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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의 대안은 모두 자본주의보다 못하다”

70년 동안 이어진 공산주의 실험이 가리킨 것처럼, 자본주의의 대안은 모두 자본주의보다 못하다. 청사진으로는 아무리 그럴 듯해도, 실제로 시행되면, 그런 대안들은 모두 정치적 압제ㆍ문화적 통제와 정체ㆍ경제적 빈곤을 낳는다. 반면 자본주의가 제대로 시행된 현대 사회들에서 많은 사람들이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풍요를 누렸다. 사람들이 때로 그 사실을 잊어버리지만, 그들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뛰어남을 깨닫게 된다.[금융위기와 경제적 자유, 복거일, 2008년 11월 06일]

복거일 씨의 이 글에서 흥미로운 오류를 찾아볼 수 있는데 바로 그가 대척점으로 놓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과 “자본주의”의 포지셔닝을 들 수 있다. 즉 그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라는 표현 앞에 “70년 동안 이어진 공산주의 실험”이라는 전제를 두고 있어 독자로 하여금 “자본주의의 대안”을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공산주의 실험”이라고 여기게끔 하고 있다. 그래서 문장 후반의 “자본주의”는 자연스럽게 과거 자본주의 블록의 자본주의 실험을 의미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그가 – 의도적이든 아니든 – 누락하고 있는 것은 대공황 시절부터 80년대 대처 시대가 시작되기 바로 전까지 자본주의 블록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케인즈주의 풍의 혼합경제라는 점이다.

그 당시 정부는 시장을 규제했을 뿐 아니라 실질적으로 그 스스로가 시장의 가장 큰 경제주체로 활동하면서 복거일 씨가 간단하게 “자본주의”라고 칭하고 있는 것, 즉 경제적 자유주의를 뛰어넘는 성과를 보였다. 이를 통해 전후 서구는 그 이전에 한번도 누린 적이 없던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주의”(사실 정확하게는 고전적인 경제적 자유주의)보다 우월한 “자본주의의 대안”이었다. 그 뒤 이러한 개입주의 경제의 피로감과 정치적 보수화로 말미암아 서구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가 등장하였고 사회 곳곳에 광범위하게 경제적 자유주의가 뿌리내린바 그것의 결과가 – 비록 그것이 원인의 전부라고는 할 수 없을지라도 – 바로 현재의 전 세계적인 금융위기다.

요컨대 케인즈주의 풍의 혼합경제는 수십 년 동안 고전적 자유주의의 분명한 대안이었고, – 심지어 자본주의 기반이 전혀 없었던 대부분의 사회주의 블록에서조차 일정정도 기능하였었고 – 그 대안들은 그것의 반작용으로 신자유주의가 한 시대를 풍미하다 엄청난 사고를 치른 이후 다시 한번 경제적 자유주의의 대안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진행방향은 현재로서는 미지수이지만 말이다. 따라서 그가 “궁극적으로 자본주의의 뛰어남”을 말하려면 그가 말하는 자본주의가 어떠한 자본주의인지를 먼저 살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