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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 사회 바깥에 있는 특수한 존재가 된 현대 국가

중세로부터 나온 민족들의 경우에 부족 소유는 다양한 단계들 – 봉건적 토지 소유, 단체적 동산 소유, 매뉴팩처 자본 – 을 거쳐서 대공업과 보편적 경쟁에 의해서 조건지어진 현대적 자본으로, 공동물의 모든 가상을 벗어 던지고 소유의 발전에 대한 어떤 간섭도 배제한 순수한 사적 소유로 발전한다. 이 현대적 사적 소유에 조응하는 것이 현대 국가인데, 이 현대 국가는 조세로 인해 점차적으로 사적 소유자들에 의해 매수되고 국채 제도로 인해 사적 소유자들의 수중에 떨어져서, 그 존립은 증권거래소에서의 국채 증권의 등락 속에서 사적 소유자들, 즉 부르주아들이 국가에 부여하는 상업적 신용에 전적으로 의존한다. 부르주아지는 그들이 바로 더 이상 하나의 신분이지 않고 하나의 계급인 까닭에, 더 이상 지방적으로가 아니라 전국적으로 자신을 조직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들의 평균적 이해에 보편적 형식을 부여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공동체로부터의 사적 소유의 해방을 통해서 국가는 시민 사회와 나란히 있는, 그리고 시민 사회 바깥에 있는 특수한 존재가 되었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p259-260]

‘소유’라는 개념이 온전하게 완성되는 시기는 현대 국가에 이르러서라는 점, 그리고 국가는 그 사적 소유자가 갖다 바치는 세금에 “매수”되고 그들이 구입한 국채 증권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수중에 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맑스와 엥겔스의 통찰이다. 조세권을 국가의 횡포가 아닌 실은 국가가 사적 소유를 인정하게끔 만드는 당의정(糖衣錠)이라는 인식이 ‘과연 뭐든지 삐딱하게 보는 좌익 듀오답다’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대목이고, 국채 제도로 인해 국가가 부르주아지의 수중에 떨어지고 결과적으로 국가를 시민 사회로부터 분리해 별도의 특수한 존재로 만들었다고 서술하는 이 대목이 현대 국가의 경제사를 관통하는 정확한 분석이라는 점에서 새삼 그들의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현실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오늘날 국채의 구입자는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다. 이제 채권 시장은 각국의 정부출연기관, 연기금, 금융기관, 기타 갖가지 사적 소유자의 돈을 위탁받은 신탁(펀드, 리츠 등)들이 각국의 국채, 공사채, MBS, 회사채 등을 사들이고 되파는 국제적인 규모의 시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산업자본 융성의 시기를 거쳐 금융자본의 제도적 틀이 국제적으로 기반을 잡게 되면서 일상적인 풍경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각국 정부의 통화나 금리 정책은 온전히 시민 사회의 목표와 부합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바로 시장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 일차적 목표가 되어버린 것이다. 요즘 시장을 보며 특히 공감하게 되는 구절이라 옮겨 적어보았다.

“의식적 지배”에 대한 단상

개인의 현실적 정신적 부 Reichtum는 전적으로 그의 현실적 관련들의 풍부함 Reichtum에 달려 있다는 것이 위에 의거하여 명백해진다. 이를 통하여 비로소 개별적 개인들은 여러 상이한 국민적 또는 지역적 한계로부터 해방되며, 전세계의 생산과(또한 전세계의 정신적 생산과도) 실천적 관련을 맺게 되고, 또한 세계 전체의 전면적 생산(인간의 창조물)을 향유할 능력을 획득하는 상태에 놓여진다. 이 공산주의 혁명을 통하여 전면적인 의존성, 즉 개인들의 세계사적 협업의 이 최초의 자연 성장적 형태는, 인간 상호간의 작용으로부터 창출되었지만 지금까지는 인간에게 완전히 낯선 힘으로서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이러한 힘들에 대한 통제와 의식적 지배로 바뀌게 된다.[칼 맑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1 중 독일이데올로기, 번역 최인호 외, 감수 김세균, 박종철출판사, p218]

맑스와 엥겔스가 “외경시되어 인간을 지배해왔던 낯선 힘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말할 때의 그 힘이란 무엇일까?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독일이데올로기’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당시까지 인민의 의식을 지배해왔던 지배계급의 관념론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한다. 바로 그 관념론일 수도 있고, 그 관념론에 의해 온존하고 있던 억압적인 생산관계일수도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을 무력하게 만들었던 자연일 수도 있다. 실제로 인간은 생산력이 발전함에 따라 풍부해진 정신력과 물질문명을 통해 자연의 변덕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자원을 채취하고 더 많은 주거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의식적 지배”를 통한 이득은 사적소유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당연하게도 자본의 차지다. 현실 사회주의 시스템에서는 이 이득이 좀 더 많은 계급과 공유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체제조차 “의식적 지배”는 자연의 파괴를 지양해야 한다는 체제적 고민은 없었다. 그리하여 체제를 불문하고 무의식적으로 진행된 – 왜곡된 형태의 – “의식적 지배”의 결과로 자연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파괴되고 있다는 증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손해에 대한 비용은 이득의 향유자가 치르지 않기에 – 부(負)의 외부효과 – “세계사적 협업”은 말뿐인 공허한 외침이 되고 있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강의 죽음’을 읽고]

다만,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체제로 자리 잡고 있는 와중에도 인류는 “탄소중립”이라는 구호를 통해 “세계사적 협업”의 실마리를 찾으려고 하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 유럽 경제가 – 특히 독일 –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의 와중에 유럽이 값싼 러시아의 가스에 마약처럼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그들이 외쳐왔던 재생에너지를 통한 “탄소중립”도 그럴싸한 화장술이었음이 드러났다. 인류가 “낯선 힘을 의식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는 “풍부함 Reichtum”에 기반한 “세계사적 협업”이 필수적인데 그 풍부함이 허상으로 드러나 약하게나마 유지되었던 “탄소중립”이라는 협업도 위기에 처할 것 같은 위기감이 생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