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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가계의 종류별 자산 패턴이 부의 집중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재밌는 그래프가 있어 소개한다. 1913년부터 2013년까지 100년 동안의 미국의 가계가 보유한 종류별 자산을 국가소득에 대한 배수로 표현한 그래프다. 이 그래프를 보면 가계자산이 국가소득대비 어느 정도 일정한 배수를 유지하다 큰 두 번의 위기에 급격히 축소되었음을 볼 수 있다. 종류별 자산에서 가장 특징적인 부분은 연금자산의 비중이 1980년대 이후 급격히 커졌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추세는 연기금의 발달 및 인구의 노령화와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상대적으로 부동산의 비중이 크지 않은 것도 눈에 띈다. 우리나라는 이 비중이 더 크지 않을까 짐작된다.

그래프의 출처가 되는 논문에는 또 다른 두 개의 흥미로운 그래프가 있다. 바로 상위 0.01%의 부자와 하위 90% 계층의 종류별 자산과, 이 자산이 전체 가계자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표시한 그래프다. 그래프를 보면 들고 있는 자산의 종류 차이가 완연하다. 상위 0.01%는 주식과 고정자산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하위 90%는 연금과 부동산의 비중이 압도적이다. 연금의 비중은 일정한 패턴을 유지하는 반면 주식, 고정자산, 부동산의 변화는 극적이다. 부동산은 당연히 금융위기에 폭락했고 주식과 고정자산은 폭등했다. 폭등의 원인은 Fed 등의 양적완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들과 평생 저축하는 이들의 자산 보유의 구성은 다르다. 그래서 자본가들이 들고 있는 자산들에게 차별적으로 혜택이 되는 여하한의 정책은 보다 심각한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양적 완화가 그러했다. [중략] 노동자들과 자본가들은 둘 다 자본의 소유자다. 그러나 다른 종류의 자본이다.“ 저소득과 중소득의 미국인들은 주로 확정소득(fixed-income)의 자산에 의존하는 반면 고소득의 개인들은 더 높은 수익을 제시하는 주식이나 보다 위험한 자산에 투자하는 경향이 있다.[Stiglitz: Fed’s Zero-Rate Policy Boosts Inequality]

상황이 이렇다보니 이런 물고기 모양의 그래프도 그려진다.

최경환,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박 대통령은 6일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서 “국정 2년차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은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을 반드시 성공적으로 추진하는 것” [중략]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이 차질없이 추진되면 3년 후 우리 경제는 잠재성장률이 4% 수준으로 높아지고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넘어 4만달러 시대를 바라보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경제혁신 3개년 추진…공공개혁ㆍ내수활성화 박차]

주요 20개국(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 참석차 미국을 방문 중인 최 부총리는 18일(현지시간) 동행기자단과의 간담회에서 “부문별로 다르지만 평균 3% 중반 성장하면 선방한 것이다. 우리 잠재력이 그 정도인 것”이라며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기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 불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최경환 “3%대 성장하면 선방…고도성장기 오지않아”]

최경환 경제부총리가 집권 2년차가 된 마당에 뜬금없이 나머지 집권기간을 셈하여 만든 “경제혁신 3개년 계획”에 관해 새삼스레 떠올릴 계기를 주는 발언을 했다. 대통령이 1년 전에 우리의 잠재성장률을 4% 수준으로 높이겠다고 한 발언을 1년 만에 부정하고 나선 것이다.

잠재성장률과 실제 경제성장률을 다른 것이라고 항변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잠재력이 그 정도”이며 “과거와 같은 고도성장기는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발언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4% 잠재성장률은 뻥이었다는 발언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런 한편으로 최 부총리는 성장률을 제고하려면 “4대 구조개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한다. 그가 말하는 4대 부문은 금융, 노동, 공공, 교육 등이다. 이들 부문에 대한 정부의 각각의 취지나 전술을 보면 동의할 부분도 없잖아 있으나 큰 틀에서 보면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정규직 과보호”라는 정치적 수사 등으로 인한 노사정의 협상파행, 금융부문에 소위 “기술금융” 실적에 대한 일방적인 할당, 공공부채 감축 일환으로 진행한 자원외교 비리 수사급반전 등 산적한 이슈는 갈 곳을 잃은 채 현 정부의 얼마 남지 않은 정치적 자본만 소진하고 있다.

대선 당시 “경제민주화” 이슈를 꺼내들며 제법 경제 이슈에 대해 진지하게 접근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던 현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일방통행식 인사 파행, 세월호 참사에 대한 미숙한 대응, 성완종 사태 등의 정치 스캔들로 경제의 걸림돌만 되고 있다. 그게 현 정부의 “불편한 진실”이다.

얼마나 더 무덤덤해져야 하나

대체 투자를 늘리려는 연기금의 장래 계획에 관해

국민연금은 투자 섹터 다양화를 위해서도 힘을 기울일 예정이다. 내년 중 헤지펀드에 투자하기 위해 현재 적극 검토 중이며 상품(Commodity), 해외 벤처투자, 무형/지적 재산권 투자, 민관합동파트너십(PPP)을 통한 핵심 인프라투자, 농업 및 원목(Timber) 등으로 투자 섹터를 넓혀나갈 계획이다. [중략] 한국투자공사의 추 부사장은 “과거 20~30년간 주식·채권 등 전통 자산에서 꾸준한 수익이 발생했지만 앞으로는 손실을 걱정해야 할 것”이라며 “앞으로 국부펀드들의 대체 투자 비중은 자연스럽게 늘어날 전망”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전통 자산의 기대 수익률 하락에 따라 전체 운용자산(AUM) 가운데 평균 20% 수준인 전세계 국부펀드의 대체 출자 비중은 향후 꾸준히 올라갈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국민연금·KIC, 대체투자 늘린다]

요즘 연기금의 운용책임자는 고민이 많을 것이다. 인용문에서 보는 것처럼 연기금은 여태의 기간 동안 주식·채권 등 소위 “전통 자산”으로 자산을 운용하여 왔기에 운용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주식과 채권 중에서도 리스크가 적고 수익률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국고채 등 채권의 비중이 높은 와중에 수익률 제고를 위해 상장 주식을 일부 혼용하는 형식으로 자산을 운용하여왔기 때문에 운용에 큰 어려움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그러한 보수적인 운용은 한계에 부닥치고 있다. 전 세계적인 저금리 기조로 인해 채권수익률은 역사적인 저점에 머물러 있다. 주식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횡보하고 있다. 그 와중에 연금 수혜자는 빠르게 늘어나고 있고 이들에게 보장한 수익률은 현재의 운용 수익률보다 높은 수준이다. 그렇기에 전통 자산의 수익률을 뛰어넘는 새로운 자산을 편입시켜야 하는 압박에 시달리는데 이런 자산을 “대체 자산”이라 한다.

대체 자산(alternative assets)은 인용문에서 언급된 상품(Commodity), 해외 벤처투자, 무형/지적 재산권 투자, 인프라 투자 등을 망라한다. 이러한 자산이 전통 자산과 다른 점은 아직 시장의 규칙이 표준화되어 있지 않고 리스크가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간주되어 상대적으로 높은 수익률을 시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현재 연기금이나 국부 펀드는 이러한 대체 자산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전체적인 자산 수익률을 높이고자 한다.

“High Risk, High Return”이라는 잘 알려진 격언이 이 상황을 표현하는 적당한 표현일 것 같은데, 사견으로 이 표현은 그리 정확한 표현은 아니다. 높은 리스크를 부담하는 투자에 모두 높은 수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투자는 초기 단계부터 청산 단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리스크가 있고, 대체 자산은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전통 자산과 같이 표준화되어 있지 않기에 수익을 자체를 시현할 수 없는 리스크도 존재한다.

즉, 채권이나 주식은 거래소가 마련되어 있어 투자에서부터 청산까지 비교적 큰 전문성이 없이도 투자를 하고 수익을 찾아올 수 있다. 하지만 비정형적인 대체 투자는 이와는 다르다. 대규모의 개별 투자는 저마다의 투자 준칙을 따르고 처한 상황도 다르다. 운용 책임자가 전문성이 떨어지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전통 자산보다 더 낮은 수익을 감내해야 할 수도 있다. MB정권 하에 자행된 자원 투자가 바로 대표적인 사례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연기금의 수혜(예정)자로서 대체 투자를 반대해야 할 것인가? 연기금 운용의 전체적인 그림이 아닌 단순히 투자 전략의 측면으로만 본다면 대체 투자 자체를 반대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앞서 썼듯이 전통 자산으로 만으로는 연기금이 지속가능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로서는 연기금이 대체 자산에 대한 리스크를 최소화할 수 있는 전문성을 갖추기를 기대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게끔 하는 것이 상책일 것 같다.

낙수효과 이론에 관한 “종북” 교황의 통렬한 비판

어떤 사람들은 여전히 낙수효과 이론을 옹호하고 있다. 낙수효과는 자유시장 체제로 경제성장을 촉진하면 세상에 더 큰 정의와 통합을 가져오는 성공적인 효과가 발휘된다는 가설이다. 이 가설은 사실로 확인된 적이 없다. 이 가설은 경제적 지배권력의 선의와 지배적인 경제체제의 신성화 작업에 대한 막연하고 순진한 신뢰를 표현한 것이다.[‘종북좌파’급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문]

최근 세계에서 제일 유명한 “종북좌파”로 떠오르신 프란시스코 교황의 권고문 일부다. 소위 “낙수효과(trickle-down effect)”라는 경제이론(?)이 얼마나 “순진한 신뢰”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지를 지적하고 있다. 교황께서 이렇게 점잖게 하신 낙수효과 비판을 미국의 코미디언 스티븐 콜베어는 다음과 같이 더 더럽게(!) 비판하고 있다.


이전 글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드는 상념‘에서도 말했다시피 경제학자는 시람들이 자신의 경제이론을 자연의 법칙을 설명하는 것으로 여기게끔 하려는 욕심이 있는 바, 이 이론을 주장한 학자와 이를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은 기회만 있으면 이 이론을 신념에 가득찬 목소리로 떠들어댄다. 사람들이 계속 가난해지면 그들의 위선을 깨닫게 될까? 물론 그렇기도 하겠지만 아래와 같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최저임금 오르면 경기에 부담가서 안된다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게 한마디 했다. “아저씨, 재벌이나 새누리당 의원님네들이 아니라 서민들이 바쁠 때 타는게 택시거든요? 그 사람들 임금이 올라야 택시 탈 꺼 아닙니까!!” 그 후 아저씨는 운전만 했다.[출처]

거짓말을 사실로 만드는 방법 중 하나는 그것을 사실로 믿을 때까지 반복적으로 말하는 것이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읽으며 드는 상념

위기에 처한 패러다임으로부터 정상과학의 새로운 전통이 태동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에로의 이행은 옛 패러다임의 명료화나 확장에 의해서 성취되는 과정, 즉 누적적 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그러한 변화는 오히려 새로운 기반에 근거해서 그 분야를 다시 세우는 것으로서, 그 분야 패러다임의 많은 방법과 응용은 물론이고, 가장 기본적인 이론적 일반화조차도 변화시키는 재건 사업이다. 그 이행 시기에는 옛 패러다임과 새 패러다임에 의해서 풀릴 수 있는 문제들이 크게 중복될 것이나, 그렇다고 해서 결코 완전히 중복되지는 않을 것이다. [중략] 최근에 통찰력 깊은 어느 과학사학자는 패러다임 변화에 의한 과학의 재편성에서의 고전적 사례를 고찰하면서, 그런 변화는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으로서, 그것은 “똑같은 자료 더미를 이전처럼 다루되 그것들에 종전과는 다른 테두리를 부여함으로써 각각의 자료들을 새로운 관련 체계 속에 놓이도록 하는 것이 포함되는 과정이라고 묘사한 바 있다.[토머스 S. 쿤 지음, 김명자/홍성욱 옮김, 과학혁명의 구조, 2013, 까치, p175]

“패러다임의 전환”이라는 표현은 토머스 S. 쿤을 모르는 이들조차도 즐겨 쓰는 표현이다. 주로 쓰는 이들은 기존 여당을 물리치고 새로 권력자가 된 야당 지도자랄지, 회사가 위기에 빠졌거나 혹은 직원들이 너무 나태하다고 생각하는 기업 경영인이다. “처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고 주문한 어떤 유명한 재벌 총수도 당시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표현을 적시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이 표현이 풍기는 뉘앙스를 염두에 두고 했던 말일 것이다.

인용한 부분은 저자가 이 “패러다임의 전환”이 가지는 의미를 핵심적으로 서술한 부분이다. 저자의 의미 해석에 따르면 “한 동안 연구자들의 커뮤니티에 모델의 문제점과 해결책을 제시해주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과학적 성취”를 의미하는 패러다임이 전환되는 과정은 ▲ 누적적인 과정과는 거리가 멀며 ▲ 풀릴 수 있는 문제가 중복될 수는 있으나 완전히 같지는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패러다임의 전환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 쓰이는 코페르니쿠스 혁명 이전의 천문학계를 지배했던 프톨레마이오스 체계는 고대의 체계 중에서 가장 자연에 잘 들어맞는 이론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행성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 체계의 예측은 코페르니쿠스의 것만큼이나 잘 들어맞아 그 계산법은 오늘날까지도 쓰이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이 프톨레마이오스의 패러다임이 옳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지팡이의 다른 끝을 들어 올린 것이니 말이다.

스스로를 일종의 사회“과학”으로 여기고 있을 경제학계에도 물론 이러한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크게 보아 아담 스미스, 칼 맑스, 존 메이나드 케인즈, 밀턴 프리드만과 같은 경제학자들이 기존 패러다임을 파괴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세운 이들일 것이다. 다만 경제학계가 다른 과학계와 다른 점은 그러한 패러다임이 한 시대를 압도할 수는 있어도, 과학의 패러다임이 그러한 것처럼 이전의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수 있을 정도는 아니라는 점이다.

과학에서는 이론의 발전과 더불어 관찰도구의 발전도 병행한다. 연구는 제반 변수들이 제거된 순도 높은 환경에서 이루어진다. 그렇기에 기존 패러다임이 새로운 변칙현상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자명해진다면 폐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학에서 한 패러다임이 다른 패러다임을 폐기시킬 정도의 파괴력이 없는 이유는 이러한 순도 높은 환경의 조성이 어렵다는 이유일 것이다. 더 중요하게 경제는 정치적 의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인 것이다.

정치적 의지를 지니고 있는 집단, 특히 경제적 사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동기가 강한 집단이 권력을 갖게 되면 그들은 대개 그러한 사익에 복무할 자세가 되어 있는 관변학자를 동원해 과학으로 둔갑한 경제이론으로 그들의 사익추구를 정당한 공익적 행위, 심지어는 자연의 이치에 부합하는 행위로 둔갑시키고는 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자가 잘 살아야 빈자도 잘 살게 된다는, 그들 스스로도 믿지 않는 “적하이론(trickle-down theory)”일 것이다.

즉, 경제학이라는 “과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유념해야 할 점은 그들이 관찰하는 환경은 자연과학에서의 그것처럼 순도 높은 환경이 아니며, 많은 비합리적인 인간들이 – 또는 연구를 진행하는 본인조차도 – 그 환경 안에 들어가 행동한다는 점일 것이다. 자연과학은 그래도 때가 되면 자신이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잡고 있었음을 인정하겠지만, 경제학에서는 오히려 지팡이를 잡은 적도 없는 이들조차도 지팡이가 자기 것이라고 우길지도 모른다.

“재능기부” 단상

# 재능기부가 적어도 진보적이진 않은가 하는 의견도 있지만 사견으로 맑스주의적이진 않다. 맑스는 합법적인 시장에서도 노동이 착취당한다는 입장이었다. 돈이 아니라도 반대급부가 없는 기부란 이름으로 시장 외 영역에서 추가 착취가 진행되는 상황은 더 나쁘다.

# 그 반대급부가 현재의 상상력으로는 시장 내에서의 가격이 되겠지만 만약 협업이나 기부 등을 통해 협업자/기부자에게 사회가 돌려주는 어떤 효용이 있다면 – 예를 들면 기본소득? – 선순환은 이어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기부강요는 착취일 뿐.

# 아무리 이름을 바꿔도 “재능기부”는 이미 시장외의 영역에서 “자원봉사”란 이름으로 일반화되어 있다. 전적인 자율적 의사에서 비롯된 노동은 계속 자원봉사라 부르면 된다. 재능기부라고 새로 호칭하는 맥락은 아직도 의아하다.

# 어떤 이가 정확히 지적했지만 “재능기부”는 결국 자기 재능으로 받았어야 할 돈을 기부하는 “임금기부”다.

# 혹시 “재능기부”란 표현을 만든 이가, 기부자에게 “당신은 재능을 가진, 남보다 우월한 자이니 베풀 여유가 됩니다”란 선민의식을 부추길 요량이었다면 상당히 악랄한 의도랄 수 있다.

# 결국 누군가의 무임노동이 필요하면 “재능기부 해주세요”하지 말고 “무임노동 해주세요”라고 해야 한다. “재능기부”란 표현으로 가장 크게 힐링받는 이는 줘야 할 돈을 안 주고 노동만 향유하는 이다.

“소비는 무의식으로 하고 의식으로 합리화 한다”

월스트리트저널의 보도에 따르면 2007년에 1,110달러를 휴대전화 서비스에 지불했던 미국인들은 2011년 1,226달러를 지불했다. 같은 시기 이들은 식료품에서는 48달러, 의료비는 141달러, 오락비는 126달러 정도 지출을 줄였다. 이 덕분에 미국의 이동통신사들의 매출은 2007년 220억 달러에서 2011년 590억 달러로 대폭 증가하였다.

튜어스 가족의 스마트폰은 무제한 데이터 요금인데, 이는 그녀가 아무리 오래 웹을 서핑 하더라도 같은 가격을 지불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자신의 폰으로 거의 매일 “Covert Affairs”나 “Grey’s Anatomy”와 같은 드라마를 볼 수 있는 혜택을 누리고 있다.

튜어스 씨는 이제 3년 된 스마트폰들을 바꾸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동통신사인 버라이존은 이번 여름에 고객들에게 지원금으로 전화기를 업그레이드하길 원할 경우 무제한 데이터 요금을 포기해야 한다고 고지했다.

튜어스 씨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이 새로운 첨단 전화기를 제 값을 다 주고 사기 위해 1천 달러 이상을 함께 지불할 필요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그녀의 비디오 감상 버릇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지도 모르는 버라이존의 단계별 데이터 요금제를 받아들여야 할지 셈하고 있다.[Cellphones Are Eating the Family Budget]

2007년 아이폰이 처음 등장한 이후 많은 미국인들은 – 물론 많은 한국인들도 – 가족마다 한 대씩 휴대전화를 소유하게 되었다. 이 휴대전화는 단순한 전화기능을 넘어선 복합기능의 기기였기 때문에 인용문의 튜어스 씨와 같은 소비패턴이 일반화되었다. 전화기로 게임을 하고, 트위터를 하고, 영화를 보고. 아~ 그리고 전화통화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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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berry 8900 ColorIsOff” by LP-mnOwn work.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한때 큰 인기를 끌었던 블랙베리 스마트폰

유선전화기 하나를 집에 놓고 식구들이 돌아가면서 쓰던 – 그래서 가족 몰래 사귀는 연인들을 애타게 했던 – 소비 패턴은 휴대전화가 등장한 이후 급속하게 바뀌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는 더욱 다양한 소비 패턴이 일상화되었다. 애플과 같은 인기 있는 하드웨어 회사는 주기적으로 기계를 업그레이드하면서 소비욕구를 자극시킨다.

과연 휴대전화 서비스가 다른 지출을 줄이고서라도 즐길만한 쾌락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것일까? WSJ의 설문에 따르면 현재 대다수(66.8%)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그간 지출을 늘려온 것을 보면, 우리의 소비가 의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의식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며칠 전 EBS에서 방영한 자본주의에 관한 다큐멘터리에서 “소비는 무의식으로 하고 의식으로 합리화 한다”라는 멘트가 나왔다는데 어쩌면 미국인의 이러한 이중적인 태도는 그러한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이동통신사들이 너무나 요금제를 복잡하고 교묘하게 해놓아서 자신들이 뭘 얼마나 소비하는지를 모를 수도 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