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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exit 단상, 혹은 술주정

우선 이 글이 지금 술을 한잔 거나하게 걸치고 집으로 들어와서 쓰고 있는 글임을 전제로 깔아두기로 한다. 왜냐하면 짐작컨대 이 글이 궤변으로 흐를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변명 아닌 변명으로 술 핑계를 대고자 함이고 쓰고자 하는 주제는 브렉시트에 관한 주제다. 술먹고 너무 심오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쓰기 때문에 핑계거리를 만들어 둠을 감안하실 것.

또 하나 전제로 깔고 자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 브렉시트의 역사적 맥락이랄지 최근의 논의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블로그에 브렉시트에 관한 글을 쓰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은 최근 브렉시트에 대해 조롱하는 한 트위터의 동영상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었기에, 술기운에 갑자기 그 동영상이 생각났기에 쓰는 것이다.

그 동영상을 따로 링크하고 싶지는 않다. 내용은 아마도 미국의 어느 도시 – 아마도 뉴욕? – 인 것 같다. 막 출발한 지하철에서 승객이 아마 미처 내릴 역임을 모르고 있다가 차량이 출발한 후에 내리려는 것 같았다. 그래서 문을 억지로 열고 얼마간 속도를 낸 차량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는 바로 승차장에 머리를 꼴아 박는 것으로 끝나는 동영상이다. 섬찟한 동영상이었다.

그 동영상을 올린 이의 의도는 십중팔구 브렉시트를 선택한 이들이 현재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고 비판하는 – 솔직히 조롱하는 – 의도였다. 원인과 결과를 알지도 못한 어리석은 유권자가 브렉시트라는 문을 억지로 열고 열차에서 뛰어내리자마자 머리를 땅에 찢고 후회한다는 그런 의도로 동영상을 올렸을 것이다. 당연히 그 동영상은 리트윗도 꽤 많이 됐다.

하지만 과연 그 동영상이 브렉시트를 선택한 시각에 딱 들어맞는 동영상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리석게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 내린 그 승객의 관성의 법칙보다는, 정치적 협잡, 경제이론의 혼란, 그리고 노동계급이 이민자가 좀비처럼 자신을 위협한다는 망상에 시달리는 정치/경제/사회의 법칙이 좀 더 복잡한 변수가 있는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앞서 내가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의 맥락을 거의 모른다고 했듯이 그 동영상을 올린 이나 또는 그 동영상을 리트윗한 이들이나 그 맥락을 지금의 영국의 유권자들보다 더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막상 그 선거결과로 인해 전 세계 자산가치가 폭발적으로 하락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들을 조롱한다. 마치 한때 남유럽을 돼지(PIIGS)라는 이니셜로 조롱했듯이.

하여튼 유럽연합은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유럽 중심주의의 우월감 쩌는 유럽 본토인들이 다시는 유럽내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끔 하도록 보다 공동체주의적으로 유럽인들끼리 살아보자’는 생각을 가지고 만든, 다소는 모순되고 다소는 혼란스러운 경제공동체 – 궁극적으로는 정치연방 – 인 것 같다. 그런데 참여주체들도 사실은 그 정체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렇지만 그들의 역사는 그들의 것이다. 나치 못지않게 추악한 제국주의 역사를 아름답게 추억하는 늙은 영국인들이 브렉시트를 주장하였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오류를 지적하고 미래의 역사를 꾸려나갈 이들은 영국 젊은이들이다. 유럽연합이 절대선도 절대악도 아니다. 왜 그들은 탈퇴를 주장했는지 – 순서는 잘못됐지만 – 지금이라도 스스로 논의하면 된다.

신자유주의 서사가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단상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은 네 가지 주요 측면의 상호작용에 기초를 두고 있었다. 정치, 종교, 경제, 예술 말이다. 그중에서 정치와 종교가 권력을 두고 다툼을 벌였다. 하지만 이제 정치가들은 개그맨의 먹잇감에 불과하고 종교는 자살폭탄 테러범이나 성추행이나 떠올리게 만든다. 예술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전부 예술가이다. 경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다. 신자유주의 서사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우리는 어떻게 괴물이 되어가는가, 파울 페르하에허 지음, 장혜경 옮김, 반비, 2015년, p128]

이 구절을 읽고 불현듯 생각난 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물체를 구성하는 4대 요소’였다. 과문하여 그 깊은 뜻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 요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다. 불교의 교리에 따르면 우주 삼라만상의 물체는 인연에 따라 만나는 이 네 가지가 뭉쳐 이루어졌다가 인연이 다 되면 본래의 요소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한 사회도 인용문의 네 가지 요소가 뭉쳐져 그 사회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이 어딘가 비슷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여하튼 좀 거칠게 표현하였다는 느낌이 들지만 인용문의 저자의 말대로 오늘 날의 사회는 경제가 나머지 세 요소를 압도하며 문화와 정체성을 이끌고 있다는 데에 대해 공감하는 바이다. 특히 신자유주의적 서사가 – 특히 서구에서 – 종교적 서사를 대체하며 우리의 정서를 지배하고 있다는 저자의 주장 역시 공감이 간다. 이러다보니 정치는 증시(證市)에 목을 매고, 종교는 성탄절 정도에나 의미가 있으며 – 그나마도 상업화된 – 예술은 경제에 종속 된지 오래다.

어쨌든 그 경제적 서사가 신자유주의 서사든 아니면 다른 경제 이념의 서사든 중요한 것은 그 서사가 다른 요소들을 지나치게 압도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할 것이다. 지수화풍은 각각 단단한 것, 물기, 열, 움직임을 뜻한다고 한다. 우리 몸의 골격, 피, 체온, 생장(生長)을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이 요소들이 적절히 조화가 되지 않는 몸은 병든 몸이지 않을까? 사회도 마찬가지다. 모든 시각을 경제적 관점에서만 사고하는 사회, 병든 사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