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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에 관한 보론

특히 한국은 수출 증가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했는데, 이 목표를 추진하기 위해서 국내적으로 많은 반대가 예상되는 조치들을 취해야 했다. 미국은 우선 원화의 가치절하를 주장했다. 원화의 가치가 절하될 경우 한국 상품의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한국 정부가 조언을 받아들여 원화의 가치를 1달러당 130원에서 256원으로 절하하는 환율 조정을 단행하자, 곧바로 격렬한 저항과 반대가 일어났다. [중략] 한 신문은 원화의 가치절하가 “가격 악순환의 소용돌이”를 초래할 것이라고 예상하였으며, 일부 국회의원은 정부의 결정을 “완벽한 실수”라고 비난하면서 이 조치로 인해 국민이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중략] 주한 미국 대사관은 “실제로 원화의 가치절하가 단행되면 전반적으로 국내 물가가 상승할 것이다. (…) 단기적으로 볼 때, 한국 정부는 미국이 추가로 지급할 식량 지원이 원화의 가치 절하가 실행되는 시점에 맞춰 진행될 것이라고 발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였다. [중략] 한국 정부의 환율 인상 조치가 중요한 계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원화의 가치절하만으로 저절로 수출이 증가하는 것은 아니었다. [중략] 당시 한국 정부는 일제 총독부가 실시하였던 정책과 미국의 경제 전문가가 권유하는 정책을 혼합하여 독특한 수출 정책을 채택하고 있었다. 일제 총독부가 추진하던 것과 유사하게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서 일부 특정 기업에게 세금 감면, 철도 수송 비용 감면, 은행 대출이자율 특혜 등의 혜택을 부여했던 것인데, 이 중에서도 은행 대출 이자율 감면 혜택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자율 감면 혜택을 받았던 기업 중에는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과 현대도 포함되어 있다. 이 기업들은 정부로부터 특혜를 받는 대가로 공화당에 거액의 정치자금을 제공하였다.[대한민국 만들기 1945~1987, 그렉 브라진스키 지음, 나종남 옮김, 책과함께, 2012년, pp245~247]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인용한 이 책의 독특한 지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책의 일관된 기조는 대한민국이, 미국이 다른 나라에서 공산세력의 위협을 막고 자신의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이식하려 했던 많은 시도들 중 가장 성공적인 나라였다는 주장이고, 이를 위해 이승만 이후부터 1987년까지의 미국 사회와 한국 사회의 상호역학관계를 다루고 있다.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에 대한 전문가인 저자는 스스로도 자신이 이 책에서 제시하는 주장과 해석에 대해 “우파와 좌파 모두 불만을 표시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우파는 독재정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좌파는 미국의 역할에 대한 긍정적 시각을 싫어할 것이라는 짐작이었다.

책 내용은 그의 염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톤을 유지하고 있다. 전반부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는 거의 좌파적 시각의 글이라 여겨질 정도로 평가가 혹독하다. 미국의 원조를 경제개발에 힘쓰기 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에 몽땅 쏟아 부은 냉혹한 독재자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대체재가 없다는 이유로 그의 독재를 용인하지만 지식인, 군인들에게 미국식 자유주의의 우월성을 전파하여 독재종식에 기여했다는 서술은 좌파의 구미에 맞지 않는 묘사다. 박정희로 가서는 그의 독재자로서의 모습과 열정적인 경제 지도자로서의 모습이 중첩적으로 서술된다. 그리고 인용문에도 그러한 이중적인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인용문에 나온 원화의 가치절하 조치는 1964년의 조치다. 1961년의 쿠데타를 통해 출범한 신생정부는 잘 알다시피 미국의 정권에 대한 승인과 원조가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정부였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경제적 원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정책적 지원에도 크게 기대고 있었다. 이러한 사유로 박정희는 집권 즉시 미국이 원하던 일본과의 재수교, 월남파병, 환율조정 등을 차근차근 실천해 나간다. 이 중 원화의 가치절하는 상기의 사유로 박 정권이 전면적으로 단행한 조치다. 지금 와서 보면 가치절하 이외에 다른 대안이 많지 않았기에 그의 결정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묘사된 정황만 보더라도 그 진행은 일방적이고 민중 수탈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 번 글에서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가 박정희의 경제개발을 “인플레를 유발할 뿐 아니라 인플레를 활용하는 방식의 경제개발”이라고 묘사했던 바, 위와 같은 조치는 그러한 경제개발의 일환이다. 즉, 박정희는 미국의 요구를 받아들임으로써 인플레이션을 방기하는 차원을 넘어 조장한 것이다. 이승만이 원화 가치를 낮추라는 미국의 조언을 무시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이는 수입품 가격을 앙등시키고 수출업자와 채무자에게는 유리한 환경을 조성했다. 더 나아가 수출기업에게는 금리를 깎아주는 등의 특혜를 주었으니 삼성과 현대와 같은 기업으로서는 이중, 삼중의 특혜를 누린 셈이다.1 그리고 우리경제는 수출주도 경제 또는 “박정희 체제”를 공고화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