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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록스 사회주의

크록스(Crocs)가 파산신청을 할 것 같다는 소식을 얼마 전에 접했다. 우선 크록스가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 잠깐 설명.

1999년 캐나다의 한 연구소에서 경량의 항균성 고무소재가 개발됐다. 이름은 크로슬라이트(Croslite). 수상스포츠 전용신발을 겨냥해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미국에서 이 소재 이름을 따 ‘크록스’라는 제품이 일반 신발로 출시되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투박하지만 일단 신어보면 신은 듯 안신은 듯 가볍고 편한 느낌 덕에 소비자 마음을 사로잡았다.[출처]

이 설명처럼 크록스는 가볍고 굉장히 질겨서 나도 여태 몇 년 동안을 캐주얼을 입을 때면 주로 이 크록스로 – 물론 다른 운동화도 있지만 – 버티고 있다. 2002년 첫 출시된 이 제품은 현재까지 전 세계적으로 1억 켤레 이상이 팔린 것으로 추산된다니 엄청난 히트상품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좋은 제품을 만드는 회사가 왜 파산신청을 할 정도로 경영이 어려워졌을까? 그 여러 이유 중 주된 것 하나는 역설적이게도 너무 튼튼한 재질 탓에 두 번째 구입하는 고객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 역시 앞서 말했듯이 크록스 하나로 몇 년을 버티고 있다. 오래되었다는 느낌도 별로 나지 않을 정도다.

그 엄청난 내구성이 오히려 비즈니스의 걸림돌이 되었다는 것이 어이없어보일지 몰라도, 조금만 달리 생각해보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신발과 같은 소비재는 일정기간 지나면 마모되어 새 제품이 팔려야 상품의 사이클이 정상적으로 돌아가게끔 되어있다. 그런데 몇 년을 지나도 신발이 멀쩡하다면 이제 회사가 멀쩡하지 못한 것이 당연한 일인 셈이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자본가가 상품을 생산하는 주된 이유는 교환가치 실현을 통한 이윤창출이다. 소비자는 그 목적으로 생산된 상품의 소비를 통해 사용가치를 실현한다. 소비자가 특정 상품의 사용가치에 만족하고 있는 동안은 새 상품을 소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본가는 부단히 여러 경영전략을 쓴다.

이를테면 자본가는 기존 상품을 업데이트하면서 새로운 소비욕구를 자극한다. 어릴 적 치약을 잘 쓰고 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불소치약이니 줄무늬치약이니 하는 것들이 출시되었던 일이 기억나는지? 예전 치약은 더 이상 치약도 아닌 것 같다. 패션 사이클을 타는 의류가 그렇고, 버전을 업데이트하는 소프트웨어가 그렇고 자본주의 거의 모든 상품은 새로운 소비욕구를 자극한다.

보다 교묘한 방법이어서 어느 경영학 교과서에도 이러한 전략을 공유하거나 권장하지 않겠지만 또 하나의 경영전략은 바로 상품의 주기적인 마모다. 어떤 이가 말하길 사실 전구의 필라멘트는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정도의 품질이지만 기업생존을 위해 일정시간이 지나면 뚝 끊어진다고 한다. 사실 여부야 알 수 없지만 일정한 진실은 담고 있다. 상품이 마모되지 않으면 생산이 필요 없고, 생산이 없으면 자본주의는 망한다.

그렇다면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소비자들은 광고를 통한 소비자극이나 일정기간이 지나면 닳아버리는 상품의 교체에 익숙하니 계속 그렇게 살면 되지 않겠는가? 생산이 늘고 소비가 늘어야 경제도 순환되고 GDP도 올라가고 고용도 창출되는 것 아닌가 말이다. 케인즈는 아무것도 하지 않느니 낭비로 보일지라도 구덩이라도 팠다가 다시 묻는 것이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했는데 이보다 훨씬 생산적이지 않은가 말이다.

경제 시스템이란 희소자원을 어떻게 분배하느냐가 관건인 시스템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무턱대고 찬성할 일만은 아니다. 결국 우리 지구는 ‘희소자원’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자본주의의 엄청난 상품생산력으로 지구의 자원은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자원의 사이클링이 오랜 기간이 걸린다는 점을 감안하면 어찌 되었든 자원절약은 생존의 테마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크록스는 정말 효자상품이다. 소비자의 사용가치도 충족시키면서 – 물론 투박한 디자인은 오래 보면 싫증이 나긴 하지만 – 내구성이 좋아 자원절약형이다. 문제는 그것을 생산한 자본가는 망할지도 모르게 되었다는 점이다. 소비자와 지구를 위해 좋은 일을 한 이들이 곤경에 처했다는 것은 안타깝고 모순된 일이다. 인민영웅이지 않은가?

결국 그 모순의 여러 원인 중 하나는 생산의 자유, 다른 표현으로 하면 무정부성 때문이다. 고전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어느 누가 어떤 제품을 생산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고들 이야기한다. 현실의 많은 생산자들이 사실 법적요건만 충족하면 어느 상품을 개발하고 판매하여 흥하거나 망하거나 한다. 크록스와 같은 코끼리나 신을 신발을 생산자 자유의사로 생산하여 판매했고, 흥하다가 망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개별기업인 크록스는 자유의사로 사업을 다각화하거나 크록스의 내구성을 포기하지 않으면 – 물론 눈에 띄게 이랬다가는 더 빨리 망하겠지만 – 자유의사로 망하게 될 것이다. 그 노동자들은 망한 기업에서 같이 망한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선호하는 이들이 지극히 선호하는 기업 생존 사이클이다. 흥할 놈은 흥할 짓을 한 거고 망할 놈은 망할 짓을 한 거다. 그러니 Let it be.

예를 들어 생산의 무정부성이 어느 정도 통제되는 사회에서 크록스가 생산되고 있었다고 가정하자. 생산통제기구는 크록스의 개발자들에게 기술혁신의 일정대가를 치르고 그 권리를 취득한 후 소비자들에게 크록스를 제공한다. 어느 순간 그 시장이 포화상태에 이르러 크록스의 소비가 예전만 못하게 된다. 생산통제기구는 크록스의 생산인력을 다른 내구재의 생산라인으로 재배치한다. 회사가 망한 것이 아니라 재배치한 것이다.

GM이 망할 위기였다가 구제 금융을 받고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향후 기술혁신이나 새로운 제품이 히트하여 다시 해 뜰 날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개인용 승용차의 지구적 시장은, 그리고 그것이 소비하는 석유의 공급은 어느 임계점을 넘어섰지 않은가 하는 판단도 고려되어야 하는 생산 분야다. 그것을 한 기업의 생존경영의 차원으로만 해석해서는 곤란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 시스템에서조차 필수불가결한 산업분야는 직간접적인 통제수단을 통해 재배치하게 마련이다. 바로 GM이 그랬고 월스트리트가 그랬다. 앞서 꾸며본 소리인 크록스 재배치와 GM 및 월스트리트의 재배치가 다른 점은, 전자는 모두가 만족한 경우고 후자는 대부분 수혜기업에게만 – 특히 경영층에게만 – 좋은 재배치라는 점이다. 앞서의 경우가 소비자를 위한 크록스 ‘사회주의’라면 후자는 자본가를 위한 ‘사회주의’라고나 할까?

물론 크록스 사회주의가 정상적으로 돌아가느냐 하는 문제는 또 다른 문제다. 예전 구 사회주의 블록에서도 이러한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허다한 사례가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자본주의 역시 끊임없이 시스템의 실패를 겪고 있으며, 사실 그것들은 이런저런 변태적인 노력에 의해 극복되고 있음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또 다른 변태적인 노력이 보다 강화된 생산재배치 – 실질적으로 만인이 만족하는 – 일수도 있다는 상상을 굳이 꺾을 필요가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