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올해의 즐거움 : 冊편

한해도 어느덧 일주일여를 남겨놓고 있다. 작년 이맘때에는 이스탄불에 있었기에 한국의 연말분위기를 느끼지 못했는데, 올해 역시 어떤 의미에서는 연말분위기를 느끼지 못하고 있다. 해가 갈수록 거리는 연말답지 않게 한산하다. 뭔가 나라 전체가 이러저러한 이유로 의기소침해 있는 듯하다. 한해를 되돌아보면 그럴만한 아픈 일들이 많았기에 의아하기보다는 나 역시 조금은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있는 한에는 인간은 언제나 즐거움을 추구하기 마련이고 올해의 나 역시 그러려고 노력했다. 블로그에 올해 나에게 즐거움을 안겨줬던 것들을 간단히 추려 적어볼까 하고 처음으로 내게 즐거움을 안겨준 책을 몇 권 골라봤다. 골라놓고 보니 대부분 소설이다.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혹시 인상 깊었던 책이나 추천하고 싶은 책이 있으면 댓글을 남겨주시길. 순서는 무작위다.

Lavery Maiss Auras.jpg
Lavery Maiss Auras” by John Laveryhttp://kevinalfredstrom.com/art/v/paintings/Sir+John+Lavery_Miss_Auras_the_red_book.jpg.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Commons.

문신살인사건

우선 문신에 집착하는 이들을 둘러싼 살인사건이라는 소재가 매우 독특한 분위기를 풍긴다. 다카기 아키미쓰라는 작가의 데뷔작이자 대표작이다. 일본의 패전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작가가 호구책으로 쓴 소설이 대히트를 하며 일본을 대표하는 추리소설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시대를 때를 타지 않는 걸작의 풍미가 느껴진다. 점쟁이의 예언대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는 작가의 황당한 창작의 배경에서부터 트릭을 만들어낸 과정 등이 후기로 담겨 있어 또 다른 묘미를 주고 있다.

홍루몽

중국의 사대기서 혹은 그 모든 작품을 뛰어넘는 중국 최고의 문학작품으로 평가받는 조설근의 장편소설이다. 올해 처음 읽기 시작하여 중간 정도까지 밖에 읽지 못했다. 이 소설을 연구하는 홍학(紅學)이라는 학문분야가 따로 있을 만큼 이 작품의 깊이는 헤아리기 쉽지 않다. 언뜻 귀족가문의 가정사쯤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화들의 연속이지만, 그 안에는 중국 봉건사회의 거대한 얼개가 치밀한 장면 묘사를 통해 느낄 수 있어 최고의 문학작품이라는 평가가 허풍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이라는 생소한 작가가 쓴 글을 홍기빈 씨가 번역했다. 이 책은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기원이라고 간주하는 신고전파 경제학이 또한 동구권의 새로운 사회에 대한 – 특히 시장 사회주의 –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고 있던 정황을 그 사상적 교류의 역사의 구체적인 이론 등이 비교적 자세하게 담겨져 있어 개인적으로는 경제학사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받았다. 더불어 내 고민의 한 돌파구도 마련되었다.

레베카

대프니 듀 모리에의 대표작. 팀에서 뮤지컬을 보겠다고 하는 바람에 알프레드 히치콕이 감독한 영화로 우선 접하였고, 이후 뮤지컬의 감동을 이어가기 위해 원작 소설까지 섭렵한 케이스. 레베카라는 카리스마 넘치는 한 여인의 거대한 그림자 때문에 고통 받는 어느 귀족가문 부부와 레베카를 여전히 흠모하는 하녀, 그리고 그들이 머무는 성(城)이 주인공이다. 영화, 뮤지컬, 소설이 비슷하지만 조금씩 뉘앙스가 달라지는 지점이 감상의 포인트다. 그리고 소설이 가장 충격적이고 우울하다.

차브 – 영국식 잉여유발 사건

영국의 최근 선거는 데이비드 카메론의 재집권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의 정치적 상황에 비해서는 왠지 그쪽 동네가 같은 보수여도 같은 보수가 아닐 것 같지만, 이 책을 읽다보면 그쪽도 우리 헬조선에 비견할 수 있는 헬영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의 젊은 사회주의자 오언 존스는 영국 자본주의에서 어느 정도의 사회적 지위를 획득한 “노동계급”이 어떻게 그 존재감을 빼앗기고 “차브(Chavs)”라는 모욕적인 호칭으로 능멸 당하게 되었는지를 시사적 사건을 예로 들며 설명하고 있다.

한 경제지의 과욕은 어떻게 왜곡을 촉발시키나

한국경제신문이 사고를 친 것 같다. 2015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앵거스 디턴(Angus Deaton)의 저서 <The Great Escape: Health, Wealth, and the Origins of Inequality>를 번역 출간하는 과정에서 그의 저서를 고의 또는 부주의하게 오역하였다는 의혹에 휘말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몇몇 누리꾼들의 문제제기로 본격적으로 알려졌고, 몇몇 이들이 디턴 교수 본인에게도 이메일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다. 친절한 디턴 교수는 제보자에게 친히 답장을 보내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알려줬다고 한다.

한국경제신문은 이 책의 번역(?)을 기획하는 과정에서 일찍부터 판매 전략을 ‘피케티 대 디턴’의 구도로 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책 소개의 첫 줄은 “소득 불평등 문제를 제기한 토마 피케티 교수의《21세기 자본》이 국제적으로 주목받고 있다”로 시작한다. 책 겉표지의 띠지로 예측 되는 하단부에는 “피케티 VS 디턴”이라고 못을 박았다.1 그리고 책 제목은 아예 원저의 “건강, 부, 그리고 불평등의 기원”이란 부제를 없애고 “위대한 탈출” 위에 “불평등은 어떻게 성장을 촉발시키나”를 달았다.

디턴 교수의 책 내용이 책 표지에 확연하게 보이는 기획의도에 맞는 내용을 담고 있는지는 아직 책을 읽어보지 않아서 확인하지 못했다. 설사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지라도, 학자가 그 학자적 양심으로 서술한 내용이고 이 책을 포함한 그의 이론 전반이 노벨상 등으로 평가받은 것이니 그 자체로 존중해줄만하다. 다만 우선 교보문고의 책 소개는 “불평등은 발전을 자극할 수도, 발전을 막을 수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고 적고 있어 한경이 택한 부제가 과연 타당한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러한 의심을 더 짙게 만드는 정황을 김공회 씨가 블로그에서 지적했다. 김공회 씨의 분석에 따르면 번역서는 “부(part), 장(chapter), 절(section)의 제목이 대부분 바뀌었고, 절의 경우 원문의 절 구분을 빼는 동시에 없던 절 제목을 집어넣기도 했고, 원문의 내용 중 일부를 자기들 멋대로 생략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리를 옮기기도 했으며, 어떤 경우엔 원문에 없는 것을 집어넣은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고 지적했다. 이게 사실이라면 한경이 책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번안 또는 심지어 오역을 한 것이다.

한편, 자유경제원은 지난 10월 14일 아예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과 한국에 주는 메시지”라는 이름의 세미나까지 열었다. 세미나를 소개하는 글은 강원대 윤리교육과 신중섭 교수의 말을 빌려 “중진국 함정에 걸려 꼼짝 못하고 북한과 통일을 꿈꾸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피케티가 아니라 디턴이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그가 말하는 우리에게 필요한 디턴은 아마도 “불평등이 성장을 촉발시킨다”고 주장하는 디턴을 암시하는 것이겠지만 세미나 발표 요약에도 디턴이 그러한 주장을 했다는 발표는 없었다.

개인적으로, 이 세계를 관찰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가치관이나 영감보다도 사실(fact)에 대한 엄정함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훌륭한 관점이라도 대등한 사실관계를 비트는 감정이 개입된다면 이는 곧 편파적인 – 또는 “당파적”이라고 미화되기도 하는 – 주장으로, 그리고 그 주장이 “진실(truth)”로 포장된다고 생각한다. 관점은 여럿이되 사실은 하나여야 한다. 그런데 한경은 뭔가 의도적인 목적을 가지고 한 경제학자의 저사가 담고 있는 사실을 왜곡한 것으로 보인다. 이 혐의가 사실이라면 이는 심각한 범죄다.

소설을 읽다가 샘터 주인인 척 했던 어떤 인간이 떠오르다

“아니, 내가 뭐, 버는 게 있어서? 빨래라야 그저 여름 한철이지, 그것두 이제 장마나 지면 다 쓸려내려가구…. 흥! 그야말루 오 전 십 전 빨래 값 받어가지구 해마다 세금 바치려면 쩔쩔매는 판인데….”
그리고 그는 잠깐 말을 끊었으나, 칠성아범이,
“허지만….”
하고, 또 이의를 제출하려는 기색에, 그는 즉시 말을 이어,
“더구나, 소문을 들으면, 뭐 청계천을 덮어버린단 말이 있지 않어? 위생에 나쁘다던가… 그러니, 정말 그렇게나 되구 본댐야, 인젠 삼순구식두 참 정말 어려울 지경이니…. 흥! 말두 말어.”[천변풍경, 박태원 저, 문학과지성사, 2014년, p168]

소설가 박태원이 1936년 8월부터 10월까지 『조광』에 연재한 ‘천변풍경’의 일부다. 이 소설은 청계천 주변에 사는 당시 사람들의 모습을 소묘(素描)하듯 담백하게 그린 소설이다. 인용한 부분은 그 중에서도 제17절 샘터 문답에서 샘터 주인이 칠성아범과 민주사 집 행랑아범과 나누던 대화의 일부다. 샘터 주인이란 말 그대로 청계천 중 일부를 자기 것으로 하여 빨래하는 이들로부터 사용료를 받는 이었다. 이런 권리가 어떠한 법적 권리가 있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소설에 나와 있지 않다.

Frame house along Seikei-Sen.JPG
미상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일제 침략 아래서의 서울(1910-1945)」의 “Frame house along Seikei-Sen“. 위키미디어 공용에 의해 Public domain으로 라이선스됨.

일제강점기 시절의 청계천 모습

청계천은 원래 그냥 개천으로 불렸으나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한다. 인용문을 보면 박태원이 이 소설을 연재하던 시점에는 이미 개천의 이름이 청계천으로 바뀌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에서 샘터 주인이 이야기하듯 실제로 일제 총독부는 청계천을 복개(覆蓋)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하지만 예산의 문제로 실행되지 못하고 한국전쟁 이후 1950~70년대에 걸쳐 복개공사가 이루어졌고, 이 공사는 일종의 근대화의 한 사례로 홍보되었다고 한다.

천변주민들에게는 빨래터이자 쓰레기 투기장이었고, 샘터 주인에게는 영업장이었던 그 곳이 “근대화”를 위해 덮여지고, 다시 “현대화”를 위해 덮개가 뜯어져 친환경(?) 관광 상품이 된 곳이 바로 청계천인 것이다. 청계천은 샘터 주인에게는 오 전이나 십 전 빨래 값 받아서 연명하게 해주는 도구였지만, 후에 이걸 보다 큰 이익에 이용해먹은 이가 있다. 2011년 건축가에 의해 최악의 건축물 3위에 뽑힌, 복원된 청계천으로 대통령이 되어 4대강으로 그 스케일을 확대시킨 이명박.

이중사고

당은 사회주의 운동가들이 원래 주장했던 모든 원칙들을 비방하고 배척했는데, 바로 그런 이름을 ‘사회주의’란 이름으로 행했다. [중략] 당은 또 중요 행정기관마저 뻔뻔스럽게 사실과 정반대인 뜻을 지닌 이름으로 부르게 만들었다. 평화부는 전쟁을, 진리부는 거짓말을, 애정부는 고문을, 풍요부는 굶주림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중략] 신중한 ‘이중사고’에서 나온 행위의 결과이다. 왜냐하면 권력은 이런 모순들을 조화시킴으로써만 영원히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300]

모순을 조화시키는 것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이라는 조지 오웰의 뛰어난 통찰력이 잘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중사고(Doublethink)’는 ‘중립’이나 ‘위선’과도 다른 부분이다. 과거의 역사를 지우고 당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즉 거짓말을 담당하는 부서를 진리부(Minitrue)라 갈등 없이 부를 수 있는 사고, 그것이 ‘이중사고’다. 오웰이 묘사한 오세아니아의 집권당 영사(英社, Ingsoc)는 “자유는 예속”이라는 슬로건으로 이러한 이중사고를 극대화한다.

현대정치에도 이러한 이중사고가 존재할까?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평화유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전쟁, 자연보전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자연파괴, 진보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수구적 행위 등의 부조리는 오웰 생전에도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한다. 상당부분 위선적인 것이지만 정말로 정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여기며 정의를 말살하는 이중사고의 정치세력도 엄존한다. 그리고 이들은 진정 진보를 추구하는 이들의 진로를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이중사고의 위험성이 바로 그런 점이 아닐까 싶다. 위선은 적발되면 폭로되고 본질과 다름을 깨닫게 해준다. 하지만 이중사고는 본질적 의미를 훼손하여 퇴로를 막아버린다. 테제에 대한 안티테제로써의 유용성을 위선보다 더 심대하게 파괴함으로써 사람들의 생각을 수구적으로 돌린다. 이스라엘의 평화를 명분으로 한 팔레스타인 학살을 보고 “왜 히틀러가 유태인을 학살하려 했는지 알겠다”는 진보주의자의 푸념이 이러한 퇴보 과정의 한 사례다. 이중사고는 위선보다 더 위험하다.

‘1984’가 말하는 전쟁의 본질

전쟁 행위의 본질은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것이다. 대중을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게 하는 한편, 장기적으로 그들을 지혜롭게 하는 데 사용되는 물품들을 박살내거나 하늘로 날려버리거나 바다 속 깊이 빠뜨리는 것이 전쟁이다. 전쟁에 사용되는 무기가 실제로 파괴되지 않는다고 해도 무기 공장은 소비 물자 생산에 사용될 노동력을 소모시키는 역할을 한다.[1984, 조지 오웰 씀, 정회성 옮김, 민음사, 2005년, p268]

조지 오웰의 작품 ‘1984’에서의 집권세력인 오세아니아 정부에 의해 “공공의 적”으로 낙인찍은 에마뉘엘 골드스타인1이 자신의 저서에서 서술한 전쟁의 본질이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기 위해 인간의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하는’ 전쟁이 내포한 본질은 오히려 후자라는 사고의 역발상이 흥미롭다.

전쟁은 고대로부터 다른 이의 경제적 자산을 약탈하기 위한 것이고, 오늘날에는 일국의 군수산업이 여타 국가의 전쟁을 통해 융성하고 해당 노동자나 지역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지구 전체적인 범위로 보면 골드스타인의 말이 옳을 것이다. 궁극에는 무의미하게 노동력의 산물을 파괴한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처음에 서로의 아이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끔찍한 살육을 자행하고 있지만 본질은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다. 진정 그들을 위해서라면 복수를 위해 백린탄을 터트려 양민을 학살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 특히 이스라엘은 – 광기어린 공포로 노동력을 소모하고 있을 뿐이다.

예전에 ‘군사 케인즈 주의’의 허상에 대해서도 쓴 적 있지만 군사행동은 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만 정신적으로 성숙치 못한 행동일 뿐이다. 집권세력의 권력 온존을 위해 끊임없이 조장되는 전쟁 위기론에 국민은 애국주의에 고취되어 현실의 고통을 잊거나 정당화한다. 그런 의식에 성숙함은 없다.

가리타니 고진은 ‘전쟁의 영구 포기’를 선언한 일본 헌법 9조의 평화주의 조항을 통해 일본이 진정한 어른이 됐다고 주장하였다. 점령군에 의해 강제된 것이고 모순되게도 자위대라는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런 모순은 아베라는 미숙아가 헌법을 부정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노동력의 낭비를 막기 위해 전 세계가 전쟁을 영구적으로 포기하는 날은 언제 올 것인가?

양(量)은 질(質)을 바꾸는 방향으로만 변화하는 것일까?

“그들은 의식을 가질 때까지 절대로 반란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며, 반란을 일으키게 될 때까지는 의식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1984, 조지 오웰, 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년, p100]

소설 ‘1984년’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가 당(黨)의 눈길을 피해 몰래 쓰고 있는 일기에 적은 말이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이 가게에 나온 냄비를 사기 위해서는 피터지게 싸우면서 정작 체제 전복을 위해선 함성을 지르지 않는 사실에 대해 든 생각을 적은 것이다.

오직 하나의 캐치가 있는데 그것은 캐치22이고, 이것은 실재하고 임박한 위험을 눈앞에 두었을 때의 자신의 안전에 대한 염려는 합리적 사고의 과정이라는 것을 구체화한 것이다. Orr는 미쳤고 비행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요청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요청하자마자 그는 더 이상 미치지 않은 것이고 더 많은 미션만큼 비행해야 한다.[출처]

윈스턴의 저 독백을 읽고 생각난 다른 소설 조셉 헬러의 ‘캐치22’의 일부다. 캐치22라는 이 부조리한 조항은 소설 내내 저자가 구사하는 유머의 근간을 이룬다. 이러한 부조리는 마치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양질 전화의 법칙’을 무용하게 만드는 상황 같다.

‘양(量)이 계속 변화하면 질(質)까지도 바뀐다’는 것이 양질 전화의 법칙의 원리다. 물이 섭씨 100도 이상으로 끓게 되면 기화되는 현상이 대표적인 그 법칙의 사례다. 하지만 캐치22 상황에서는 액체가 기화되는 일은 없다. 양의 변화 자체를 인정하기 않기 때문이다.

물론 현실에서는 양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의식도 그러하다. 문제는 그것이 질을 변화시키는 순방향으로 계속 나아가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이론은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요새 보면 그것도 아닌 것 같다. 역방향도 꽤 있는 것 같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

바로 얼마 전 2월에 풍요부는 1984년 중에는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지 않겠다고 약속(공식 용어로는 이를 ‘절대 서약’이라고 한다.) 했었다. 그러나 윈스턴이 알고 있듯 실제로는 초콜릿 배급량이 이번 주말부터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드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따라서 처음에 약속했던 내용을 4월 언제쯤 배급량이 감소될지도 모른다는 식으로 바꿔놓기만 하면 되었다.[1984,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민음사, pp58~59]

“민주적 사회주의자”를 자처한 조지 오웰이 스탈린이 통치하고 있던 소비에트 사회주의를 풍자하여 쓴 SF소설이다. 주인공 윈스턴 스미쓰는 진리부(Ministry of Truth)에 근무하며 이렇듯 역사에 대한 오류들을 바로(?) 잡는다. 이 경우처럼 그는 정부가 어떤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을 때 그 이전의 약속을 고쳐놓는다. 이런 묘사는 실지로 스탈린이 통치 기간에 저질렀던 – 심지어 사진 속의 인물을 지워가면서까지 – 역사 왜곡을 비판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스탈린이 극적이고 잔인한 사례지만 이렇게 과거를 고쳐서 미래를 지배하려 했던 정부는 꽤 많았다. 멀리 갈 것도 없이 NLL대화록을 둘러싼 우리의 정치권 논쟁도 비슷한 사례다. 노무현 前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과 어떤 대화를 했는가 하는 것이 대화록만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을 문제로 보였는데, 그 뒤 수많은 배우가 등장하면서 판을 흔들고, 대화록은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슈로딩거의 대화록’이 되어 현재를 뒤흔드는 과거가 되었다.

다행히 우리의 현실은 1984년에서의 현실처럼 윈스턴의 간단한 업무처리를 통해 과거가 바뀌는 정도로 폐쇄적이지는 않다. 하지만 과정이 덜 폐쇄적이 되었다는 것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행태를 쳐다보는 우리의 시선을 덜 고통스럽게 하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그 “현폐(現弊)”가 “적폐(積弊)” 탓을 하는 부조리한 과정을 육안으로 확인하며 – 사실은 통념과 다르다며 끊임없이 과거를 흔들어대는 수구매체에 시달리면서 – 우리의 인식은 한층 혼란스러워진다.

과거는 현재가 규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