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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가난한 이들을 위함인가?

가난한 놈들은 일을 하겠는가, 굶어 죽겠는가? 양자택일하게 되면 일을 택하게 된다. 젊은 놈은 늙어서 구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되면 저축을 할 것이고 늙은이도 자식들의 봉양을 받아야겠다는 것을 알면 자식들을 사랑하도록 애쓸 것이다. 따라서 정말로 부양해 줄 사람이 없거나 생활능력이 없는 사람 이외에는 절대로 구제해서는 안 된다. 특히 부분적인 보조는 금물이며 전적인 구제 아니면 아예 구제를 없애야 한다.[Nassau Senior, 앙드레 모로아著 ‘영국사’에서 재인용, 弘益社(1981), 465p]

17세기 말 영국의 빈곤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위원회의 2명의 수반 중 한 명이었던 낫소 시니어(Nassau Senior)의 말이다. 가난한 이를 구제해주면 더욱 나태해지니 차라리 매몰차게 대하는 편이 더욱 그들에게 동기부여가 된다는, 역사적으로 꽤 생명이 끈질긴 주장이다. 이 주장을 부자들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변형되는지 오늘 발견한 어떤 글에서 알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종부세를 소득 상위계층 2%에 대해서만 세금을 부담 지우려고 의도하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세입자들의 전세금 상승으로 늘어난 세금부담이 전가되는 바람에 결국 보호받아야 할 98%가 세금을 부담하는 형편이 되었다.[유동운 부경대학교 경제학 교수, 감세정책, 재정규모 축소부터, 2008년 08월 11일]

부자들에게 세금을 매겨봤자 결국 부자들은 그 상승분을 지대(地代)에 전가시키니 괜히 가난한 이들 괴롭히는 정책을 펴지 말라는 주장이다. 즉 폭포수처럼 과세효과가 아래로 전가된다는 논리다. 이것도 꽤 역사적으로 생명이 길다.

일단 경제학 교수라는 분이 2%에 부과된 종부세가 고스란히 98%의 전세금 상승으로 전가되었다는 용감한 주장을 하는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하고 싶다. 이것이 사실인지를 밝히는 방법은 2%에 해당하는 이들 중 집을 전세로 놓은 이들이 자신들의 세금부과분 만큼 전세 값을 올렸고, 그들 중 다른 곳에 집을 보유하면서 2% 지역에 전세를 살고 있는 이들이 또 그들의 집에 대한 전세 값을 자신들이 추가 부담한 만큼 내었는지를 살펴보면 될 것이다.

위와 같은 가정이 검증되면 2% 세금이 98%의 전세값을 상승시켰다는 무리한 주장은 아니어도 상당한 개연성에 대해 수긍이 가겠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실증연구를 한 이는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최근의 전세 동향은 전체적으로는 소강상태이면서도 강남보다 강북이, 대형평형보다는 소형평형이 강세라고 한다. 아무리 궁리 해봐도 강북의 소형평형이 종부세 오른 부담을 고스란히 지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막말로 98%가 다 종부세 부담분을 부담한다면 왜 강남서초 국회의원들이 종부세법 개정안을 내놨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말이 좀 샜는데 글 쓴 의도로 돌아가 보자면 서두에 말한바 구빈(救貧)정책은 오랜 기간 가난한 이들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으로 시행되지 못해왔었다. 같은 이치로 누진세나 부자에 대한 좀 더 많은 책임을 요구하는 여하한의 정책도 역으로 부자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또는 보호논리)으로 시행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러다보니 위의 유동운 교수가 말하는 것처럼 “모든 세금은 궁극적으로 빈곤층의 부담으로 돌아간다”며 “그런 의미에서 모든 세금은 사라져야” 한다는 주장이 21세기에도 여전히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를 위한 논리가 아니라 빈자를 위한 논리로 치장하고서 말이다.(이런 이들에게 빌 게이츠는 빨갱이다)

복지나 구빈을 하지 말자고 하는 것도 빈자를 위함이요 부자에게 세금을 매기지 말자고 하는 것도 빈자를 위함이니 빈자를 위한 사람들이 역사적으로 이렇게 많았음에도 왜 이 세상은 여전히 1세계고 3세계를 떠나서 계속 빈자가 늘어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어제 BBC에서 제작한 우고 차베스에 관한 다큐멘타리를 보았다. 그 프로그램에서 차베스에 관한 평가는 유보적이었다. 여하튼 그 중 재미(?)있는 인물이 있는데 방송사 사장이면서 백만장자인 한 양반이 차베스의 지지자였다.(그러면서도 여전히 그의 부를 즐기고 있다) 사회자가 왜 차베스를 지지하느냐고 묻자 “제 계층에 대한 소속감보다 이렇게 불평등한 세계에 대한 불안감이 더 크기”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솔직하게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라고 하지 않고 자신의 불안감 때문이라고 털어놓고 있다. 위의 두 양반들에게 애꿎은 사람들 위한다는 이야기마시고 그저 계급적 이익에 솔직해지라고 요구하는 것이 지나친 요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