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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말씀

이리하여 <서기>야말로 다시금, 모든 것 위에 군림하고, 모든 것을 수중에 장악하는 존재가 되었다. 그럴진대, 학생들에게 배움에 대한 의욕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직업에마다 각기 따르는 부정적인 측면들을 유창하게 열거하면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우월한 서기생활의 이점을 제시하고 있는 이른바 [훈계] – 케티의 훈계 – 가 바로 이 시기에 작성되었다는 사실은 하등 놀랄 바가 없다. 그 발췌문을 인용해 보자.
“그는 그 아이를 높은 양반들의 자제들 틈, 도시 안에서 가장 높이 솟아 서 있는 한 사람으로 만들고자 하였으매, 아이를 서기학교에 넣기 위해 도회지를 향하여 남쪽으로 데려왔다. 그리고는 이곳에 와서 아이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 ‘나는 매맞는 사람들을 눈여겨 보아 왔다만, 그것을 보더라도 너는 문필에 마음을 써야 할 것이니라. 나는 또한 강제노동으로부터 벗어난 사람들도 보아 왔단다. 그러한즉 서책(書冊)보다 위에 서는 것은 아무것도 없느니라. [중략] 잘 보거라, 관리(官吏)를 빼놓고는 명령을 받으며 일하지 않아도 되는 직업이 없단다. 관리란 바로, 그 자신이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란다. 글을 쓸 줄 알게 되면, 이는 내가 지금까지 네 앞에서 길게 늘어놓은 온갖 직업보다도 너에게 더 쓸모가 있게 될 것이나라.” [勞動의 歷史, 헬무트 쉬나이더 外, 韓貞淑 譯, 한길사, 1982년, pp 93~95]

고대 이집트의 지혜의 책 중 하나인 케티의 훈계에서의 글을 재인용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에게 문자는 비비원숭이 머리 모양의 지식의 신인 토트의 선물이었고,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신의 말씀’이라는 의미의 ‘메두네제’라 불렀다 한다.(주1) 그런데 상기 묘사를 볼 것 같으면 문자를 아는 것은 단순히 ‘신의 말씀’을 전하는 데에 그친 것이 아님이 분명해 보인다.

문자의 발전은 위에 예시된 서기(書記)와 같은 전문가 계층의 형성을 통해 소위 육체노동과 정신노동의 분리를 초래하였다. 자연스레 문자를 아는 이의 차지인 정신노동은 ‘명령을 내리는 사람’으로서 육체노동을 지배 내지는 관리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의 명을 받들어 수행하는 십장(什長)이자 판관(判官)이자 세리(稅吏)이자 문필가였다. 그러한 권위는 왕정의 붕괴 후 자연스레 새로운 지배계급으로의 길을 보장하는 것이었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이집트뿐 아니라 거의 모든 사회에서 문자는 소수의 특권이었다. 앞서 보았듯이 그것은 ‘신의 말씀’이라는 진리에로의 접근권한이자, 보다 직설적으로는 권력과 이에 따른 부의 축적의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자유롭고 평등한, 그럼으로써 더 부유해진 현대 사회의 전제조건은 문자교육 – 그리고 교육 그 자체 – 에 대한 무차별적인 접근이라 할 것이다.

물론 이제는 글을 읽을 줄 안다는 것 자체는 너무나 기초적인 토대일 뿐이다. 이제 개개인은 좀 더 세분화되고 다양화되고 전문화된 교육을 받아야만 다른 이들에게 “명령을 내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요즘 보면 대한민국 사회에서 교육의 평등화를 통해 달성된 자유, 평등, 부가 이제 새로이 차별화될 교육의 선별을 통해 붕괴될 조짐을 보인다. 외고, 자사고, 특수고, 명문대 등 차별화는 이미 상당부분 진행중이며 부촌의 자제들이 고급교육 수혜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교육 게토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지금도 수많은 ‘케티’는 고대의 케티만큼 솔직한 어투로 자신의 아이들에게 교육의 효과를 역설할 것이다. 육체노동자들의 고된 하루와 비루한 삶을 반면교사로 삼을 것을 주문하면서 말이다. 어떤 권력자는 ‘면접만으로 학교에 진학하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가 그러한 사회를 만들 것이라 믿는 이는 그리 많지 않은 것 같고, 더군다나 그렇게 해줄 것을 기대하는 이도 생각만큼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되는 상황이 요즘의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주1) 이는 비단 이집트뿐만이 아닌 거의 모든 고대사회의 특징이었을 것이다. 글을 안다는 것은 구술사회의 유적을 전하는 엄청난 도구이고 그 유적 중 가장 소중히 남겨야 할 것은 그 사회의 신화일터이니 글을 아는 이는 자연히 권력자이거나 성직자였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