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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의 천국을 노래하는 Big Eden

뉴욕에서 성공한 화가 Henry는 할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개인화랑 개업일을 코앞에 두고도 부랴부랴 고향 Big Eden으로 향한다. Henry는 할아버지와 정든 이웃들을 만나 오랜만에 푸근한 감정에 사로잡히지만 정작 그가 절실히 보고 싶은 이는 따로 있다. 고교시절 그가 좋아했던 건장한 체격에 핸섬가이 Dean.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에다 이혼남인 그를 교회에서 만나자마자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는 Henry. 그런데 상황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이 마을의 유일한 잡화점 주인인 Pike(역시 학교 동창이다)는 엉뚱하게 Henry에게 삘이 꽂혀버린 것이다.

몸을 가누기 어려운 Henry의 할아버지와 Henry를 위해 수다스러운 Thayer 여사의 음식을 Henry네 집에 배달해주던 Pike는 여사의 음식이 맘에 안 들어 아예 요리책을 사서는 직접 요리를 해내버린다. 물론 할아버지보다는 Henry가 맛있게 먹어주길 바라며…. 하지만 천성적인 수줍은 성격 탓에 Henry에게 말을 걸기는커녕 같이 식사도 못하고 매번 돌아와 버린다.한편 할아버지가 쓰러져 다시 병원에 입원하던 날 집에 돌아온 피곤한 Henry와 Dean은 우연히 입맞춤을 하게 되지만 자신이 게이임을 아직 인정하지 못한 Dean이 차마 진한 입맞춤을 하지 못하고 입을 떼버린다. 이후 소원해진 둘 사이에 서서히 Pike가 끼어들어 어느덧 이 좁은 동네에서 게이 삼각관계가 펼쳐진다.

사실 영화는 지극히 비현실적이다. 이 청량하게 아름다운 동네의 주민들은 모두가 선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셋의 동성애 관계를 곧 눈치 채지만 누구도 그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관계개선을 부추기기도 한다. 한마디로 게이들의 에덴동산이다(보수적인 기독교도들에게는 신성모독 적으로 느껴질 설정이겠지만). 이런 면에서 영화는 역시 동성애를 주제로 했지만 동성애자이기에 겪는 고민과 갈등을 허심탄회하게 술회한 Cachorro 와 비교된다. 오히려 이 작품은 어찌 보면 우리에게 익숙한 설정인 Cyrano 의 게이버전에 가깝다. 육체적으로 끌리는 Dean과 정신적으로 그에게 다가가는 Pike 사이에서 고민하는 Henry. 딱 Cyrano의 설정이지 않은가.

하지만이 영화를 단순히 게이코드를 이용한 그저 그런 코미디로 치부하기에는 무척 매력적인 것이 사실이다. 일단 재미있다.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생동감이 있고 배우들의 연기가 궁합이 들어맞고 있다. 특히 Henry 역의 Arye Gross는 실제 게이가 아닌가 할 정도로 게이 연기가 훌륭하다. 그리고 풍경이 멋있다. 그 드넓은 자연을 담은 화면을 보고 있자면 사랑이니 뭐니 하며 아웅대는 인간사가 부질없게 느껴진다. 음악도 맘에 든다. 개인적으로 컨트리는 비호감 장르지만 이 영화에서 소개되는 컨트리 음악들은 껴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앙증맞다. 한마디로 눈이 번쩍 뜨일 정도로 참신한 영화는 아니지만 가끔 즐거운 마음으로 꺼내서 다시 볼 정도로 정이 가는 코미디다.

* Sex And The City 에서 Carrie의 절친한 게이친구 Stanford가 시골고향에 내려가면 이런 식의 해프닝이 생기지 않을까 하는 쓸데 없는 생각도 들었다.

공식 웹사이트

Billy Liar 와 River’s 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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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iginal movie poster for the film Billy Liar” by http://www.moviegoods.com/movie_product.asp?master%5Fmovie%5Fid=1884. Licensed under Wikipedia.

청춘을 다룬 영화가 노년기를 다룬 영화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그들이 영화의 주된 소비계층인 이유도 있겠지만 그 시기가 인생에 있어 어느 시기보다도 이야깃거리가 많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방황하는 청춘’이니 ‘분노하는 청춘’이니 ‘아름다운 청춘’이니 하는 표현들의 형용사는 분명 ‘노년’이라는 명사보다 ‘청춘’이라는 명사에 더 착 달라붙는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이 시기는 그들의 일상생활 자체가 영화가 될 수도 있다. Dazed And Confused처럼 말이다. 젊음은 분명 아름답다. 그 어느 시기보다 밝게 빛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어른의 몸과 아이의 마음을 가진 모순된 시기이기도 하다. 즉흥적이고 충동적이어서 행동은 빠르지만 책임은 지기 싫어한다.

Midnight Cowboy로 유명한 John Schlesinger가 메가폰을 잡은 Billy Liar 의 Billy(Tom Courtenay)가 바로 그런 무책임한 청춘이다. Keith Waterhouse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청춘영화에서 Billy는 거짓말을 또 다른 거짓말로 돌려막는 대책 없는 젊은이다. 서로의 존재를 몰랐던 두 명의 약혼녀와 회사 상사, 그리고 부모에게 있지도 않은 사실을 지어내고는 상상력이 풍부해서라고 둘러댄다. 상대가 자신의 거짓말을 간파하자 그들을 총으로 쏴 죽여 버리는 상상을 한다(이런 장면들은 루이스브뉘엘의 작품을 연상시키는 초현실적인 장면으로 표현되는데 그러한 점에서 다른 kitchen sink realism 계열 작품과 비교된다). 그렇지만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여인 Liz가 함께 런던으로 떠나자고 하자 그마저도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소심한 젊은이기도 하다. 밉상도 이런 밉상이 없다.  

동시대에 프리시네마 혹은 브리티시뉴웨이브를 주도했던 Lindsay Anderson이나 Tony Richardson이 신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소통불능의 원인을 주로 제도권의 기성세대 탓으로 돌리며 은근히 신세대 편을 들어준 것과는 달리 John Schlesinger는 신세대 역시 자기성찰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넌지시 충고하는 것 같다. 그러나 한편으로 Billy에 대한 애정의 끈은 놓지 않고 있다. 그래서인지 이 캐릭터가 제법 인기를 얻어 연극, 뮤지컬, 심지어는 TV시리즈로도 인기를 얻었다. 이미 몇 차례 감상문에서 등장한 문학소년(?) Morrissey 역시 이 소설에 감화 받아 그의 노래의 가사 곳곳에 이 소설을 언급하였고 The Smiths 의 히트곡 “William, It Was Really Nothing” 이 바로 Billy Liar를 소재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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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vers-edge-poster”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movieposterdb.com/poster/ded40d63. Licensed under Wikipedia.

한편 현대로 넘어올수록 청춘의 무책임은 점점 극단적으로 치닫는다. Tim Hunter의 River’s Edge는 다큐멘터리를 찍는 마냥 냉정한 시선으로 탈선하는 청소년을 영상에 담아내었다. 큰 강을 접하고 있는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 사는 John 은 여자친구 Jamie 를 강변에서 살해한다. 단순히 자신에게 심한 말을 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Billy는 상상을 했지만 John은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스스럼없이 그녀를 죽였노라고 이야기한다. 친구들이 강변으로 달려가 확인을 하지만 아무도 그녀의 시신을 거두거나 John을 신고하지도 않는다. 정말 무책임의 극치를 달리고 있다. 그나마 죄책감을 느낀 Matt(Keanu Reeves)가 신고를 하지만 이미 이들의 이기심과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는 충분히 까밝혀지고 난 후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영화는 Stand By Me, Gummo, 그리고 Blue Velvet 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놓은 것 같은 매력적인 작품으로, 이 영화 덕에 Keanu Reeves는 Kathryn Bigelow의 눈에 띄어 ‘폭풍 속으로’에 캐스팅되었고 Tim Hunter는 Twin Peaks TV시리즈의 감독을 맡게 되었다. 이후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보다 밀도 있는 다큐멘터리적인 영상으로 청소년들의 삶을 포착해낸 Larry Clark 감독의 Kids와 비교하여 감상하면 흥미로울 것이다.

Paths Of Glory

개인적으로는 영화 감상할 때 롱테이크니 트래킹샷이니 하는 현란한 영상문법보다는 내러티브에 빠져드는 편이다. 영화에서의 영상기법이나 소설에서의 문체는 그 자체로도 감상포인트이긴 하나 역시 매력적인 이야기를 꾸며주는 양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탠리큐브릭의 이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그 시각적 요소의 탁월함과 현란함은 그 자체로도 매료될만한 마법을 지니고 있다.

개미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진격하는 장면이나 참호 속을 시찰하는 장면은 유사한 장면의 연출에 있어 고전으로 남을만한 – 또는 지금 재탕을 해먹어도 여전히 매력적일만한 – 표본으로 남을 교과서적인 사례이다. 물론 지나친 비주얼함이 극의 집중에 방해가 될 만도 하나 적어도 개인적으로 그로 인해 내러티브를 따라가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다.

대표적인 반전(反戰)영화로 자리매김하였고 프랑스 군인에 대한 – 또는 군대 체제에 대한 – 신랄한 시각으로 말미암아 1975년까지 프랑스에서 상영이 금지되었다는 이 작품은 큐브릭의 영화이력의 이정표로 인정되고 있는 역작이다. 그의 개인사적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일 수도 있는데 영화에 유일하게 등장하는 여배우 Susanne Christian 은 그의 평생의 반려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1차 세계대전 최대의 격전지였던 서부전선에서 사령관 역할을 하고 있던 Broulard 장군은 개인영달을 위해 가능성 없는 개미고지의 점령을 명령하고 Dax 대령은 이 부조리한 상황에서 부하들의 피해를 뻔히 알고도 진격명령을 내린다. 일부 부하들이 진격을 거부하는 바람에 결국 진격은 막대한 피해만 남긴 채 실패한다. 분노한 Broulard 장군은 희생양을 위해 무고한 사병 셋을 군사법정에 회부한다.

전직 변호사였던 Dax 대령은 그들을 변호하지만 법정에는 기소장도 없었고 증거제출도 거부한 채 사병들에게 사형을 언도한다. 그 와중에 Broulard 장군의 용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명령이 양심적인 장교의 고백에 의해 밝혀지지만 군부는 사형언도를 취소 하기는 커녕 오히려 그 내용을 Broulard 장군의 축출에 활용한다. 이러한 더러운 암투에 Dax 대령은 진저리를 치지만 부하사병들이 포로로 잡힌 한 독일소녀의 노래에 나지막한 허밍으로 동참하는 모습에서 새로운 희망을 얻게 된다.

명백히 잘못된 명령임에도 이에 복종하였으나 이내 부하들을 감싸기 위해 희생양을 자처한 Dax 대령의 캐릭터는 선과 악의 명확한 이분법보다는 고뇌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는 나약한 인간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평가들의 호평을 얻었다. 그럼에도 말미부분에 암시되는 새로운 희망은 약간 작위적인 면이 없잖다. 차라리 부하사병들이 독일소녀의 노래를 함께 따라 부르기보다는 그녀를 더 그악스럽게 약 올렸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위와 아래에서 모두 배신당하는 Dax 대령의 모습이 더 드라마틱하지 않을까?

Salaam Bombay!

혹자는 아기의 귀여운 몸동작이 어른들로 하여금 보호본능을 자극시켜 자신이 생존하기 위한 일종의 생존전략이라고들 말한다. 지나치게 냉소적인 말이지만 나름대로는 일리가 있는 말이다. 도대체 그 귀여움이라도 없었더라면 성가시고 귀찮기 만한 양육을 뭐 하러 자기 돈 들여가면서 떠안을 것인가?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양육을 부모로서의 신성한 의무로 이데올로기화시킨다. 안 그러면 이 사회의 존속은 불가능 할 테니까.

사회 절대다수의 가정이 이렇듯 자신의 피붙이에 대한 기본적인 부양의무를 어떻게 해서든 이행하려 노력하지만 때로는 자의든 타의든 양육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가정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들은 집단 수용시설에 들어가거나 거리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Mira Nair 의 1988년작 Salaam Bombay! 는 바로 이러한 거리의 아이들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본 영화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고 몸을 의지하던 서커스단으로부터도 버림받은 크리슈나는 자연스럽게 인도의 대도시 봄베이의 거리를 거처로 삼는다. 창녀촌 주변의 노점상에서 차를 배달하는 한편으로 이런 저런 육체노동으로 푼돈을 꼬박 꼬박 모으는 크리슈나의 꿈은 돈을 모아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의 어머니가 500루피를 모으기 전에는 집에 돌아올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을 하며 그를 떠났고 크리슈나는 이 말을 500루피를 모으면 어머니가 다시 그를 받아줄 것이라는 약속으로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한 가지 희망 때문에 온갖 악의 유혹이 넘쳐나는 거리에서 꿋꿋이 살아가지만 그런 연약한 소년을 경찰은 부랑아라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집단 수용시설에 가둬버린다. 천신만고 끝에 수용시설을 탈출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는 현실은 수용시설 안보다 더 잔혹하다.

볼리우드라 불릴 만큼 현실과 동떨어진 당의정과 같은 환각적인 영화를 양산해내는 인도의 영화계에서 보기 드물게 리얼리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영화이면서 감정의 과잉으로 흐르지 않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고 있다. 루이스 브뉘엘의 1950년 작 Los Olvidados 과 여러 면에서 비교될만한 수작이다. 인도의 영국의 합작 영화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30)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끝 모를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쟁터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초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무기의 발달과 참전국의 확대로 인해 대량학살이 동반되었던 그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부전선은 밀고 밀리는 와중에 무의미한 죽음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후대의 어느 역사가에 따르면 이러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이 나치 독일의 준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어느 정도 용인하려 – 동맹국을 내주고서라도 – 하였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반전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참전군인의 눈이 아닌 독일 참전군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 할만하다. 대개의 전쟁영화는 승리자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 또한 당연히도 그 배급자도 역시 승전국인 영미권이 주이기에 – 웬만한 웰메이드 전쟁영화조차도 선악이분법의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독일의 평범한 시민이자 학생이었다가 참전한 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우선 이 작품이 전쟁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되고 있다.

군인들의 시가행진, 시민들의 환호, 참전을 부추기는 애국교수의 열변, 크게 감화되어 입대를 결심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극 초반 숨 가쁘게 진행되며 극은 중반으로 돌입한다. 애국주의에 감화되어 도착한 전쟁터는 이념이 설 자리가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는 생지옥이었다. 전우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며 호승심은 공포로 바뀌어 가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친구의 죽음으로 친구가 갖고 있던 신발이 내 차지가 되고, 전우의 죽음이 더 많은 식량배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만족하는 이성마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살아남은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잠깐의 휴식과 전우들뿐이다. 잠깐의 휴가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으로만 전쟁을 하는 국수주의자들은 멋대로 승리를 예견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군인들의 휴식처는 전쟁터가 되고만 것이다.

선구자적으로 사용한 크레인샷을 통해 비참한 전쟁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 주인공이 애국교수가 혼쭐이 날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 그리고 나비를 좇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The China Syndrome(차이나신드롬)

Kimberly Wells (Jane Fonda)는 비록 가벼운 흥미위주의 뉴스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지만 좀 더 심각한 주제를 손대고 싶어 하는 야심찬 방송기자다. 어느 날 그녀는 카메라맨 Richard Adams (Michael Douglas)와 함께 지역의 핵발전소에 대해 홍보성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찾아갔다가 우연히 뭔가 불길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가벼운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가장 끔찍한 사고인 ‘멜트다운(melt down)’ – 소위 China Syndrome 이라 부르는 –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엔지니어 Jack Godell (Jack Lemmon)에 의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Richard 는 이 상황을 몰래 필름에 담아와 방송하려하지만 경영진은 발전소 운영회사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방송을 보류한다. Kimberly 와 Richard 는 핵전문가의 도움으로 뭔가 불길한 일이 진행됨을 알게 되고 Jack 역시 발전소에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Jack 은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 원자로를 멈추려 하지만 회사는 이윤의 감소를 우려하여 이를 만류한다. 분노한 Jack 이 증거를 Kimberly 에게 넘기려 했지만 회사는 이를 막으려 하고 마침내 Jack 은 발전소의 지휘실을 점거하고  kimberly 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실을 폭로하려 한다. 그 순간 회사가 부른 기동타격대가 Jack 을 살해하여 또 한 번 진실을 은폐한다.  

핵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극에 달하던 70년대 말 이 영화는 은유나 비유가 아닌 직설화법으로 핵의 위험성, 민영화의 위험성, 방송의 공공적 역할, 그리고 내부고발의 합당성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작가 Mike Gray 가 실제 발생했던 유사사고를 바탕으로 한 사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와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Michael Douglas 와 진보적 연예인으로 알려진 Jane Fonda 의 열성이 결합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 Jack 이 추적자들에 쫓겨 발전소로 도망오고 마침내 지휘실을 점거하여 인터뷰하는 그 과정을 따라간 몇 분은 웬만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긴박감을 유지하고 있다. 메시지를 설파하는 매체이면서도 긴장감과 극적쾌감을 주는 수작이다. 또한 실제로 영화가 개봉된 이후 몇 주 후 펜실베니아 주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언론과의 싸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대선이 끝났다. 기쁜 이들, 분노한 이들, 씁쓸한 이들, 관심없는 이들….  다양하다. 여하튼 대통령은 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그 지위가 가지는 중요성과 책임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1970년대 세계 최고의 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의 사소한(?) 거짓말을 두 기자가 어떻게 집요하게 파헤쳤으며, 이로 인해 그 대통령이 어떠한 대가를 치뤄야 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영화 한편을 대선에 즈음해 소개한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은 Alan J Pakula 의 ‘Paranoia Trilogy(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편집증 삼부작?)’ 으로 꼽히는 작품들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작품(나머지 두 작품은 Klute, The Parallax View)으로 그 시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정치권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수상은 하지 못하였지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각색상 수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의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비평가들이 꼭 봐야 하는 명작으로 선정하는 걸작이다.

1972년 어느 날 미국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사무실이 자리 잡은 워터게이트 빌딩에 정체모를 무리들이 몰래 침입하였다가 경찰에 들키고 만다. 헌데 이들의 몸속에서는 공화당 재선본부의 수표가 발견되고 침입자 중 한명이 전직 CIA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뭔가 석연치 않은 커넥션이 감지된다. 워싱톤포스트의 신참기자 Bob Woodward (Robert Redford)와 Carl Bernstein (Dustin Hoffman)은 최고 권력층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사건을 파헤쳐가지만 취재요청 거부, 위협, 발뺌 등 수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결국 이들의 집요한 탐사보도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사건의 핵이었던 리차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1974년 백악관을 떠난다. 이로써 이 사건은 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정치적 술수와 더러운 유착관계, 이러한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는 제3의 권력으로서의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준 문명세계의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영화는 이런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전작 The Parallax View 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대도시의 거대하고 수직적인 구도와 그 안에 자리 잡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사람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다수의 개인의 뒤에 존재하는 거대한 권력집단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닉슨의 재선장면을 방영하는 두 대의 텔레비전을 앞뒤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타이핑을 하는 두 기자를 배치한 장면은 영화사에 기록될만한 명장면으로 뽑힐 만하다.

결국 ‘정의의 승리’로 환호해야 마땅할 결말이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대의 민주주의의 외피를 뒤집어 쓴 Inner Circle 이라는 거대악은 해소되지 않은 채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측면에서 ‘절반의 승리’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 닉슨에 이어 대통령직을 맡은 제럴드 포드가 대국민 성명에서 ‘미국의 긴 악몽이 끝나고 헌법이 제 기능을 한다고’ 천명한 사실은 그 내부권력집단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은유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족 1) Bob Woodward 에게 결정적 제보를 제공했던 이른바 Deep Throat 는 FBI 의 전 관리 마크 펠더 였던 것으로 2005년 밝혀졌다. 오랜 동안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았던 이 사실은 펠더씨의 측근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그는 닉슨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후임으로 자신을 앉히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제보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에서도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에 대한 보호 법제화 등 시민사회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사족 2) Deep Throat 라는 별명은 당시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포르노 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성감대가 목에 있는 여자라는 설정의 영화로 극장에 개봉하며 큰 사회적 이슈를 불러온 작품이다. 이는 바로 워터게이트의 언론이슈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즉 ‘표현의 자유’라는 이슈를 제기하였고 포르노배우들은 본의 아니게 문화게릴라로 격상되기도 했다. 이 당시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Inside Deep Throat 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