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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골적이고 천박한 2014년 한국의 자본주의

복수의 임원회의 참석자들에 따르면, 한기총 부회장인 조광작 목사는 지난 20일 오전 11시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내 한기총 사무실에서 열린 긴급임원회의에서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한기총 부회장 “가난한 집 아이들 불국사로 수학여행 가지...]

정 후보는 박 후보가 서울시 예산으로 협동조합 사업을 지원하는 점을 들며 “(이 사업은) 국가보안법 위반 인사들이 주도하고 있다. 박 후보 정체성이 뭔지 알 수가 없다”며 “제가 되면 이런 사업 안 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협동조합으로 사회적 기업을 꾸리고 있거나 예정인 이들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과도 같은 발언이었다.[협동조합 사업 날벼락 맞나.. 정몽준 폭탄발언]

시차가 별로 없는 이 두 유력자의 발언이 현재 한국 자본주의 사회의 민낯을 잘 보여주는 발언이라 생각되어 인용해보았다. 조 목사의 발언은 이 사회의 부유층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흘겨보는 눈초리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입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개인적으로는 ‘사고 난 아이들이 강남의 아이들이었으면 이랬을까’라는 주장은 불편했었는데 조 목사의 발언을 보면 그리 틀린 말도 아니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든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어쩌면 막강한 생산력을 통해 과거에는 부유층만 누리던 일종의 “사치”를 전 인민의 보편적 소비로 확산해왔던 과정이다. 여행은 대표적인 사치 상품이었다. 하지만 유람선과 같은 집합적 소비상품 등을 통해 더 많은 이들이 여행을 다닐 수 있게끔 했다. 그런데 조 목사는 그런 자본주의의 그러한 평등적 측면도 외면한 채, 인종주의적 발언도 서슴지 않고 있는 것이다. 지금은 가난한 집 아이도 유람선 정도는 탈 수 있는 경제상황이다.

레제가 이런 낙관적인 이상향을 묘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좌익들이 확실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의 정치상황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랑스 좌익은 1930년대 파시즘의 위협 하에 사회당, 공산당 등이 결합한 인민전선을 결성한 후 선거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한 1936년 6월 총파업 이후 전국적 규모의 중앙노사협정인 마티뇽 협정(Accords de Matignon)이 이루어졌는데, 이로 인해 대표적 노동조합의 개념과 단체협약의 효력확장규정이 도입되었다. 그리고 이 협정에는 프랑스에서는 최초로 ‘2주간 유급휴가제’가 도입되어 노동자는 비로소 유급휴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페르낭 레제, ‘여가 – 루이 다비드에게 보내는 경의’]

한편 아들의 “미개한 국민” 발언으로 고전하고 있는 정몽준 후보는 관훈 클럽 주최의 토론회에서 협동조합에 대해 위와 같이 발언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경제조직의 지배구조에 대한 다양한 고민 속에 나온 대안적 구조의 조직이다. 그런 조직을 박원순 후보까지 엮어서 색깔론으로 깔아뭉개고 있다. 조 목사의 발언이 어느 정도 봉건적 발상이라면 정 후보의 발언은 대기업의 대주주인 “자본가”다운 발상이다. 협동조합원은 “빨갱이”.

자본주의는 그 속성상 불가피하게 빈부격차가 벌어지고 이것이 사회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서구 자본주의는 복지지출과 같은 경제제도와 소수의 정치세력을 보호하는 정치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결국 갈등은 사회적 비용이고 총체적으로 보자면 이 또한 체제에 위협요소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4년 한국의 유력자들은 갈등 따위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듯하다. 그 천박함이 너무 노골적이어서 소름이 끼친다.

국제노동조합총연맹은 세계에서 가장 노동자의 권리를 지켜주지 않는 나라로 한국을 지목했다.

대한민국 언론 단상

“9.11 테러 이후, 미국에서 가장 중요한 뉴스 매체 대부분은 비애국적 매체로 간주되어 시장점유율 하락을 두려워한 나머지 정부의 월권에 이의를 제기해야 하는 언론의 역할을 포기했습니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명확한 전략이지만, 언론기관이 이득을 얻은 덕분에 결국 국민들은 큰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다.”[스노든의 위험한 폭로, 루크 하딩 지음, 이은경 옮김, 2014, 프롬북스, 74p]

정부 보안기관의 일급기밀을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일반에 공개한 에드워드 스노든의 인터뷰 발언이다. 뉴욕타임스 기자가 왜 그 기밀을 뉴욕타임스에 제보하지 않고 가디언의 칼럼니스트인 글렌 그린월드에게 제보했는지에 대해 묻자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애국주의와 상업주의가 어떻게 언론기관의 입을 다물게 하는지를 단순명료하게 잘 설명하고 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2014년 5월 한국의 언론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부조리한 상황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일어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언론의 모습은 스노든이 묘사하는 바로 그 모습이다. 어쩌면 비즈니스 관점까지도 나아가지도 않아 보이고 사주(社主) 혹은 더 위의 누군가에게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 혹은 복종심 – 엿보인다.

“한꺼번에 죽어서 많아 보이지만,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수로 생각하면 그리 많은 것이 아니다”라는 망언을 한 것으로 알려진 김시곤 KBS 보도국장의 최근 행태를 보면 언론인으로서의 모습도 인간으로서의 모습도 포기한 비굴함이 느껴진다. “연성독재”의 압력에 굴종을 택한 것인지, 아니면 스스로 또 하나의 권력이라고 자부한 것인지 모르겠다.

KBS의 이러한 모습, 나아가 비슷한 행태를 보이는 몇몇 매체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바람직한 언론의 모습이 무엇일까에 대해 다시 고민하게 된다. ‘자본에 굴종하는 언론’이 되지 않게 하려고 소위 “공영화”를 시켰는데 사익을 추구하는 권력층의 스피커 역할만 할 뿐이다. 2014년 대한민국의 언론은 “시장의 실패”와 “정부의 실패”가 동시에 진행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뉴스타파’ 등과 같은 대안매체에서 그나마 희망의 싹을 본다. 이용자의 자발적인 기부로 운영된다는 점에서 외부압력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 돋보인다. 어찌 보면 언론이 지향하여야 할 대안적 구조, 즉 “사회화된 매체”의 가능성이 기대된다. 다만 때로 드러나는 지사(志士)적 태도가 언론의 객관성을 해칠 개연성은 있어 보인다.

JTBC는 ‘손석희’라는 1인이 자본의 지원 하에 전권을 가진다는 점에서 독특한 지형을 형성하고 있다. 현재까지의 모습은 한 자산가의 기부와 철저한 편집권 독립 보장을 통해 독립매체로 자리 잡고 있는 미국의 ProPublica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본질은 다르다. 손석희라는 히트 상품이 가지는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담고 있는 실험이라고 생각된다.

2014년 현재 국민들은 질문을 하지 않는 언론 때문에 너무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다.

또 다른 세월호 사태를 막기 위한 방법은?

잔인한 4월에 발생한 세월호 침몰 사고는 “국민 우울증”이라 할 만큼 많은 이들이 이 사태에 대해서 안타까워하고, 사고를 불러온 것으로 추측되는 이들을 비난하고, “용서하지 않겠다”나 “잊지 않겠다”는 다짐을 하고 있는 비극적인 참사다. 너무나 안타까운 갖가지 사연과 복잡하게 얽힌 원인들이 산재되어 있어서 블로그에서 섣불리 뭐라 하기도 조심스러운 사고다. 그래서 말을 아끼고 있었는데 마침 논지가 비슷한 두 개의 글을 동시에 읽게 되었고, 개인적으로도 이에 공감하는 바가 있기에 여기 옮겨왔다.

똑바로 말하자. 자본주의를 넘어서서 인간이 물질과 생산,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어떻게 구축해야 할지를 고민하는 것은 해야 할 일이고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자본주의라 말할 수도 없는,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이다. 최소한의 도구적 합리성이 있다면 기업이 이딴 식으로 돌아갈 리가 없다. 그러나 이 “해운회사”는 바로 그런 모습을 보여주었고 그 빈 자리를 광신과 무책임과 끼리끼리의 문화가 채웠다. “돈보다 사람”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 없다. 어떤 수준에서는 돈이 더 중요하다. 그딴 식으로 사업하면 쫄딱 망한다는 경험을 보여주면 대부분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안 망했을까? 공무원과 금융기관을 꽉 잡으면 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과 “인간관계”를 잘 구축해 놓는 것이 합리적 기업경영보다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출처]

미국에 살면서 불편한 것 중 하나는, 때로 지나칠 만큼 안전을 강조해 사회적 비용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고치러 가 보면 느끼는데, 차에 안전에 관한 문제가 하나만 있어도 수천 달러를 메기며 전체를 다 갈아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번에는 바퀴에 바람이 좀 빠져 정비소에 가져갔더니 바퀴를 갈아야 한다고 했다. 타이어가 새 것이었고 내가 보기엔 정말 문제가 없어 보여 그냥 좀 고쳐서 써도 될 것 같다고 했더니, 라이어빌리티(liability) 문제가 있어 날 그냥 보낼 수 없단다. 하는 수 없이 바퀴를 새 것으로 갈았다. 이들이 도덕성이 높고 진정으로 내 안전을 걱정해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혹시라도 사고가 발생하면 회사가 져야 할 책임이 워낙 크니 애초에 조심을 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소송이 쏟아지는 나라인지라, 뭐라도 잘못해서 책 잡히면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을 해야 하니, 회사의 자산을 책임질 수 있는 직원들을 채용하고, 그들을 철저히 교육하게 될 수밖에 없다.[세월호 여객선 침몰, 그리고 세모 그룹 유병언]

첫 번째 글을 권복규 이화여대 교수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고, 두 번째 글은 실리콘벨리에서 활동 중인 조성문 씨가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이 글들의 요지는 비슷한 것으로 여겨진다. 약간 각색을 해서 요약해본다면, 이 사회에서의 벌어지는 참혹한 사고의 원인은 “도구적 합리성”이 결여된 “천민 약탈 도적의 무리”가 “합리적 기업경영”이 아닌 “인간관계”로 장사를 해서 생겨나는 일이며 이에 대한 현실적 대안은 “라이어빌리티”를 강조하여 회사의 책임을 “천문학적인 액수의 보상”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대형 사고가 날 때마다 “왜 안전사고에 대한 시스템이 이토록 미비한 것인가?”라는 질문이 이어지지만, 시장경제에서 비용만 발생하는 안전조치에 돈을 쓰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로 인해 발생할 비용이 조직의 존망을 흔들 정도가 되어야 반응할 뿐이다.[출처]

4월 17일 내가 트위터에 올린 글이다. 위의 두 주장과 유사한 주장이고 이 체제에서의 세월호와 같은 기업 – 또는 공공 – 이 제공하는 집합적인 소비재에 대해서는 이러한 대책이 근본적인 해결책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권복규 교수는 자본주의가 발전하며 실제로 안전에 대해 투자하는 것이 전체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있었다고 말하며 우리는 이제야 그 비용을 치르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조문성 씨가 경험한 그 고지식한 정비소일 것이다. 결국 안전하게 하는 게 비용절감인 셈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제도적 합리성을 구현하는 데에는 많은 시일이 걸릴지도 모른다. 이번 사태가 벌어지는 와중에도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 정몽준 씨가 실질적 주인인 현대중공업에서는 노동자들이 연달아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모두가 안전조치 미흡으로 벌어진 일들일 텐데, 막내아들의 페북 망언에 대해서는 사과하던 정몽준 씨가 이 사태에 대해선 묵묵부답이다. 정몽준 씨는 그러면서 정작 서울시에 안전한 사회 시스템을 구축하겠단다. 사회가 아직도 이런 행위에 대해 너그러워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한편, 권복규 교수의 애초의 글은 세월호 참사의 원인을 “신자유주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지나치게 매크로적인 비판이라는 취지의 글이었고, 이에 대한 방증으로 며칠 전에 있었던 서울 지하철 추돌 사고를 들었다. 취지에 일부 공감한다. 하지만 결국 과적이 침몰 원인을 제공했다는 측면에서 자본주의 이윤 논리를 여전히 사태의 원인을 제공한 바 있고 지하철 사고 역시 또 다른 의미에서의 이윤 논리, 보다 정확하게는 비용절감 논리가 원인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공기업 특유의 이윤논리인 셈이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 공기업의 대대적인 “개혁”을 예고하고 있지만 사실 공기업에 대한 이런 공격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자본축적이 일천하고 기본적인 공공서비스가 부재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공기업이 이 나라의 경제발전에 기여한 몫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던 것이 공기업에 대한 “정부의 실패” 논거가 등장하고 재정압박에 직면하자 정부는 공기업의 개혁을 주문했고 이는 거의 예외 없이 이윤추구 논리로 귀결됐다. 그 결과 공공재의 내구연한은 계속하여 늘어났고 안전을 위한 비용은 삭감됐다.

다시 큰 틀에서 보면 서구 자본주의 사회가 우리보다 안전에 있어서는 마이크로하게 더 엄밀한 것이 사실이다. 우리가 지향하여야 할 통제와 규제는 이를 참고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매크로한 측면에서 보자면 체제적 반성도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자본주의가 지구촌 규모의 대량생산/대량소비/집합소비로 고도화된 것은 불과 100여년에 불과하다. 당시 지어진 인프라는 서구에서조차 이제 낡아가지만 긴축재정은 공공/민간 양측에서 새로운 정비를 유예하게 만든다. “안전이 이익”의 선순환 고리가 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R.I.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