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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Network를 보고..

남자들은 여자에게 차일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 보통 굉장히 찌질해진다. 평소에는 유치하다고 듣지도 않던 사랑 노래가 갑자기 내 사연이 되어버리고, 술 마시며 그녀의 휴대전화로의 통화버튼을 누를까 말까하고, SNS에서 들어가서 그녀가 나 때문에 괴로워하지는 않는지 살펴본다. 가장 찌질한 경우는 그녀의 SNS에 가서 친구신청을 하는 경우인데 바로 영화 소셜네트워크에서의 마크 주커버그가 그 경우에 해당된다.

하지만 그 점을 제외하고는 마크의 행태는 다른 평범한 찌질이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는데, 그는 실연의 에너지를 창업의 원동력으로 썼다는 점이다. 극적반전을 위해 허구가 뒤섞인 면이 적지 않겠지만 어쨌든 희대의 기업가인 마크는 – 적어도 극중에서는 – 여자한테 차였다고 술 먹고 찌질거리는 대신 교내 여자들의 사진을 비교하는 사이트 facemash.com을 만드는 geek적인 찌질함으로 슬픔을 승화시킨다.

결국 엄청난 트래픽때문에 학교의 네트웍을 마비시킨 죄로 처벌을 받기는 하지만 이를 계기로 이상한 이름의 엄친아 쌍둥이 형제를 만나 세상을 바꿀 그 어떤 아이디어를 제공받게 된다. 바로 자신의 정보를 등록하고 같이 교류하는 소셜네트워크 사이트를 만든다는 아이디어. 마크는 결국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 쌍둥이 형제는 생까버리고 – 그의 친구 왈도와 함께 작업하여 TheFacebook.com을 런칭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냅스터의 창시자 숀파커가 끼어들면서 마크와 왈도의 우정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서로 궁합이 맞지 않았던 숀과 왈도, 그 과정에서 서서히 왈도가 권력 밖으로 밀려나기 시작한다. 결국 마크는 페이스북의 엄청난 성공으로 부와 명성을 얻지만 이름이상한 쌍둥이 형제와 왈도를 적으로 돌리게 되고 엄청난 금액의 송사에 시달리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현재와 과거를 교차하여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드는 생각은 오늘날 인터넷 라이프에 큰 영향을 차지하는 페이스북의 역사가 불과 7년 전에 한 찌질한 청년에 의해 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떤 자본주의적인 기업가 정신도 없지 않았겠지만 결국 마크를 그 짧은 시간에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은 창업으로 이끈 그 어떤 다른 동기 – 실연으로 인한 정욕? 열정? 단순한 재미? – 는 도대체 어떤 경영학 이론으로 설명이 가능할까하는 의문이었다.

물론 적지 않은 부분이 픽션이 섞여있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 영화지만 상당수의 혁신이 이와 유사하게 – 그만큼 극적이지는 않더라도 –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또는 어떤 예상했던 과정에서 발생한 부작용으로 발전하여 왔다는 사실에서, 때로 나는 역사에 특히 경제사에 있어 역사적 합법칙성에 의한 선형적 발전에서 때로 궤도를 심각하게 벗어나는 비선형의 그 어떤 경향에 대해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특정 기업의 성공에 있어서는 그러한 경향이 적지 않음에 주목해야 한다. 만들기만 하면 척척 팔리는 것이야 교과서적인 상황이고 – 아니지 마르크스도 생산물이 상품으로 전환하기 위해선 “필사의 도약”을 해야 한다고 했던가? – 실제로는 어떤 티핑포인트에 도달하기까지 영화에서와 같은 수많은 좌절과 운이 작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 성공의 핵심이 무엇이었는지는 대개 사후적으로 인정이 될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직 창업을 못하고 있다. 천재도 아니고 새가슴인 관계로… (돈도 없다)

Taking Woodstock

스포일러의 범위를 크게 확장하면 스포일러라 생각될 수도 있는 내용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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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ing woodstock” by Impawards.com.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Taking Woodstock“>Fair use via Wikipedia.

제목만 보고 이거 ‘우드스탁에 대한 다큐멘터리쯤 되겠구나’ 하고 아내와 영화 시작 한 시간 전에 즉흥적으로 영화를 보러갔다. 이안 감독의 신작이라는 점이 그나마 의사결정의 한 요소였을 뿐. 하지만 영화의 내용은 우드스탁이 시작된 배경, 그것도 거창한 사회적 배경이라기보다는 페스티발을 기획했는데 그 소식을 신문으로 접한 엘리엇 타이버가 기획자 중 한 명이었던 마이클 랭에게 전화를 해서 자신의 부모님이 모텔을 운영하던 한 조그만 마을에 와서 페스티발을 해주었으면 하고 부탁하는 등, 어떻게 우드스탁이 실현되었는가에 대한 구체적인 사연들을 엘리엇 타이버 자신의 정신세계의 성장과 함께 엮어서 보여주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영화 중반쯤에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지만 공연 자체에 대한 재현은 거의 없었다. 다만 약에 취한 엘리엇이 먼발치에서 밝게 빛나는 – 약기운에 관객이 넘실넘실 파도를 타는 것 같은 환각적 장면이 연출되는 – 공연 스테이지를 바라다보는 정도로 그친다.

영화는 반문화적인 이벤트의 회고라는 다소는 충격적인(?) – 여태까지? –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그간 작품성을 인정받아온 거장 감독의 작품답게 각각의 에피소드가 큰 무리가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등장인물이나 관객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씩 연출된다. 문제는 엘리엇이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과정인데 주디 갤런드의 음반을 낯모르는 남자 – 무대설치가 – 와 같이 들으며 담소를 나누는 장면은 게이코드를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면 이미 ‘동성애적’ 무드를 짐작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에겐 평범한 남자들 간의 대화로 보일 소지도 많았고 이후 엘리엇과 그 무대설치가 와의 애정행각이 뜬금없다고 여길 소지가 있을 정도로 약간은 설명이 불충분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찾아보니 이미 실재인물의 엘리엇은 이전부터 게이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있었다. 즉, 감독은 성장영화라는 장르에 충실하기 위해 이런 배경설명을 숨겨두는 트릭을 쓴 것이다.

‘아~ 우드스탁이 저렇게 시작했구나!’라고 가벼운 맘으로 즐기고 싶은 분들에게 권할만한 작품.

Milk

어제 아내와 영화 ‘밀크’를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보고 왔다. 한 낙농업자의 진정한 우유를 만들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다룬… 그런 영화는 아니고 샌프란시스코 시의원으로 동성애 인권운동을 펼쳤던, 그리고 스스로 게이였던 ‘하비 밀크(Harvey Bernard Milk)’의 삶을 다룬 – 역시 게이인 – 구스 반 산트 감독의 2008년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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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n Penn Cannes” by Georges Biard – 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밀크 역을 연기한 션펜. 아카데미 주연상 득템.

밀크는 동성애자였지만 그 사실을 숨긴 채 40년을 살아온다. 애인과 함께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의 카스트로 거리로 삶의 거처를 옮긴 밀크는 자연스레 같은 동성애자들과 어울리면서 스스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핍박받는 동성애자들을 위한 정치대변인으로 나설 것을 결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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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 crop” by 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jpg: Daniel Nicoletta
derivative work: Hekerui (talk) – Harvey Milk in 1978 at Mayor Moscone’s Desk.jpg. Licensed under CC BY-SA 4.0 via Wikimedia Commons.

하비 밀크의 실제 모습

몇 번의 도전 끝에 시의원을 진출하는데 성공한 밀크의 적은 이 사회의 거대한 편견. 마침 전국적으로 동성애자들의 차별을 당연시하는 보수적 기류가 일어나면서 밀크는 존 브릭스, 아니타 브라이언트 등 극우적인 의원이 추진한 법안과 맞서 싸운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법안을 저지하는데 성공하지만 엉뚱한 이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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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ita Bryant Billboard 1971” by Word Recor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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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text : Billboard Magazine, January 16, 1971 p. 21.).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가수이자 정치인이었던 아니타 브라이언트. 하비 밀크의 정적.

실제 인물의 8년 동안의 질풍노도와 같은 삶을 다룬지라 어쩔 수 없이 편년체의 평면적인 서술을 깔고 갈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음에도 영화는 지루하다거나 서두른다거나 하는 느낌이 적다. 공인(公人)으로서의 삶과 사인(私人)으로서의 삶에 대한 묘사가 적절히 안배되어 있고 다큐멘터리적 편집을 통해 현장감을 충분히 살리고 있다.

결국 밀크가 깨부수려했던 것은 자기와 다르다는 사실을 차별의 빌미로 삼는 이기주의였다. 과거 모든 역사에서 권력자들이 그러했고 아직까지 그러한 차별은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그런 이기주의 말이다. ‘동성애자’란 타이틀을 유지하여도, 그 자리에 다른 단어를 집어넣어도 차별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동성애자’, ‘이주노동자’, ‘여성’, ‘비정규직’, ‘철거민’, ‘장애인’, ‘이슬람’, ‘좌익’

사실 그 중에서도 우리사회에서 아직까지 가장 금기시되는 천민은 어떤 면에서는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동성애자’다. 홍석천, 하리수 등 커밍아웃을 한 연예인들이 살아남긴 했지만 우리나라에서 누군가 밀크와 같은 시도를 한다면 과연 이 사회가 두 눈 뜨고 그것을 빤히 보고만 있을까? 아마 전국의 유림들이 난리를 피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눈에 보이는 권력보다 무서운 것은 – 역시 게이였던 – 미쉘 푸코가 묘사한 ‘미시적 권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푸코가 정확히 그러한 의미로 묘사했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내가 생각하는바 미시적 권력은 대통령 하나 바뀐다고 바뀌지 않는 이 사회의 편견과 이기주의와 물적 욕망의 그물망이다. 실질적으로 그것이 사회를 통제한다.

때로 개혁적인 지도자가 나서서 이 사회를 정화하려 시도하기도 하고, 또 그것이 사회적 반향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럴 때 그 미시적 권력은 격렬히 저항하거나 힘이 약할 때면 낮게 숨죽이며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다시 자신들의 대표자가 지도자로 나서는 순간 봇물처럼 사회 곳곳을 다시 그들의 입맛대로 재편한다.

미시적 권력이란 괴물은 우리 스스로 편견에 빠지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계속 자라난다.

The Pursuit of Happyness(2006)

이 영화는 여러 면에서 ‘Erin Brockovich’의 흑인 남성 버전이라 할만하다. 어린 자식들을 부양해야 하지만 배움도 없고 재주도 없었던 에린이 각고의 노력 끝에 마침내 성공하게 되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영화처럼 이 영화 역시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던 Chris Gardner 라는 흑인 남성이 주식중개인으로 성공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80년대 초 샌프란시스코에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를 판매하며 생계를 꾸려가던 Chris Gardner(Will Smith). 그에게는 사랑하는 아내와 사내아이가 있었지만 쪼그라들어만 가는 생계로 인해 아내와의 갈등은 심해지고 마침내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나고 만다. 어릴 적부터 수학적 재능이 있었던 Chris 는 어느 날 주식중개인의 인턴십에 도전하지만 정식사원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수많은 난관이 버티고 있었고 그나마 인턴 기간에는 보수마저 없었다.

유일한 호구책인 엑스레이 촬영기는 이런 저런 사람들에게 도둑맞고 되찾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급기야 세무당국에게 밀린 세금을 차압당하여 무일푼이 된 그는 여관에서도 쫓겨나 아이와 함께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몸을 누이고는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어쨌든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져가던 그의 인생은 마침내 인턴기간 동안 보여준 그의 능력에 대해 회사가 정식채용으로 보상함으로써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린다.

이 영화에서는 재미있는 두 개의 물건이 등장한다. 하나는 앞서 말한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이고 또 하나는 80년대를 풍미했던 이상한 정육면체 장난감 루빅스큐브이다. 엑스레이 촬영기는 Chris 와 그의 가족에게 있어 애증의 상징이다. 그 뛰어난 성능에 혹한 Chris 가 판매를 위해 전 재산을 쏟아 구입했을 당시 그것은 가족에게 희망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의사들에게 일종의 사치품으로 간주되었던 그 물건의 부진한 판매는 가족에게 갈등과 고통의 상징으로 돌변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가 떠나고 파산한 Chris 에게 그것은 마지막 삶의 희망이 된다. 부피가 큰 재봉틀과 같은 외양을 가진 이 물건을 항상 들고 다니던 Chris 의 모습에서 우리는 애정과 증오가 반복되는, 그러면서도 차마 떨쳐 내버리지 못하는 우리 삶의 그 어떤 고단한 일상을 발견하게 된다.

반면 일종의 고도의 수학적 지식이 요구되는 장난감이었던 루빅스큐브는 단 한번의 등장으로 Chris 에게 천재일우의 기회를 제공하는 물건이 되었다. Chris 가 끈질기게 매달렸던 증권회사의 유력한 임원 Jay Twistle 은 Chris 와 함께 탄 택시 안에서 루빅스큐브를 맞추려고 노력한다. 이것을 본 Chris 가 혼신의 힘을 다해 루빅스큐브를 맞추자 Twistle 은 이 고졸 학력의 흑인을 남다른 눈빛으로 바라보고 마침내 인턴십의 기회를 준다.

그가 행복추구를 위해 돈을 쏟아부은 촬영기는 짐이 되고, 루빅스큐브는 Chris 에게 단순한 장난감이 아닌 자신의 능력을 검증하는 매개체로 작용한 것이다. 고단한 일상에서도 토마스 제퍼슨이 천명한 ‘행복추구권’의 행사를 위해 노력했던 그의 구세주는 국가의 공적 부조나 그의 아내, 그리고 촬영기가 아닌 루빅스큐브였다는 사실이 인생의 아이러니로 다가온다.

많은 사람들이 휴대용 엑스레이 촬영기와 같은 어리석은 선택을 통해 행복을 추구하지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훨씬 적은 사람들이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된다. 인생의 사닥다리에 매달린 수많은 사람들이 Chris 의 루빅스큐브와 같은 기회를 잡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한 개인에게는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적으로 다수의 빈자들에게는 일종의 동화 같은 무용담일 뿐이다.

가난한 미혼모에서 해리포터의 작가로 일약 억만장자가 된 조앤 롤링이나 수학적 재능을 바탕으로 인생역전을 이루어 낸 Chris 와 같은 이들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행복추구권은 있는 것이고 이는 사회의 조화로운 발전을 통해 이루어져야 하지만 현실은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다수의 보통사람들은 그 와중에도 자신은 ‘동화 같은 무용담’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곤 한다.

p.s. Chris 의 아들 역을 맡은 꼬마는 다름 아닌 Will Smith 의 아들 Jaden Smith 라고 한다. 오디션에 뽑히기 전까지 Will Smith 의 아들임을 밝히지 않았다고 하니 연기재능은 역시 어디로 새지 않았던 모양이다. 영화의 말미에 한 흑인 남성이 Chris 부자의 곁을 지나가는데 그가 바로 실제 인물 Chris Gardner 라고 한다.

미쉘 공드리

요즘 감상하는 작품 중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는 영화감독이 있다면 단연 미쉘 공드리 Michel Gondry 다. 여태껏 본 그의 영화는 세 개. 감상시점 순서로는 ‘수면의 과학(2005)’, ‘이터널 선샤인(2004)’, ‘비 카인드 리와인드(2007)’ 인데 각각의 작품이 나름의 개성을 품고 있으면서도 ‘공드리 표 영화’라는 스타일이 일관되게 흐르고 있다는 점이 매력이다.

비단 나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면서 레오 까라, 무라카미 하루키, 왕자웨이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특유의 감성을 느꼈을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그의 작품에서 더욱 도드라지는 그만의 특색은 우리가 소위 MTV식 편집이라 이름붙인, 어떤 의미에서는 휘발성의 자극이 강하다고 비판하는 그 지점의 편집과 연출이 공드리 식의 현실과 환상을 오가는 이야기 전개에 기가 막히게 어울린다는 점이다.

소재 면에서는 공히 남녀 간의 사랑을 다룬 ‘수면의 과학’, ‘이터널 선샤인’ 에 지쳐갈 때쯤, 마을주민이 참여한 영화제작을 통해 낡은 건물을 보존한다는 줄거리의 ‘비 카인드 리와인드’를 감상하게 되어 공드리에 대한 신선감을 이어갈 수 있었다. 가장 감탄을 하면서 본 영화는 ‘이터널 선샤인’. 과거와 현재가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하므로 영화 보다가 헷갈릴 수도 있다. 글을 적다보니 레오 까라의 영화가 보고 싶어진다.

꽁치의 맛 (秋刀魚の味, 1962)

그 유명한 오스 야스지로의 영화를 본 건 이 작품이 유일하다. 죽기 전에 꼭 봐야 되는 영화란 없는 법이니 “누구누구의 영화를 여태 못 봤네” 라고 새삼 떠들어댈 필요는 없으나 이른바 그의 최고 걸작이라는 ‘동경이야기’를 건너뛰고 ‘꽁치의 맛’을 본 것이니 만큼, 그 감상은 그 감독에 대해 종합적이기보다는 ‘꽁치’ 한 마리만의 맛에 대한 감상에 그칠 것이기 때문에 굳이 언급해둔다.

이 영화의 작품은 마치 영어 제목처럼 가을 오후 어느 평범한 일본인 가정에 몰래 들어가 그들의 일상을 훔쳐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그것은 극적갈등 없이 – 그 갈등이랬자 시집가기 싫다는 딸의 푸념인데 보통 영화들의 갈등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 잔잔한 일상을 편하게 그려내고 있어서 그렇기도 하거니와 그 유명한 ‘다다미샷’ 이 시종일관 사람머리보다 낮은 위치에서 미동도 않은 채 풍경을 잡아내고 있기에 더욱 그런 느낌이 든다. 남의 집 복도 한편에서 몰래 방안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말이다.

그런데 사실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인 듯하면서도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혼기가 찬 딸과 딸을 시집보내려는 아버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에피소드는 우리 일상에서 흔히 벌어질법한 소재들이기는 하나 그 사건들안에서 실제 일어날법한 갈등이 극중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아버지는 너무 인자하고 딸은 너무 야무지다. 심지어 딸은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미우라가 다른 애인이 있음을 알자 미련 없이 포기해버리고 만다. 마치 예전에 방영되었던 TV드라마 ‘보통사람들’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그 많은 대가족이 아무런 갈등도 없이 사이좋게 사는 그런 상황설정이었는데 절대 보통사람들의 가족이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딸을 시집보낸 아버지는 술에 취한 채 집에 들어와 외로움을 되뇐다. 그리고는 나지막하게 부르는 노래가 있는데 바로 옛 전우를 만난 ‘Torys 빠’에서 들은 군가. 자칫하면 아슬아슬하게 전범으로까지 몰릴 수 있는 함장의 위치까지 올라갔었던 ‘인자한’ 아버지는 결국 자신의 전성기였던 그 시절이 덧없이 흘러갔음에 눈물짓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인지상정인 것이다. 폭력의 역사마저 한 개인의 추억으로 남게 되는 나약하고도 모순된 감정. 영화는 물론 그러한 편리한 감정치환이 어떻게 자리매김해야하는지에 대한 답은 제시하지 않는다. 그저 옛 전우의 입을 통해 미국이 이기는 통에 요즘 젊은 애들이 미국 흉내를 낸다고 불평할 뿐이다. 패전의 역사적 교훈은 아들딸에게 대물림되지 않고 늙은이들의 푸념이나 추억으로만 남을 뿐이다.

한 세대가 가고 새로운 세대가 혼인을 맺는 전후 과도기를 잔잔히 그린 이 작품이 단순히 한 가족의 아름다운 일상을 그린 드라마가 아니라 일본역사의 세대간 단절감과 새로운 도약에 관한 은유라고 간주한다면 – 완전히 그런 느낌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 군가와 옛 전우의 배치는 다분히 의도적이기 때문이다 –  적어도 이 영화에서 등장하는 옛 세대들은 너무 무책임하다.

오만과 편견(Pride and Prejudice,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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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ideandprejudiceposter” by The poster art can or could be obtained from Focus Features.. Licensed under Fair use of copyrighted material in the context of Pride & Prejudice (2005 film)“>Fair use via Wikipedia.

극중 인물 엘리자베스 베넷이야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그리 새로울 것도 없는 캐릭터다. 안정적인 결혼생활이 가능하지만 안 끌리는 – 역시 무엇보다도 너무 못생겨서(?!) – 콜린스보다는 언젠가 자신을 확 잡아당겨줄 사랑할 남자와 함께 하고 싶다는 그녀. 로맨틱코미디에서 신물 나게 보아온 인물상이다. 하지만 이 캐릭터가 19세기 초반 여성작가가 쓴 소설에서 등장했다면 꽤나 심각히 생각해볼 문제이다. 빅토리아 여왕이 아직 태어나기도 전인 1813년 여류작가 제인오스틴이 발표한 이 작품은 이성관계의 연결고리를 지위나 재산으로 보기보다는 둘 사이의 감정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당시로서는 매우 혁신적이었을 법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당시 중산층 이하의 영국여인에게 결혼이란 로맨스의 귀결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밥벌이인 동시에 가족부양의 주요한 수단 일만큼 절박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당시에는 ‘한정상속’이라고 하여 여자에게는 상속권이 없었고 가장 가까운 남자친척 – 극중에서는 콜린스 – 에게 상속권이 있었다고 할 만큼 여성의 지위는 보잘 것이 없었기에 고소득의 직업군이 있을 리 없을 당시 여성들에게 결혼이외에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었다. 작가 스스로도 혼기가 차자 청혼을 받았으나 남자집안의 반대로 결혼이 무산되면서 평생을 친척집을 전전하며 살았다 하니 결국 엘리자베스는 사랑이라는 너무 위험한 베팅을 한 것이었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을 깔고 있는지라 극 초반 다섯 자매의 호들갑은 충분히 이해할법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서든 자신들을 예쁘게 포장하여 무도회장이라는 시장(市場)에 내놓아 검증을 받아야 하는 입장이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무도회에서는 아름답고 우아한 맏딸 제인이 빙리의 뇌리에 꽂혔고 엘리자베스는 어디서 꾸어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시큰둥하기만 한 달시와 어색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이후 진행되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로맨틱코미디의 전형이라 할 만한 장르적 형식, 즉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형을 따르고 있다. 오만한 달시와 편견을 가지고 있는 엘리자베스. 주위에서도 다들 서로 싫어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그 두 사람이 조금씩 서로에게 다가가는 그 미묘한 긴장감, 그 뒤로 그들을 받쳐주는 아름다운 자연과 시대극의 충실한 재현이 볼거리를 만들어준다.

1940년대부터 영화화되기 시작하여 1995년 BBC에서 시리즈로 방영되어 큰 인기를 얻었고 그 뒤에 원작을 노골적으로 패러디한 ‘브리짓존스의 일기’까지 큰 인기를 얻었던 작품이라 2005년 영화화에 많은 이들이 그 성과에 대해 반신반의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나름대로의 작품성을 인정받아 여러 영화제에서 상을 타기도 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개인적으로는 엘리자베스역의 배우가 맘에 들지 않는다. 너무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있기도 하거니와 약간 나온 턱이 시종일관 눈에 밟혔다.(-_-;) 아버지 역으로 나온 도널드서덜랜드는 극 내내 변변히 등장도 못하다가 말미에 엘리자베스의 결혼소식에 눈시울을 붉히는 촌철살인의 명연기를 보여준다.

18세기 페미니스트라 할 만한 제인 오스틴, 그리고 그의 알터에고였을 엘리자베스. 엘리자베스는 결혼에 성공하였고 제인 오스틴은 당시에는 찬밥 대우를 받았으나 오늘날 영국에서 세익스피어 다음으로 최고의 문학가로 손꼽히고 있다한다. 둘 모두에게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사랑에 대한 주체적인 선택이 결혼의 필수조건이라는 모던한 사고방식을 가졌다가 좌절했을 많은 여성들에게 원작은 오히려 여성해방 지침서가 아닌 싸구려 로맨스 소설로 간주되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이 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