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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버리지(leverage) 단상

레버리지(leverage)를 노동가치론에 연결시켜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자.

칼 마르크스는 생산에 투여되는 자본을 불변(不變)자본과 가변(可變)자본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변한다는 표현의 대상은 그 자본이 표현하고 있는 가치(value)다. 가치는 상품이 시장에서 교환되기 위한 기본전제로 그 표현법의 근본은 노동시간에서 시작하여 화폐로 표현할 수 있다.

資本 C는 두 부분 즉 生産手段에 지출되는 화폐액 c와 勞動力에 지출되는 v로 구성되어 있다. c는 不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하며, v는 可變資本으로 전환된 가치부분을 표시한다. 따라서 최초에는 C=c+v이다. 예를 들면, 투하자본 500원=410원[c]+90원[v]이다. 생산과정의 끝에 가서는 상품이 나오는데, 그 가치는 c+v+s이며, 여기서 s는 잉여가치다. 예를 들면 410원[c]+90원[v]+90[s]이다.[칼 마르크스 지음, 김수행 옮김, 자본론I[上], 비봉출판사, 1994년, p268]

c가 불변자본이라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생산수단이 생산과정에서 오로지 과거의 가치를 이전하기만 할뿐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v를 가변자본이라 하는 이유는 그가 보기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한 노동력이 필요노동시간을 초과하여 사용되기 때문이라는 의미다. 즉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창출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이 식을 통해 이윤율의 허상을 폭로한다. 즉 자본가들은 위 도식에서의 이윤율이 s/(c+v)=90/(410+90)=18% 라고 설명한다. 우리에게 익숙한 계산방식이다. 마르크스는 불변자본이 얼마가 이전되던 노동시간의 착취도와는 관계없으므로 잉여노동/필요노동=s/v=100% 의 비율이 사태를 정확히 표현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것을 그는 잉여가치율이라 정의한다.

다시 한번 거꾸로 정리를 해보자.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90원을 지불하고 그 보수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을 지출하게 한 후, 추가로 90원에 해당하는 초과노동을 지출하게 하여 100%의 잉여가치율을 실현하였다. 하지만 생산수단의 소모분을 감안하면 그 이윤율은 18%다. 회계 용어로 하자면 ‘법인세전 당기순이익’과 비슷할 것이다.

왜 마르크스는 이윤율이 아닌 잉여가치율에 주목하였는가? 그것은 그 당시 관변학자들이 위의 산식에서 18%의 이윤율을 끌어낸 후 노동시간을 축소할 경우 – 예를 들어 현재 노동시간의 18% – 그 순간 자본가는 손해를 보는 분기점에 도달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18%를 줄여도 여전히 잉여가치율은 (90X(1-18%))/90=73.8/90=82% 라는 것을 설명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난 번에 말한 숫자의 정치학이다.

얼핏 이윤율이 대폭 감소할 것 같지만 실상 이윤율 역시 73.8/500=14.8%로 줄었을 뿐이다. 그런데도 심지어 당시 관변학자들은 “노동자들은 마지막에서 둘째번 1시간에 자기의 임금을 생산하고 최후의 1시간에 순이윤을 생산”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다.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투하된 자본을 보충할 뿐”이라는 논리다.

각설하고 이제 레버리지에 대해 알아보자. 자본가는 해당 생산과정에 투입되는 비용을 모두 자기 돈으로 댈 필요 없다. 자기자본(equity)에 대한 기대수익이 타인자본(loan)에 대한 기대수익보다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필요자금 500원 중 20%만 자기자본으로 출자하고 나머지를 해당기간 동안 10%의 이자로 은행에서 빌리기로 했다.

실질적으로 그가 낸 돈은 100원이 되었다. 그리고 400원을 끌어 모아 500원을 투입하였다. 이를 통해 총매출은 590원이 되었다. 이윤은 90원이다. 이중 40원은 차입금에 대한 이자 10%로 지출되므로 남은 돈은 50원이다. 이제 자기자본에 대한 수익률, 즉 Return on Equity는 50/100=50%다. 애초 18%에서 수익률이 2.8배 증가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레버리지다.

한편 이 사업에서 노동시간을 18% 감축할 경우 레버리지를 이용한 자기자본수익률은  (73.8-40)/100=33.8/100=33.8%로 줄어든다. 이윤율의 감소율은 (18%-14.8%)/18%=17.8%인데 반해 자기자본수익률의 감소율은 (50%-33.8%)/50%=32.4%에 해당한다. 레버리지를 활용한 투자가 이윤감소에 더 민감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레버리지 추세보다 디레버리지(deleverage) 추세가 훨씬 급격한 이유다.

요컨대 경제의 생산과정에서 – 노동가치론에 따르면 – 유일한 가치창출의 원천은 노동이다.(자연자원은 c에 해당하는 것으로 가치를 이전할 뿐이다) 이윤창출은 과거의 가치들과 새로 생산되는 가치들의 결합이며, 잉여가치율은 생산과정에서의 가치증분을 설명한다. 이윤율은 과거가치를 분모에 더해 잉여가치율, 즉 착취율은 희석한다. 자본가가 레버리지를 활용할 경우 이윤율을 증가시킬 수 있고, 이때 이자는 창출한 잉여가치를 전유(appropriate)하는 행위다.

‘시골의사’님의 글을 읽고

오랜만에 유명한 경제 논객이신 시골의사님이 블로그에 글을 올리셨다. 반가운 마음에 읽었다. 제목이 “하반기 경기회복 가능할까…? (1)” 인 것을 보니 제법 야심에 찬 기획시리즈로 보여 기대된다. 다만 옥에 티 하나만 지적하자면

우리가 일상적인 농,공업을 통해 잉여가치를 창출 할 때 이것은 과거에는 지주에게, 현재는 자본가에게 집중된다. 막시스트들은 바로 이점을 가리켜 ‘착취’라고 규정하고 자본주의를 죄악시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런 주장은 노동자가 곧 소비자인, 다시말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노동자의 대부분이 곧 부르조아인(얼마간의 잉여를 가진) 자유시장경제 질서를 놓고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막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기에는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중략)
저개발국으로 이전한 기업이 수익이 증가하면 그 수익의 증가가 고스란히 한 국가 사회적 자산의 증가로 잡히기 때문이다. 자국기업의 글로벌 진출이 곧 국가의 발전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부의 분배구조다. 이 경우 전자와 달리 이익은 기업의 주주들에게 돌아간다. 즉 총량은 같지만 배분은 점점 기울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는 과정에서 부풀려진 부는 사실상 총량적 부의 증가라기 보다는 생산활동에서 초래된 잉여가치가 한곳으로 쏠리면서 부풀려지는 현상에 불과하다.[원문 읽기]

전체 본문 중에서 위 두 문단의 상호모순이다. 첫 번째 문단은 글의 도입부에 두 번째 문단은 글의 결론부에 위치해있다. 두 문단은 모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의 부의 분배구조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문단은 생산과정에서의 잉여가치에 따른 노동착취에 대한 설명인데, 시골의사님은 (주식회사, 펀드 등을 통해 : foog주) “착취”받는 노동자 대부분이 스스로 부르주아이기 때문에 (즉 설사 잉여가치가 있어도 다시 주주배당으로 분배되어 분배의 평등이 어느 정도 달성될 것이기 때문에 : foog주) “막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고 계신 것 같다. 아니면 잉여가치가 원천무효라는 주장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적어도 부가 (소수의) “자본가에게 집중”된다는 주장은 아니다.

그런데 두 번째 문단에서는 이와는 다소 다른 주장을 하신다. 1,2차 산업에서 산출되는 기업수익의 증가가 국가 사회적 자산의 증가로 이어지기에 바람직하지만 이익이 기업의 주주에게 돌아가기에 “총량은 같지만 배분은 점점 기울”어지고 “생산활동에서 초래된 잉여가치가 한곳으로 쏠리”는 현상이 일어난다고 말씀하신다. 첫 번째 문단에서의 “노동자의 대부분이 곧 부르조아”라는 설명이 그들이 노동자이자 동시에 주주이므로, 마르크스의 착취론은 설득력이 없다는 설명이라 이해한 내 생각이 맞는다면 두 문단은 서로 모순된다.
 
실제로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주식회사를 통한 주식의 사회적 분산, 펀드의 발전을 통한 노동계급의 투자사업 참여 활성화 등은 전통적인 계급론의 이분법적인 틀에서의 노자(勞資) 구도를 많이 희석시켜온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그 활동이 결과론적으로 부의 재분배를 촉진시켜 여하한의 자본주의의 모순을 완화시켜왔는가가 관건인데, 적어도 현 시점에서 그 대답은 그 주원인이 금융자본주의의 융성이든 아니면 주주배당의 불공평성이든 아니면 잉여가치의 착취든 ‘아니다’쪽으로 기우는 것 같다.

내 글이 괜한 딴죽이랄 수도 있겠으나 앞서 지적했듯이 시골의사님도 그 결과부분에서는 분배의 불평등을 지적하고 있고 향후 진행될 이야기도 내 짐작에 현재의 자본주의가 왜 이러한 결과를 초래하였는가, 그리고 그 전망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바, 지적할 것은 지적하여야겠기에 토 다는 것이다. 어쨌든 적어도 지금 시점은 마르크스가 무덤 속에서 부활할 정도는 아니지만, 헌 책방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그의 책이 다시 읽혀지는 시대인 것 같다.

이어서 읽으면 괜찮을 것 같은 글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2)

다음은 사회주의평등당(the Socialist Equality Party) 호주지부의 국가서기인  Nick Beams가 200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호주 여러 도시에서 가졌던 강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우리가 증명해야할 질문들은 다음과 같다. : 어떻게 이 금융위기가 발생하였는가? 어떻게 18개월 전 발생했던 미국 서브프라임 모기지에서의 340억 달러가 연루된 문제가 미국 금융 시스템과 전 세계의 금융시장에 57조 달러에 달하는 재앙으로 발전했는가? 어떻게 지구상의 수억 명의 사람들이 그들이 관련되지도 않고 통제할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위기로 인해 고통 받는가? 어떻게 자산담보부증권, CDS와 같은 고도로 복잡한 금융상품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칠 수가 있는가? 왜 이러한 금융위기가 침체와 전쟁에의 위험을 증대시키면서 지구적 자본주의 질서의 붕괴를 초래하는가? 이것들이 이 강의에서 우리가 들여다 볼 이슈들이다.

자본주의의 ABC

자본주의의 동력은 사용 또는 수요를 위한 생산이 아니다. 더군다나 시장을 위한 생산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자본의 축적, 이윤의 창출이다. 가장 간단한 형태에서 축적과정은 M 이라는 화폐형태의 자본에서 시작한다. M은 더 큰 양의 자본인 M’으로 바뀐다. 즉 자본의 초기량에 그 증분 “델타 M”을 더한 것이다.

이 증분의 원천은 생산과정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다. 자본으로써의 화폐는 생산수단과 함께 노동자의 노동력(labour power)을 구입하는데 쓰인다. 이 노동력 또는 일할 능력은 다른 상품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구입 가능한 상품(commodity)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계약의 형태로 판매되는 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가치(value)는 노동자 가족의 생활유지에 필요한 음식, 의류, 주거 그리고 기타 필수재(necessities)의 가치에 의해 결정된다.(주1)

그러나 이러한 필수재 들의 가치(노동자의 임금)는 생산과정에서 자본가에 의해 공급되는 상품에 노동자가 부가하는 가치와 같은 것은 아니다. 다른 말로 노동자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과정에서 기여한 가치보다 적다. 이 차이가 잉여가치(surplus value)의 원천이다. 노동력이 생산과정에서 소비되지만 그것에 의해 생산되는 상품은 그 안에 추가적인 또는 잉여의 가치를 체현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시장에서 M’ – M에 델타M을 더한 – 를 실현하기 위해 팔린다.

자본주의 생산양식은 생산력의 거대한 축적을 추동한다. 이전 양식들과 달리 자본주의는 생산수단에 대한 지속적인 갱신에 주력한다. 축적은 노동생산성의 증가에 의존한다. 경쟁의 압박은 이러한 과정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자본의 모든 부문은 소멸의 고통에 두려워하며 생산성을 증대시켜야만 한다. 생산과정의 항구적인 규모증대는 자본주의 경제의 금융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이는 이제 자본의 축적과정이 단순히 개별 자본가의 능력을 훨씬 초과하여 진행되는 것을 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사회 전체의 자원(resource)에서 조달된다. 두 개의 극적인 금융발전이 이를 가능하게 했다. 신용 및 은행 시스템과 합자회사 또는 주식회사의 형성.

사회 모든 분야의 돈이 은행으로 모이게끔 만드는 이른바 신용이라는 것은, 자본주의 기업에게 개인이나 심지어 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능력을 월등히 초과하는 규모의 자원을 제공한다. 자본가는, 마르크스가 설명하길, 이제 다른 사람들의 돈의 단순한 관리자가 될 뿐이다. 이 돈이 없으면 루퍼트 머독도 평범한 시민에 불과할 뿐이다.

자본을 공급하는 대가로 은행은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가치의 일부를 이자지급의 형태로 수령한다. 은행과의 대출계약이나 기업의 회사채 발행은 채권자에게 정기적인 이자지급을 약속한다. 즉 그 소지자는 소득을 보장받는다.

주식의 발행을 통해 설립되는 주식회사의 경우에는 화폐자본을 공급한 대가로 재산권을 보장받는다. 그들이 회사의 일부에 대해 권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매체인의 주주라고 해서 당신이 가게에 들어가 그 회사의 부분적인 소유주라는 이유로 물건을 달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상품은 기업화된 법인의 소유물이다. 당신이 보장받는 것은 배당의 형태로 지급되는 이익의 일부분이다.

신용과 주식소유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새로운 시장을 갖게 되었다. 채권과 주식과 같은 소득 형태를 수여하여 그것들이 거래되는 금융시장. 그리고 이들 금융자산의 가격은 오르고 떨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사고팔면서 이윤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신용 혹은 주식의 형태로 제공되는 화폐는 노동력과 생산수단을 구입하는데 공급된다. 그것들은 생산자본이 되어 노동계급의 잉여가치를 착취하는데 관여한다. 이는 또한 화폐만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주식과 채권은 마르크스가 “상상의(imaginary)” 자본, 혹은 가상(fictitious)자본이라 부른 것들이다. 그것들은 최종적으로는 생산자본이 착취한 잉여가치의 지분을 소득으로 할 수 있다.

그러나 금융의 세계에서, 즉 가상자본의 세계에서는 금융자산을 거래함으로써 막대한 이윤을 얻는 것이 가능하다. 여기는 황홀한 세계다. 환상의 세계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화폐의 조작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기 때문이다. 금융관리자의 영리한 조작과 거래를 통해 거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세상에서 어떻게 노동이 모든 이윤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 초기 시절부터 금융시장은 그것을 말살하거나 최소한 통제하고 싶어 하는 –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 전체를 흔들지는 않고 – 이들로부터 비난을 받아왔다. “자본주의의 나쁜 부분을 규제하자”가 그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이야기했듯이 자본주의의 “좋은 면”은 “나쁜 면”과 구분할 수 없다. 사실 때로 “나쁜 면”이 역사적인 발전의 추동력이 되기도 했었다. 한 예로 합자회사라는 수단을 통한 집중화(Centralisation)는 짧은 시기에 철도라는 거대 사회간접자본의 설치를 가능케 했다.

가상의 자본과 부채의 증가

수많은 통계들에서 지난 30여 년간 금융 시스템의 발전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수치 중 하나는 부채수준이다.

1981년 미국 신용시장은 GDP의 168%로 추정되었다. 2007년 그것은 350%로 증가한다. 금융자산은 1980년의 GDP의 다섯 배였는데 2007년에는 열 배였다. 설상가상으로 이렇게 늘어난 부채는 점점 더 생산자본의 확장 보다는 금융시장 그 자체의 금융활동을 위해 사용되었다. 은행과 다른 금융기관이 취득한 부채는 1997년 미국 GDP의 63.8%에서 2007년 113.8%로 늘었다. 2004년 대형 투자은행의 자기자본 대비 자산 비율은 23이었다. 2007년에는 30이었다.

이토록 레버리지 비율을 늘이는 것은 그들의 수익 때문에 그렇다. 만약 어떤 자산이 매년 10%씩 가치가 증가하는 1억 달러의 자산이라면(연말에는 1.1억 달러의 가치가 될) 그리고 이 자산이 1천만 달러의 자본(equity)과 5% 이자의 9천만 달러 대출(borrowing)로 구성되어 있다면 연말에 4백5십만 달러의 이자를 치르고 난 뒤 이윤은 5백5십만 달러가 될 것이다. 이는 수익률이 55%라는 것을 의미한다.(주2) 이 과정의 핵심은 값싼 신용(cheap credit)에 의한 자산가치의 증가다. 화폐가 싸면(주3) 그것은 자산시장에 투입될 것이다. 시장은 주식이나 다른 상품 또는 주택이 될 수도 있다.

물론 자산 거품의 형성에 관련하여 그러한 폰지 스킴이 종국에는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데에는 대단한 지적능력을 요하는 것도 아니다. 여기서 관련된 것은 개인적인 실패나 지적능력의 부족이 아니라 금융시장 그 자체의 구조다. 신용이 저렴한 한에는 그리고 자산가치가 오르는 한에는 모든 금융기관이 참여하도록 강요당한다. 시티그룹의 CEO 척 프린스는 2007년 7월 이렇게 말했다. “음악이 멈추면, 유동성의 관점에서, 일이 복잡해질 것이다. 그러나 음악이 흐르는 동안은 당신은 일어나서 춤을 춰야 한다. 우리는 여전히 춤추고 있다.”

이제 음악이 멈췄다.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는 지난 수십 년간 쌓여져 온 부채의 산의 붕괴의 방아쇠가 되었다. 이 붕괴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기 위해 예를 들어보자. 10%의 수익이 예상되는 1억 달러의 자산이 이제 5%의 수익밖에 창출할 수 없다. 그러면 자산가치가 5천만 달러로 줄 것이다. 시장전체의 자산가치가 반절로 줄어든 것이다.

그런데 빌린 돈 9천만 달러로 구입한 자산을 가정해보자. 자산의 시장가치가 줄어든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은행의 부채는 여전히 9천만 달러다. 그러나 자산은 그것을 구입할 시 투입된 가치만큼도 안 된다. 어떻게 부채를 갚을 것인가? 현금을 얻기 위해 다른 자산을 팔수도 있다. 그러나 경계를 뛰어넘어 이런 일이 벌어지면 특정자산의 가치는 떨어지고 위기는 악화될 것이다.

앞에서 가상의 자본은 최종단계에서 노동계급으로부터 착취한 잉여를 원천으로 하는 소득에 대한 청구권이라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자본은 그것이 종국적으로 의존하는 것 이상으로 자랄 수 있다. 금융시장 조작은 가상의 자본의 엄청난 성장으로 귀결되었다. 그러나 특정 시점에서 이 확대는 멈추고 위기가 폭발한다. 자본은 이 불균형을 극복하여야 한다. 서로 연관된 두 개의 과정 : 잉여가치 증대를 위해 노동계급 착취를 심화시키는 방법, 그리고 자본의 총 부문을 부도내거나 제거함으로써 가용 잉여가치에 대한 그들의 청구권을 없애버림으로써 남아있는 자본 부문의 지분을 보존하는 것.

그러한 “재평가”는 단순히 회계 상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지적하였듯이 “폭력적이고 날카로운 위기”를 통해 갑작스러운 가치하락, 실질적인 불경기, 재생산 과정의 중단을 수반한다.

[원문보기]

(주1) 이 부분이 사실 노동력을 상품으로 볼 것이냐 하는 것의 논쟁의 한 원인을 제공하고 있는데 다른 상품들이 정확히 투입된 가치대로 측정할 수 있다고 간주될 수 있는 반면 노동력은 여기서 말하듯이 단순히 필수재의 가치에 상응한다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다. 그것은 어느 면에서는 가격(price)으로 측정할 수밖에 없는 면이 있고, 필수재 그 자체의 범위도 그야말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한 예로 예전에 휴대전화가 사치재였다면 지금은 필수재라 할 수 있다. : 역자 주

(주2) 물론 이는 시간가치를 고려하지 않은 단순 나눗셈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 역자 주

(주3) 이자를 화폐에 대한 가격이라고 간주한다면 저금리는 화폐가 싸다는 것을 의미한다. : 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