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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승병님 글에 대한 댓글

채승병님이 고맙게도 지난 번 끼적거린 내 글트랙백 보내주신 글에 대해 댓글을 쓰다가 너무 길어져 여기 올려두도록 한다. 너무 좋은 글이니 꼭 가서 읽으시도록~ (채승병님 글읽기)

유익한 글 잘 읽었습니다.

다만 외람되지만

“어설프게 읊어대고 으스대던 시장과 정부의 문제점들이 실은 그들이 이미 치열하게 고민하며 펼쳐낸 것임을 발견했을 때의 화끈거림이 아직도 생각난다.”

에서 뭐 얼굴이 화끈거릴 것까지야 있을까 싶기도 하네요. 어차피 학술논문도 아니고 블로그인바에야 자신의 생각을 정밀소묘하기보다는 캐리커쳐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작용해가며 선조들의 발자취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는 블로깅아니겠습니까? ^^;

여하튼 제가 이야기했던 바에 대해서는 큰 첨삭이 없으시니 따로 드릴 말씀은 없지만 굳이 제 글에 대해 말하자면 저는 적어도 해당 글에서는 “시장이냐 정부냐”라는 질문을 던지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오히려 정부가 시장의 동조자 내지는 방관자?) 그보다는 전후 어떤 식으로든지 “진화”해온 시장이, 과연 언급하신 고전적 물리학에서의 어떠한 이상적인 모형처럼 자연법적인 보편성을 지니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스티글리츠가 ‘결국 시장은 복구되어야 한다’기에 더더욱 그런 궁금증이 더했습니다. 그래서 sonnet님께 그 부분을 넌지시 여쭈었더니 ‘두통감기에 뇌수술’한다는 핀잔만 들었습니다.^^(뭐 보론을 하신다니 기대해보도록 하고요)

또 하나 이 글을 읽으면서 불현듯 느낀 점이 있는데요. 대개 그 시대의 경제학자들은 좌우를 떠나서 역시 자기네들이 살고 있는 공간의 시장만을 바라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이에크의 ‘결과론적 옹호론’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만약 그 당시 시장이 성공적이었다면 그것은 제1세계의 시장의 성공이었을 따름이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겠죠. 그리고 그 경제학자들은 그러한 시장만을 분석하였을 것이고요. 인도의 발달한 직물산업을 폭력으로 좌절시킨 영국의 무력사용은 그 분들에게 영국 면화산업의 발전요인의 고려사항이었을까요?

문득 에르제(Herge)라는 만화가가 생각나네요. 벨기에 만화가인 이 분은 제가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이라는 불어권, 아니 유럽 최고의 인기 만화를 그려낸 작가입니다.(이 만화를 스필버그와 피터 잭슨이 실사영화로 만들 거라는군요. 기대만빵!) 왜 이 분이 생각났는가하면 이 분은 나름 흑역사를 지니고 계시기 때문이죠.

이분의 첫 작품들은 1930년대 초반 그린 ‘땡땡 소련에 가다’와 ‘콩고에서의 땡땡’입니다. 그런데 이 두 작품은 벨기에의 우익 소년잡지에 그림을 담당한 백인 에르제가 지니고 있던 이념적, 종교적 편견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에르제는 두고두고 후회합니다. 심지어 ‘땡땡 소련에 가다’는 흑백 버전을 칼라 버전으로 업그레이드시키는 것조차 거부하죠. 그분의 최후 작품은 쿠바혁명에 감화받아 남미 게릴라의 활약상을 담은 ‘땡땡과 피카르소’입니다.

다른 데로 많이 샜네요. 🙂

요는 이렇습니다. 많은 이도 그렇거니와 저도 사물을 바라볼 때에 수많은 편견에 사로잡히곤 한다는 것을 수시로 깨닫곤 합니다. 그래서 저와는 조금은 다른 시각을 지니고 계신 것으로 간주되는 sonnet님을 가끔 들이받기도 하고 또 이렇게 채승병님의 주옥같은 글에 많은 것을 깨닫기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모든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 콩고인을 하인처럼 여긴 한때의 자신을 극복한 에르제처럼 – 언젠가는 더 넓은 시야로 나아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그리고 앞서 말씀드렸듯이 저 석학들의 주장에서도 그들만의 편견을 느낀 것도 사실이기에, 그래서 솔직히 솔직담백하게 세계관을 바꾼 에르제가 더 멋져보여 예로 들었습니다. 글이 삼천포로 갔네요. 🙂 (글에 대한 독후감에서 boys be ambitious 분위기로~)

여하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글 잘 읽었습니다. 이래서 블로깅하는 보람이 있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