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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널드 리건’이 ‘로널드 레이건’이 된 사연에 대한 고찰

한국어는 여러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적혀진 한글에 대한 발음에 있어 거의 이론의 여지가 없는 편이다. 자기 이름을 ‘유인촌’이라 써놓고 사람들이 ‘유인촌’이라고 부르니까 “내 이름을 유인촌 말고 문익촌이라 읽어 달라”라고 억지를 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표음문자(表音文字)의 특징이다. 문익촌도 나쁘진 않지만.

그런데 알파벳은 같은 표음문자라 하더라도 좀더 변용이 많은 편인 것 같다. 특히 이름과 같은 고유명사의 발음에 있어서는 기존 관행 또는 본인의 의지에 따라 달리 발음하기도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팝가수 ‘샤데이’는 스펠링이 Sade다. ‘세이드’라 발음해야 할 것 같은데 나이지리아 국적인 그녀가 그렇게 불러 달래서 샤데이다.

한편 미국 대통령 중에선 희한한 케이스가 하나 있는데 ‘로널드 레이건’이다. 그의 이름은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는 ‘로널드 리건’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대통령이 된 날 ‘로널드 레이건’으로 표기가 바뀌었다. 알파벳 스펠링은 ‘리건’일때나 ‘레이건’일때나 여전히 Ronald Reagan 인데 말이다. 대통령이 될 때쯤인 1981년의 신문을 보자.

(이하 네이버 디지탈뉴스아카이브 캡처)

이때까지만 해도 ‘리건'(1980년 7월 17일 동아)

경향신문의 1981년 11월 6일자 보도에 따르면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도용어 통일심의회(韓國新聞編輯人協會報道用語 統一審議會)’라는 거창한 단체에서 여태 ‘리건’이라 써오던 표기를 ‘레이건’으로 바꿔 쓰기로 했다고 한다. 누구 맘대로? 아무리 단체 이름이 거창해도 감히 미국의 대통령 이름을 멋대로 바꿔 쓸 수는 없다. 본인이 허락하지 않은 한은.

너무 거창한 단체 이름!(1981년 11월 6일 경향)

그런데 동아일보는 경향이 그런 사실을 보도하기 하루 전에 이미 그를 ‘레이건’이라고 표기했다. 왜 그렇게 했냐고? “본인의 희망에 따라” 그랬다는 보도도 있다. 동아는 이미 발빠르게 ‘한국신문편집인협회보도용어 통일심의회’가 바꿔 쓰기로 결정하거나 말거나 “본인”의 희망사항을 확인했다는 이야기다. 역시 그때부터 대단한 신문이었던 듯?

본인의 희망이라잖아~(1981년 11월 5일 동아)

그때 아직 소년시절인지라 많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 사실만큼은 기억한다. 여태 ‘리건.. 리건..’하던 미국의 대통령 각하의 이름이 어느 날 갑자기 ‘레이건’으로 바뀐 그 순간 말이다. 그때 기억을 더듬어 보면 동아의 말마따나 그리고 ‘샤데이’의 경우처럼 본인이 “이제 멋없는 리건이라는 이름대신 레이건이라 불러라. 에헴!”한거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85년 11월에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미소 수뇌회담이 열렸다. 언론은 양자가 화해하여 동서대립이 해소된 것처럼 요란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당시 수행자들이 누구였던가? 레이건의 감시자로서 세계최고의 원자력발전소 건설회사 벡텔 사의 사장 조지 슐츠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 메릴린치의 도널드 리건이 각각 국무장관과 수석보좌관의 직함을 들고 동행하지 않았던가. [중략] 이 가운데 리건 보좌관은 재무장관에서 자리를 옮긴, 최고 실력자라 부를만한 인물이었다. 레이건이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그때까지 로널드 리건이란 이름의 발음을 로널드 레이건으로 바꾼 것도 이 헷갈리기 쉬운 스폰서인 도널드 리건을 장관으로 맞이하는 예의로서 대통령이 한발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리라.[제1권력, 히로세 다카시 지음, 이규원 옮김, 2010년, pp481~482]

JP모건과 록펠러 집안이 미국과 전 세계의 권력을 좌지우지한다는 히로세 다카시의 음모론 책을 읽고 있는 와중에 만난 대목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레이건’ 씨는 비록 스펠링이 Regan으로 다르긴 하지만 발음은 구분할 수 없는 차기 재무장관을 배려(?)하여 대통령으로 당선되자마자 표기를 바꿔달라고 요구한 셈이다. 대단 대단!

변방의 신문은 전체 이름을 ‘도널드 리건’이라 하기도(1980년 3월 13일 경향)

그런데 여하튼 ‘도널드 리건’이 재무장관 자리에 확정발표된 것은 ‘로널드 레이건’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지 한달이 지난 후였으니 딴에는 히로세 다카시가 오버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물론 그림자 내각이야 이미 확정되었을 수도 있고 그깟 이름에 대한 음모론은 전체 거대 음모론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기는 마이클 무어의 신작 ‘캐피탈리즘:러브스토리’를 보면 도널드 리건이 보통 인물이 아니기는 하다. 대통령이 된 후 증권거래소를 찾은 레이건이 연설을 하는 와중에 노령인 탓인지 말이 상당히 느렸다. 이때 뒤에 있던 리건이 끼어들며 “빨리 좀 말하세요.”라고 하자 레이건이 “오호~”하며 놀라는 장면이 나온다. 단순히 부하직원의 충고였을까?

한국어로 잘 감이 안오면 영어로 표현해보자. “you’ll have to speed it up.” 이것이 그가 한 말이다. “have to”라는 표현이 유난히 눈에 들어온다. 입각하기 바로 직전까지 세계 최고의 투자은행(이었던) 메릴린치의 CEO ‘리건’과 변방국가의 신문조차 이름을 헷갈려 하는 전 캘리포니아 주지사 ‘리건’의 대화 톤이 굳이 주종관계를 따질 게재가 있을까?

어쨌든 답은 알 수 없다. 진실은 한 사람이 – 혹은 두 사람이 – 알고 있을 텐데 둘 다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호사가의 가십거리에 불과하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소위 레이거노믹스가 투자은행, 나아가 미국 자본가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졌는가, 그리고 그것이 소수 지배계급에 의해 획책되었는가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위키피디어를 볼 것 같으면 레이거노믹스를 주장한 것은 사실은 ‘도널드 리건’이다. 그러니 사실 레이거노믹스의 옳은 표현은 원래 발음대로 <리거노믹스>일지도?

p.s. 한편 옛날신문을 살펴보다가 한 가지 재미있는 보도를 발견했다. 1960년대에 CIA가 광범위한 불법 활동을 자행했다는 1974년 뉴욕타임스의 보도에 따라 포드 대통령이 진상조사를 위한 위원회를 꾸리는데 그 위원회 이름이 위원회를 이끈 ‘넬슨 록펠러’의 이름을 딴 ‘록펠러 위원회’였고 ‘로널드 리건’이 이 위원회에 낀 것이다. 당연히 ‘넬슨 록펠러’는 록펠러 집안의 사람이다. 과연 ‘로널드 리건’은 록펠러 집안의 하수인이었을까? 🙂

‘록펠러 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로널드 리건'(1975년 1월 15일 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