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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 전시회

지난번 일본에 갔을 때 운 좋게도 볼 수 있었던 전시회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広重)의 우키요에(浮世絵) 작품 전시회였다. 운이 좋았다고 말하는 이유는 당초 이 전시회가 있는 것을 모른 채 도쿄에 가서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전시회 포스터를 보고 찾아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키요에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히로시게의 명성은 어느 정도 알고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전시장을 입장하였다.

한 집요한 콜렉터의 수고로 모여진 히로시게의 작품을 전시한 이 전시회에서, 나는 그간 매체를 통해 접할 수 있었던 히로시게의 주요 작품들을 거의 빠짐없이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히로시게는 우키요에 중에서도 특히 풍경을 소재로 한 목판화1로 유명하다. 이는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당시 일본인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을 안겨주는 일종의 여행 팸플릿의 역할을 하는, 당시 표현으로 메이쇼에(名所絵) 장르라 할 수 있다.

De pruimenboomgaard te Kameido-Rijksmuseum RP-P-1956-743.jpeg
By Utagawa; Hiroshige (I) , Utagawa died 1858; Uoya Eikichi Hiroshige (I)http://www.rijksmuseum.nl/collectie/RP-P-1956-743 (handle),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33364940

히로시게가 살았던 19세기 쿄토(京都)와 에도(江戸) – 오늘날의 토쿄 – 사이의 연결 루트라 할 수 있는 도카이도(東海道)의 풍경을 담은 ‘도카이도53차(東海道五十三次)’나 에도의 풍경을 담은 ‘에도100경(名所江戸百景)’ 등이 특히 유명한 그의 작품이다. 전시회에서는 그의 작품을 유리 창 너머로 비스듬히 배열하고 그 옆에 작품의 배경이 되는 지역의 위치와 실제 사진을 같이 배치하여 관객이 그 풍취를 함께 느낄 수 있게 배려하였다.

작품의 특징은 풍경이 단아하고 등장인물이 해학적이라는 점이다. 서구미술의 원근법도 도입한 히로시게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다양한 사건들을 스냅 사진 찍듯 화폭에 담아 극적긴장감과 현장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인상주의적(!)” 특징은 고흐가 그의 그림을 필사할 만큼 유럽의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특히 많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색감으로는 두드러지게 붉은 색을 애용했다는 느낌이 드는데 보다 청명한 느낌의 호쿠사이와 비교된다.

전시 장소인 산토리 미술관은 쇼핑센터 안에 위치했음에도 2층 규모의 큰 전시장을 확보해, 많은 관객들 사이에서도 불편 없이 관람할 수 있는 미술관이었다. 미술관의 이런 조건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당일 찾은 다른 미술관에서 겪은 고초를 생각할 때 더욱 두드러진 미덕이었다. 또 다른 유명 우키요에 작가였던 구니요시2구니사다의 전시회가 열린 그 비좁은 미술관에서 나는 작품 감상을 포기한 채 그야말로 휩쓸려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3

어쨌든 히로시게의 전시회를 방문한 날, 당초 염두에 두고 있던 두 다른 우키요에 작가의 전시회까지 함께 감상하면서 내 평생 가장 많은 우키요에 작품을 육안으로 감상한 날이 되었다. 비록 목판화여서 육필화(肉筆畵)에 버금가는 생생함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뛰어난 묘사력, 이국적인 소재, 그리고 그림에 담긴 적절한 해학은 21세기의 한국인에게도 시각적 즐거움을 안겨주기에 충분한 매력요소였다.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 感想文

예술, 그 중에서도 미술이란 과연 무엇일까? 어떤 재능이 미술을 미술답게 하고 우리에게 예술적 쾌감을 안겨주는가? 이러한 질문은, 예를 들면 마르셀 뒤쌍의 작품 ‘샘(Fountain)’을 대할 때 더욱 대답하기 난감해진다. 다빈치의 ‘모나리자’나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볼 때에는 어느 정도 분명해 보이던 것이 ‘샘’과 같은 현대의 추상예술에 접어들면 흐릿해지는 것이다. ‘피카소의 달콤한 복수’는 이런 현대미술의 모호함을 고발한 책이기도 하다.

한편 언젠가부터 이러한 제도권의 위선을 비웃으며 미술계의 ‘힙합전사’가 거리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거친 거리의 청년들이 극장의 호화스러운 무대에서 우아한 춤을 추는 대신에 거리에서 골판지를 깔아놓고 힙합댄스(또는 브레이크댄스)를 추는 것처럼, 일군의 예술가들은 거리의 벽이나 광고판에 불법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전시해놓기 시작한다. 그런 예술가들 중에서 내가 알게 된 최초의 거리예술가는 아마도 장 미쉘 바스키아였던 것 같다.

바스키아의 현란한 색채감과 절제되지 않은 형태의 자유분방한 작품을 접한 제도권은 그에게 ‘검은 피카소’란 별명을 지어줬고, 이윤극대화를 위해 그의 재능을 빠른 속도로 확대재생산한다. 결국 그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작품‘공장’에서 자신의 재능을 착취당하며 괴로워하다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지만, 거리 예술가는 그 이후에도 꾸준히 명맥을 이어간다. 그리고 한 프랑스인이 이러한 거리의 삶을 아무 생각 없이 필름에 담기 시작한다.

스스로가 거리 예술가인 뱅시(Banksy)가 감독했다는 다큐멘터리 ‘선물가게를 지나야 출구(Exit Through The Gift Shop)’(2010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티에리 구에타(Thierry Guetta)가 바로 그 사람이다. 영화는 어릴 적 경험한 엄마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로 인해 모든 것을 비디오로 기록해야만 성이 풀리는 집착증을 가지게 된 티에리가 어떻게 거리 예술가의 모습을 찍게 되었고, 뱅시를 만나게 되었고, 뱅시의 권유에 따라 스스로 거리 예술가가 되어 “상업적으로” 성공하는지를 경쾌하지만 냉소적인 유머감각으로 조명하고 있다.

다큐에 따르면 원래 뱅시는 그가 기획한 미국에서의 전시회가 엄청난 성공을 거두게 되고, 또 다시 거리예술이 제도권의 상업주의에 편입되는 과정을 보면서, 거리예술의 진정한 모습을 티에리의 기록물을 통해 알리기 위해 티에리에게 기록물을 편집해 작품으로 만들 것을 제안하였다. 하지만 티에리의 재앙 수준의 작품에 넋을 잃은 뱅시가 작품의도를 완전히 바꾸고 티에리의 자료를 기초로 새로운 작품을 만들면서 이 영화가 탄생하게 된다.

즉, 뱅시의 권유에 따라 티에리 스스로가 전시회를 기획하고 큰 성공을 거두게 되는데, 이 과정이 제도권 미술계의 허영심에 찌든 현실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는 것을 간파한 뱅시가 작품을 거리예술에 대한 소개 다큐가 아닌 거리예술을 기록하고 다니던 티에리의 인생역전 드라마로 바꿔 버린다. 이를 통해 그는 다다이즘, 바스키아, 그리고 뱅시 그 자신 등, 미술계의 연속되는 사기극이 티에리에 이르러서도 반복재생되고 있음을 고발한다.

특히 티에리가 존경하는 뱅시의 권유에 따라 기획한 전시회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자신의 전 재산을 투자하여 어이없는 대규모의 전시회로 만들고, 구인모집을 통해 작품을 제작할 기술자들을 모집하고 – 마치 다큐에 언급된 데미안 허스트처럼 – , 전시장을 기존의 팝아트를 포토샵으로 변형시킨 작품으로 메워가는 과정이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재생산 도식을 그대로 답습하면서 사기극의 극적효과는 더욱 두드러진다. 예술의 자판기 수준이랄까?

예술적 재능과 관련 없는 티에리의 성공에 대해 뱅시 등 거리예술가들은 씁쓸한 미소를 짓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티에리는 여전히 천진난만한 미소를 지으며 그가 이룬 성공에 흡족해 한다. 작품구입자들은 티에리의 작품이 어떤 예술적 성취를 이루었건 간에 다음 거래에서 만족할만한 투자수익을 거두기만 하면 되니까, 어쨌든 이 예술계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채권은 시장이 폭발하기 전까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보관되거나 유통될 것이다.

Theo Jansen

예술가의 임무가 창조주의 역할을 대행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테오 얀센 Theo Jansen은 그러한 역할부여에 가장 적합한 예술가일지도 모르겠다.

1990년부터 난 새로운 형태의 생물을 창조하는데 사로잡혀왔다.
꽃가루나 씨가 아닌 노란색의 플라스틱튜브가 이 새로운 창조물의 기본재료로 쓰인다. 나는 바람 속에서 걸을 수 있는 뼈대를 만든다. 그래서 그들은 먹이를 먹을 필요가 없다.
시간이 지나면 이 뼈대들은 점점 더 폭풍과 홍수와 같은 요소에서 살아남기가 유리해질 것이고 나는 궁극적으로 이 동물들을 해변가들에 집단으로 풀어놓을 것인데,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삶을 살아갈 것이다.

Since 1990 I have been occupied creating new forms of life.
Not pollen or seeds but plastic yellow tubes are used as the basic material of this new nature. I make skeletons that are able to walk on the wind, so they don’t have to eat.
Over time, these skeletons have become increasingly better at surviving the elements such as storms and water and eventually I want to put these animals out in herds on the beaches, so they will live their own lives.[출처]

그에 관한 비디오 보기

[서경식] 나의 서양미술 순례

고호를 괴롭히고 있는 것도 역시 ‘생활’이라는 얘기다. 이러한 형의 존재가 단순히 경제적으로뿐만 아니라 좀 더 근원적인 의미에서 ‘저주스러운 짐짝’이 아닐 리 없다. 현세적인 가치관에 대한 순수한 저항을 관철하기 위해서도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은 필요하다. 이 단순한 모순이야말로, 옛날 옛적부터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를 괴롭혀왔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에게 채찍질을 해대지만, 그런 행위는 그 채찍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까지도 함께 쓰러뜨리고 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 자신뿐 아니라 타자에 대해서도,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이기를 끊임없이 요구한다. 창조자, 구도자, 혁명가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의 이해자들이 그 채찍의 아픔을 견뎌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짐짝’인 것이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2년, p57]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술과 관련된 책치고는 그 내용이 조금 무겁다. 이는 글쓴이인 서경식의 개인적인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8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그를, 정확하게는 그의 형제들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것이다. 서승, 서준식, 서경식은 재일조선인 2세였다. 이들 중 서승과 서준식은 서울대에 다니고 있던 중 북한을 방문했다는 혐의로 이른바 ‘유학생 형제 간첩단 사건’의 주모자로 투옥된다. 이후 이들 가족에게는 기나긴 고통의 나날이 지속된다.

이 당시 서승은 고문에 못 이겨 난로를 껴안고 자살을 기도해 얼굴과 온몸에 화상을 입었다. 서슬 퍼런 독재에 대한 저항의 표시를 온몸에 새긴 셈이다. 서준식은 7년형을 마치고도 전향서를 쓰지 않아 감호처분을 받아 다시 10년을 더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부모들은 말년에 자식들의 옥바라지를 하다가 자식들의 출소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아야 했다. 누이와 서경식 역시 크나큰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했다. ‘짐짝’이나 ‘채찍’이니 하는 단어는 바로 글쓴이의 이런 생생한 경험에서 나온 단어인 것이다.

사실 재일조선인에게 그 당시 조국이란 남과 북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한반도는 북조선과 남한이 아닌 조국의 남쪽과 북쪽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양쪽은 한쪽으로의 굴종을 요구했고, 결국 북한방문 그 자체로 그들은 ‘혁명가’로 분류되어 창살에 갇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끔찍한 고문, 자살시도, 사상전향서 작성 거부 등 ‘혁명가적’ 삶은 가족들에게 채찍이고 짐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이해한다는 것 때문에 그들을 탓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렇듯 ‘혁명가’에게 있어서의 ‘생활’의 문제는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이 아닌 집단적인, 때로는 구조적인 차원으로까지 확대된다. 혁명가 김문수가 왜 ‘혁명가’의 삶을 포기하고 경기도 지사라는 ‘생활인’의 삶으로 전향하였을까? 언젠가 그는 그것은 정치적 변절이 아니라 그냥 정치적 삶을 포기한 것뿐이라는 뉘앙스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진의는 알기 어려우나 뭔가 “의식주 따위 현세적인 뒷받침”이 그의 태도변화에 한 몫을 했으리라 짐작되는 대목이다. 비단 그뿐 아니라 많은 이들이 어쩌면 같은 이유로 삶의 노선을 바꿨을 것이다.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활동가나 기타 진보단체 활동가 등 이른바 아직까지 ‘변혁적 삶’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이러한 현세적 문제가 현재진행형이다. 비록 급여를 받는다고는 하나 현실적인 씀씀이에 미치지 못하는 정도의 돈으로 알고 있다. 그럼에도 소위 동지들은 여전히 암묵적으로 그런 희생을 강요하고 있다. 몇 년 전에 있었던 민주노동당의 노조설립 시도에서 보인 지도부의 반동적 행태가 바로 그러한 강요의 전형이다. 개인적으로는 어쩌면 진보정당의 득표수 증감보다 이런 현세적 문제가 더욱 당의 진로를 괴롭히는 문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각설하고, 서경식의 이 책은 미술 감상문의 형식을 취하고는 있으나 그와 그의 가족들, 나아가 조선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를, 그가 감상한 미술작품에 투영시킨 수필집에 가깝다. 고흐, 벨라스께스, 고야, 삐까소, 고이소 료오헤이 등의 그림 등 다양한 그림이 소개되고 있으나 안타깝게도 흑백 문고판이다. 다행히 2002년 칼라를 실어 개정 출판되었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찾아보면 좋을 것 같다. 출옥한 두 형의 그간의 기록도 [서승의 옥중 19년]이란 이름을 출간되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글쓴이의 통찰력 있는 서술을 한 문장 더 인용한다.

진보는 반동을 부른다. 아니, 진보와 반동은 손을 잡고 온다. 역사의 흐름은 때로 분류(奔流)가 되지만, 대개는 맥 빠지게 완만하다. 그리하여, 갔다가 되돌아섰다가 하는 그 과정의 하나하나의 장면에서, 희생은 차곡차곡 쌓이게 마련이다. 게다가, 그 희생이 가져다는 열매는 흔히 낯 두꺼운 구세력(舊勢力)에게 뺏겨버리는 것이다.[나의 서양미술 순례, 서경식 지음, 박이엽 옮김, 창작과 비평사, 1992년,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