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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고 있는 책

두서없이 몇권의 책을 동시에 읽고 있다.

수전 손택 / 사진에 관하여
수전 손택은 워낙 글솜씨가 현란하기 때문에 읽으면서 약간의 열등감도 느끼게 되는 그런 사진을 주제로 한 에세이 모음이다. 작가가 사진에 관한 프로페셔널이 아님에도 사진에 관한 철학적이고 기술적인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면서 좋은 작가와 작품도 소개해주고 있어서 서양의 사진사에 대해 표피적으로나마 학습할 수 있는 좋은 수필이다.

Michael Chabon / Wonder Boys
마이클 더글러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토비 맥과이어 등 호화배역이 출연하였던 2000년 영화 원더보이스의 원작 소설. 몇년동안 책꽂이에 꽃힌채 방치되어 있었는데 다시 꺼내들어 앞 몇 챕터를 읽었다. 영화와는 조금 다른 스토리로 전개되는데 얼핏 남주가 ‘호밀밭의 파수꾼’의 홀덴 컬필드가 나이가 들은 듯한 느낌을 준다.

튜더스
몇년전에 읽은 책인데 다시 읽으니 내용이 또 새롭다. 영국의 왕가 중에서도 가장 흥미로운 “막장”의 튜더 왕가에 관한 전기다. 당연한 것이지만 이 왕가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수많은 사건은 단순히 헨리8세가 앤블린과 새 장가를 가고자 하는 욕정에서만 비롯한 것이 아닌, 권력집단의 이해타산과 그 시대가 연출해낸 장대한 서사시인 것이다.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가?
이 책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아니고 얼마전 다 읽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가장 논쟁적인 소설 ‘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원작자와 다른 시각에서 보며 새로운 범인을 제시하는 도발적인 글이다. 정신분석가인 작가는 이러한 식으로 여러 권의 탐정 비평을 썼으며 이 책이 그 중 가장 유명한 책이다.

“법복과 털외투는 악행을 감춰주지”

Edwin Austin Abbey King Lear, Act I, Scene I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jpg
By Edwin Austin AbbeyMetropolitan Museum of Art, online database: entry 10049, Public Domain, Link

넝마 옷 사이로 보이는 악행은 크게 보이는 법이지만, 법복과 털외투는 그 모든 걸 감춰주지. 죄에 황금 칠을 하면 강력한 정의의 창이라도 상처 하나 못 입히고 부러지는 거다. 누더기로 무장하면, 난쟁이의 지푸라기라도 뚫을 수 있다.[리어 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김태원 옮김, 웅진씽크빅, 2014, p190]

아버지로부터 권력과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러한 아버지는 섬길 마음은 없었던 두 딸에게 버림받고 황야에서 길을 잃어 정신이 온전치 못한 리어 왕의 독백이다. 이성의 끈을 놓은 와중에도 이렇게 문득 이치에 맞는 말을 하고 있어 동행하고 있던 에드가로부터 “광기 속에 이성이 있다”는 찬사를 받는다.

오 후보자는 2011년 12월 서울행정법원 행정1부 재판장 재직 시절 800원을 횡령한 버스기사를 해임한 고속버스 회사의 해고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결했다. [중략] 이는 2013년 2월 변호사로부터 85만원 상당의 접대를 받은 검사의 면직에 대해 “가혹하다”고 한 판결과 대비돼 입길에 올랐다.[800원 판결과 ‘윤석열, 술, 인연’…대법관 후보 오석준 청문회]

한 인물이 리어 왕의 그 촌철살인에 그대로 적용되는 두 가지 경우에 동시에 관여하고, 지금 대법관 후보로 행세하고 있다니 인간세상의 부조리는 문명의 진보와 무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이것이 문제다 저것이 문제다 하지만, 결국 인간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하는 염세적인 생각도 든다.

올해 읽은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소설들


올해의 책읽기 중에 가장 모험적인 시도였다면 연초에 시도한 ‘롤리타 원서로 읽기’였다. 소설의 원작자인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귀족 명문가에서 태어난 천재인지라 여러 나라 언어에 능숙하였으며, 이 소설을 쓸 때 그는 모국어인 러시아어대신에 영어를 사용하였다. 하지만 네이티브가 쓴 영어소설이 아니라고 결코 만만히 볼 것이 아니었다. (물론 영어실력 부족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보코프가 사용한 수많은 은유와 현학적인 단어 등으로 인해 – 어릴적 한국어로 이미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 한 문단 한 문단을 힘겹게 타고 올라야만 했다. 그런 시도 끝에 완독에 성공했음에도 – 또는 그러하였기에 – 만족감은 기대 이상이었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험버트 험버트가 롤리타와 묵었던 여관에서 정체모를 남자와 나눴던 대화에서 험버트의 머릿속에 잠재하고 있던 죄책감이 대화 속에서의 언어적 유희로 표현되던 상황은 영어가 아니고서는 쉽게 이해될 수 없는 상황이었고, 소설의 곳곳에 배치되어 있는 이런 가느다란 감정의 뉘앙스는 영어로 읽어야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아성애라는 비뚤어진 여성 혐오적 욕망을 관능적이고 현학적으로 풀어낸 탓에 – 또는 덕분에 – 아직도 이 소설의 제목과 캐릭터는 유사한 사회적 현상을 묘사하는데 가장 손쉽게 쓰이는 상징이 되었고, 소설 그 자체의 매력을 감상하기 위해서나 또는 그 욕망의 사회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번쯤 읽어야할 소설이라고 생각한다.


롤리타가 힘겨운 고산등반이었다면 요코미조 세이시의 옥문도(獄門島) 읽기는 가벼운 트래킹이라 할 수 있었다. 영국에 셜록 홈즈가 소설 속에 등장하는 사설탐정의 전범이라면 일본은 바로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해낸 긴다이치 코스케(金田一耕助)라 할 수 있다.1 1947년 처음 연재되기 시작했다는 이 소설은 역시 긴다이치가 등장하는 요코미조의 다른 소설에 비교할 때에 – 적어도 내가 읽은 중에서는 – 가장 미스터리로서의 매력이 강하고 이 매력이 하이쿠 등 일본 고유의 문화와 잘 융합되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긴다이치 코스케의 다소 엉뚱한 캐릭터 설정과 뛰어난 건축물을 보는 듯한 주변 캐릭터 설정의 기하학적 배치가 훌륭하게 결합되어 있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력이다.

소설은 긴다이치가 동료군인이었던 한 명문가의 장남이 죽음을 맞이하며 했던 부탁을 들어주러 “지옥의 문”이라는 끔찍한 이름의 섬에 찾아가면서 겪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이 소설의 매력은 섬으로 향하는 배에서부터 시작한다. 요코미조는 이때부터 등장하는 어느 조연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저마다의 역할을 정확히 배치하여 활용한다. 하다못해 섬으로 싣고 가는 절의 종(鐘)에도 역할이 배당되어 있다. 그리고 이후 발생하는 살인사건은 각각의 하이쿠의 대응하는 모양새를 띤다.2 소설의 또 하나의 매력은 그 살인의 배경에 거대하게 자리 잡고 있는 섬의 폐쇄성, 그리고 더 매크로하게 일본이라는 섬이 지니고 있는 폐쇄성과 봉건성을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다. 재미와 메시지를 함께 지닌 작품.


지난 11월 말 교토(京都)를 여행했다. 그래서 가기 전에 참고용으로 고른 소설이 미시마 유키오의 ‘금각사’였다.3 1956년 출판된 이 소설은 하야시 쇼켄이라는 절의 도제가 1950년 실제로 금박으로 덮여 있던 누각을 불태워버렸던 충격적인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다.4 작가는 소설을 쓰기위해 5년간 자료조사를 할 만큼 치밀하게 작품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현실의 하야시 쇼켄은 소설 속에서 말더듬과 부모에 대한 원망으로 열등감에 젖어있는 미조구치로 재탄생한다. 미조구치는 어쩌면 하야시 쇼켄과 당시 여러 내적 갈등을 겪고 있던 미시마 유키오 자신이 뒤섞여 있는 캐릭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읽다보면 ‘미시마 스스로가 먼저 금각사를 태워버리지 못해서 이 소설을 쓴 게 아닐까’하는 의문이 들 정도다.

미시마 유키오가 “이상한 에로티즘을 구사”한다는 평이 있는데 이 소설 역시 그런 이상한 에로티즘이 잘 묘사됐다는 점에서 시사소설인 동시에 작가의 뇌내망상과 상상력의 재창조물이라 할 수 있다. 미조구치는 임신부의 배를 걷어차며 쾌감을 느끼고 여러 에로틱한 상황에서 금각사의 환영을 중첩되며 성적환상에 시달린다. 이런 면에서 방화는 명백히 미조구치의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고, 먼 훗날 미시마 유키오 스스로가 자행하는 자살극에서 느꼈을 오르가즘과 연결되어 있다. 금각사라는 미(美)는 파괴해야만 영속한다는 모순된 강박은 “인간이 잔인해지는 순간은 단말마의 신음을 볼 때가 아니라 나뭇가지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이 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때”라는 작중인물의 대화에서도 엿볼 수 있다.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경제사범에 대한 인식

카센티노의 푸른 언덕에서 아르노 강으로 서늘하고 잔잔하게 흘러내리는 실개천들이 언제나 눈앞에 속절없이 아른거립니다. 그것을 머리에 떠올리는 일이 얼굴 살을 뜯어내는 병보다 나를 더 애타게 목을 태우고 있소. 나를 괴롭히는 엄격하기 그지없는 정의가 하필 내가 죄를 지은 곳을 떠올리게 하며 더 깊은 한숨을 내쉬게 만드는구려. 거기는 로메나, 내가 세례자의 얼굴로 주화를 찍어 위조화폐를 만들던 곳이오. 나는 그 때문에 저 위에 불에 탄 육신을 남겼소.[신곡, 단테 엘리기에리 지음, 박상진 옮김, 민음사, 2008년, pp306~307]

지옥에 떨어진 이 죄인은 스스로를 “장인(匠人)”이라 부르는 아다모1다. 그는 당시 로메나 성2의 군주였던 귀도와 알레산드로의 꾐에 빠져 쇠로 피오리노(fiorino)3라는 – 중세유럽의 부국이었던 피렌체에서 1252년부터 주조하여 통용시키던 – 금화의 위조화폐를 만들었고, 그 탓에 지옥에 오게 됐다는 것이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한 일화다. 이 장에서 단테가 묘사하는 것을 보면 당시 화폐 위조를 중한 범죄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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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인용문의 뒤쪽을 보면 같이 지옥에 떨어진 시논이라는 다른 죄인4은 아다모에게 “내가 거짓말을 했으면, 넌 돈을 위조했어! 난 한마디 말 때문에 여기 있지만, 넌 다른 어떤 마귀보다도 나쁜 놈이야!”라고 거칠게 힐난한다. 당시 피렌체는 백년 전쟁 동안에 잉글랜드 왕에게 자본을 대기도 하는 등 유럽 각국에 자본을 대주는 금융도시였다. 자연히 위조화폐를 주조하는 죄는 중죄로 다루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들의 고통은 눈에서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그들은 비처럼 떨어지는 불꽃과 뜨겁게 달구어진 모래를 손으로 내저으며 이리저리 피해 다녔다. 마치 여름날에 벼룩, 파리, 빈대에 물어뜯기는 개가 주둥이와 발목으로 버둥대는 것 같았다. 고통스러운 불길이 떨어지는 가운데 몇 사람을 눈여겨보았지만, 아무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목에 주머니를 걸고 있음을 깨달았다. 색깔과 문장(紋章)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 와중에도 그들의 눈은 주머니를 흡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같은 책, pp167~168]

한편 이들은 고리대금업자다. 그들이 차고 있는 주머니가 바로 고리대금업자임을 상징하고 있다.5 교회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를 통해 고리대금업자는 영성체를 비롯한 교회의 구원을 받을 수 없도록 정하였다. 따라서 단테가 신곡을 쓴 14세기 초 고리대금업자가 사후에 갈 곳은 지옥밖에 없었다. 금융업으로 성장한 도시에 살면서 위폐범을 단죄하면서도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에 보내는 혼돈된 세계관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여하튼 고리대금업에 면죄부를 준 것은 먼 훗날이 지나서였고 위폐범은 아직도 극악한 중죄다.

Giotto, scrovegni, enrico scrovegni dona agli angeli una riproduzione della cappella degli scrovegni (13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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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리대금업자라도 교회에 재산을 바치면 성화에도 등장하고 천국도 갈 수 있다

이렇듯 종교적 관념은 언뜻 우리의 경제활동과는 별로 관계가 없어보일지 몰라도 실은 다른 여타 분야에서 그렇듯 우리의 경제관념에도 끈끈하게 얽혀 있다. 이자를 받는 것을 금지한 것은 기독교나 이슬람 모두의 교리였고 앞서 보는 것처럼 기독교 교리는 그런 고리대금업자를 지옥으로 보냈으며 이슬람은 여전히 이자수취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다6. 금융 등 3차 산업을 “노동”으로 여기지 않는 관념도 아담 스미스7, 막스 베버8, 심지어 칼 맑스9에 이르기까지 서양 경제학자들의 경제관에 일관되게 반영되어 있다.

올해의 책

슬슬 한해를 마무리할 시간이 왔다. 오늘 ‘올해의 뫄뫄’ 시리즈를 써볼까 하고 에버노트를 뒤적거리다보니 올해는 개인적으로 나름 참 많은 일이 있었던 해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참 많은 일이 벌어졌던 – 그리고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 해이기도 하다. 많은 사건이 비극이었지만, 그 와중에 그러한 비극을 계기로 화해와 상처 회복의 단초가 마련되기도 했다. 그러한 양면성이 인생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누구도 언제나 행복할 수 없고 누구도 언제나 불행하지만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책을 읽는 순간만은 행복하거나 최소한 불행을 잠시 잊는 순간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紅樓夢

올해는 조설근의 소설 홍루몽을(내가 읽은 것은 나남에서 발간한 총 여섯 권짜리) 다 읽은 해다. 작가의 반자전적 소설이라는 설이 유력한 이 걸작은 주된 줄거리는 한 귀족 집안의 자녀인 가보옥과 임대옥과의 사랑 이야기이지만, 그 안에는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라는 진지한 질문이 담겨져 있다. 또한 작가 스스로가 겪었을 귀족의 풍습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우리는 봉건사회의 계급구조를 들여다볼 수도 있다. 이 소설을 “페미니스트 소설”이라 이름붙이는 것은 과잉해석이겠지만, 대부분 여성이 주인공이고 그들의 주체성이 살아있다는 점에서 웬만한 현대소설보다 페미니즘 적이라는 것도 매력요소다.

The Catcher In The Rye

여태 한 대여섯 번은 읽은 것 같은데 올해는 특히 홀덴이 방황하는 주요무대인 뉴욕을 다녀와서 읽었다는 점에서 더 맛깔스러운 독서가 됐다는 점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해 보았다. 즉, 홀덴이 기차를 타고 뉴욕의 펜스테이션에 도착해서 센트랄파크 및 웨스트사이드 등으로 헤매는 동선이 내가 뉴욕에서 헤맸던 동선이기에, 영화화도 되지 않은 이 작품에 비주얼을 가미해주어 더 실감나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다. 한편 트위터에서 화제가 되었던 “원문에서의 head가 ‘머리’냐 ‘귀두’냐”란 논란도 다시 곱씹어 볼 수 있었던 계기가 됐다. 귀두로 해석한 번역가는 음란마귀가 씐 것 같다.

스트레스테스트 / 정면돌파 / 대마불사

2008년 금융위기를 다룬 책은 여러 권이 있겠지만, 올해에는 이 세권의 책으로 어느 정도 당시의 정황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앞의 두 권은 금융위기 속의 출연진인 – 그리고 서로 앙숙인 – 티모시 가이트너와 쉴라 베어가 쓴 회고록이다. 그렇기에 둘의 주장이 엇갈리는 장면에서 서로의 주장을 비교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대마불사는 뉴욕타임스의 컬럼니스트이기도 한 작가 앤드류 로스 소킨(Andrew Ross Sorkin)이 쓴 책이다. 작가의 시점에서 각 주요국면의 정황을 치밀하게 조명했다는 점에서 앞서의 두 권이 비어있는 부분을 채워줄 수 있는 좋은 참고서다. 암튼 대단한 사건이었다.

콜레스테롤 수치에 속지마라

특이하게 건강에 관한 책을 골라봤다. 조니 바우덴(Jonny Bowden)과 스테판 시나트라(Stephen Sinatra)의 공저다. 개인적으로 LDL수치와 총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서 빌려본 책인데 의외의 내공을 느끼고 숙독했던 기억이 난다. 요점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을수록 심장질환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가설”은 현대의학의 신화이자 상술일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해박한 지식을 통해 콜레스테롤, 인슐린 등 우리 귀에 익숙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잘 모르는 것들에 대해 상세하게 알려준다. 작가의 주장은 굉장히 논란이 많은 주제이기 때문에 독자로서 이를 유의하며 다른 주장과 비교하여 읽어야 할 것이다.

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읽다

빵과 자본론이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주제가 한데 만난 책이다. 질풍노도의 삶을 살던 저자는 어느 날 빵을 배워보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학자이신 아버지가 문득 자본론을 읽어보라고 해서 그 책을 읽으며 제빵업자로서의 삶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는 개인적 경험을 적은 것인데 엉뚱해 보이면서도 읽다보면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결국 저자는 자신의 경제주체로서의 역할을 자본론에서 이상적인 경제단위로 설정한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편 맑스가 자본론에서 엉터리로 만들어진 빵이 얼마나 나쁜지 설명하는 부분도 있으니 의외로 빵과 자본론은 어울리는 주제다.

(장수의 악몽) 노후파산

NHK 스페셜 제작팀이 실제로 노후파산의 위기에 있거나 이미 파산한 노인들을 심층 취재하여 만든 책이다. 올해 일본에 갔을 때 유난히 노인층이 많이 눈에 띄어서 일본사회의 노령화를 실감하였던 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노인층이 세계 최고의 선진국인 일본에서조차 어떻게 삶의 파행을 겪게 되는 지를 실감하게 됐다는 점에서 충격적이었다. 이러한 비극적인 삶은 단순히 문학 속의 소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 시스템이 해결해야 할 절체절명의 과제다. 올해는 특히 전 세계적으로 기본소득 등 그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한편 이 책을 읽고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 충격이 배가 된다.

문 앞의 야만인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뭔지 아리송하게 만드는 제목의 이 책은 M&A에 관한 고전이다. RJR내비스코라는 미국의 거대기업의 합병과 LBO를 둘러싸고 월스트리트의 쟁쟁한 플레이어들이 어떻게 합종연횡을 하며 사투를 벌이는 지가 번역본 900페이지가 넘는 회고록을 통해 소상히 담겨져 있다. 그래서 해당 분야의 종사자들에게나 문외한에게나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다. 아직 3분 2 정도 밖에 진도를 나가지 못했지만, 굳이 ‘올해의 책’으로 선정한 이유가 이것이다. 특히 투자은행 업계에 종사하고 있다면 어떻게 딜소싱이 이루어지는지, 주선은행이란 어떤 의미인지, 협상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민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올해의 즐거움 : 冊편

한해도 어느덧 일주일여를 남겨놓고 있다. 작년 이맘때에는 이스탄불에 있었기에 한국의 연말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올해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연말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거리는 연말답지 않게 한산하다. 뭔가 나라 전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의기소침해 있는 듯하다. 한해를 되돌아보면 그럴만한 아픈 일들이 많았기에 의아하기보다는 나 역시 조금은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한에는 인간은 언제나 즐거움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올해의 나 역시 그러려고 노력했다. 블로그에 올해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던 것들을 간단히 추려 적어볼까 하고 처음으로 내게 즐거움을 안겨준 책을 몇 권 골라봤다. 골라놓고 보니 대부분 소설이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혹시 인상 깊었던 책이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댓글을 남겨주시길. 순서는 무작위다.

Lavery Maiss Auras.jpg
Lavery Maiss Auras” by John Laveryhttp://kevinalfredstrom.com/art/v/paintings/Sir+John+Lavery_Miss_Auras_the_red_book.jpg.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Commons.

문신살인사건

우선 문신에 집착하는 이들을 둘러싼 살인사건이라는 소재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카기 아키미쓰라는 작가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작가가 호구책으로 쓴 소설이 대히트를 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시대를 때를 타지 않는 걸작의 풍미가 느껴진다. 점쟁이의 예언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황당한 창작의 배경에서부터 트릭을 만들어낸 과정 등이 후기로 담겨 있어 또 다른 묘미를 주고 있다.

홍루몽

중국의 사대기서 혹은 그 모든 작품을 뛰어넘는 중국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 조설근의 장편소설이다. 올해 처음 읽기 시작하여 중간 정도까지 밖에 읽지 못했다. 이 소설을 연구하는 홍학(紅學)이라는 학문분야가 따로 있을 만큼 이 작품의 깊이는 헤아리기 쉽지 않다. 언뜻 귀족가문의 가정사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화들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는 중국 봉건사회의 거대한 얼개가 치밀한 장면 묘사를 통해 느낄 수 있어 최고의 문학작품이라는 평가가 허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이라는 생소한 작가가 쓴 글을 홍기빈 씨가 번역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원이라고 간주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또한 동구권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 특히 시장 사회주의 –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정황을 그 사상적 교류의 역사의 구체적인 이론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담겨져 있어 개인적으로는 경제학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더불어 내 고민의 한 돌파구도 마련되었다.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의 대표작. 팀에서 뮤지컬을 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영화로 우선 접하였고, 이후 뮤지컬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원작 소설까지 섭렵한 케이스. 레베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 여인의 거대한 그림자 때문에 고통 받는 어느 귀족가문 부부와 레베카를 여전히 흠모하는 하녀,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성(城)이 주인공이다. 영화, 뮤지컬, 소설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뉘앙스가 달라지는 지점이 감상의 포인트다. 그리고 소설이 가장 충격적이고 우울하다.

차브 – 영국식 잉여유발 사건

영국의 최근 선거는 데이비드 카메론의 재집권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 비해서는 왠지 그쪽 동네가 같은 보수여도 같은 보수가 아닐 것 같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쪽도 우리 헬조선에 비견할 수 있는 헬영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젊은 사회주의자 오언 존스는 영국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노동계급”이 어떻게 그 존재감을 빼앗기고 “차브(Chavs)”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능멸 당하게 되었는지를 시사적 사건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