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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기계화, 개발주의 등에 대한 단상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적어도 지금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아마 그보다 훨씬 더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기계화된 세상이며 엄청나게 조직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옛 문명들이 노예에 의존하듯 기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년, p255]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자처한 조지 오웰이 한 진보단체의 의뢰로 1936년 쓴 르포르타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일부다. 책의 전반부는 작가 스스로가 몸으로 체험한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인용한 부분과 같이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현황과 이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웰이 잘 관찰하였듯이 확실히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기계화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들이 실현할 사회주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계화, 산업화를 최대한 극대화시켜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윤동기의 제거는 오히려 이런 기계화를 더 촉진시킬 것이었다.

일례로 오웰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페르낭 레제는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신뢰가 아예 그림에 투영된 경우다. 그는 사람의 몸통을 기계 플랜트의 배관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그렸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신생 소비에트에게 있어 기계화는 사회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후진적인 생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생산과 유통 과정은 기계화, 표준화, 집단화 되어야 했다. 각종 설비는 대규모로 지어져서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 노동영웅이 탄생했고 목가적인 소농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많은 진보세력이 비난하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도 이러한 기계화, 표준화에 대한 낙관주의를 사회주의와 공유하고 있다. 이전에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지던 음식들을 제조업 공정처럼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맛의 질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싸게 팔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모든 산업에 이러한 획일적인 표준화를 적용하는 것은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상당수가 비판적인 시각일 것이다. 그렇기에 원전과 같은 개발주의적 산물에 대해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고, 슬로우푸드 운동과 같은 반성적인 소비운동이 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이념적 지평을 넓혀 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함에도 과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기계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웰 역시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어떠한 이념적 기반이건 간에) 개발주의 자체의 폐해를 비판하는 이들도 스스로의 삶에 미치는 개발주의의 수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원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와중에도 전기는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대안 모색을 위해 우선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려야 할 것이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이런 맹신 속에 자연을 파괴했고, 자본주의 국가 역시 일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조금 더 비용을 감내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지탱 가능한 발전”은 이전의 개발주의와 다른 비용을 요구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자세를 바꾸고 개발주의를 청산하는 일이 과연 현 체제에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무슨 방송국의 캠페인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또한 이상주의자들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도전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사회를 오염시키는 거대한 욕망

인간을 비 ·바람이나 추위 ·더위와 같은 자연적 피해와 도난 ·파괴와 같은 사회적 침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건물을 말하는데, 가족구성의 핵화(核化)와 순수한 가정생활의 장소로서 소형화 ·단순화가 이루어져 가는 경향이 있다.

네이버에서 검색해본 주택(住宅)의 정의다. 지극히 당연한 정의인 것 같지만 뭔가 설명이 부족한 느낌이다. 보통사람들이 바라보는 주택에 관한 시각이 빠져있다. 주택은 많은 이들에게 투자의 대상이다. 대개의 사람들은 단순주거의 목적이 아닌 투자의 관점에서 주택을 선택한다. 그래서 역세권, 학군, 조망 등이 주택가격에 미치는 영향들을 주관적으로 가늠하고 심지어는 연구자들에 의해 계량화되기도 한다.

진보진영에서는 그러한 시류에 저항하고자 주택을 ‘사회적 주거’의 개념으로 바라볼 것을 주문하고 있기도 하다. 즉 시장이 주택을 ‘교환가치’ 추구의 대상으로 삼아 주거라는 본래의 목적의 달성이 점점 어려워지니 ‘사용가치’ 추구에 대한 주거권을 정립시키자는 주문이다. 그러한 요구가 정책적으로 표현된 것들 중 하나가 ‘공공 임대주택’이라 할 수 있다. 이 주택들은 공공적 성격에 부합하여 낮은 임대료 및 긴 임대차기간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대표적인 임대주택이 서울시의 ‘시프트’다.

우리나라의 임대주택은 그 공급이 충분할까? 서울시 관계자에 따르면 “서울의 주택보급률이 2008년 기준 93.6%에 불과해 아직도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며 “특히 전체 재고주택(약 314만채) 대비 임대주택의 비율은 선진국(10~20%)에 한참 못 미치는 5.4%밖에 안 된다”고 한다. 서울의 상황이 그러니 전국의 상황도 이 정도이거나 이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한 관계로 이른바 이사철이 되면 수시로 언론에 ‘전세대란’이라는 용어가 등장하고 시프트를 분양할 때면 경쟁률이 몇 십대 1이 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더 많은 공공 임대주택이 절실한 상황이다. 다행히 서울시는 공공 임대주택의 공급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겠다는 입장이다. 재건축 단지에 의무적으로 지어야 하는 소형주택 비율도 낮출 계획이 없다고 못 박고 있다. 지자체의 의지가 이렇다 하더라도 걸림돌은 아직 많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임대주택/소형주택을 반기지 않는 시장(市場)이다. 소형주택 의무비율은 강남권 재건축 사업성의 핵심적 요소다. 더 적은 소형주택을 지어야 분양성이 좋은 대형주택을 지어 수익을 올릴 수 있다는 논리다.

임대주택 역시 욕망에 사로잡힌 민원인들의 불평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은평구청 관계자는 “얼마 전 녹번동 국립보건원 부지에 시프트 1000여 가구가 들어설 예정이라는 보도가 나간 직후 항의성 민원전화가 200통 이상 걸려왔다”고 했다. 겉으로는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들 민원인들의 의도는 간단하다. 싸구려 임대주택 때문에 자기들의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걱정이다. 대형 아파트 단지에 지어져있는 임대아파트들에 철조망을 두르는 행위만큼이나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개발지상주의’에 찌든 인간들이다.

이러한 거대화되어 있는 자산증식에 대한 욕망이 정치를 오염시킨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라는 지극히 단순한 구호 뒤에는 이 사회의 개발주의와 약자배제를 정당화하는 기제를 편리하게 무시하려는 의도가 숨어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대운하나 4대강 정비사업이 ‘녹색’으로 치장하고 있지만 바로 뒤에 ‘성장’이란 단어가 나오는 것이 그 이치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진정한 ‘용산 참사’의 재발방지책 수립은 멀쩡한 집도 까부숴 재개발하는 것을 당연시하고 임대주택 건설에 항의하는 그 욕망의 제거를 전제하여야 하는 것이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주택을 재산의 소유로 하면 안 됩니다. 집 평수에 따라 인격이 달라지잖아요. 20평은 20평의 인격, 50평은 50평의인격, 이건 아니지 않습니까. 저도 주거 문제로 투쟁하기 전에는 이런 것을 몰랐어요. 일반 사람들이 자기가 25평인데 동창회에 가서 쪽팔렸어요. 그러면 기필코 내년에는 33평 가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것이 잘못된 주택정책을 자꾸 부추긴다고 생각해요. 당연히 건설업체는 원하는 사람에게 맞추기 위해 더 넓은 평수, 더 좋은 집을 짓는 거죠. 앞으로 이사 올 사람들도 자기 앞에 떨어질 이익분만 생각해요. 거기서 살고 있는 원주민들 생각은 안 하는 거죠. 경찰이나 용역이 폭력적인 진압을 하는 데는 이런 사람들의 욕구가 숨어 있다고 봅니다. 일반 시민들이 자기도 모르게 그런 폭력을 지지하는 골이 되는 것이죠.[대한민국 개발잔혹사 철거민의 삶 여기 사람이 있다, 삶이 보이는 창, 2009년 p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