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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ark Knight

WARNING!! 스포일러 만땅

히스레저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그가 이 영화에서 보여준 광적인 연기가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개봉도 하기 전에 준(準,quasi)신화적인 존재가 되어 블록버스터 컬트라는 새로운 길을 개척해버린 영화.  The Dark Knight을 오늘 화면발 죽이는 아이맥스로 감상했다.

보통 이런 액션영화는 좀 근사한 크레딧타이틀이나 큰 줄거리와는 상관없지만 보는 이의 심장박동수를 증가시키는 호쾌한 액션씬을 첫머리에 집어넣기도 하는데 – 007시리즈의 특기지 – 이 영화는 어영부영하지 않고 바로 본문으로 들어가 조커가 은행을 털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는 장면부터 시작한다.(주1)

영화는 이후 배트맨과 조커, 그리고 또 하나 외연을 확장하자면 정의감 넘치는 검사에서 투페이스로 전락해버린 하비 덴트의 삼각구도로 진행된다. 이 셋은 기묘하게도 서로 서로 공유하는 것들이 겹친다. 배트맨과 하비 덴트는 정의감을 공유한다. 배트맨과 조커는 어둠을 공유한다. 그리고 조커와 하비 텐트(정확하게는 투페이스가 되어버린 하비 덴트)는 광기(狂氣)를 공유한다.

이렇게 한 인물이 다른 두 인물의 공통점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 때문에 셋은 끊임없이 반목하게 된다. 조커는 알량한(!) 정의감이 없어서 도시를 휘젓고 다닐 수 있다. 하비 덴트는 어둠 속에 존재할 수 없는 시스템의 남자여서 배트맨에게 불법적인 납치를 부탁한다. 배트맨은 어쩔 수 없는 냉정함 때문에 조커의 광기와 하비 덴트가 투페이스가 되면서 폭발한 광기를 말리기 위해 혼자 오지랖 넓게 동분서주 바쁘기만 하다.

그러면서도 정작 조커를 죽일 수 있는 순간이 되어도 정의감이라는 후천적 뇌종양 증세 때문에 무슨 아시모프 소설에 나온 인간을 죽일 수 없는 로봇이라도 되는 마냥 주먹을 거둔다. 게리 올드맨이 열연한 고든 경찰서장은 아들에게 이런 배트맨을 ‘어둠의 기사(Dark Knight)’라고 칭송하지만 내게는 왠지 냉소적인 조롱으로 느껴진다.(주2)

조커는 비이성(非理性)과 비합리(非合理)가 무기인 녀석이다. 그의 행동반경은 랜덤하고 생각역시 그러하다(물론 계획은 치밀하다. 이러한 점에서 그 역시 절대적인 혼돈 그 자체는 아니다). 오죽하면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불을 질러버린다. 전통적인 악당들에게도 경악 그 자체다. 오직 하나의 동기가 있다면 배트맨과 재밌게 놀고 싶었을 뿐이다.(주3)

그래서 조커는 배트맨이 모토사이클을 몰고 달려드는 순간에도, 빌딩에서 집어 던져버려도 재밌어서 깔깔 웃어대기만 한다. 죽일 테면 죽여보라는 심산이었다. 그저 재밌어서 배 두 척을 상대로 ‘죄수의 딜레마’게임을 벌이기도 했고(주4), 하비 덴트를 투페이스로 만들어버렸다. 그런데 결국 배트맨은 그런 행동반경이 파리 같은 녀석 하나 처치를 못했다. 결국 어찌 보자면 패자는 배트맨이다.

결국 이 영화는 수많은 명배우들의 연기경합, 제이슨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낮은 톤(low tone)’의 연이어지는 긴장감, 그리고 수퍼히어로의 맛깔스러운 재해석으로 – 전문가가 아닌지라 걸작까지는 잘 모르겠고 – 수작의 반열은 거뜬히 뛰어넘은 것으로 여겨진다.

추.

이 영화가 현실 자본주의, 또는 문명세계의 메타포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유명한 리뷰어는 배트맨이 자경단이자 자본가라는 사실을 이야기의 발화점으로 삼고 있던데 이건 원작이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고 원작자가 그러한 것에 큰 염두는 두었다고는 여태까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뭔가 프로이트적인 분석을 하기 시작하면 혐의를 둘 수도 있겠다. 더불어 현실세계는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정의’라는 것이 순수결정체도 아니다. 분명한 사실 하나는 실존하는 배트맨이 하나 있긴 하다는 것이다. 바로 자본주의로 거부가 되고도 끊임없이 자본주의를 저주하는 조지 소르스

 

주1) 이 은행털이 에피소드에서 호기 있게 강도와 대적하는 아저씨가 바로 프리즌브레이크2에서 석호필 형과 맞장 뜨는 형사 아저씨기에 적잖이 기대했는데 맥없이 당하고 만다.

주2) 기사(Knight)가 또 원래 그렇게 정의감 넘치는 족속들도 아니다.

주3) 현대 소프트웨어 운동의 그루로 추앙받는 리누스 토팔즈(Linus Torvalds)가 쓴 책 제목이 ‘그냥 재미로’인데 그는 궁극적인 발전의 동기를 ‘재미’라고 보았다. 그는 그저 재미있어서 Linux 소스를 공개했고 많은 이들이 이 소스를 역시 재미로 같이 손보아서 이 정도로 만들어 놓았다. MS적인 이윤동기로 설명되지 않는 대목이다. 무언가를 재미로 하는 애들은 못 말린다. 이를테면 블로거나 오타쿠

주4) 나도 이 장면을 보면서 ‘죄수의 딜레마’를 떠올렸고 집에 와서 검색해본 리뷰에서도 ‘죄수의 딜레마’가 언급되어 있는 글이 꽤 있으나 엄밀히 말해 정통적인 ‘죄수의 딜레마’와는 다른 상황이라고 판단된다. 즉 정통적인 상황에서 수사관, 즉 죄수를 징벌할 수 있는 이는 죄수에 대한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말미암아 수세적 상황에 놓여있다. 그러나 조커는 이 상황을 완벽하게 콘트롤하고 있었다. 양쪽 배에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이겼다고 치더라고 조커가 기폭장치 한번 눌러버리면 상황 끝이다. 그들의 정의감은 헌 신짝만도 못한 것이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그 상황에서 죄수가 기폭장치를 강물로 던져버리는 설정은 너무 작위적이었다. 감독 조차도 인간성을 신뢰한 것인지 아니면 제작사의 압력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주5) 개인적으로는 게리올드맨과 마이클케인의 등장이 반가웠다. 마이클 옹 너무 늙으셔서 안타까웠고 레이첼의 편지를 펼쳐볼 때 발견한 그의 산도적 같은 손은 약간 실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