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drien Tournachon – Image from page 321 of “The expression of the emotions in man and animals” (1872), No restrictions, Link
며칠 전 런던에서 수만 명의 분노한 영국인들이 – 대부분 백인 남성 – 거리로 뛰쳐나온 반(反)이민 시위를 보면서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The Smiths의 Panic. “인생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고 묻는 이 노래 가사처럼 요즘 드는 생각은 ‘세상이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원래 세상은 미친 곳이라고 하면 할 말이 없지만, 지금보다는 조금 덜 복잡했던 것 같다.
런던을 1997년과 2007년 두 번 갔다 왔었다. 그때 당시에 느꼈던 것은 그 10년 사이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늘었다는 사실이었다. 백인 남성이 근무하던 카페에서는 유색인종 여성이 근무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체감 적으로도 느껴졌었던 10년간의 세월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얼마나 많은 이민자가 런던에 머무르고 있을까? 그 십년 사이의 기간보다 훨씬 높은 속도로 증가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원주민은 왜 이민자에게 분노하는가? 논리는 비교적 간단하다. 사는 것은 더 팍팍해지는데 주위에는 이민자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들이 내 일자리를 차지하고, 내 딸과 사귈 것이고, 내가 아끼는 문화를 파괴하려 들것이다. 이민자들을 본국으로 돌려보내면 이러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다. 이것이 이민자들에게 분노감을 표출하고 있는 – 자본에 착취당하는 – 제1세계 원주민이 선택한 이차원적 해결 절차다.
다시 Panic을 보자. 노래 가사 중 “디스코를 불태워 버려. 축복받은 DJ를 매달아 버려. 그들이 끊임없이 틀어대는 음악은 내 삶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으니까.” 라는 가사. “축복받은 DJ”를 삶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고 환상만 부추기는 거대 미디어, 즉 문화자본으로 간주한다면 얼추 현실과 매치된다. 미디어는 날이 갈수록 우리의 삶과는 무관한 것들을 이야기하거나 현실을 왜곡하기에 바쁘다.
찰리 커크(Charlie Kirk)의 죽음을 비판한 토크쇼 진행자 지미 키멜(Jimmy Kimmel)이 방송국에서 쫓겨났다. 찰리 커크는 극우적 사고를 지닌 선동가인데 지금 일종의 이 세력의 순교자로 추앙받고 있다. 문화자본의 입장에서는 키멜이 삶에 당의정 역할을 하는 상품 가치가 높은 DJ였는데 이제 이 살벌한 분위기에 그도 숙청 대상이다.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DJ는 목매달라지는 않지만 직업을 잃는다.
우중(愚衆)과 선동가, 그리고 ‘삶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DJ’에 둘러싸인 이들은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많은 이들은 거리로 뛰쳐나가 파시스트, 전쟁광, 선동가를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한다. 브라이언 이노(Brian Eno) 등 삶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DJ들은 공연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쇠퇴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만연하고 있는 공포(panic)를 저항으로 승화시키는 것 이외에는 딱히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