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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量)은 질(質)을 바꾸는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것일까?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1984, 조지 오웰, 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년, p100]

소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가 당(黨)의 눈길을 피해 몰래 쓰고 있는 일기에 적은 말이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이 가게에 나온 냄비를 사기 위해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정작 체제 전복을 위해선 함성을 지르지 않는 사실에 대해 든 생각을 적은 것이다.

오직 하나의 캐치가 있는데 그것은 캐치22이고, 이것은 실재하고 임박한 위험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자신의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합리적 사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구체화한 것이다. Orr는 미쳤고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요청하자마자 그는 더 이상 미치지 않은 것이고 더 많은 미션만큼 비행해야 한다.[출처]

윈스턴의 저 독백을 읽고 생각난 다른 소설 조셉 헬러의 ‘캐치22’의 일부다. 캐치22라는 이 부조리한 조항은 소설 내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부조리는 마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양질 전화의 법칙’을 무용하게 만드는 상황 같다.

‘양(量)이 계속 변화하면 질(質)까지도 바뀐다’는 것이 양질 전화의 법칙의 원리다. 물이 섭씨 100도 이상으로 끓게 되면 기화되는 현상이 대표적인 그 법칙의 사례다. 하지만 캐치22 상황에서는 액체가 기화되는 일은 없다. 양의 변화 자체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양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의식도 그러하다. 문제는 그것이 질을 변화시키는 순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요새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역방향도 꽤 있는 것 같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바로 얼마 전 2월에 풍요부는 1984년 중에는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공식 용어로는 이를 ‘절대 서약’이라고 한다.) 했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알고 있듯 실제로는 초콜릿 배급량이 이번 주말부터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약속했던 내용을 4월 언제쯤 배급량이 감소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되었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pp58~59]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지 오웰이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풍자하여 쓴 SF소설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에 근무하며 이렇듯 역사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 이 경우처럼 그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이전의 약속을 고쳐놓는다. 이런 묘사는 실지로 스탈린이 통치 기간에 저질렀던 – 심지어 사진 속의 인물을 지워가면서까지 – 역사 왜곡을 비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극적이고 잔인한 사례지만 이렇게 과거를 고쳐서 미래를 지배하려 했던 정부는 꽤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NLL대화록을 둘러싼 우리의 정치권 논쟁도 비슷한 사례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어떤 대화를 했는가 하는 것이 대화록만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문제로 보였는데, 그 뒤 수많은 배우가 등장하면서 판을 흔들고, 대화록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슈로딩거의 대화록’이 되어 현재를 뒤흔드는 과거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1984년에서의 현실처럼 윈스턴의 간단한 업무처리를 통해 과거가 바뀌는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과정이 덜 폐쇄적이 되었다는 것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행태를 쳐다보는 우리의 시선을 덜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현폐(現弊)”가 “적폐(積弊)” 탓을 하는 부조리한 과정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 사실은 통념과 다르다며 끊임없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수구매체에 시달리면서 – 우리의 인식은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정보의 전파에 있어 판화가의 역할

승리를 거둔 전투나 왕의 대관식, 혹은 축제의 현장이나 발레 공연, 군주가 주관한 공연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판화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중략] 이제 그런 현장을 나가게 된 것은 화가가 아닌 판화가들이었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오늘날의 사진가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판화가인 자크 칼로Jacques Callot(1592~1635) 역시 브레다와 라로셸 진지에 가서 그곳의 주요 상황들을 사람들에게 판화로 알렸고, 박람회장의 풍경을 판화로 담아내는가 하면 전쟁의 공포와 집시들의 떠도는 삶도 판화로 새겼다.[책의 탄생,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지음, 강주헌/배영란 옮김, 돌배게, 2014년, pp185~186]

책의 탄생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 이 책에서 판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림이 가진 자의 것이라면 판화는 덜 가진 자의 것이었다. 그림은 한 폭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왕과 귀족이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용도로나 쓰였지만, 판화는 여러 장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다량으로 생산되는 책의 삽화로 쓰이기도 했고 독립적인 판화가 그림보다 저렴한 값에 소장용으로 팔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jpg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 by Jacques Callotartgallery.nsw.gov.au.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전쟁의 고통들 ; 작품 11. “교수형”

이렇듯 대량생산과 복제가능성은 소수만이 향유하던 재화와 서비스를 보다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책이나 판화 등 문화적 상품에 대한 시장이 보다 커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을 확산시킴으로써 인기가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판화작업실을 따로 두어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복제는 사실을 알리고, 명성을 가져다주고, 지식을 퍼트렸다.

오늘날의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크 칼로가 특정 상황을 알리기 위해 동판화에 그림을 새겨 찍어낸 후 사람들에게 그것을 퍼트렸던 그 상황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어느 날 저녁의 노을이 아름다우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순식간에 아름다운 노을사진이 퍼진다. 당시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를 전파하고 수용하는 세상이다. 때로는 너무 빠른 감도 없지 않다.

맨해튼 트랜스퍼 읽는 중

파란불. 시동이 걸리고 기어는 1단으로 들어간다. 차들은 서로 떨어져 유령 같은 시멘트 도로를 따라 기다란 리본 모양으로 흘러간다. 콘크리트 공장의 검은 창문 사이로, 현란한 광고 간판들 사이로 노랗게 우뚝 솟은 대형 천막극장처럼 밤하늘 속으로 믿을 수 없이 치솟는 도시의 광채를 마주보며.[존 더스패서스 씀, 박경희 옮김, 맨해튼 트랜스퍼, 문학동네, 2012, pp307~308]

소설가 존 더스패서스가 1925년 발표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의 일부분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은 1920년대를 살아가는 뉴욕시민들의 다양한 군상을 그리고 있다. 작가의 묘사는 인용부분에서 보는 것처럼 짧은 문구 안에서 효율적으로 그 상황의 시각적 이미를 끌어내고 그 이미지가 가지는 의미까지도 뛰어난 솜씨로 해결해낸다.

작가가 묘사하는 저 도시의 모습은 1920년대의 뉴욕이다. 가장 발달한 자본주의 도시의 모습이니 만큼 저 풍경을 현대의 다른 도시에 대입해도 그리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풍경이 그러한 만큼 존이 그리는 인간군상의 모습도 1920년대 답지 않고(?) 현대적이다. 야심만만한 여배우, 망한 주식투자자, 투쟁하는 노조원, 야비한 변호사, 가난한 웨이터 등.

책을 여러 권 같이 읽기도 하는데 이 소설을 읽는 중에 박윤석 씨가 쓴 ‘경성 모던타임스’를 읽었다. “1920 조선의 거리를 걷다”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1920년대의 서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이다. 그러다보니 내 머릿속에는 얼마간 1920년대의 뉴욕과 서울의 이미지가 동시에 머물러 있었다. 동시대에 존재했던 자본주의의 심장과 제국주의의 발뒤꿈치.

사랑하고 번민하고 목말라 하는 모습은 두 도시의 거주민 모두 비슷하다. 하지만 그 물적 조건의 차이는 그들의 삶의 조건을 구성한다. 식민지의 피착취자인 서울 시민은 이제 막 자본주의 문명의 일면만으로도 감읍할 뿐이지만 뉴욕의 시민은 이미 휘황찬란한 마천루 아래서 자본주의 본류의 쓴맛단맛을 다 맛본 상태이다. 매력적이지만 씁쓸하기도 하다.

“몇 명의 사람이 감방에 실지로 갇혔나요? 제로.”

Matt Taibbi라는 작가가 “The Divide: American Injustice in the Age of the Wealth Gap,”이란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 이 책에 대해 Democracy Now가 작가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흥미로운 부분을 약간 해석해 보았다. 이 인터뷰를 읽어보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는 것이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의 상처는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다. 그 위기의 해소 과정에서 자행된 수많은 부조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깊은 골을 만들었으며 각국 정부가 떠안은 부채는 향후에도 계속 전 세계 경제의 회복을 방해할 것이다.

AMY GOODMAN: 이건-이건 이를테면 많은 다른 사람들이 수백 년을 교도소에서 썩는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MATT TAIBBI: 오 예. 바로 맞아요. 제 말은, 다른 사례에서 찾아보죠. 제너럴리인슈어런스라는 여러 임원들이 7억5천만 달러의 주식 사기로 기소된 회사와 관련한 사례가 있어요. 그 금액은 같은 해에 미국 북동부에서 도난당한 자동차의 전체 값어치보다 많은 금액입니다. 그럼 그 해에 도난당한 차 때문에 징역을 산 모든 이들을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이 친구들은 궁극적으로 법의 세부조항을 통해 빠져 나옵니다.

그래서 다시 JP모건체이스로 돌아가면 그들은 200억 달러의 벌금을 냈습니다. 그리고 정부가 왜 그들은 교도소에 가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늘 하는 대답은 “음. 우리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아요. 이 케이스는 성사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제가 묻고 싶은 것은, 반복해서 계속 묻고 싶은 것은 이들 회사로부터 수십억 달러의 벌금을 걷을 수 있는 충분한 지렛대가 어느 정도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죠. 그러나 임원들 중 누구 하나도 감방에 하루라도 가둘 수 있는 지렛대는 충분치 않다고요? 이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논리적으로 완전히 불합리한 추론이죠. 당신이 기업에게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하게끔 할 수 있는데 아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저 그것은 가능하지 않죠.

[중략]

AMY GOODMAN: 누가 주식회사 아메리카에 대해 좀 더 터프했나요? 오바마 대통령 아니면 부시 대통령?

MATT TAIBBI: 오~ 부시죠. 명백합니다. 그리고 이건 중요한 포인트인데요. 2000년대 초로 돌아가서 모든 중요한 케이스들을 생각해보세요. : 알렐피아, 엔론, 타이코, 월드컴, 아더앤더슨. 이 모든 회사들은 부시의 법무부 하에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에 관해 흥미로운 점은 일종의 진행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80년대 후반의 저축은행 위기로 돌아가 보면 수많은 사기성 문제가 있었지만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 앞에서는 무색해집니다. 그 위기 때는 800명이 감옥에 갇혔죠. 앞으로 가보면 엔론, 알렐피아, 타이코와 같은 회계 스캔들에서는 10년이나 15년이었습니다. 저축은행의 기소처럼 열정적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그렇게 했어요. 최소한 조지 부시는 정의는 장님이라는 사실을 보통의 미국인들에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의 상징적인 중요성을 인지했어요. 그렇죠?

그 다음의 큰 위기로 돌아가 보면 몇 명의 사람이 감방에 실지로 갇혔나요? 제로. 그리고 이 위기는 저축은행 위기나 회계 위기보다 훨씬 큰 범위의 위기였습니다. 제 말은 전 세계 부(富)의 거의 40%를 쓸어버렸고 아무도 교도소에 가지 않았어요. 그러니 우리는 이제 사물을 공평하게 보이는 것과 관련하여서는 겉치레의 중요성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곳에 위치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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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읽은 중 인상적이었던 책들

올해가 아직 한 달 조금 넘게 남았지만 글 올리는 것도 뜸하고 해서 올해 읽은 책들 중에서 인상 깊었던 책 몇 권을 소개할까 한다.

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 경제 성장과 민주화, 그리고 미국

냉전 시기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그렉 브라진스키의 저서다. 저자 스스로도 좌우 어느 쪽으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할 정도로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쓰인 책이다. 저자는 미국이 자국의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하려 시도한 허다한 사례 중에 거의 유일한 성공사례로 남한을 꼽았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위정자와 시민사회, 남한의 위정자와 시민사회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에 대해 상술하고 있다. 이승만을 개차반 취급하는 것이 이색적임.

백은비사 : 은이 지배한 동서양 화폐전쟁의 역사

우리는 경제사조차 서구의 시각을 대부분 수용하는 편이다. 그러하기에 과거 역사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경제대국이었던 중국의 경제사에 대해서는 무지한 편이다. 이 책은 그 빈틈을 어느 정도 채워준다. 왜 중국이 다른 나라와 같은 형태의 제국주의 정책을 취하지 않았는지, 왜 스페인이 남미에 진출했는지, 왜 중국은 은을 사랑했는지에 대한 이치를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 화폐전쟁 유의 음모론 책보다는 조금 더 차원 높은 매력을 지닌 중국인에 의한 중국과 그 주변의 경제사.

위건 부두로 가는 길 : 조지 오웰 르포르타주

조지 오웰의 대표작인 ‘1984년’의 최초의 외국어 번역이 한국어였다고 한다. 당연히 대표적인 반공(反共)서적으로 유용하게 쓰였었는데 아는 사람은 알다시피 조지 오웰 스스로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하였다. 이런 그의 포지션을 잘 느끼게 해주는 작품이 이 르포르타주다. 노동자의 삶에 직접 스며들어가서 느낀 불편함, 건강함, 역동성 등을 솔직한 필치로 적고 있다. 그런 한편으로 기성 운동권들의 나태함, 위선, 한계 등도 적고 있다. 1984년은 아마 그러한 고민의 연장선의 작품이었으리라.

점과 선 / 모래그릇

올 한해 의미 있는 발견은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로 칭송받는 마쓰모토 세이초다. 배우 김혜수 씨가 읽기 시작했다는 기사를 읽고 무심코 빌려본 작품인데 패전 후 일본사회의 사회상이 생생하게 묘사된 이 작품들을 읽고 있노라면, 시대를 뛰어넘는 그 암울함과 긴장감이 가슴에 느껴진다. ‘점과 선’은 실종된 남편을 찾는 아내의 일화를, 모래그릇은 실력을 인정받은 작곡가의 비밀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이 맘에 들어 DVD까지 직접 구해서 봤는데 영화의 작품성도 뛰어나다. 특히 ‘모래그릇’(1974년)은 걸작.

골목 사장 분투기 : 자영업으로 본 대한민국 경제 생태계

이정우 교수에 따르면 1963~1979년 동안 국내총생산은 131조 원 발생했는데, 지가는 326조 원 상승했다고 한다. 결국 박정희는 경제성장을 위해 불로소득을 용인 내지는 독려한 것인데, 이제 그 모순이 지금의 자영업자에게 치명적인 독이 되고 있다. 아무리 벌어도 높은 임대료 때문에 버틸 수가 없는 구조적 모순 속에 뛰어든 저자가 생각하는 자영업 생태계를 담담한 필치로 풀어나간다. 그 와중에 프랜차이즈 방식 또한 자영업자를 옭아매는데 그 올가미에서 빠져 나온 한 자영업자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천재의 두 얼굴, 사이코패스

사이코패스는 한니발 렉터처럼 식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연쇄살인마에게서만 발견할 수 있는 잔인한 캐릭터일까? 저자는 사회의 곳곳에 사이코패스가 존재하는데 경영인, 외과의사, 특수부대 요원과 같은 이들에게서 이런 특성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과연 인간을 사이코패스와 “정상인”으로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별개로 하고라도 매우 흥미 있는 주장이다. 무엇이 그들을 사이코패스로 태어나게 또는 자라나게 했는가에 대한 이런저런 사례와 임상실험 내용등이 소개된다.

기나긴 이별 / 깊은 잠

올해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발견은 레이먼드 챈들러. 한때 흠뻑 반했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 매력적인 유머코드와 문체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에서 고스란히 발견할 수 있다. 보통 아무리 매력적인 스릴러라 하더라도 스토리의 파악을 위해 대충대충 읽어나가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는데, 이 작품들만큼 한 문장 한 문장 아껴가며 읽었다. 그리고 그럴 가치가 있었다. 두 작품 역시 모두 영화화되었는데 ‘깊은 잠’의 경우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둘 다 소설이 더 재밌다.

지상의 위험한 천국 : 미국을 좀먹는 기독교 파시즘의 실체

저자는 미국의 진보적 성향의 개신교도다. 일종의 인사이더인 셈인데 그런 그가 미국의 개신교 중 일부세력이 어떻게 파시즘적인 성향을 강화시켜가면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이 집단 자살극이나 벌이는 “소수의 광신도”면 “사회의 다양성” 차원에서 내버려 둘 수 있을지 몰라도 현재 미국 사회 전반을 극단주의로 심각하게 오염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티파티 등의 극단주의 세력이 미국 정치를 뒤흔드는 꼴을 보면 이는 단순한 기우가 아니다.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 : 왜 보수가 남는 장사인가?

위에 소개한 책과 함께 읽으면 미국 사회의 극우 세력의 실체가 좀 더 명확히 다듬어진다. 원제는 The Wrecking Crew로 ‘자신이 탄 배를 스스로 파괴시키는 선원들’을 일컫는 표현인데, 저자가 고발하고 있는 우파들의 행태를 보면 이 표현이 그렇게 와 닿을 수가 없다. 즉, 정치권에 진입한 우파들이 스스로를 반정부 세력으로 자처하며 정부의 긍정적 기능을 약화시키고 파괴시키는데 주력한 결과, 현재의 미국사회는 비효율적이고 사익을 위해 봉사하는 정부조직으로 변질됐다는 것이 작가의 생각이다.

박정희의 맨얼굴 : 8인의 학자 박정희 경제 신화 화장을 지우다

“독재는 했어도 경제는 살렸다”는 주장이 당연시되는, 또는 더 노골적인 주장도 서슴지 않는 시대가 되어버린 요즘 이러한 시도는 분명 유의미하다. 민주당 의원을 지낸 경제학자 유종일 씨가 주축이 되어 이정우 씨 등 진보적인 연구진이 박정희 경제신화의 허상을 고발하고 있다. 충분히 좋은 내용이 담겨 있으나 다만 기획의 제약조건 때문인지 좀 더 입체적인 모습을 조명하지 못하는 미흡함이 아쉽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러한 시도들을 아예 기획 시리즈로 해서 내면 어떨까 싶다. 레이디 가카가 분노하시겠지만.

아무래도 가을엔 고전 스릴러에 빠져 지낼 것 같다

지난주는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에 푹 빠져 있던 한주였다. 회사 도서관에서 그의 대표작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을 빌려 읽었는데, 책이 너무 낡아 너덜너덜한 탓에 정말 오랜만에 소설책을 돈 주고 구입하기도 했다. 처음 읽는 그의 저서이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로버트 알트만(Robert Altman) 감독의 동명 영화는 이미 본지라 전혀 낯설지는 않은 작품이었다.

술 한 잔 즐기기에도 피곤한 끈적끈적한 더위가 사람을 곤죽으로 만드는 LA에서 벌어진 두 건의 살인사건, 그리고 이 두 사건에 모두 엮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의 대처법과 그의 수다가 소설의 큰 줄거리다. 특유의 하드보일드 문체와 독특한 인물설정 및 서로의 관계, 무엇보다도 무뚝뚝한 척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독특한 시각으로 수다를 떨어대는 필립 말로의 스타일이 매력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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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ymondChandler TheLongGoodbye” by May be found at the following website: http://www.betweenthecovers.com/btc/reference_library/title/1000133.. Licensed under Wikipedia.

특유의 문체와 인물설정 등이 낯설지 않아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했는데 곧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것들과 매우 유사함을 깨달았다. 하루키가 의심할 바 없는 챈들러 팬임을 알 수 있는 정황이다. 말로의 캐릭터와 그가 맞수들과 벌이는 설전은 즐겨 읽던 하루키의 소설에서의 설정과 겹친다. 특히 ‘일각수의 꿈’에서의 정체모를 사나이들과 주인공의 설전은 챈들러의 작품이라 해도 될 것 같은 설정이었다.

요점은 하루키가 챈들러를 표절했다는 게 아니고 챈들러의 작품이 그 정도의 일류 소설가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이라는 점이다. 스릴러는 때때로 줄거리를 빨리 따라잡기 위해 세부묘사를 건너뛰고 읽기도 하는데, 이 책은 한줄 한줄 정성들여 읽어도 좋을 만큼 디테일에 공을 들였다. 챈들러 팬들에게는 쏘울푸드라는 ‘김릿’이라는 이름의 칵테일이나 기타 자잘한 에피소드 등이 깨알 같은 재미를 안겨준다.

한편 기억력이 메멘토인지라 앞서 언급한 로버트 알트만 감독의 영화를 다시 DVD로 주문하여 감상했다. 놀랍게도 줄거리와 필립 말로의 캐릭터는 원작과 딴 판이었다. 1953년에 발표된 원작을 20년이 지난 1973년에 만들어 현대화시키다보니 상당한 정도의 수정이 불가피할 수도 있었겠으나 챈들러의 팬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영화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었다. 수작에 넣어줄만 했다.

아무래도 가을엔 고전 스릴러에 빠져 지낼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