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heo1905 – 자작, CC BY-SA 4.0, 링크
국민은 국가의 구성원이라는 의미가 강하여 국가 우월적 느낌을 준다. 반면에 인민은 국가라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자유와 권리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표현한다. [중략] 하지만 초안의 ‘인민’은 국회 헌법기초분과위원회 심의 과정에서 ‘국민’으로 바뀌고 말았다. [중략] 그 주된 이유는 북한 때문이었다. 당시 국회의원 윤치영은 “인민이란 말은 공산당의 용어인데 그러한 말을 쓰려고 하느냐. 그런 말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의 사상이 의심스럽다.”고 흥분했다. 하지만 인민이란 용어는 구 대한제국의 절대군주 시절에도 사용하던 용어였다. [중략] 인민이란 표현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그 좋은 말을 공산주의에 빼앗긴 셈치고 포기했다. [지금 다시 헌법, 지은이 차병직 / 윤재왕 / 윤지영, 펴낸곳 로고폴리스, 2017년, 35쪽]
어떠한 중립적인 단어가 특정한 시대적 맥락에 따라 어떻게 그 의미가 왜곡되고 변질되다가 급기야 다른 단어로 대체되는가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사례다. 국민(國民)이나 인민(人民)을 영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똑같이 ‘people’, ‘public’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다만, 국민은 ‘nation’, ‘citizen’ 등 다른 단어가 더 등장한다. 뉘앙스로 보면 결국 우리말은 인민이 people에 정확하게 대응하는 표현이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다. 반면 國자가 들어간 국민은 딱히 대응하는 영단어가 궁색한데 굳이 따지자면 nation이 어울린다. 더욱이 국민이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줄임말이라는 설도 있거니와, 궁극에 개별적인 사람을 국가라는 정체성에 묶어놓은 표현이라는 점에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한 단어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이렇게 특정단어를 다른 단어로 대체하여 본래의 의미를 비트는 대표적인 사례가 ‘근로자(勤勞者)’다. 이 단어는 ‘노동자(勞動者)’라는 단어를 대체하여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원래 있던 표현이긴 하지만, 인민의 사용금지와 비슷한 사유로 이승만과 박정희는 적극적으로 노동자를 대체하는 표현으로 근로자를 사용하고, 더불어 ‘노동절’도 ‘근로자의 날’로 바꾸고 심지어 노동절의 날짜마저 변경했다. 이외에도 ‘재벌 일가’를 ‘오너 일가’로 부르는 행태, ‘사치품’을 ‘명품(名品)’으로 바꿔 부르는 행태도 만연한데, 재벌 및 사치품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 희석을 위해 의도적으로 유포한 표현이다. 이렇게 같은 의미인 듯하면서도 다른 의도가 있는 표현이 우리 귀에 익숙해지면 어느 샌가 그 부조리한 세상에도 익숙해져 버리게 된다.
인용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렇게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많은 단어들은 우리가 주체적으로 사용하고 사고하는 것 같아도 실은 권력층과 주류에 의해 사용이 금지되거나 다른 단어로 대체되는 권력기제를 통해 우리가 사용하는 것이 허락된다. 그렇기 때문에 단어를 둘러싼 투쟁은 종종 그것이 상징하는 현실에 대한 투쟁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혐오’라는 단어가 기존에 있었지만, 이 단어를 주체적으로 ‘여성’, ‘소수자’와 결합하면서 피억압 계층에 대한 차별과 혐오라는 시대적 의미를 부여받게 되었다. ‘여성혐오’, ‘소수자혐오’의 의미를 계속 사회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그런 행위가 잘못된 것임이 공인되는 것이기에 단어의 규정은 중요한 것이다. 이준석의 폭력적 발언에 대한 단죄 역시 그러한 단어 투쟁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