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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가뱅크 단상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김석동 금융위원장은 4개 정책금융기관 기능 통폐합과 민간 투자은행(IB) 대형화에 대해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OK사인`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라고 단언한다. 김 위원장은 지난 1월31일 청와대에서 열린 공공기관 혁신워크숍에서 신임 금융위원장 자격으로 대통령과 함께 헤드테이블에 앉았다. 당시 김 위원장은 원전 수주와 같은 초대형 SOC(사회간접자본)의 금융지원 방안을 보고했고 대통령으로부터 “좋은 생각이다, 잘 추진해 보라”는 답을 들었다고 한다.[`김석동과 강만수`..쌓여가는 `메가뱅크` 징후들]

여기서 “4개 정책금융기관”이라 함은 산업은행, 정책금융공사, 수출입은행, 무역보험공사를 지칭한다. 산업은행과 정책금융공사는 얼마까지만 해도 산업은행이라는 한 몸의 국책은행으로 국내 인프라시설 프로젝트금융의 선두주자를 자처하고 있는 기관들이다. 수출입은행과 무역보험공사는 각각 공적수출신용기관(Export Credit Agency)의 대표기관들이다. 이들 기관들이 통합된다면 말 그대로 프로젝트금융에 있어 국내에 다른 경쟁자가 있을 수 없는 메가뱅크가 되는 셈이다.

현 정부의 메가뱅크에 대한 욕심은 – 특히 이번에 산은지주 회장으로 내정된 강만수 씨를 대표로 하여 – 이전 정권부터도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온 “금융선진화”에 대한 관료들의 갈망이 근저에 놓여 있다고 보는 편이 맞다. 오랜 기간 관치금융에 익숙해있던 국내금융기관들은 관치금융 나름의 요소투입에 따른 효율성을 높았을 개연성은 있으나 리스크 분석능력, 금융조달방안의 다양화, 자산의 성장 등에 있어서는 전 세계에서 차지하는 경제규모에 걸맞지 않게 왜소했던 것도 부정하기 어렵다.

참여정부에서는 이러한 국내금융의 상대적 후진성을 “동북아 금융허브”라는 신자유주의적 해법으로 극복하려 시도했다. 이는 홍콩, 도쿄, 싱가포르 등이 점유하고 있던 아시아의 금융허브 기능을 우리나라에 끌어오겠다는 다소 무리수가 있는 정책이었는데, 이 세부과제에도 “동북아 자본시장을 선도하는 대규모 투자은행 출현”이라는 메가뱅크와 유사한 개념이 들어있다. 실천방안은 “금융투자회사간 M&A 촉진을 위한 지원방안 모색”이었으나 이를 위해 정부가 특별히 기울인 노력은 없다.

그러던 것이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메가뱅크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은 인수위 시절부터 “챔피온뱅크” 육성계획을 추진했는데, 이는 “산업은행, 우리금융지주, 기업은행을 합병해 초대형 금융회사를 육성하자는 아이디어”였다. 재밌는 것은 당사자의 말에 따르면 그 제안배경이 “한국이 아시아 금융허브가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아이디어의 제공”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참여정부의 “동북아 금융허브”와 강만수 씨의 “챔피온뱅크”는 맥락상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챔피온뱅크” 시도는 이후 외환위기의 태풍과 더불어 산업은행의 정책금융공사의 분리와 산은지주로의 변신, 우리금융지주의 민영화 추진 등 역풍이 불어오면서 사그라졌다. 이후 메가뱅크의 꿈은 엉뚱한(?) 곳에서 다시 피어올랐다. 또하나의 메가뱅크론자인 어윤대 씨가 KB금융지주의 회장이 되면서 우리금융의 인수 의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그는 조선비즈와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에 “자산 규모로 세계 50위 정도는 되는” 은행이 나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메가뱅크론 역시 KB금융지주 내외부에서 거센 역풍에 부닥치면서 또 하나의 해프닝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당시 어윤대 씨의 메가뱅크 주장에서 한가지 흥미로운 논리가 강만수 씨의 소위 3차 메가뱅크 시도 의혹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는 점이다. 즉, 어윤대 씨는 당시 인터뷰에서 해외에서 원전 수주할 때 국내 은행들의 신용도가 떨어져 애로를 겪고 있다는 주장을 하였는바, 이번 메가뱅크說 역시 UAE원전에 대한 프로젝트금융의 필요성 배경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로 경쟁력이 떨어지나?
“하지만 우리나라 은행들의 수준은 B+ 수준이다. A나 A+가 돼야 글로벌 경쟁력에서 이길 수 있다. 1970년대 우리나라 기업이 바레인 등에 가서 공사할 때 보험을 드는데 우리나라 은행 신용도가 없어 외국계 은행이 중복으로 보증을 섰다. 똑같은 현상이 지난해 말 원전 수주를 한 UAE(아랍에미레이트연합국)에서 되풀이됐다. 우리나라 금융기관은 늘 뒤 따라가고 있는데 이제는 달라져야 한다.”[어윤대① “한국 금융기관도 세계 50위권 나와야”]

전 세계 금융위기 이후 비판론자들은 대형은행이 대형위기를 불러온다며 월街의 대형은행들에 대해 거세게 비판하였다. 이에 대형은행들 역시 과거 스탠다드오일이나 AT&T와 같은 독점기업처럼 해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적지 않다. 이러한 주장에 개인적으로 공감하면서도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국내금융기관이 그 정도까지 우려할만한 수준으로 대형화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따라서 방향 없는 산은지주의 민영화보다는 오히려 공적기능을 강화하는 차원의 재정비가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본다.

하지만 물리적인 메가뱅크 설립이 과연 강만수 씨나 어윤대 씨가 지니고 있는 논리의 흐름, 즉 <은행합병 → 시너지효과 발생 → 은행신용도 상승 → 국제적 수준의 투자은행>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연구할 면이 많다고 생각된다. 특히 시기상으로 메가뱅크의 대두가 UAE원전의 프로젝트파이낸스와 맞물려 있는 점이 찝찝하다. 이미 시중은행의 자금능력 미달, 이슬람채권 도입의 무산 등으로 난항을 겪고 있는 UAE원전 프로젝트를 위해 무리수를 두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한국금융연구원이 최근 발표한 <해외프로젝트 수주확대를 위한 민간금융의 역할>이란 보고서 역시 UAE원전 등 대규모 사업에 국내금융기관의 조달능력이 떨어진다는, 메가뱅크論과 유사한 논리의 흐름을 가지고 있다. 다만 보고서는 민간금융의 역할강화를 강조하지만, 결국 관건은 조달 금리 경쟁력이나 장기자금 조달능력이 국책은행이든 시중은행이든 국가신용도 등과 맞물려 서구금융권에 비해 상대열위에 놓여 있는 것이 현실이다. 메가뱅크가 만들어진다고 대번에 신용등급이 올라갈 것 같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