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소유

그들이 열망을 부추기고 나태함을 꾸짖으면서 얻으려 하는 것

‘열망있음’ 대 ‘열망없음’의 대립구도는 대처리즘 시대에 드러난 노동계급의 균열을 이용하려는 신노동당의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신노동당 정치인들이 ‘열심히 일하는 가족’이라고 부르면서 부정하게 복지금이나 타내는 수많은 게으른 사람들의 반대편에 세워놓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방편일 것이다. ‘복지 식객’을 때리는 것이 백만장자가 아닌 저임금 노동자의 지지를 끌어내기에 더 매력적인 방법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결국 적은 임금을 받으려고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 돈으로 흥청망청 사는 부자들에게 분노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오언 존스 지음, 이세영/안병률 옮김, 차브 영국식 잉여 유발사건, 북인더갭, 2014년, p130]

대처가 집권하자마자 바로 실행에 옮긴 이념을 상징하는 표현 하나가 ‘자산소유의 민주주의(property-owing democracy)’다. 그는 이 민주주의를 “사람들이 자기 집과 주식을 소유하고, 또 사회에 이해관계를 가지는 국가”를 의미한다고 설명하였다. 즉, 그는 노동계급이 자산을 소유하여 중산계급으로 신분상승이 되면 세상이 더 좋아질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고 이를 집권기간 동안 강하게 밀어붙였다. 대표적인 정책이 바로 국유기업의 민영화(privatization)다. 그는 이 로드맵을 통해 전후 상당기간 국가의 소유로 남아있던 국유기업의 주식과 공영주택 등을 일반에게 매각하였다.

소유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켜서 민주주의를 달성하겠다는 이런 정치적 열망은 대처리즘과 영국의 범위를 뛰어넘어 세계 각국, 특히 미국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레이건 이래 국가적 정책목표가 된 것이 바로 후에 조지 W 부시가 2004년 선거 캠페인 구호로 사용하게 될 ‘소유권 사회(ownership society)’였다. 美연방예급보험공사의 의장이었던 실라 베어는 “연방정부 정책은 25년 동안 주택 소유 촉진에 초점을 맞췄으며, 이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가리지 않았다”고 증언하였다. 이러한 소유에 대한 열망을 정치적으로 부추겼다가 비극적인 종말을 맞게 된 사건이 바로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인 것이다.

소유에 대한 열망이 비극적 사태를 초래했음에도 그 열망은 문명사회에서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은 금융위기 이전 “진보”를 자임하는 미국의 민주당, 영국의 신노동당, 스페인의 사회주의노동자당 등의 세력 역시 그 열망에 편승하여 권력을 유지하여왔기에, 그래서 그 열망이 헛된 열망임을 알려줄 조언자도 없는 채로 긍정만을 강요당하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들 사이에서 좌표 없이 표류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 진보는 소유에 대한 열망을 억제시키는 대신 보수와 함께 복지 식객을 악마화시키는 것으로 정권을 유지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들을 대변해줄 세력은 미약하기에 정치적으로 부담도 없다.

또한 이런 전략은 정치공학적으로도 유용하다. 빈곤층은 부유층의 갑질에 분노하기도 하지만 이보다 그들보다 더 가난한 계층이 복지혜택을 받는 것에 더 분노하기도 한다. 그 계층은 이미 큰 시장이 되어버린 자기계발 시장에서의 복음을 통해 열망을 가지고 살다보면 언젠가 부유층과 같은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꿈을 가지고 산다. 그 와중에 자신보다 게으른 이들이 복지로 자신을 밟고 일어서는 것을 용납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공간적으로도 차하위층과 분리되기를 원한다. 이런 정서가 광범위하게 퍼지면 정치인은 “과도한 복지는 사람을 나태하게 만든다”고 거리낌 없이 말하게 된다.

이 “꼴찌 혐오(last-place aversion)”의 역설적인 결과는 몇몇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의 소득은 실제 약간 상승시키지만 그들보다 가난한 이들이 그들과 비슷하거나 더 높은 위치까지 상승할 수도 있는 정책들을 소리 높여 반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중략] “꼴찌 혐오”의 개념을 유지하기 위해 바닥으로부터 떨어져 있는 사람들은 그들보다 상위에 위치한 이들에게 돈을 줄 수도 있다. : 어떤 이들이 그들 자신보다 가난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을 확인하는 대신 “부자”에게 보상하는 것. [중략] 이 아이디어는 여론조사기관인 Pew가 미국에서 모은 설문 데이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최저임금보다 약간 더 버는 이들이 그것을 높이는 것을 가장 반대한다.[Don’t look down]

나태함을 미덕으로 삼게 되는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칼 맑스가 “오전엔 사냥, 오후엔 낚시, 초저녁엔 목축, 저녁식사 후엔 비평과 토론”을 할 수 있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그렸다고는 하지만 이건 노동해방을 통한 여유로운 삶이지 나태한 삶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서구사회에서 악마화되고 있는 ‘일하지 않는 복지’는 지양되어야 할 사회병리 현상이다. 하지만 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경제위기에 빠졌다는 사실관계도 틀린 주장을 근거로 복지로 인하여 발생할 나태함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이 영화장면이 떠오른다. 적어도 이 장면은 재밌기라도 한데 현실 속의 정치인의 그런 모습은 공포스럽다.

정치인이 이렇게 열망을 부추기고 나태함을 꾸짖어서 얻으려는 것은 무엇일까?

자신들의 나태할 권리.

‘이익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에 대한 단상

요즘 미국의 자본주의를 두고 ‘이익은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는 부자들의 사회주의’라는 표현이 아주 유행하고 있다. 특히 자신들의 돈으로 부도덕하고 무능력한 기업주들의 목숨을 연장시켜주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미국 납세자들이 이러한 주장에 심히 공감할 것으로 생각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사실 이러한 ‘부자들의 사회주의’는 자본주의 역사에 있어 예외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어떠한 사회인가. 생산수단을 집적하고 대규모화시켜서 소비할 것을 만들어내는 사회다.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것들은 만들어낸 이가 쓰기위해서가 아니다. 다른 이들에게 팔려고 만든 것들이다. 즉 상품(商品)이다.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경제/시장경제의 시스템이 본격화된 사회다. 즉 소비는 자본주의와 더불어 ‘사회화’되었다.

한편 (생산수단의) 소유와 투자는 여전히 ‘개인화’되어 있었다. 주식회사라는 신종 기업형태가 일반화되기 전까지 사기업들은 개인 또는 가족의 소유였다. 주식의 공개가 ‘사회주의’를 재촉할 것이라는 피터 드러거와 같은 이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주식, 즉 회사의 소유권은 소수 자본의 손에 집중되어 왔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와 투자 ‘개인화’는 자본주의의 본질 중 하나이다.

사기업은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주요주체다. 특히 오늘 날과 같이 국가의 공공서비스가 민간부문으로 이전되는 시점에서는 더욱 그 비중이 커져가고 있다 할 수도 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국가가 망해가는 기업을 구제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회화된 소비를 담당하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방기하면(주1) 그것은 체제의 – 자본주의에 국한된 것이 아닌 물질문명의 –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바로 이러한 소비와 소유/투자의 불일치가 납세자들을 분노하게 한다. 기업의 상품을 국민이 소비하는 한편으로 그 기업을 국민이 소유하고 있다면 – 물론 그 집단이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 불만은 한층 줄어들 것이다. 반면 국민이 소비하는 상품을 생산하는 기업의 소유주, 그리고 의사결정의 주체가 회장 일가, 론스타, 듣보잡 소버린 펀드, 또는 헤지펀드일 경우, 그리고 그들이 구제 금융으로 한숨을 돌릴 경우 왕짜증이 나는 것이다.

그러나 일개국가는 여전히 소유와 투자의 개인화는 손댈 의지가 없다. 보다 노골적으로 표현하자면 능력이 없다. 조지 부시, 헨리 폴슨, 고든 브라운, 니콜라 사르코지, 이명박 등등 국가의 수반 중 위와 같은 기업의 모순에 대해 1초 이상 고민한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이번에 미행정부가 정리신탁공사(RTC·Resolution Trust Corp.)를 신설하지만 이를 기업형태의 본질을 손대기 위한 조치라고 생각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사실 세상은 더욱 복잡해져가고 있다. 예전처럼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의 갈등, 가진 자와 못 가진 자의 갈등으로만 관찰할 수 없는 현상이 늘어가고 있다. 미행정부가 자국의 모기지 사용자 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소버린 펀드의 이해관계를 위해 프래니를 구제해준 것에 대해 누가 약자고 누가 착취자라고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 다 딴에는 국가를 위하고 서민을 위한 일들을 하고 있다.

‘이익의 사유화되고 비용은 사회화’되었다고 볼멘소리 하는 납세자들 중에서도 자신이 투자한 간접투자펀드가 그 ‘이익은 사유화’되는 과정에서 구제받은 아이러니한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결국 모순의 본질을 살펴보는 것, 그리고 그 해법을 찾는 과정은 ‘악랄한 자본가를 몰아내자’라는 좌익적 도덕론만으로는 부족한 측면이 있을 것이다.

(주1) 즉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그토록 신봉하는 자유방임도 때와 장소를 가려가면서 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내 생각엔 시장근본주의자들이 가장 위험한 반(反)자본주의자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