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g Archives: 엘리엇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국면에서 등장한 “국익”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신장섭 교수는 국민연금이 수익률과 국익을 고려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삼성물산 주가가 합병발표 뒤 15~20% 올랐다”며 “국민연금은 투자기관이기 때문에 필요한 수익률을 내야하고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국익을 지키는 범위에서 투자해야 한다” [중략] “삼성그룹은 잘한 점도 있고 잘못한 점도 있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한국경제에 어떤 공이 있는지 모르겠다”[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국민연금 어느 편에 서야 하나]

KIC 고위 관계자는 8일 “지난 2010년 10월 투자 수익률 제고 차원에서 엘리엇 펀드에 5000만달러(약 568억원)를 투자했으며 지금까지 약 40%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안다”면서 “엘리엇이 삼성물산 보유 지분(7.12%)을 일시에 다 팔고 나가면서 ‘먹튀’ 행태를 보이거나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 시장 질서와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 회수를 적극 고려하겠다”고 밝혔다.[한국투자공사 “엘리엇이 국익 해치면 투자금 5000만달러 회수 고려”]

참 재밌는 상황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합병 건에 대해 외국계 펀드가 딴죽을 걸고 나오자 난데없이 “국익(國益)”이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이 표현을 최초로 언급한 이는 인용기사 중 언급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이 “국익을 지키는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한편 엘리엇에 투자하고 있는 KIC는 엘리엇이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이제 우리는 국익의 실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국익이라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을 경제적으로 굳이 규정해보자면 ‘국가 및/또는 그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 전체의 경제적 이익’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경제적 이익이 국민경제 단위를 경계로 하여 그 손익을 따져야 한다는 명분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형평성 측면으로는 어떠할까? 국익이라는 국가주의적 뉘앙스를 감안하자면 그 경제적 이익은 보다 많은 국민의 이익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신 교수의 “국민연금에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이란 개드립은 무시하고라도 국민연금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것이 소위 국익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크게 이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단순히 경영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사익추구의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결권 자문사들이 삼성물산의 주주는 합병 건에 반대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다.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라 여기면서 우리나라의 재벌과 같은 사익추구 집단의 존재가 시장경제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삼성 “오너” 일가의 지배권 강화를 위한 꼼수 시도가 아니라면 시장에서 양 합병 주체는 각각의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익에 의해 왜곡된 삼성물산은 직원을 동원해 소액주주를 찾아가 합병 찬성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신 교수 주장대로 국민연금이 합병 건에 찬성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엘리엇이 시세차익을 얻지 못하고, 제일모직에도 상당한 지분이 있는 국민연금의 삼성그룹 주식 가치가 오를 수도 있고, 통합 삼성물산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기업이 성장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KIC가 손해를 보고, “오너” 일가가 부당한 이익을 얻고,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던 삼성물산 직원이 구조조정으로 잘릴 수도 있지만 이런 손해들은 국익의 대차대조표에서 한편에 밀어두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을 대변하는 국민연금은 왜 더 나은 국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합병이 성사되면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삼성 측의 조건부 립서비스 말고 지금부터라도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여타 조치를 – “오너” 일가의 예상 이익에 대한 특별과세, 협력업체와의 상생, 직원들의 고용안정 등 – 합병 찬성을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 국익을 논하려면 그 정도의 협상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