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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의 전파에 있어 판화가의 역할

승리를 거둔 전투나 왕의 대관식, 혹은 축제의 현장이나 발레 공연, 군주가 주관한 공연 등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 행사를 기념하기 위해 판화를 사용한 것은 아닐까? [중략] 이제 그런 현장을 나가게 된 것은 화가가 아닌 판화가들이었다. 판화는 여러 장을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들은 오늘날의 사진가와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도 볼 수 있다. 가령 프랑스의 판화가인 자크 칼로Jacques Callot(1592~1635) 역시 브레다와 라로셸 진지에 가서 그곳의 주요 상황들을 사람들에게 판화로 알렸고, 박람회장의 풍경을 판화로 담아내는가 하면 전쟁의 공포와 집시들의 떠도는 삶도 판화로 새겼다.[책의 탄생, 뤼시앵 페브르/앙리 장 마르탱 지음, 강주헌/배영란 옮김, 돌배게, 2014년, pp185~186]

책의 탄생과 발전에 관한 역사를 서술한 이 책에서 판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림이 가진 자의 것이라면 판화는 덜 가진 자의 것이었다. 그림은 한 폭밖에 그릴 수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는 왕과 귀족이 자신의 모습을 남기는 용도로나 쓰였지만, 판화는 여러 장 찍어낼 수 있기 때문에 다량으로 생산되는 책의 삽화로 쓰이기도 했고 독립적인 판화가 그림보다 저렴한 값에 소장용으로 팔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jpg
The Hanging by Jacques Callot” by Jacques Callotartgallery.nsw.gov.au.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전쟁의 고통들 ; 작품 11. “교수형”

이렇듯 대량생산과 복제가능성은 소수만이 향유하던 재화와 서비스를 보다 많은 이들이 향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는 또한 책이나 판화 등 문화적 상품에 대한 시장이 보다 커짐을 의미하기도 한다. 루벤스는 자신의 그림을 확산시킴으로써 인기가 높아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판화작업실을 따로 두어 자신의 작품을 복제하게 했다고 한다. 이렇듯 복제는 사실을 알리고, 명성을 가져다주고, 지식을 퍼트렸다.

오늘날의 풍경에 대해 생각해보자. 자크 칼로가 특정 상황을 알리기 위해 동판화에 그림을 새겨 찍어낸 후 사람들에게 그것을 퍼트렸던 그 상황에서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린다. 어느 날 저녁의 노을이 아름다우면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에 순식간에 아름다운 노을사진이 퍼진다. 당시 사람들은 상상을 할 수 없는 속도로 정보를 전파하고 수용하는 세상이다. 때로는 너무 빠른 감도 없지 않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 感想文

요즘 아이패드로 이런저런 명화 컬렉션 앱으로 명화를 감상하는 것이 소소한 즐거움이다. 그런 앱들 중 하나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을 담은 Louvre HD다. 그림들은 당연하게도 성화(聖畵)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그림들보다는 화가가 살던 당시의 모습을 담은 풍속화(風俗畵)가 더 마음에 든다. 그런 풍속화도 당시 화가들의 주요고객이었던 귀족이나 부자들의 초상화가 많지만 때로는 거지나 저자거리의 상인 등 삶이 고달픈 보통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기도 하다.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출처)
 

그런 그림들 중 유난히 내 눈을 잡아끈 그림이 있어 소개한다. 캥탱 마시(Quentin Matsys 1466~1529)라는, 지금의 벨기에인 플랑드르의 화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고리대금업자와 그의 아내’(1514년作)가 그 작품이다. 이 작품이 흥미로웠던 이유는 앞서 말했듯이 귀족이 아닌 고리대금업자라는 상인이라는 점이다. 당시 플랑드르는 유럽의 상업 중심지였고 고리대금업자라고 해서 꼭 부정적인 뉘앙스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를, 그것도 그가 일하는 모습을 담은 것이 이채로웠다.

그림을 상세히 들여다보기 전에 전체적인 그림을 보자. 신중하게 금화의 무게를 재고 있는 업자의 표정에는 장인정신을 느낄 정도의 숙연함이 있다. 옆의 부인도 무심한 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이 생생하다. 힘줄까지 느껴지는 손들의 묘사력도 뛰어나다. 당시의 복식문화를 알 수 있는 의상, 여러 정물들의 터치도 마음에 든다. 전체적으로는 처음 봤을 때 연상되는 그림이 있었는데, 비슷한 지역에서 활동했던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5년경 ~ 1441)의 ‘아르놀피니의 결혼식’(1434년作)이었다.


미술 역사상 가장 유명한 2인 초상화 (출처)
 

그림의 의미를 살펴보자. 후대의 ‘미술 역사가’들의 평은 이 그림이 풍자적이고 도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중론인 것 같다. 꼭 부정적인 의미는 아니라고는 했지만 중세엔 아직 고리대금업자는 도덕적으로 떳떳한 직업은 아니었다. 당시교회는 이자수취를 금지하고 있었고, 주로 차별받는 유대인이 이런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고리대금업자의 아내가 성가족(聖家族)의 그림이 담긴 종교서적은 건성으로 넘기고 남편의 일에 신경을 쓰는 듯한 자세를 취하는 것도 그런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모양새다.

한편,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전부 몇 명일까? 책 속의 마리아와 예수를 뺀다면 다섯 명이다. 그림의 오른쪽에 아내의 옆을 보면 창밖으로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또 한 명의 사람이 있는데, 그의 모습이 부부 앞에 놓인 볼록 거울 – 이 정물이 또한 ‘아르놀피니의 결혼식’을 연상시킨다 – 에 비춰지고 있다. 화가가 왜 이런 사람들을 슬쩍슬쩍 배치해두었는지, 그 상징적 의미가 무척 흥미롭다. 집밖의 두 사람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거울에 비친 터번을 두른 이는 왜 거기에 있는 것일까?

일단 집밖의 두 사람에 대해서는 업자의 작업실이 저자거리에 있었으니 집밖에 사람들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는 해석을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문제는 거울에 비친 사람이다. 어떤 역사가는 이 사람을 창문 밑에 숨은 도둑이라고 했다는데, 역사가고 뭐를 떠나 어떻게 이런 해석이 가능한지 모르겠다. 누가 봐도 방의 창가에서 책을 읽고 있는 터번을 두른 사람이다. 가장 적극적으로 해석한다 해도 이 사람은 고리대금업자의 동업자이거나 그에게 돈을 빌리러 온 사람일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산토스 마누엘 레돈도(Manuel Santos Redondo)라는 한 교수는 이 그림에 도덕적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하는 것보다는, 마시가 당시 플랑드르에서 일상적으로 행해지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를 한 것일 뿐이라고 해석하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고 제안하고 있다. 아내가 종교서적을 펴들고 있는 것도 그들의 상행위가 종교적으로 옳은 것인지를 참고하고 있는 장면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즉, 이 그림에 과도한 풍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현대사가의 편견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로 이 그림이 그려진 25년 뒤, 마리우스 반 레이메르발(Marinus Van Reymerswaele)이라는 화가가 똑같은 이름과 비슷한 구도로 또 하나의 그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들고 있다. 가장 중요한 차이라면 아내가 보고 있는 책이 종교서적이 아니라 회계장부란 점이다. 레돈도 교수는 이런 패턴의 그림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그저 막 루터 종교개혁이 막을 열던 시대상황의 경제행위에 대한 묘사일 뿐 다른 풍자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고 말하고 있다.


개인적인 기준으로는 미학적으로 마시의 그림에 한참 떨어진다 (출처)
 

어쨌든 레돈도 교수의 해석도 또 하나의 의견이다. 개인적으로는 호사가적 취미 때문에 풍자적 알레고리가 어느 정도 숨어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작품 그 자체만으로도 심미적 쾌감을 충분히 주는 걸작이라는 점에서 불만을 가질 수가 없다. 요컨대 마시의 그림에서 요모조모 뜯어보며 의미를 부여할만한 재밌는 소재는 많지만, 꼭 특정 역사가의 해석대로만 생각하지 말고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여, 당시의 시대상을 들여다보는 계기 정도로 삼는 것도 유익할 것 같다.

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큐비즘, 기계, 건축, 공산당, 서민적 레크리에이션 등등. 우리에게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큐비즘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하나인 페르낭 레제(Jules Fernand Henre Léger)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몇 가지 키워드를 나열해보았다. 우리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작품 중 하나로는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국립 퐁피두 센터가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2008년 한국에서 열린 ‘퐁피두 센터 특별전 <화가들의 천국>’이 열릴 때에 국내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바로 이 작품이 앞서 나열한 페르낭 레제의 그림에 관한 키워드가 포괄적으로 내재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Les Loisirs. Hommage à Louis David
huile sur toile de Fernand Léger – 1948-1949
Paris, musée national d’Art moderne – Centre Georges Pompidou
© ADAGP Paris 2004
© CNAC / MNAM – distr : RMN / Jean-François Tomasian

1881년 생인 페르낭 레제는 건축을 공부하다 1910년경부터 큐비즘 운동에 참가, 피카소, 로베르 들로네 등과 함께 적극적인 추진자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위대한 건축가 르코르뷔지에의 영향을 받은 그는 기계문명, 건축, 추상회화의 접점을 모색하는 그림을 즐겨 그렸다. 1919년 그린 ‘도시’라는 작품을 보면 이러한 경향을 잘 목격할 수 있다.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기계문명에 대해 낙관적이었고 이를 즐겨 표현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기계문명과 기술진보에 대해 낙관적이란 점에서 목가적인 反기계문명론자와는 다른 세계관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장이 유별날 것은 없다.

그의 작품만의 특징을 하나 들자면 유난히 원통형에 대한 묘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기계 플랜트에 들어가는 각종 배관을 염두에 두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여하튼 이런 레제의 원통형에 대한 집착은 구상화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그가 그린 사람들은 원통형의 체형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가 그린 사람들은 뚱뚱해 보인다기보다는 튼튼해 보이는 골격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유난히 뚱뚱한 사람을 즐겨 그렸던 콜롬비아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와는 또 다른 느낌을 준다.

다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로 돌아가 보자. 사실 이 작품을 맥락 없이 전시장에서 만난다면 그저 평범한 남녀가 여가를 즐기는 모습쯤으로 짐작할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기술진보로 노동자들에게 시간의 여유가 생기면서 여가를 즐기고 있는 모습을 담으려는 의도가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인 작품이다. 예의 원통형 몸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 “천국” 미국에서 유입된 자유분방한 옷차림을 하고 하이킹을 즐기고 있는데, 기술진보로 직장에서 잘리는 대신 여가를 즐기고 있다는 점에서, 그가 그린 사회는 이미 이상적인 노동자 중심의 사회가 전제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퐁피두 센터의 설명에 따르면 레제의 의도는 바로 이러한 노동자를 위한 유급휴가를 지지하라는 것이었다. 휴가는 이전까지 귀족이나 부르주아지의 전유물이었고, 이러한 분위기는 조르주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서 잘 느낄 수 있다. 프랑스 노동자는 마티뇽 협정 이전까지는 유급휴가를 즐길 수 없었다. 그런데 계급투쟁을 통한 자본가와의 타협, 기술진보로 인한 사회잉여의 증가 등이 노동자의 여가를 이야기할 수 있는 물적 토대가 이 시기부터 만들어졌다. 그래서 자연히 이 작품에는 혁명까지는 아니어도 사회개혁을 통한 노동자 세상에 대한 낙관이 담기게 되었다.

이렇듯 우리가 오늘날 당연시하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의 노동자의 유급휴가는 – 사실 잘 알다시피 그마저도 여전히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잘 지켜지지 않고 있다 –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그렇듯이 이렇게 지난한 계급간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레제와 같은 예술가들의 선전선동에 의해 기틀을 다져온 것이다. 일단 무엇이든지 가지게 된 자들은 웬만해선 기득권을 잘 양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평론가는 그의 작풍을 “사회주의 이론의 결과이되, 전투적인 맑시스트라기보다는 열정적인 휴머니스트”적인 것이라 평했는데, ‘여가’는 이러한 평가에 잘 어울리는 작품일 것이다.

클림트

클림트하면 개인적으로 안 좋은 추억이 있다. 지금으로부터 십년도 훨씬 전 그가 우리나라에서 아직 유명세를 떨치지 못하던 시절, 나는 지금의 아내와 ‘친구’사이였다. 그리고 따로 애인이 있었다. 크리스마스엔가 아내를 애인보다 먼저 오전에 만났는데 그 당시로서는 희귀한 클림트 달력을 선물로 줬다. 뒤늦게 애인에게 줄 선물이 없는 것을 깨닫고 그걸 도로 회수해서 애인에게 갖다 줬다. 그 뒤로 여태까지 아내에게 ‘선물 줬다 뺏어간 X’ 으로 낙인찍혀 있다. 아마 평생 갈 것 같다.

어쨌든 오늘 짬을 내서 동양에서 최초로 연다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의 전시회에 다녀왔다. 어렸을 적 수학여행에 가서 첨성대 실물을 보고 실망한 적이 있어 그 뒤로 유명작가의 유명작품들에 대해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작품을 보면 ‘역시 클림트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력이 대단함을 느낄 수 있었다. 특히 습작에서조차 느껴지는 놀라운 머리카락 세부묘사랄지(그림보기), 단색의 검은 옷에서의 풍부한 색감표현(그림보기) 등이 놀라웠다.

Gustav Klimt 039.jpg
Gustav Klimt 039” by Gustav Klimthttp://www.belvedere.at/en/sammlungen/belvedere/jugendstil-und-wiener-secession/gustav-klimt.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사실 ‘키스’와 같은 그의 대표작 상당수가 이번 전시회에서 제외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이라면 홍보용 걸개그림을 장식하고 있는 ‘유디트 I’(그림보기) 정도다. 그렇더라도 앞서 말한 것처럼 다른 그림들에서도 충분히 클림트의 실력과 화풍을 느낄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맘에 드는 작품은 오히려 우키요예를 연상시키는 그의 현란한 색채나 황금장식과는 거리가 먼 ‘마리 브로이니크 초상’(그림보기) 이다. 성공한 사업가의 부인이었던 이 여인은 차분히 옆을 바라보고 있지만 자신의 몸을 감싼 옷가지 중에서 오른쪽 장갑을 벗어 틀에서 벗어나 방종해지고픈 욕망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이 오히려 홍조를 띤 하얀 얼굴과 함께 어울려 노골적인 전라의 여성보다 더 에로틱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클림트는 그런 여인을 극사실주의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하게 표현해냈다.

옆 전시실에서 진행 중인 – 내일 끝난다 – 요섭 카쉬(Yousuf Karsh)의 사진전도 보았다. 명사들의 사진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담아낸 20세기 최고의 인물사진가라는데 역시 멋진 작품들이 많았다. 그의 작품들에서 주목할 것은 인물의 얼굴도 있지만 바로 손이다. 손이 어떤지, 어떤 손 모양을 하고 있는지가 그 인물의 됨됨이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사례 보기) 버트란트 러셀의 사진은 역광을 통해 아예 실루엣으로 처리했는데 그러한 과감성이 재밌었다.

사족 : 분리파의 다른 작가들 작품도 전시되어 있던데 혹시나 하고 기대했던 에곤 실레(Egon Schiele)의 작품은 웬 생뚱맞은 배를 그린 그림 한 점이 달랑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