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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콥터 투하를 고려할 때라는 이코노미스트

정치인들이 중앙은행과 함께 싸움에 동참해야 할 시간이 도래했다. 가장 급진적인 정책 아이디어는 재정정책과 통화정책을 융합한 것이다. 그런 옵션 중 하나가 “헬리콥터 투하”라고 알려진, 돈을 찍어내어 공공 지출에 (또는 세금 감면) 쓰는 것이다. 양적완화와 달리 헬리콥터 투하는 은행과 금융시장을 거치지 않고 막 찍어 낸 현금을 사람들의 주머니에 바로 찔러 넣는 것이다. 이 단순함 무모함을 통해 이론적으로는 사람들은 횡재를 저축하는 대신에 사용하게 된다.[Out of ammo?]

중앙은행의 경기부양 수단들이 점점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이코노미스트가 이제 정치인이 가세해야 한다며 쓴 기사의 일부다. 이 아이디어는 일부 진영에서 주장하고 있는 기본소득을 연상시킨다. 돈을 찍어내어 바로 사람들 주머니에 찔러 넣어주는 행위, 그 행위가 소득수준 등에 따라 차별적이지 않다면 바로 그것이 기본소득일 것이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은 어쩌면 점점 더 많은 중앙은행들이 시도하고 있는 마이너스 금리와 유사한 효과를 기대하는 보다 급진적인 정치적 행위라 할 만하다. 마이너스 금리는 예금자들에게 금리 대신 오히려 비용을 요구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이 예금을 찾아 어딘 가에 돈을 쓰기를 기대하는 정책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시원찮다면 예금 대신 쓸 돈을 정부가 직접 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론적인 예상을 벗어나서 사람들이 국가의 용돈마저 비용을 물고서라도 저축을 하게 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기는 하지만 적어도 여태의 양적완화가 결과적으로 중앙은행이 돈을 특정용도에 부어넣음으로써 자금배분 왜곡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던 반면, 기본소득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무차별적인 살포라는 점에서 진일보해 보이기는 하다.

(첨언)

한편 페이스북에서 어느 분도 지적하셨다시피 시장자유주의 성향의 이코노미스트가 이런 케인지언 적인 주문을 한다는 사실이 의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인용기사의 결론부분을 보면 이코노미스트가 이런 제안을 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것은 “국유화와 같은 궤멸적인 계획을 대안으로 가지고 있는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막기 위해서다. 누군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한편 바로 그런 점에서 급진좌파 일부는 오히려 기본소득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고 주장한다. 즉, 기본소득은 “현찰자본주의의 일환으로서 복지의 시장화”일뿐 이라는 주장이다. 시장을 거치지 않은 소득이긴 하지만 다시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쓰일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수긍이 가는 의견이긴 하다. 그게 과연 “사회주의 강령”과 충돌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샌프란시스코에 등장했다는 무인(無人) 레스토랑에 대한 단상

지난주에 난 빠르게 움직이는 줄에 서서 평면 모니터에 나오는 각각 6.95달러(브리토 볼, 벤토 볼, 발사믹 비트)인 여덟 개의 퀴노아볼(quinoa bowls) 메뉴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이패드로 내 주문을 눌러 메뉴를 고른 후 지불했다. 신용카드에서 취한 내 이름이 다른 스크린에 뜨고 음식이 준비된 후 다른 화면에 번호가 떴다. 그 번호는 내 음식이 곧 나타날 칸의 번호였다. 그 칸들은 음식이 비축되면 어두워지는 투명한 LCD 스크린들 뒤에 위치해있다. 인간이 개입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손가락으로 두 번 두드리자 칸막이가 열렸고 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Restaurant of the Future? Service With an Impersonal Touch]

최근 샌프란시스코에 문을 연 퀴노아 식당인 잇사(Eatsa)라는 곳에 대한 뉴욕타임스 기사 일부다. 고대 마야인이 먹었다는 곡물인 퀴노아가 자연식을 추구하는 서구의 힙스터들에게 인기를 얻게 된 지는 꽤 된다. 그래서 새로운 퀴노아 식당이 생겼다고 해서 그리 새로울 것은 없지만, 그럼에도 이 식당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는 이곳이 무인(無人)시설로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식당의 설립자 David Friedberg는 식당이라기보다는 음식배달 시스템이라 여겨달라고 했다지만 주문된 음식을 상업공간에서 함께 먹는다면 그건 누가 뭐래도 식당이지 배달서비스는 아닐 것 같다.

자동화에 따른 식당 등 각종 서비스의 무인화는 사실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20세기 초의 공상과학적 상상력을 가지고 있던 대중문화 예술인들은 이런 개념을 큰 어려움 없이 상상하여 자신들의 작품에서 묘사하기도 했고, 폭넓게는 아니지만, 극소수 혁신적인 미래주의적 기업가에 의해 현실에서 실현되기도 한 적이 있다. 이후 실제로도 많은 식당 서비스가 자동화되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를 선도해나갔다. 대표적인 서비스 및 상품이 바로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햄버거 푸드체인이다. 일관화되고 표준화된 생산 매뉴얼에 따라 만들어지는 – 요리라기 하기에는 어색한 – 그 곳 말이다.


1900년대 초 베를린에서 있었다는 자동화 식당의 풍경. 지금의 Eatsa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다.

직접 가보지 않아 모르겠지만 잇사는 이미 상당히 무인화된 카페테리아와 같은 곳에서 그나마 인간노동의 영역으로 남아있던 조리, 주문, 계산, 청소와 같은 노동마저 자동화시킨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가능하게 된 데에는 짐작건대, 조리 과정 단순화 및 무인화, 아이패드 등 전자기기를 통한 주문 및 계산 서비스 자동화, 별도의 설비작업을 통한 청소 서비스 무인화 등의 요소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서비스는 앞으로 가격과 품질의 조화만 이룬다면 입맛이 까다로운 고객이나 사람과의 소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고객을 제외하고는 상당수 고객을 유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얼마 전 사석에서 만난 한 기자가 말해줬는데 인간과 컴퓨터가 각각 스포츠 경기 결과에 관한 기사를 작성하여 기자들에게 기사 작성주체가 누구인지 짐작하게 했는데, 상당수 기자들이 누가 작성한 기사인지를 제대로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렇듯 기계의 발전이 이런 추세로 나아간다면 장래에 제조업 프로세싱이나 식당 등 반복적인 단순 노동뿐만 아니라 스포츠 기사 작성, 금전 출납, 운전과 같은 좀 더 복잡한 노동, 나아가 비평 칼럼 작성, 의료 진찰, 법률 상담과 같은 고도의 정신적 판단을 요구한다고 여겨지는 노동에까지 기계의 작동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지 말란 법이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해방된다는 것은 나쁜 소식이 아니다. 문제는 대다수 노동자에게 노동으로부터의 해방은 곧 임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는 점이다. 잇사와 같은 개별자본의 입장에선 노동자가 직업을 잃어 소비활동을 하지 못한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광범위한 자동화와 이로 인한 소비자층의 붕괴는 아마도 정치인, 총자본, 노조 등에서나 신경 쓸 의제가 될 것이다. 이나마도 자동화에 의한 노동시장의 붕괴는 마치 기후변화처럼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옥죄어 오는 것이기에 난민, 복지, 최저임금 등 보다 급박한 현안에 의해 우선순위에서 밀려있게 될 것 같다.

대다수 노동이 자동화에 의해 대체된다면? 기본소득이 답일 듯.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안드로이드(Android)는 구글이 내놓은 모빌 기기들을 위한 운영체제다. 그렇지만 원래 이 호칭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기계, 즉 봇과 같은 기계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1863년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장난감에 관한 미국 특허장에 언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호칭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SF소설에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화 ‘Blade Runner’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있다.

소설에서 안드로이드의 역할은 인간의 노예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지구 대신 우주의 식민지로 이주해가는 인간들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 바로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는 노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자유를 찾아 지구로 탈출해온 안드로이드는 주인공 릭 데카드와 같은 사냥꾼에 의해 “은퇴”당해야 했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안드로이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안드로이드는 철저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였다.

한편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어떠할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제조업, 농업, 광업과 같은 분야에서의 자동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증기기관, 트랙터, 드릴기계 등이 바로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다. 이들 안드로이드는 물질문명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인류를 미증유의 풍요의 시대 속에서 살게 해주었다. 안드로이드는 분명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별 산업 그 자체에서는 반드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기계사용을 통한 대량생산은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을 몰락시켰다. 더 발전된 기계가 등장하면서는 대공장의 숙련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았다. 이를 통해 산업사회는 거대한 실업자 집단을 낳았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사회갈등을 증폭시켰다. 칼 맑스는 이러한 상황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맞물려 혁명적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관찰이었지만 현실은 어쨌든 아직 지구적 혁명적 상황에 몰리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지만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전통적인 산업분야 종사자도 많았을 것이다.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는 GM과 비교해 시가총액이 절반 수준에 달하지만 직원은 30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공장자동화의 영향이다. 게다가 딜러를 통한 판매가 아닌 온라인 판매 방식이라 딜러도 필요 없다. 딜러 연합은 강하게 반발하며 현대의 러다이트가 되었다.

분명 생산성의 향상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텐데 왜 일부는 저항하는가? 기득권을 뺏기기 때문이다. 비록 궁극적으로 쇠퇴할 기득권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일임은 분명하다. 사회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겠지만 특정인에게는 노동시간의 몰수이자 소득의 몰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이주자 전체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주와 같은 소수의 노예다. 기업주가 안드로이드로부터 이득을 또 다른 노예와 공유할 생각이 없는 한 인간노예는 기계노예에게 분노감을 갖게 된다.

지난 주말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IT행사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인터랙티브에서는 로봇이 노동시장을 차지할 것인가가 중요한 토론주제였다고 한다. 논의 내용 중 상당수는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 내다봤다고 한다. 칼 배스 오토데스크 CEO는 30년이 지나면 똑똑한 기계와 로봇들의 수가 인간의 수를 넘어설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예언도 내놓았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정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안드로이드 노동자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러다이즘은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 배스가 이런 갈등을 해소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소득이 아닌 경제 생산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소득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역소득세’를 실시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전자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인에 대한 소득세는 없애고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후자의 방법은 어느 정도 익숙한 기본소득이다. 소득세 폐지, 법인세 강화, 기본소득.

물론 이것은 스스로 자동화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업체의 대표의 말이다. 이런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그의 비즈니스는 더욱 탄력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의미하다. 사회전체의 자동화 이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이 특정분야 특정인의 도태로 이어진다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보조를 한다는 개념은 수긍할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선별적인 보조가 아닌 사회유지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적 조치로서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로 이어진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영화 Blade Runner의 시간적 배경은 2019년이다.

기본소득 단상

‘연금재원을 소비세로 하자’고 제안했을 때 반드시 나오는 반론이 있다. 그것은 ‘소비세에는 역진성(逆進性)이 있다’는 주장이다. [중략] 그래서 내가 제창하고 싶은 것이 ‘환급금부 소비세’다. 예를 들어 소비세가 20퍼센트가 되었을 때, 연수 200만 엔인 사람들의 소비세 부담은 (모든 수입을 소비로 돌렸다고 하면) 40만 엔이 되는데, 이 세율 인상과 동시에 ‘전 국민에게 균등하게 매년 40만 엔씩 환급한다’는 제도를 도입하는 것이다. [중략] 이 같은 ‘환급금부 소비세’의 아이디어의 기초가 되어 있는 것은 ‘베이직인컴(기초적 소득)’이라는 세상이다. [중략] 앞에서 말한 것처럼 덴마크는 기초연금은 세금방식이고, 모든 거주자에 대해서 무조건으로 지불한다. [중략] 연금은 퇴직 후에 평등하게 주는 급부인데, 이것도 퇴직 후라고 하지 않고, ‘지금 당장’, 모든 연대의 사람에게 확대하는 것이 베이직인컴 제도라고 생각하면 된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343~347]

사실 노동당 일부에서 주장하는 기본소득에 대해서 깊게 생각해보지 않았는데 소비세와 결합시켜 역진성을 없애고 기초생활도 보장하자는 아이디어는 참신하다. 물론 소비세와 결합하면 실질적으로는 기본소득이 이미 낸 세금에 대한 환급금에 불과하므로 상쇄효과 밖에 없다는 점이 눈에 띄지만 어디까지나 아이디어 차원이므로 소비세 수입을 통한 추가적인 복지혜택 등과 결합하면 재분배의 효과가 있을 것이라 여겨진다.

어쨌든 기본소득은 일반인의 ‘소득’에 대한 통념, 즉 ‘소득은 노동에 대한 반대급부다’라는 선입견에 비추어 볼 때 좀 의아한 개념이다. 존 로크가 재산형성의 기본적인 경로를 ‘노동’으로 정의한 이후 대부분의 사상가는 노동을 소득과 재산의 기본전제로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 맑스가 노동자의 노동을 부불(不拂)노동으로 정의한 이후 투여노동이 꼭 소득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종의 균열이 생긴다.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체제라면 개인의 소득은 시장에서 결정된 노동에 대한 가격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이 시장에서 검증받은 능력에 대한 대가라고 정당화할 것이다. 마이클 샌델은 그의 저서에서 이런 시각의 맹점으로 특정인이 금융구조화 능력이 뛰어나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배경에는 금융시장이 발달한 시공간적 조건이 성숙되어야 한다는, 즉 사회 없이 개인의 특출함만으로 대가를 받는 것은 아니란 점을 지적한다.

마가렛 대처는 ‘사회란 없다’고 일갈했지만 소득은 개인의 능력과 함께 사회가 그 능력에 지불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돼야 가능한 것이다. 시장 역시 사회 안에 존재하며 맑스에 따르면 시장에서의 대가 중 지불되지 않는 노동도 있다. 적정한 재분배가 일어나지 않는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는 역할 또한 사회가 맡아야 한다는 당위에 비추어 보자면 ‘기본소득’은 진지하게 고려해야할 또 하나의 공적부조의 수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