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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상품은 자본가의 탐욕?

여기서 말하는 불량상품은 어렸을 때 먹곤 하던 쫀드기, 번데기와 같은 불량식품이나 코 묻은 돈을 털어내려는 목적이 분명한 불량 장난감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불량상품이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표준화되고 평준화된 대량생산 시스템에 의해 생산된, 그 중에서도 그 품질이 하향평준화된 상품 일반을 의미하기 위해 이 글에서 특별히 쓸 표현이다. 즉 사전적인 의미에서의 불량품이 아니라 대량생산을 위해 그 품질이 – 때로는 불가피하게 – 하향평준화된 상품을 말한다.

즐겨보는 만화 ‘맛의 달인’에 보면 두부에 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이 에피소드에서 주인공 지로는 한 양심적인 두부 제조업자의 제조과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제조업자는 두부를 만들 때에 원래 천연 간수를 넣어야 하나 요즘에는 천연 간수가 오염 우려가 있어 할 수 없이 천연 간수와 가장 비슷한 성분의 염화마그네슘을 쓰는 상황을 소개한다. 그런 한편으로 다른 제조업자도 그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몸에 안 좋은 다른 화학약품을 사용하면서 두부의 콩 단위당 생산량을 2~3배로 늘린다는 것을 고발한다. 당연히 맛도 형편없어진다.

이 에피소드에서 볼 수 있듯이 ‘맛의 달인’은 전편에 걸쳐 음식을 만듦에 있어 맛의 비결은 정도를 지키는 것, 그것이 음식의 맛과 품질을 확보하는 철칙임을 강조하고 있다. 좋은 재료에 정성을 깃들이면 최고의 메뉴가 완성된다는 평범하지만 당연한 논리다. 그런데 그 단순한 진실을 역행하는 것은 흔히 요리사의 오만, 잘못된 요리법 등이 지적되고 있다. 한편으로 더 본질적으로 지적되는 문제점은 대량생산 사회에서의 기업의 이윤논리다. 즉 최대한 이윤을 창출하기 위해 식품관련기업들은 앞서 두부의 예처럼 잘못되고 저렴한 생산법을 택함으로써 맛을 포기하고 양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를 보고 있자면 생산자들이 맛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이 또 하나 있다. 바로 맛에 무지한 소비자들이다. 잡지에 이름이 오르내린 맛집에 부화뇌동하여 몰려드는 소비자, 고급레스토랑의 허울 좋은 음식에 허영심을 느끼는 소비자들이 그들이다. 그리고 그 정도는 아니더라도 만화의 등장인물 다수는 어느새 일상적으로 하향평준화된 대량소비용 식품의 맛에 길들여져 있다. 조미료 맛에 물들어 조미료를 쓰지 않은 음식을 싱겁다고 여기는 우리들처럼 말이다.

만화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우미하라와 지로는 그러한 둔감한 미각을 거부하고 최고의 맛을 즐길 것을 독자에게 요구하지만 사실 그게 그리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들은 절대미각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온갖 재료가 섞여진 음식을 맛보며 마치 와인을 분석하는 소뮬리에처럼 음식을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하지만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그런 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솔직히 말하면 대량소비를 목적으로 하는 생산업자는 절대미각을 지니지 못한 절대다수의 대중을 대상으로 맛의 수위를 조절하게 마련인 것이다. 정규분포 곡선에서 상하위의 극소수 소비자는 그들의 목표수요층에서 제외하면 그만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공리주의가 맛을 포기한 생산자와 소비자의 암묵적인 합의 속에 달성된 것이다.

그러니 이제 톡 까놓고 생각해보면 불량상품을 만들게끔 한 장본인은 사실 불량소비자일 수도 있다. 대량생산 시대 이전에는 소수의 특권층이 맛보았거나 향유하였던 많은 것들, 예를 들면 설탕, 냉장고, 자동차와 같은 것들이 이제는 웬만한 가처분소득이 있는 집에서는 사치품이 아닌 필수품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 특히 먹거리에 있어 – 하향평준화된 또는 거짓으로 꾸며진 – 조미료나 인공향신료 등 – 상품들이다. 더 극단적으로는 항생제를 밥 먹듯이 먹은 닭고기와 돼지고기 등이다. 농약으로 떡칠을 한 채소들이다. 효용은 즉각적인 반면 폐해는 장기적이므로 이러한 해악은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편의적으로 눈감아진다.

그러므로 적어도 이점 하나는 인정하고 들어가야 한다. 대량생산의 대량소비 사회에서 양(量)과 질(質)을 동시에 추구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대량생산 사회에서 상품이 불량화되는 것은 자본가의 탐욕일 수도 있지만 때로 시장에서 용인할 수 있는 가격에 상품의 대량소비를 가능케 하는 고육지책일 수도 있다. 불과 몇 십 년 전의 ‘최저생계기준’과 지금의 그것을 비교해보면 소비자의 탐욕(?)도 자본가의 탐욕만큼이나 성장해왔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100년 전까지 설탕은 서구사회에서도 특권층들이 먹는 사치품이었고 50년 전까지 서울에 승용차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20년 전까지 인터넷과 휴대전화는 소비의 대상이 아니었다.

바로 이점이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사회에서 소비자로서 스스로에게 던져봐야 하는 실존적인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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