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Sailko – Own work, CC BY 3.0, Link
현대의 감각으로 보면 시가 전차가 있는 피렌체는 여전히 참아 줄만한 도시였을 것이다. 그러나 거리를 가로막는 양철 뱀(시가 전차/옮긴이)이나, 버스, 총알처럼 거리를 내달리는 그런 것은 안 되었다. 이졸데 쿠르츠만 해도 새로운 교통수단을 통해 초래될 변화를 부담스러운 것이라고 여겼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1880년대만 해도 거리의 교통수단은 낡은 궁전의 회랑을 달리는 것처럼 점잖은 것이었다. 그녀는 특히 이 모든 것이 위에서 설명한 새로운 시대 의식과 결합된 것임을 알아보았다. “누구나 시간을 남아 돌 만큼 가지고 있었다”라고 그녀는 새로운 교통 수단이 도입되기 바로 직전에 적고 있다.[피렌체 1900년 아르카디아를 찾아서, 베른트 뢰크 지음, 안인회 옮김, 2005년, 리북, 101쪽]
이졸데 쿠르츠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였다. 그는 시가 전차 도입 등 피렌체의 도시 현대화에 대해 당시 많은 이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전차, 전신주, 가스등 등은 분명 당시 사람들에게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편리함을 느끼게 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이 낯선 것들이 낯익은 도시풍경에서 공존하는 것이 불편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졸데는 시가 전차가 도입하는 것에 대해 “누구나 시간을 남아 돌 만큼 가지고 있었다”라고 넌지시 비판적인 의견을 내놓은 것이다.
아닌게 아니라 당시의 피렌체 시민이 느끼고 있었던 시간감각은 현대의 대도시 시민이 느끼는 시간감각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인용한 책은 다른 부분을 인용하자면 당시 피렌체의 한 건설 담당관은 “12군데의 중요한 공공 장소에 시계를 설비하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시민이 시계를 통해 시간을 알게 되면서 현대적 도시의 규범을 따를 수 있기 – 예를 들면 가로등의 소등 시간 – 때문이었다. 즉, 정밀한 시간 분할은 현대화 양식의 기본적인 양상에 해당한다. ‘더욱 정확하게’, ‘더욱 객관적으로’, ‘더욱 공공연하게’는 새로운 시대의 시간관을 결정하는 삼박자였다.
지금의 도시는 이졸데 쿠르츠의 시간의 개념으로 전차를 타지 않아도 시간이 남아돈다고 여기면 삶이 고달파질 것이다. 당신이 누군가와 대중교통으로 2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의 장소에서 만날 약속을 하면 당신은 지도 앱을 켜서 시간을 가늠한다. 버스와 전철을 이용하는 옵션을 택했다면 버스 정거장에 가서 도착시간을 알려주는 안내판을 보거나 전철의 도착시간을 체크하는 등 당신의 시간을 설계한다. 이렇게 당신의 하루는 도시 공간과 어플이 결합하여, 분 단위까지는 아니더라도 시간 단위로 쪼개어진 하루일 것이다. 1900년의 피렌체와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이러한 도시의 현대화를 우리는 ‘공간의 압축’이라 부를 수 있다. 교통수단의 발전은 도시 내부 혹은 도시와 도시/농촌 사이를 시간적으로 압축시켰다. 물론 현대화의 최대 수혜자 자본가는 공간적 압축이 이윤 극대화에 도움이 되었기에 이를 반겼다. 흥미롭게도 맑스 역시 공간의 압축이 서로 다른 공간의 노동자의 단결을 강화해준다며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교통이 자본의 이윤을 보장해주는 동시에 노동자의 단결을 도모한다는 사물의 이중적 성격에 주목한 것이다. 근대에서 현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살았던 한 예술가의 느긋함은 현대를 사는 좌우 모두에 와닿지 않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