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보관물: 드라마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1930)

1차 세계대전 당시 서부전선은 끝 모를 지루하고 무의미한 전쟁터의 상징이었다. 20세기 초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은 이전의 전쟁과 달리 무기의 발달과 참전국의 확대로 인해 대량학살이 동반되었던 그 이전의 어느 전쟁보다도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서부전선은 밀고 밀리는 와중에 무의미한 죽음이 난무하던 곳이었다. 후대의 어느 역사가에 따르면 이러한 참혹한 전쟁에 대한 공포심으로 말미암아 연합국이 나치 독일의 준동에 수동적으로 대응하였고, 심지어 그들을 어느 정도 용인하려 – 동맹국을 내주고서라도 – 하였다는 주장까지 있을 정도다.

레마르크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이 영화는 반전영화의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이 작품은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 참전군인의 눈이 아닌 독일 참전군인의 눈으로 관찰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히 주의 할만하다. 대개의 전쟁영화는 승리자의 눈으로 바라보기에 – 또한 당연히도 그 배급자도 역시 승전국인 영미권이 주이기에 – 웬만한 웰메이드 전쟁영화조차도 선악이분법의 구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나 독일의 평범한 시민이자 학생이었다가 참전한 이들의 눈으로 전쟁을 바라본다는 설정이 우선 이 작품이 전쟁에 대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반석이 되고 있다.

군인들의 시가행진, 시민들의 환호, 참전을 부추기는 애국교수의 열변, 크게 감화되어 입대를 결심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극 초반 숨 가쁘게 진행되며 극은 중반으로 돌입한다. 애국주의에 감화되어 도착한 전쟁터는 이념이 설 자리가 없는 삶과 죽음이라는 단순함이 자리 잡고 있는 생지옥이었다. 전우들이 하나둘씩 죽어가며 호승심은 공포로 바뀌어 가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친구의 죽음으로 친구가 갖고 있던 신발이 내 차지가 되고, 전우의 죽음이 더 많은 식량배급으로 이어진다는 것에 만족하는 이성마비의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결국 살아남은 이들에게 유일한 위안거리는 잠깐의 휴식과 전우들뿐이다. 잠깐의 휴가동안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머릿속으로만 전쟁을 하는 국수주의자들은 멋대로 승리를 예견한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군인들의 휴식처는 전쟁터가 되고만 것이다.

선구자적으로 사용한 크레인샷을 통해 비참한 전쟁터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장면, 주인공이 애국교수가 혼쭐이 날만큼 전쟁의 참혹함을 학생들에게 설명해주는 장면, 그리고 나비를 좇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장면 등이 이 영화의 명장면이다.

The China Syndrome(차이나신드롬)

Kimberly Wells (Jane Fonda)는 비록 가벼운 흥미위주의 뉴스를 다루는 일을 맡고 있지만 좀 더 심각한 주제를 손대고 싶어 하는 야심찬 방송기자다. 어느 날 그녀는 카메라맨 Richard Adams (Michael Douglas)와 함께 지역의 핵발전소에 대해 홍보성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 찾아갔다가 우연히 뭔가 불길한 상황을 목격하게 된다. 그것은 가벼운 지진으로 인해 원자로가 녹아내리는 가장 끔찍한 사고인 ‘멜트다운(melt down)’ – 소위 China Syndrome 이라 부르는 – 직전까지 이르렀다가 엔지니어 Jack Godell (Jack Lemmon)에 의해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Richard 는 이 상황을 몰래 필름에 담아와 방송하려하지만 경영진은 발전소 운영회사와의 마찰을 우려하여 방송을 보류한다. Kimberly 와 Richard 는 핵전문가의 도움으로 뭔가 불길한 일이 진행됨을 알게 되고 Jack 역시 발전소에 기본적으로 결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Jack 은 상부에 이를 보고하고 원자로를 멈추려 하지만 회사는 이윤의 감소를 우려하여 이를 만류한다. 분노한 Jack 이 증거를 Kimberly 에게 넘기려 했지만 회사는 이를 막으려 하고 마침내 Jack 은 발전소의 지휘실을 점거하고  kimberly 와의 인터뷰를 통해 진실을 폭로하려 한다. 그 순간 회사가 부른 기동타격대가 Jack 을 살해하여 또 한 번 진실을 은폐한다.  

핵에 대한 대중의 우려가 극에 달하던 70년대 말 이 영화는 은유나 비유가 아닌 직설화법으로 핵의 위험성, 민영화의 위험성, 방송의 공공적 역할, 그리고 내부고발의 합당성 등 다양한 사회적 이슈를 복합적이고 입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이는 실제로 엔지니어이기도 했던 작가 Mike Gray 가 실제 발생했던 유사사고를 바탕으로 한 사실감 넘치는 시나리오와 제작에 참여하기도 했던 Michael Douglas 와 진보적 연예인으로 알려진 Jane Fonda 의 열성이 결합된 결과이다. 이러한 결과 Jack 이 추적자들에 쫓겨 발전소로 도망오고 마침내 지휘실을 점거하여 인터뷰하는 그 과정을 따라간 몇 분은 웬만한 스릴러를 능가하는 긴박감을 유지하고 있다. 메시지를 설파하는 매체이면서도 긴장감과 극적쾌감을 주는 수작이다. 또한 실제로 영화가 개봉된 이후 몇 주 후 펜실베니아 주에서 유사한 사고가 발생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고 한다.

대통령과 언론과의 싸움,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대선이 끝났다. 기쁜 이들, 분노한 이들, 씁쓸한 이들, 관심없는 이들….  다양하다. 여하튼 대통령은 한 나라의 우두머리로서 그 지위가 가지는 중요성과 책임감은 새삼 거론할 필요가 없다. 1970년대 세계 최고의 강대국 미국의 대통령의 사소한(?) 거짓말을 두 기자가 어떻게 집요하게 파헤쳤으며, 이로 인해 그 대통령이 어떠한 대가를 치뤄야 했는지를 잘 말해주는 영화 한편을 대선에 즈음해 소개한다.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All The President’s Men)”은 Alan J Pakula 의 ‘Paranoia Trilogy(굳이 우리말로 번역하자면 편집증 삼부작?)’ 으로 꼽히는 작품들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작품(나머지 두 작품은 Klute, The Parallax View)으로 그 시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 정치권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그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최우수 작품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수상은 하지 못하였지만 아카데미 남우조연상과 각색상 수상) 뉴욕 영화 비평가 협회의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하는 등 수많은 비평가들이 꼭 봐야 하는 명작으로 선정하는 걸작이다.

1972년 어느 날 미국 민주당의 전국위원회 사무실이 자리 잡은 워터게이트 빌딩에 정체모를 무리들이 몰래 침입하였다가 경찰에 들키고 만다. 헌데 이들의 몸속에서는 공화당 재선본부의 수표가 발견되고 침입자 중 한명이 전직 CIA 요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등 뭔가 석연치 않은 커넥션이 감지된다. 워싱톤포스트의 신참기자 Bob Woodward (Robert Redford)와 Carl Bernstein (Dustin Hoffman)은 최고 권력층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심증을 가지고 사건을 파헤쳐가지만 취재요청 거부, 위협, 발뺌 등 수많은 난관에 부닥친다.

결국 이들의 집요한 탐사보도를 통해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고 사건의 핵이었던 리차드 닉슨은 미국 대통령 사상 처음으로 임기를 채우지 못한 채 1974년 백악관을 떠난다. 이로써 이 사건은 대의 민주주의 정치의 후미진 골목에 자리 잡고 있는 정치적 술수와 더러운 유착관계, 이러한 사회 부조리를 파헤치는 제3의 권력으로서의 언론의 중요성을 새삼 확인시켜준 문명세계의 주요한 사건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영화는 이런 긴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생동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전작 The Parallax View 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는 대도시의 거대하고 수직적인 구도와 그 안에 자리 잡은, 상대적으로 왜소한 사람들의 모습을 대비시키면서 다수의 개인의 뒤에 존재하는 거대한 권력집단의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특히 영화 말미에 닉슨의 재선장면을 방영하는 두 대의 텔레비전을 앞뒤로 배치하고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타이핑을 하는 두 기자를 배치한 장면은 영화사에 기록될만한 명장면으로 뽑힐 만하다.

결국 ‘정의의 승리’로 환호해야 마땅할 결말이지만 개인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대의 민주주의의 외피를 뒤집어 쓴 Inner Circle 이라는 거대악은 해소되지 않은 채 체제는 그대로 유지된다는 측면에서 ‘절반의 승리’로 폄하할 수밖에 없다. 닉슨에 이어 대통령직을 맡은 제럴드 포드가 대국민 성명에서 ‘미국의 긴 악몽이 끝나고 헌법이 제 기능을 한다고’ 천명한 사실은 그 내부권력집단이 건재함을 과시하는 은유로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사족 1) Bob Woodward 에게 결정적 제보를 제공했던 이른바 Deep Throat 는 FBI 의 전 관리 마크 펠더 였던 것으로 2005년 밝혀졌다. 오랜 동안 취재원 보호를 위해 밝히지 않았던 이 사실은 펠더씨의 측근에 의해 공개되었는데 그는 닉슨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후임으로 자신을 앉히지 않자 이에 불만을 품고 제보를 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사건을 기점으로 미국에서도 ‘내부고발자(Whistle-Blower)’에 대한 보호 법제화 등 시민사회의 발전에 뚜렷한 영향을 미쳤다.

사족 2) Deep Throat 라는 별명은 당시 미국에서 크게 유행했던 포르노 영화의 제목에서 따온 것이다. 성감대가 목에 있는 여자라는 설정의 영화로 극장에 개봉하며 큰 사회적 이슈를 불러온 작품이다. 이는 바로 워터게이트의 언론이슈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즉 ‘표현의 자유’라는 이슈를 제기하였고 포르노배우들은 본의 아니게 문화게릴라로 격상되기도 했다. 이 당시 이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로 Inside Deep Throat 가 있다.

매스미디어의 정치경제학에 관한 영화, Network

거장 시드니루멧의 강력한 힘과 후광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무엇 하나 쉽지 않은 테마들이 그야말로 유기적으로 팽팽하게 연결되어 저마다 빛을 발하고 있다. TV가 현대 매스미디어에서 차지하는 중심적 역할,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시스템의 중심 다국적기업의 존재감, 서로 다른 방향으로 바라보고 만난 남녀의 이유 있는 불륜, 청춘을 바친 직장을 떠나는 직장인의 자아상실, 반문화의 상업화를 통한 자본주의의 놀라운 생존력, 시청률이라는 정체불명의 숫자놀음을 감싸고 벌어지는 비정한 인간관계 등 따로 떼놓아도 장편영화 한편이 너끈히 나올 소재들이 이 영화 한편에 경이롭게 담겨있다.

그러면서도 산만함이 없이 떡하니 중심이 분명하다. 모든 배우들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분명한 색깔을 부여하고 있다. 특히 의욕 넘치는 젊은 중역 다이애나 역의 패이더너웨이와 노련한 보도부장 맥스 역의 윌리엄홀덴의 연기는 동선 자체도 훌륭한 연기다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섬세하다.

UBS 의 인기 앵커였던 하워드빌은 시청률이 떨어지자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쫓겨날 판이다. 오랜 직장동료이자 같은 방송국의 보도부장 맥스슈마허는 술김에 방송에서 자살한다고 말하면 시청률이 올라갈 것이라고 농을 건넨다. 다음날 뉴스에서 하워드는 정말 방송에서 자살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방송국이 발칵 뒤집힌 가운데 센세이셔널리즘을 추구하는 다이애나크리스틴슨은 UBS를 합병한 CCA의 점령군 프랭크해킷을 설득해 하워드의 뉴스를 버라이어티쇼로 전환시켜버린다.

시청자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주는 효과덕분에 하워드빌쇼는 엄청난 인기를 얻게 된다. 저널리즘을 훼손하였다고 생각한 맥스는 회사를 때려치우고 다이애나는 더 힘을 얻어 극좌 테러리스트의 테러 장면을 시리즈로까지 제작한다. 그 와중에 둘은 연인사이가 된다. 이제 TV는 더 이상 솔직해질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의 치부마저 상업화시키는 ‘반문화의 상업화’의 정점에 오르게 된다. 하워드빌은 방송중에 CCA가 아랍계 자본에 먹힐 것이라며 애국적 호소를 하게 되자 회사중역들은 그의 무한질주에 분노를 느낀다. CCA의 최고경영자 젠슨은 그를 불러 민족과 민주주의는 실종된 지 오래며 그 자리를 다국적기업이 채우고 있음을 일갈한다. 다국적기업이라는 새로운 신 내림을 받은 하워드는 점점 더 자기 폐쇄적으로 침몰해가고 젠슨을 제외한 나머지 중역들은 그의 존재에 심각한 위기를 느낀다.

완벽한 시나리오, 완벽한 배역, 완벽한 완급조절 등 Dog Day Afternoon 등과 함께 시드니루멧의 전성기를 대표하는 걸작이다.

로마, 무방비 도시

로베르토로셀리니의 1945년 작품인 이 영화는 마치 에릭홉스봄의 20세기 역사를 다룬 명저 ‘극단의 시대’를 영상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이다. 파시즘과 나찌즘이 극에 달하던 시기 로마에서 저항운동을 펼치던 공산주의자들의 투쟁을 그린 이 영화는 형식적인 측면에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이탈리아식의 사회주의 네오리얼리즘의 큰 축을 이룬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주의 : 이하 스포일러 있음>

극의 줄거리는 크게 반독 항쟁을 벌이고 있는 공산주의자 만프레디, 저항활동을 후원하는 돈피에트로 신부, 그리고 만프레디를 사랑하는 배우 마리나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무신론적 공산주의와 보수적 카톨릭 사이의 갈등은 서구세계에서 보편적인 현상이었지만 둘 모두 천년왕국에 대한 확신이 있으며 집단윤리에 익숙하다는 점에서 본질적인 친화성도 무시할 수 없으며 평사제들의 공산주의에 대한 호의감도 충분한 개연성을 가질 것이다. 흥미롭게도 다음의 경구를 보면 혁명가와 사제의 공통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그는 1928년에 그의 아내가 죽을 때까지 10년 동안 결코 그녀와 살지 않았다. 여자를 멀리하는 것은 혁명가의 철칙이다.” – 칼파나 두트

마치 사제서품을 눈앞에 둔 성직자의 각오를 연상케 하는 이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이 주장에서 언급되는 혁명가의 연애관은 만프레디와 마리나의 연인관계는 만프레디의 비극적인 운명을 암시한다. 투사도 인간일진데 사랑이라는 감정에 휩쓸릴 수 있는 것이 당연한 권리이지만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 대가가 얼마나 참혹한 것인가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혁명과 욕정은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화해할 수 없었나보다.

페데리코 펠리니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한 이 영화는 이후 “전화의 저편”, “독일 영년”과 함께 로베르토 로셀리니의 3대 전쟁 영화이기도 하다.

뉘른베르크의 재판 (Judgment At Nuremberg, 1961)

영화는 한 건물 위에 장식되어 있는 스와스티카가 파괴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절대권력 나찌의 종말을 표현하는 이 장면을 통해 영화는 이후 펼쳐질 승자의 역사에 대한 기록일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뉘른베르그에서는 연합국 4개국이 제3제국의 전범을 단죄하는 법정이 열리고 있었다. 이제는 은퇴한 판사인 Dan Haywood(Spencer Tracy) 는 제3제국의 부역한 4명의 판사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재판의 재판장을 맡게 된다. 이 재판에서 열혈검사 Ted Lawson(Richard Widmark)은 피고들의 나찌에 대한 적극적인 충성을 주장하는 한편, 오스트리아 출신의 변호사 Hans Rolfe(Maximilian Schell)는 법관은 정해진 법을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실행하는 수동적인 집행관일 뿐이라는 논리를 펼친다.

이후 법정은 공산주의자 집안이라는 이유로 거세수술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Rudolph Peterson(Montgomery Clift)와 유태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죄목으로 유태인은 사형당하고 상대여인은 감옥살이를 했던 펠렌스타인 사건의 당사자였던 Irene Hoffman(Judy Garland) 등이 주요증인으로 등장하며 치열한 법정공방을 펼치게 된다. 위의 두 사례는 검찰이 나찌가 인간을 사상과 인종으로 차별하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로 제시되었던 것인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 재판이 진행되던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소위 선진화된 서구에서조차 나찌의 인종차별적인 행위내지는 이론적 주장이 그리 드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영화에서도 변호사에게 지적당하는바 재판장인 Dan Haywood 자신이 버지니아 법원관할에서 지능과 능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는 사람들에게 거세수술을 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린바 있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 케이스인 펠렌스타인 사건은 – 실제 사건을 기초로 하였는데 독일여인과 성관계를 가졌다는 죄목으로 사형당한 카첸버그 사건에 기초하였다 한다 – 좀 더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이 당시만 하더라도 미국에서 여전히 교육, 직업, 공공서비스 등에서의 인종분리 정책이 유효했고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처럼 이미 어떤 의미에서는 문명의 별종으로 인식되는 나찌의 정책이 자본주의 문명 일반 – 게다가 스탈린 치하의 사회주의 정권까지 – 의 위선적인 자화상과 닮아있다는 점이 극중 재판관들을 헷갈리게 하고 관객들을 헷갈리게 하는 점이다. 그러한 지루한 국면을 전환하는 결정적인 계기는 검찰이 제시한 유태인수용소에 대한 필름이다.

실제 아이젠하워 시절 정권의 독려 하에 촬영되었던 단편 다큐멘터리였던 이 필름은 재판정을 위해, 그리고 영화관객을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여 상영되는데 당시 관객들에게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임은 – 이 당시엔 아직 홀로코스트라는 단어조차 생경한 단어였다 한다 – 불문가지이다. 그 어떤 궤변을 떠나서라도 정당화될 수 없었던 인종청소는 이 재판을 종결짓게 하는 결정적인 단서로 작용하고 결국 네 명의 전직 판사는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하지만 영화는 Haywood 의 그 결단력 있는 판결이 약간은 순진한 판결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바 재판 와중에 소련은 독일의 동부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고 볼쉐비즘의 저지를 새로운 목표로 설정한 서구는 독일인의 환심을 사기위해 그들의 전직 지도자들을 평생 감옥에서 썩게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이다. 엔딩크레딧의 자막에서 그들이 바로 얼마 뒤 가석방되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중에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라고 어느 성현이 말하셨다는데 법률 전공하는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법과 법정의 존재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결국 영화는 나찌의 부역자로 4명의 판사를 지목하여 단죄하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으나 변호사의 주장처럼 나찌의 득세에는 독일 산업을 후원하였던 미국의 자본가, 독일의 정치구조를 찬양했던 영국의 처칠 등도 (외부적인) 부역자에서 면죄될 수는 없을지도 모르기에 이 영화는 다른 법정 영화는 다른 법정 영화와는 다른 좀 더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 포스터가 영화 자체보다는 호화배역을 좀 더 강조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느 관료의 죽음

문화 카테고리의 ‘영화’ 섹션 이름을 ‘진보와 영화’로 바꿨습니다. 이런 저런 영화를 닥치는대로 소개하는 것보다는 테마가 있는 영화를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테마를 ‘진보’로 택했습니다. 앞으로 나름대로의 역사의식과 진보적인 주제를 가진 영화를 위주로 소개를 드릴까 합니다.(필자 주)

영화를 즐겨보는 이들에게는 쿠바 혁명 직후 그곳에 남은 부르주아의 정신세계를 그린 “저개발의 기억”이라는 영화로 알려져 있는 토마스 구티에레스 알레아 감독은 쿠바혁명의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동시에 혁명의 비판자이기도 했다. 이러한 일면 모순 되는 그의 행태, 그리고 필르모그래피는 역설적으로 혁명이란 단순히 일회성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체제 내부의 적과의 투쟁이라는 사실을 그가 잘 알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저 개발의 기억”이 자신의 물적 토대와 다른 외부 상황에 혼란을 느끼는 부르주아의 모습을 통해 한 개인의 변화를 관찰하고 있다면 “어느 관료의 죽음”(1966년)은 반대로 한 노동자의 의식을 배반하고 있는 ‘노동자 국가’의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관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어느 관료의 죽음”이 보여준 이런 과감한 관찰 시점 때문에 노동자 국가 쿠바에서는 상영 금지되었다 한다.

영화는 한 위대한 노동자의 죽음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술가로서 프롤레타리아로서 위대한 삶을 살다간 한 노동자가 죽고 난 뒤 유족들은 국가에 연금을 신청한다. 하지만 공무원은 연금신청의 구비서류로 노동증을 요구하고 유족들은 뒤늦게 노동증을 시신과 함께 묻었음을 말하지만 공무원은 요지부동 노동증을 요구한다. 이후 죽은 노동자의 조카 후안신은 노동증을 찾기 위해 경직된 관료주의와 한판 싸움을 벌이게 된다.

사실 나는 주인공이 이렇듯 곤란에 빠지는 코미디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자꾸 곤란에 빠지는 모습이 웃음보다는 연민을 자극 – 심지어는 짜증을 유발 – 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표적으로 체비 체이스 주연의 “휴가대소동(National Lampoon’s Vacation)”이 그런 류의 코미디이고 개인적으로는 ‘전혀’ 재밌지 않았다.(예외가 있다면 “밥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What About Bob?)” 정도?) 이 영화도 역시 그리 맘 편하게 보지는 못했다. 게다가 나름의 노동자 국가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영화가 아닌가 말이다.

결국 내 마음의 갈등과 불편함을 견디고 끝까지 본 소감으로는 개인적으로는 불편하고 취향이 아닐지 몰라도 감독의 세계관이나 비판의식에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았음을 밝혀둔다. 독점재벌을 비판하면서도 부르주아적 삶을 만끽하는 예술창작집단의 매니저, 서류 한 장 발급받기 위해 이곳저곳을 뺑뺑 돌아야하는 관료주의, 그 한편으로 관료주의를 박살내자며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복지부동 공무원들, 이 모두가 존재했던 사실이고 존재할지도 모르는 개연성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현실에 안주해서 편한 창작활동을 펼쳐도 무방할 친체제적이지만 스스로 반골을 택한 알레아 감독의 캐릭터도 마음에 든다.

과거를 반추하여 미래를 되짚어 보는데 있어 결국 이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누구를 위한 노동자 국가인가?”라는 것이다. 굳이 국가의 관료시스템이 아니라 하더라도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부닥치는 ‘목적과 수단의 전도’, ‘조직을 위한 조직’ 등의 풍경을 보면서 시스템과 함께 인간 스스로도 변하고 노력해야만 진정한 “사람 사는 세상”이 오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반(反) 자본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내에서는 아무리 인간이 변하여도, 또는 인간이 선하여도 모든 노동이 이윤의 획득으로 수렴되는 비인간적인 구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자본주의를 타파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또는 우리가 내놓아야 할 대안은 이윤이 아닌 다른 무엇이든 본래의 목적과 이상을 왜곡시키는 변질된 요소가 개입되는 것을 막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것은 관료주의일수도 있고, 개인 또는 국가의 이기심일수도 있고, 차별의식일수도 있다. 그 어느 것이건 간에 그 독소는 일회성(?) 혁명으로는 타파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이 영화가 강력히 시사하는 바이다.

사형이 옳은 것이냐 : 絞死刑(Death By Hanging)

극은 한 사형수 R의 교수형이 처해지는 장면의 묘사로 시작된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밧줄에 매달린 R은 의식은 잃었지만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었다. 당황한 참관인들(교도관, 검사, 신부, 의사 등)은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리는 희극에 뛰어든다. 그러나 의식을 되찾은 R은 자신이 R임을 깨닫지 못하고 참관인들은 R의 성장배경과 그가 저지른 강간살인을 재연하며 R이 R임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을 기울인다. 재일 한국인이었던 R의 어두웠던 가정환경, 그의 범행동기, 살인 당시의 상황이 이 우스꽝스러운 상황극을 통해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R은 결국 자신 스스로는 사형을 받을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자부하지만 국가의 또 다른 범죄에 항의하는 의미에서 모든 사형 받을 이들을 대신해 사형을 받겠노라고 스스로의 죽음을 순교로 정의하고 교수형으로 사라져간다. 결국 어쩌면 이 모든 사형을 둘러싼 참관인들의 해프닝은 R이 교수형을 받으며 아래로 추락하는 찰나의 순간에 꾸었던 꿈일지도 모른다.

루이스 브뉘엘 스타일의 실험적인 코미디 형식을 빌려 실제 있었던 재일 한국인에 대한 사형을 다룬 이 영화는 사회적 징벌로써의 사형의 부적절함,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무지와 편견, 스스로 살인자였던 일본이 또 다른 살인자를 처벌하는 모순 등 무거운 사회적 주제를 한 편에 소화해내고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회적 이슈를 나름의 시각으로 펼쳐내어 대가로 인정받은 오시마 나기사는 진정한 범죄자는 전쟁으로 국민들을 내몰아 수만 명을 살인한 국가임을 고발하고 있다. 재일 한국인 R의 역은 실제 한국인인 윤윤도가 열연하였다.

P.S. 전기의자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미국에서는 1950년대 실제로 사형수가 형집행 후에도 살아남은 일이 있었다. 부실한 전기의자의 성능 탓이었다. 사형수는 같은 범죄로 두 번 처벌받을 수 없다며 사형을 재개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으나 기각되고 두 번째 전기의자에서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는 미성년자인 흑인이었다.

오시마나기사

Broken Flowers(2005)

오늘 낮 채널을 돌리다 우체부를 따라가는 롱테이크샷이 인상적인 한 영화에서 채널을 멈추었다. 곧이어 등장하는 장면은 코미디언 치고는 지루한 얼굴이어서 나이를 먹어갈수록 인디풍의 영화에 곧잘 등장하는 빌머레이(돈 존스턴)가 덜렁 큰 집에서 허연 머리에 중늙은이 모습을 하고는 소파에 앉아서 혼자 돈주앙을 소재로 한 흑백영화를 보고 있는 장면. 이윽고 동거녀 쉘리가 그런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는 휑하니 집을 떠나버린다. 이윽고 발견한 핑크색 봉투의 편지.

이웃집 친구 윈스턴(Syriana에서 심각한 얼굴의 그 흑인 변호사역을 했던 제프리라이트)의 앞에서 뜯어본 그 편지는 20년 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썼다는데 그에게는 그가 모르는 아들이 있었고 그를 곧 찾아갈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서명도 주소도 없었다.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윈스턴은 돈에게 묘령의 여인을 찾아낼 것을 꼬드기고 마침내 돈은 한때 히피였던 자신이 60년대에 사귀었었던 네 명의 후보자들을 찾아 나선다. 단서는 오직 핑크색과 편지를 타이핑했을 구식 타이프라이터. 한편으로 환대를 받기도 하고, 어색한 만남을 가지기도 하고, 면전에서 주먹으로 얻어맞기도 했지만 산발적인 핑크색과 버려진 타이프라이터를 통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여인을 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한때 힙스터(hipster; “최신유행에 민감한 사람” 또는 “히피족”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보다 복잡한 의미를 지닌 단어로 반대되는 의미는 “체제순응자”의 의미를 지닌 square라 할 수 있다)였으나 컴퓨터로 떼돈을 번 뒤 무료한 삶을 살고 있는 스퀘어가 되어버린 중년의 과거 찾기가 로드무비와 미스터리물의 형식으로 펼쳐지는데 제법 결과가 궁금하다. 하지만 결말이 다소 미지근한데(스포일러일수도 있어 죄송하지만) 엔딩타이틀에서 감독이 짐자무쉬인 것을 알고 나서야 “그러면 그렇지”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무려나 과거는 과거일 뿐 재밌었으면 되잖아” 이런 식일지도.

60년 세대의 힙스터 분위기를 차용하고 있는 마이크마이어스 주연의 코믹 스파이물 Austin Powers 를 보면 Austin이 Dr. Evil을 체포하려는 장면에서 Dr. Evil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즉, 자신과 Austin Powers 는 90년대 상황에서 비슷한 처지라는 것인데 Austin이 60년대의 프리섹스와 난잡한 파티를 벌인 것이 90년대에는 악(evil)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에 Austin이 자유는 여전히 유효하며 ‘책임’이 함께 따르면 된다고 일갈하지만 Dr. Evil 은 ‘나이든 힙스터(aging hipster)’만큼 비참한 것은 없다고 맞받아친다.

이 영화에서 돈존스턴이 바로 그 ‘나이든 힙스터’이다. 그가 아들의 엄마를 찾는다는 핑계로 옛 애인들을 쫒아 다닌들 자신이 힙스터로 되돌아갈리는 만무한 것이었다. 그 부질없음이 영화의 큰 주제라 여겨진다. 짐자무쉬의 영화에서 자주 비쳐지는 주제이기도 하고 “American Beauty”에서 제대로 써먹은 주제라 식상하기도 하지만 여전히 고정 관객은 확보할 수 있는 주제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