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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자 본색을 드러내는 조선일보

국회가 탄핵의 정치적 관문이라면 헌재는 탄핵의 사법적 관문이다. 더 큰 문제는 그 과정에 걸리는 시간 요소다. 최대 7~8개월을 잡는다면 대통령 권한이 정지되는 상황이라 해도 임기는 거의 채우는 셈이 된다. 애초에 박 대통령이 ‘김병준 총리’ 카드를 내고 2선 후퇴를 제의했을 때 야권이 이를 받았으면 여기까지 오지 않아도 됐을 것을 문씨, 안철수씨 등이 ‘웬 떡이냐’면서도 더 먹으려고 반대했다가 사태를 여기까지 끌고 온 것이다. 야권의 과욕과 두뇌 부족이 빚은 결과다.[이제 ‘박근혜’는 과거다]

오늘자 김대중 칼럼 중 일부다. 그간 마치 반정부 투쟁의 선봉에 서기라도 한 것처럼 살벌한 구호를 외쳐대던 조선일보의 본색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우선 김 씨는 그간 박 대통령의 탄핵을 미적거리던 야권의 우려사항 중 하나를 지적했다. 바로 탄핵절차를 밟자면 의도한대로 간다 하더라도 대통령의 임기에 필적하는 기간이 소요된다는 점이다. 김 씨는 그런 현실을 지적하며 야권이 “과욕과 두뇌 부족” 탓에 김병준 총리 카드와 대통령의 2선 후퇴를 놓쳤다고 조롱한 것이다.1

하지만 그 상황은 조선일보가 원하는 상태일지는 몰라도 야권, 더불어 국민이 원하는 미래는 아니다. 대체 야권에 몸을 담은 적이 있던 총리와 대통령의 2선 후퇴라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2선 후퇴도 거국내각도 – 김병준 총리 체제가 거국내각도 아님은 물론이고 – 그 어느 것도 헌법적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그런 상태는 박근혜를 보수 세력의 본류가 아닌 일탈자로 취급하여 골방에 처넣고 전열을 정비하여 보수 재집권을 노리는 조선일보나 원할 극히 어정쩡한 상태다.2

이 사태의 본질은 “저잣거리 아녀자의 국정농단”이나 “최태민 교주에 정신적으로 지배당한 위정자의 일탈”이 아니라 헌정 이래 지속되어 오던 사익추구집단의 정경유착을 기반으로 하는 상호 사익추구다. 지난번 수사결과 발표에서 검찰이 헌정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을 피의자로 칭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가장 많은 기부금을 내고 직접 정유라를 지원한 삼성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언급도 없었다. 죄목도 현재까지는 뇌물죄가 아닌 강요죄다. 언급되지 않은 이가 바로 주범이다.

경제범죄가 악랄한 점은 그 범죄 구성요건을 입증하기가 어렵다는 점이다. 삼성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사안한화와의 방산 업체 거래에 있어, 최순실 씨등의 국정농단 세력에 대한 로비를 통해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했다는 심증은 있지만, 이러한 심증이 법정에서 실정법 위반으로 판결나기까지는 험난한 길이 예고되어 있다. 그리고 김대중 칼럼이 원하는 상황이나 검찰의 발표 내용은 그러한 길에 첫발조차 내딛지 못하게 하려는 심산이다. 그게 보수의 생존전략이다.

‘기승전순실’이라고 지금 교육, 의료, 재난구조, 인사, 경제운용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분야가 최순실 씨의 입김이 작용하지 않은 곳이 없어 보일 정도다. 믿기지 않기는 하지만 그 부조리의 신경망에서 최순실 씨만 걷어내고 보면, 그간 사익추구집단이 얼굴만 바꿔가며 해오던 짓이다. 김대중 씨가 원하는 김병준 총리 체제는 그렇게 얼굴만 바꾼 사익추구의 체제다. 따라서 야권은 이번 기회에 이 사회의 패러다임 전환을 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말 두뇌 부족이다.

한데 김용철 씨는 그들의 서술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00% 실존인물이 100% 실제 벌어졌던 일을 꾸미고 저지르고 있는 양 이야기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화려하다. 국내 최고의 재벌 삼성의 이건희 가족, 현 대법원장인 이용훈 판사, 돌아가신 두 대통령과 현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검찰 등 지배계급들이 총망라되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 이유는 만약 이 이야기가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면 이건 나라가 두 번 뒤집어질만한 대사건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김용철 씨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사상최대의 인격모독이자 무고이기 때문이다.[‘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민영화”와 더불어 고민해야 할 이슈

# 대통령 “철도 노조 주장을 보면 민영화가 경영을 악화시킨다면서 영국의 예를 들고 있는데 영국과는 다르다. 철도도 민간이 서비스해야하며” (출처) 대통령이 이런 말을! 앗 그러나 김대중 전 대통령의 말이로군요.

# 김대중 전 대통령도 “민영화”의 필요성을 역설했던 것 처럼 이 이슈는 1980년대 이후 소위 “진보/보수” 구도를 넘어서는 정책적 연속성을 지닌 이슈다. 이를 한쪽 진영 시각에서만 보면 그 해법은 진실과 동떨어진다. 소위 나꼼수식 시각의 근본적 오류.

# 1980년대 이후 공공서비스의 “민영화”가 본격화되면서 가장 빈번하게 쓰인 표현은 “경쟁력 강화”였다. 사람들은 민영화란 표현에 거부감을 가지면서도 경쟁력이란 표현엔 고개를 끄덕이게 됐다. 현재 철도 민영화 논쟁에서 정부가 쓰는 레토릭도 경쟁력이다.

# 정부 부문이 커지면서 관료적 행태와 비효율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정부의 역할 자체를 부정하는 이들은 이런 부작용과 정부 고유의 공공성을 “경쟁력 강화”라는 쓰레기봉투에 함께 넣어 내다 버리려 한다. “진보”는 이 둘을 세심하게 분리하는데 실패했고.

# 요컨대, “민영화”와 더불어 고민해야 할 분야는 “정부부문 내의 시장 경쟁논리의 무분별한 도입”이다. 경쟁력 강화란 명목으로 공격당하는 정당한 요구들은 정부부문 내에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공항공사의 살인적인 외주율. “세계 최고의 공항”의 그늘.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이래서 내가 박노자 씨를 좋아한다. 평소 그의 점잖은 선비풍의 글을 읽다가 이렇게 단어는 얌전하게 쓰면서도 속 내용은 신랄한 비아냥거림을 접하게 되면 평소 얌전한 사람이 노래방에서 노래빨날리는 광경을 보는 듯한 신선함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평소의 글투에도 약간 장난기가 섞여 있는 진중권 씨나 우석훈 씨의 글이나 말과는 또 다른 쾌감을 제공한다.

박노자 씨 말마따나 우리나라의 신자유주의 노선의 관철은 역설적으로 정치적 레토릭의 급진화와 경제적 노선의 보수화의 교묘한 줄타기를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 의해 가속화될 수 있었다. 막 독재의 틀을 벗어난 인민에게 몇몇 탈권위적 정치행태를 보여주면 경제적으로는 충실한 우파 노선을 걷기에 편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보수언론은 그들을 ‘좌파’라고 부르기 서슴지 않았다. 물론 그 정부들의 하부 추종자들 중에서는 ‘나름 좌파’도 섞여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박노자 씨도 그렇게 봤는지 모르지만 나도 솔직히 그들이 이전의 두 정부를 ‘좌파’정부로 몰아세운 것은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렇다는 것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이 그런 정도의 머리는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 그 친구들 하는 행동을 보면 진정으로 그 시절을 ‘상종 못할 빨갱이 놈들의 세상’이었고 지금은 ‘사람 사는 정의로운 세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째서 이들이 자신들 스스로가 노무현 정부 시절 득달같이 비판하던 미국산 쇠고기의 안정성에 대한 의문제기를 이제 시민들이나 네티즌들이 주장하자 이들을 마치 ‘돌아온 반도(叛徒)’ 대하듯이 대하고 있는지 설명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들의 좌파/우파 구분법이 진정성이 없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나폴레옹 귀양 갈 때와 파리 입성할 때의 헛소리가 이렇게 차이가 나겠는가 말이다. 머리가 어느 정도 있었다면 양쪽의 주장 간에 수위조절을 했어야 할 것이다.

여하튼 이런 꼴을 보고 있자면 이 세상이 진짜 메트릭스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제 정신도 아니고 정치이념의 ABC도 모르는 것들이 기자질을 하고 있고 하버드 수석 졸업했다고 뻥치는 과대망상증 환자가 국회에 입성하겠는가 말이다. 하긴 학살자 부시가 세상의 지배자인 세상이니 그 정도는 약과인지도 모르겠다.(주1)

박노자 씨의 ‘조중동의 치명적 실수’ 읽기

 

(주1) 부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오늘자 동아일보는 부시 측근의 부시 재임시절의 비리와 오판에 대한 폭로에 대해 “뒤늦은 정의감? 두둑한 인세?”라는 제목으로 그것들을 폄하하면서 관련사진에는 생뚱맞게 부시의 인간적인(?) 면모가 담긴 사진을 첨부하였다. 전형적인 용비어천가적인 기사였다.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까지 이렇게 사탕발림을 하는 신문이니 정말 할말 다했다

수돗물 민영화에 관한 오해 몇 가지 (2)

수돗물 민영화(주1)에 관해 시리즈로 하기로 해놓고 속으로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생각도 했다. ‘시각도 다분히 즉흥적인데다 주관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떠들어서 요즘처럼 민감한 시기에 쓸데없는 뭇매를 맞게 생겼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서.. 라기보다는 귀차니즘 때문이다. -_-;; ‘좋아하는 셜록홈즈 TV시리즈나 편하게 감상할 시간에 이런 글을 써야하나?’라는 귀차니즘. 하지만 그 귀차니즘의 질곡을 넘어 별로 기다리는 사람 없는 시리즈를 이어가도록 하겠다.

두 번째 오해 : 다국적 기업의 안방점령?

이 부분은 굉장히 민감한 사안인데 그런 만큼 미리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을 것 같아 ‘두 번째 오해’로 선정하였다. 즉 그 오해란 다국적 물기업이 수돗물을 포함한 상하수도 민영화 과정에서 우리나라 시장을 점령하여 폭리를 취할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는 하루 수돗물 값이 14만원이라는 ‘그야말로 괴담’보다는 꽤나 신빙성 있는 주장이고 꽤나 공신력 있는 단체(주2)나 매체에서도 주장하고 있는 바다.

“꽤나 신빙성 있는” 근거는 첫째로 그간의 세계 상하수도 산업의 민영화 과정에서 실제로 그러한 일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남아프리카공화국 크와줄루 나탈 대학의 몰피 은돌부 연구원은 요하네스버그의 물사유화에 따른 실태를 증언하였다. 그에 따르면 물사유화에 따른 고통은 극심하였으며 외국인 혐오 폭력사태의 원인을 제공하기까지 하였다고 할 만큼 우려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수돗물이 민영화되면 남아프리카나 기타 멕시코, 인도와 같은 제3세계에서의 그것과 같은 사태가 일어날까?(주3) 이는 사실은 참으로 난감한 질문이다. 누가 객관적 근거나 실증자료로 증명할 문제는 아니다. 일부의 우려처럼 분명히 개연성은 있다. 하지만 적어도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정부의 속내는 앞서의 나라에서 활개치고 있는 수에즈나 베올리아와 같은 다국적 물기업에게 안방을 내주겠다는 항복 선언은 아니다.

우리나라 정부는 그보다는 수자원공사에게 지자체 상수도 사업본부의 수돗물 운영권을 거의 특혜다시피하여 넘겨주어 거대기업으로 키운 후 영국의 테임즈워터나 브라질의 사베습처럼 주식매각을 통해 민영화시키겠다는 로드맵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과정에서 아무리 수에즈나 베올리아와 같은 거대기업이라 할지라도 수돗물 민영화에 있어서만큼은 이런 로드맵에 접근하기 쉽지 않은 것이 또한 우리나라의 현실이기도 하다.

그들은 사실 이미 지난 1990년대 말 국내 하수도 시장의 민영화 시장에 기진출한바 있다. 당시 김대중 정부의 국운을 건(!) 외자유치 전쟁에서 수에즈와 베올리아는 그야말로 무혈입성이 기대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때나 지금이나 외국기업에게 상당히 배타적인 나라였고 민영화 시장마저 그들의 구미에 맞게끔 융통성(?)있는 곳이 아니었기에 거의 적응을 하지 못하고 패퇴(!)하였던 전력이 있다. 내 생각에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면에서 남아프리카와 같은 상황까지 몰리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변수는 다국적 물기업이 그들의 입맛에 맞게 표준을 만들어가고 있는 ISO나 개별기업이 국가를 상대로 제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한미FTA가 될 것이다. 이것들이 효과를 발휘하면 수자원공사의 국내 수돗물 민영화의 독식은 만만치 않은 도전을 받게 될 개연성도 크다. 그럼에도 역시 우리나라에는 다른 제3세계와는 다른 완충지대는 존재한다. 적어도 그들 나라보다는 규제정책이 더 강하고 정부의 협상력도 상대적으로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하튼 그렇다면 수자원공사가 국내 상수도의 운영권을 독식하는 것은 옳다는 이야기란 말인가? 이것은 또 별개의 문제다. 이 부분은 별도로 다룰 수 있을지 잘 모르겠지만 우선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해두도록 하자. 요컨대 수에즈나 베올리아가 제3세계에서 ‘물사유화의 악의 축’으로 활개치고 다니기도 하지만 그들은 또한 사회주의 성향이 강한 프랑스에서 100년이 넘게 물장사를 하고 있는 기업이기도 하다. 걔들도 상대보고 달려든다는 이야기고 그들이 국내시장에 들어올 때에는 적어도 분위기 파악 정도는 하고 들어올 것이라는 정도만 이야기하도록 하겠다.

이 오해는 무엇이 문제인가

사실 이 주제는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해라기보다는 향후 전망에 대한 입장차이라 할 수도 있다. 물산업이 민간에게 개방될 경우 어떤 이는 외국의 다국적 물기업이 우리나라 시장을 독식하여 제3세계에서의 그들의 행태마냥 횡포를 부릴 것이라는 것이고 나는 그런 식까지는 가기 어려울 것이라는 정도다. 누구의 입장이 맞고 틀릴지는 두고봐야하겠지만 적어도 어느 입장이든 시사점은 있다.

그것은 물산업 민영화의 로드맵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또는 대안을 갖기 위해서는 다양한 예상 시나리오에 대한 다양한 대응방안을 강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제3세계의 현실에 대해서 고발하고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중요하겠으나 꼭 그것이 우리의 유일한 미래라고만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가능함 직한 시나리오에 대해서 실용적인 대안, 근본적인 대안을 세밀하게 나누어 순차별로 접근하는 것도 그리 나쁜 방법은 아닐 것이라고 본다.

수돗물 민영화에 관한 오해 몇 가지 (1)

(주1) 수돗물 민영화라는 표현으로 시리즈를 시작하였으니 만큼, 또 그리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본 시리즈에서는 ‘상하수도 민영화’, ‘물사유화’ 등 여러 표현보다는 보통은 ‘수돗물 민영화’라는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다만 또 이러저러한 사유가 있을 경우 다른 표현을 쓰도록 하겠다

(주2) 특히 물사유화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지고 반대하고 있는 공무원노조의 연구단위에서 지속적으로 이슈를 제기하고 있다

(주3) 이들 나라에서의 상수도 민영화에 따른 끔찍한 사태는 ‘블루골드’라는 책에 잘 묘사되어 있으니 일독을 권한다

좌우(左右)를 구분하는 백한번째 방법

좌익(또는 좌파)과 우익(또는 우파)을 구분하는 데에는 백가지 방법이 있다. 또는 훨씬 더 많다. 사람 사는 세상이 두부모 자르듯이 명쾌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한번 들여다보자.

천차만별 좌우구분

우선 소위 좌파정당이라 자처하는 민주노동당에서의 좌우구도다. 당내에는 소위 ‘평등파’와 ‘자주파’가 있다(또는 있다고 하고 없다는 사람도 있다). ‘평등파’는 좌파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주파’를 우파라 한다. 그런데 ‘다함께’라는 단체에 소속된 정치적 세력이 있다. 이들은 좌파들이 극좌파라 부른다. 그런데 ‘다함께’에서는 ‘자주파’를 ‘민족주의적 좌파’라고 부른다. 소위 좌파도 또 지향점이 조금씩 틀리다. 이 좌파에는 ‘유럽 취향의 사민주의자’, ‘신좌파적 감성의 사회주의자’, ‘생태사회주의자’, ‘과거 스탈린식 공산주의자’ 등 굉장히 폭넓게 아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로 폭을 넓혀보자. 북한을 ‘좌파 국가’(이런 표현 실제로는 없고 보다 정확하게는 사회주의 국가)로 보느냐 아니냐에 따라 바로 위와 같이 남한의 정치적 지형이 많이 달라진다. 그런데 여하튼 북한을 사회주의 체제로 보기도 하고 수구적인 왕조체제로 보기도 한다. 남한 정치는 또 어떠한가. 어떤 이는 참여정부를 신자유주의를 적극 수용한 우파 정부로 보고 어떤 이는 가진 자를 핍박(!)한 좌파 정부(주1)로 본다.

정리가 되었는가. 뭐 된 것 하나도 없지. -_-;

이글은 제목에도 썼지만 좌우를 구별하는 101번째 방법이다. 앞서의 100가지 방법을 정리하거나 비난할 생각은 별로 없고 필자가 앞으로 글을 쓰거나 세상을 바라볼 때 헷갈리지 않게 하기 위한 나만의 기준 정립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선 좌익(左翼, left)의 사전적 의미부터 알아보자.

사회주의적 ·급진주의적 ·공산주의적인 과격한 혁신사상 또는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

이 용어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프랑스 대혁명 당시, 상대적으로 사회변동에 온건한 지롱드당이 의회의 오른쪽 부분에, 급진적인 자코뱅당이 의회의 왼쪽 부분에 위치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한편 우익은 좌익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좌익(左翼)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사용하는데, 일반적으로 우익은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킨다

고 정의되어 있다.

우선 좌우익과 좌우파의 구분에 대해서

우선 좌우구분법에 대해 생각해보기 전에 필자는 좌우익/좌우파의 구분법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예전에 어느 신문에선가 좌우익과 좌우파의 구분법에 대한 칼럼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이후로 개인적으로 그 구분법을 따르려 노력하고 있다. 즉 좌우익은 절대적인 기준이고 좌우파는 상대적인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를테면 좌익은 사회주의 사상을 신봉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이고 좌파(左派)는 특정집단 내에서 좀 더 급진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분파를 일컫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같은 이치로 우익은 현재 시점에서 자본주의 체제를 신봉하거나 그러한 경향을 가진 인물이나 단체이고 우파(右派)는 특정집단 내에서 좀 더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인물이나 분파를 일컫는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이 구분법에 따르면 스스로를 사회주의 정당이라 자처하는 정당이 있다면 그 정당은 좌파정당이라기보다는 좌익정당이다. 한편 그 당 내에서 사회주의로의 도달방법에 대해 변혁적인 방법을 택하느냐 의회주의적인 방법을 택하느냐로 의견이 갈라지면 그것은 ‘당내 좌파’와 ‘당내 우파’가 형성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실 영어로는 좌익이나 좌파나 다 left-wing 이다. 영어에서는 이런 식의 구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필자는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구분법이 쓸모가 있다고 본다. 특히나 한반도에서 좌우의 구분이 날림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이제부터는 좌와 우의 구분에 대해서 생각해보겠다.

좌우의 구분에 대해

지금부터의 의견은 ‘龍川 미리내’님의 “대토목 공사와 한국의 우파”라는 글에 대한 상념이 많이 녹아 있다. ‘龍川 미리내’님은 이 탁월한 글에서 남한의 위정자들이 가지고 있는 천박한 정치철학으로 말미암아 좌우파 개념이 혼돈 내지는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고 이것이 오늘날 새로 탄생할 정부의 대운하 해프닝에서 절정을 달하고 있다고 보고 있다.

‘龍川 미리내’님은 그의 글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IMF 침공으로 인하여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거칠 여지가 없이 노동의 유연화(실제는 해고의 자유 확대)와 같은 가장 우파적인 정책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다.

라고 이야기하셨는데 이 글의 백미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다. 남한사회의 비극은 바로 소위 민주화세력(남한 사회를 당으로 비유한다면 이들은 분명 당내 좌파다. 다만 모두다 좌익은 아니다.)이 독재세력(이들은 당내 우파이자 우익이었다)에 대한 반발이었든지 또는 IMF 침공 탓이었든지 국가의 경제노선을 좌익 또는 좌파적이 아닌 전적으로 시장경제 우선의 우익노선을 취했다는 점이다.

어떠한 점에서 우익인가

앞서 살펴본 한 사전에서는 우익을 “보수적·민족적·국수적·반동적인 것을 가리킨다”라고 되어 있지만 개인적으로 좀 더 확장해보자면 현대 정치사와 경제사에서 우익은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노선을 지향하고(주2) 경제적으로는 ‘자유주의적인 시장경제’에 대해 맹종 내지는 최소한 친화적인 입장을 견지한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정치적 자유주의’는 우익내의 좌우파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물론 자기들 스스로도 종종 ‘정치적 자유주의’와 ‘경제적 자유주의’를 혼동하지만 말이다(특히 유시민).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햇볕정책을 펼치면서 민족의 화해를 시도하는 한편으로 노동자를 탄압하고 자유무역협정을 전폭적으로 수용하는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지극히 정상적인 우익정부이다. 그런데 이 정부가 또 한나라당과 같은 수구적이고 반동적인 정치집단이 보기에는 ‘좌파’가 되어버린 것이다. 정리하면 지난 10년간의 집권세력은 ‘한나라당이 보기에 좌파적인 우익정부’이다.

박정희는 좌익인가 좌파인가 우익인가 우파인가

‘龍川 미리내’님은 박정희의 경제정책이 분명히 “좌파적”이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는 맞는 말이다. 그의 연차별 경제개발계획, 새마을 운동과 같은 시도들은 분명히 소비에트식 사회주의에 영향 받은 바 크다. 그렇지만 핵심은 그런 한편으로 그가 또는 그의 정권이 인민권력의 가능성이나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철폐에 대해 한 번도 로드맵에 올려놓은 적이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그것들을 철저히 탄압했다는 점에서(주3) 그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의 경제전술을 베낀 변방나라의 변태적 우익’이다.(주4)

한편 이명박 당선자의 대운하 사업을 살펴보자. 이 해프닝은 언뜻 후버댐 등 대규모 토목공사를 국가적으로 추진하였던 루즈벨트의 뉴딜 사업을 연상시킨다. 또한 노동자들을 놀리느니 구덩이라도 팠다가 다시 메우는 것이 국가적으로 이익이 될 거라는 케인즈의 유머도 생각난다.(주5) 분명 그 역시도 시장이 아닌 정부가 주도하는 대규모 사업을 통한 경기부양을 유도한다는 차원에서 변종우익이다. 하지만 그의 정치경제 철학은 사실 박정희 정권보다는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그것에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더 헷갈리는 변종우익이다. 하여튼 대운하도 정부 재정이 아닌 민간투자사업으로 한다고 하니 완전히 반시장적이라고도 하기 어렵다.

사실 그의 우익적인 행태는 지금 대운하가 문제가 아니라 금산분리 철폐나 신문-방송 교차 소유 허용과 같은 실질적이고 더 파급력이 큰 시장주의적인 정책에 방점이 놓여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때로 이명박 측에서 그러한 보다 근본적인 우익적 조치에 대한 주의를 딴 데로 돌리기 위해 대운하라는 지극히 ‘허경영’스러운 해프닝을 벌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여튼 결국 좌익의 핵심적인 키워드에는 ‘권력의 형태’와 ‘생산수단의 사적소유’에 대한 관점도 집어넣어야 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나도 정리 안 되지만

어쨌든 쭉 생각나는 대로 적어보았다.

요약하자면 좌익과 우익은 그 정치경제적 노선에 따라 어느 정도는 절대적인 가치를 두어 구분할 수 있고 구분하는 편이 편하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해놓으면 사물의 본질이 어느 정도 눈에 들어온다. 소금에 아무리 검은 물을 들이고 쪼개고 쪼개도 ‘짠 맛’이 나지 않으면 소금이 아닌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좌파와 우파는 어느 정도 자유롭게 상대적인 가치를 두어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막말로 내 왼쪽에 있는 이는 좌파고 내 오른쪽에 있으면 우파다. 말섞기도 짜증나면 극좌파고 극우파다.

polanara 님의 댓글에서 화두를 얻어 글을 썼으니 polanara님이 댓글을 달아준 그 “너무나 차이나는 프랑스와 한국의 우익”에 대한 언급으로 글을 끝내겠다.

사르코지와 이명박은 분명히 우익이다. 남들이 보기에도 우익이고 스스로도 우익을 자처한다. 하지만 한쪽은 노동자에 대한 더 많은 분배를 주장했고 또 한쪽은 노동자의 자원봉사를 주장했다는 점에서 둘 다 반(反)시장적인 발언을 했다. 그런데 사르코지는 ‘좌파’적인 발언을 한 것이고 이명박은 ‘극우파’적인 발언을 한 것이다. 밀턴 프리드먼 같으면 둘을 싸잡아 욕했을 것이다. 반(反)시장주의자라고.

여하튼 그럼에도 그들은 여전히 우익일 뿐이다. 우익은 우익의 길로 간다. 권력이 인민의 손으로 넘어가지 않는 한에는 가끔씩 재밌는 ‘좌파쇼’나 ‘극우파쇼’를 보여줄 뿐이다.

(주1) 나는 개인적으로 우익언론이 현 정부를 이렇게 부르는 것이 일종의 정치적 선동이고 실제로는 그들도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이는 그런 생각은 한국의 우익을 너무 과대평가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주2) 국수적, 반동적이란 표현까지는 포함시키지 않겠다. 그럴 것 같으면 사실 소비에트 붕괴시의 공산당은 우익으로 보아야 한다.

(주3) 박정희 시대에 빈민촌에서 탁아소를 운영한 이를 빨갱이라고 몰아서 잡아간 일도 있다고 한다

(주4) 그리고 실제로 아시아, 아프리카 등 많은 제3세계 국가의 당시 독재자들은 경제노선으로 미국식의 시장자본주의 노선보다는 소련식의 계획경제 노선을 채택했고 효과를 보기도 했다

(주5) 그런 면에서 피라미드를 지은 이집트 왕조는 케인즈 주의 왕조였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