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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석유 파이프라인 정치와 러시아-그루지야 사태

US oil pipeline politics and the Russia-Georgia conflict

By Alex Lantier
21 August 2008

미국언론들이 그루지야의 민주주의를 주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갈등을 일으키고 있는 그루지야 대통령 미하일 사카쉬빌리를 미국이 지원했던 분명한 이유 하나는 그루지야가 코카서스와 카스피 해로부터의 석유와 가스 수출의 주요 통행국가의 하나로 자리매김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루지야가 그루지야에서 탈퇴한 남오세아티아에 있던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에 폭격을 가하면서 그루지야와 러시아 사이의 적대가 분출된 8월 7일은 파이프라인 정치와 중앙아시아에서의 그 경제적이고 군사적인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해 미국이 대리국가들(proxy states)을 공격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이러한 정책의 큰 윤곽은 소비에트의 1991년의 붕괴 이후부터 과거 소비에트 국가였던 곳들과 미국과의 관계를 규정하였다. 그 시절 미국의 투자자들은 이전 소비에트 경제의 많은 부분을 획득하고자 몰려들었고, 그 중에서도 두드러지게 카스피 내만의 석유 및 가스 산업에 몰려들었다. 1990년대 초반 서방의 에너지 기업들은 카자흐스탄의 텡기즈(Tengiz) 유전, 아제르바이잔의 Azeri-Chirag-Guneshli(ACG) 유전, 그리고 투르크메니스탄의 다울레타바드(Dauletabad) 천연가스전과 같은 수많은 사업들을 개발할 수 있는 지분을 확보하였다.

착수단계에서부터 미국 회사들과 자문들은 과거 소비에트 국가들에로 하여금 미국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적대적이라고 여기는, 특히 러시아와 이란과 같은 나라들을 우회하는 파이프라인 경로에 동의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그러한 파이프라인은 미국의 라이벌에게서 통행료 수입과 파이프라인 흐름을 차단할 수 있는 그들의 권한으로부터 나오는 정치적 레버리지를 제거했을 뿐 아니라 친미 지역 동맹을 함께 결합할 수 있는 기회를 워싱턴에 제공하기도 했다.

1990년대 중반 빌 클린턴 정부는 러시아, 이란, 중국의 영토를 우회하면서 카스피 해의 석유와 가스를 수출하기 위한 두 개의 주요한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착수한다. 첫 번째 것은 투르크메니스탄의 가스를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을 통해 인도양의 항구들로 수출하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 때문에 워싱턴은 투르크메니스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TAP) 파이프라인을 건설하기 위해 1995년에서 1996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을 통일하고 평화를 유지하도록 탈레반을 지원하였다. 이 계획은 결국 북부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는데 실패한 탈레반의 무능력 때문에 좌초되었다.

또 하나의 계획은 코카서스에의 친미 성향의 소국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을 통해 서쪽으로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것이었다. 카스피 해의 동쪽해안에 위치한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을 연결하는 해저 카스피해 횡단 파이프라인과, 바쿠(아제르바이잔)-티빌리시(그루지야)-세이한(터키) 파이프라인은 카스피 해 에너지 수출의 상당량을 지중해로 보낼 것이었다. 이 파이프라인은 특히 카스피에서 서구로 향하는 에너지 루트에 대한 러시아의 오랜 지배에 대한 결정적인 반격으로 여겨졌다.

이 사업의 정치적 성격은 부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가 최근 “브리티시 페트률룸이 30%를 소유하고 운영하고 있는 40억 달러짜리 BTC 파이프라인은 카스피의 석유를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또는 러시아를 통해 보내는 것을 피하기 위해 그루지야로 길이 잡혀있었다. 10마일짜리 파이프라인이 카스피 해의 석유를 잘 설치된 이란의 파이프라인 시스템으로 연결할 수도 있었다.”라고 보도하였다.

클린턴 정부의 관리들은 무모하게도 바쿠-티빌리시-세이한(BTC) 파이프라인을 위해 로비를 감행했다. 이 파이프라인은 아제르의 수도 바쿠 근처의 ACG 유전에서 그루지야의 수도 티빌리시를 거쳐 세이한의 지중해 항구까지 석유를 수송할 것이었다.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야, 터키가 BTC 파이프라인에 찬성하는 국제조약에 서명한 후 클린턴은 2000년에 그 파이프라인이 “20세기 말에 가장 중요한 성취”였다고 말한바 있다.

2001년에 입각한 부시 행정부는 동일한 기본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국의 군사력과 전략적 영향력을 사용하기로 계획하였다. 많은 고위관리들이 소비에트에서의 미국 에너지 기업의 초기투자에 직접 개입하였다. 국가안보 보좌관을 거쳐 국무장관이 된 곤돌리자 라이스는 1991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의 석유 메이저 쉐브론의 이사회에 소비에트 관련 전문가의 자격으로 종사하였다. 이 시기 쉐브론은 텡기즈 유전에서 주요지분을 획득한다.

부통령 딕 체니는 석유 인프라회사인 핼리버튼의 CEO로 재직하였고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카자흐스탄 정부에 의해 조직된 카자흐스탄의 석유자문위원회 위원이었다. 이 자문위원회에는 석유 메이저 쉐브론과 텍사코의 CEO들도 위원이었다. 1990년대에 체니는 또한 아버지 부시의 행정부에서 국방부 장관을 했던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핼리버튼 이사진과 아제르 정부사이의 회담을 주선하였다.

부시 행정부는 러시아에서 전혀 다른 정부를 만나게 된다 : 보리스 옐친 대통령은 2000년에 자신이 고른 후계자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권력을 넘겼다. 석유 매출 덕에 러시아의 경제가 소비에트의 붕괴를 초래했던 절망적인 추락로부터 서서히 살아났다. 그리고 푸틴은 보다 독립적이고 독자적인 외교정책을 실행할 계획을 세운다. 이러한 회복은 푸틴의 권력쟁취 이후에 전 세계 유가가 치솟기 시작하자 가속도를 낸다.

그러나 2001년 9월 11일의 테러리스트 공격의 여파로 푸틴은 표면상으로는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에 대한 미군의 공격을 위한 물류기지라는 명목으로 실시된 카스피 지역 군사기지에로의 미군배치를 묵인한다. 그러나 또한 이러한 배치를 통해 미국은 자신들의 파이프라인에 대한 이해관계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가장 명확하게 중동, 중앙아시아, 그리고 러시아를 중국의 태평양 해안과 연결하는 경쟁적인 네트웍인 “범아시아 글로벌 에너지 가교”를 마련하겠다는 중국측 계획의 일시적인 좌절을 초래하였다.

그루지야는 곧 서방의 파이프라인 계획에서 주요한 통과국가로 부상하였다. 2002년 런던에서 아제르바이잔의 샤 데니즈(Shah Deniz) 가스전에서 바쿠와 티빌리시를 거쳐 터키의 동쪽 도시 에르주룸으로 이어지는 천연가스 수송관(BTE)과 함께 BTC 파이프라인의 건설을 시작하기 위한 국제 컨소시엄이 출범하였다. 또한 BTE 파이프라인을 에르주룸에서 비엔나까지 연장되는, 소위 “나부코(Nabucco)” 파이프라인을 통해 유럽 시장으로 연결하는 계획들도 세워졌다.

그 결과로 그루지야는 2003년 겨울 예두아르드 세바르드나제(Eduard Shevardnadze)의 축출로 이어진 “장미 혁명”이 벌어진, 러시아와 미국이 처음으로 공개적으로 대립하는 지역이 되었다. 미국이 지원하는 야당에 의해 선거결과에 대한 논란이 야기되었던 총선에서 야당은 일련의 시위를 조직했고 결국 의회를 장악했다. 미국의 집중적인 훈련을 수료한 그루지야 군부는 당시 국무부장관인 콜린 파웰을 비롯한 미국의 최고위 관리들이 세바르드나제가 사임하라고 개인적으로 개입하는 동안 한쪽으로 비켜나 있었다.

이런 미국산(made-in-the-USA) 공격은 세바르드나제의 협력자 중 좀더 미국과 친했던 이들에게 일련의 권력을 안겨주었는데 가장 주되게 콜롬비아 대학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미하일 사카쉬빌리를 들 수 있다. 사카쉬빌리는 2004년 1월 공식적으로 그루지야의 대통령에 취임한다.

2003년 있었던 의회 선거 캠페인에서 세바르드나제와 사카쉬빌리의 가장 큰 차이은 그루지야에서의 인종적 소수 지역을 어떻게 처리하는가에 있었다. 세바르드나제는 아드자리안(Adjarian)의 정치가 아슬란 아바쉬드제(Aslan Abashidze)와 연합했다. 반면 사카쉬빌리는 노골적으로 이 지역 전체에 대해 티빌리시가 총체적인 통제를 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세바르드나제가 아드자리아, 아브카지아, 남오세아티아 등과 같은 그루지야의 지방정부의 탈퇴와 독립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모스크바의 명백한 허가를 받았음을 의미한다.  

2004년 사카쉬빌리는 아드자리아에 그루지야 군대를 동원해 침공하여 협박함으로써 아바쉬드제를 추방하는데 성공한다. 재임기간 동안 그는 러시아의 평화유지군이 주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오세아티아와 아바카지아를 위협하였다. 

미국의 석유를 둘러싼 이해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장미 혁명은 완벽한 타이밍이었다. 그것은 2005년의 BTC 파이프라인의 개통의 1년 전에 이루어졌는데, 이는 미국 대외정책에서 가지는 가치는 그루지야 정부가 러시아의 압력으로부터의 자유에 의존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장미 혁명으로 말미암아 그루지야 정부는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갔고, 그루지야 민족주의에 굳게 헌신하던 세바르드나제를 교체하고, 그루지야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다. 사카쉬빌리 치하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은 그루지야의 항상적인 공격위협에 놓여있던 소수지역에 국한되었다.

장미 혁명 이후 중앙아시아 파이프라인 정치지형의 보다 광범위한 전개는 미국에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 하나는 점증하는 모스크바와의 무모한 대립에서 사카쉬빌리를 지원하는 미국의 계산이 일정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점령에 대한 저항이 커감에 따라 결국 중앙아시아에서 인도양으로 잇는 TAP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려는 계획이 좌절되었다. 결과적으로 그루지야를 통한 코카서스 파이프라인이 워싱턴이 용인할 수 있는 중앙아시아의 석유와 가스 수출의 유일하게 가능성 있는 통로가 되었다.

2007년 12월 러시아가 카자흐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과 함께 동 카스피 해에서 러시아로 이어지는 새로운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는 계약을 체결한다. 연간 200억 큐빅미터의 최초 수출용량을 지닌 이 파이프라인의 건설은 중앙아시아 정부들이 주요한 석유 및 가스 자원을 코카서스에서 현존하는 미국이 지원하는 파이프라인에 연결될 잠재적인 카스피 횡단 파이프라인에 의존할 것이라는 미국의 희망에 엄청난 일격을 가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중앙아시아로부터 이웃한 서쪽의 중국으로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에너지 공급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2001년 미국의 중앙아시아로의 주둔으로 인해 좌절을 맛본 중국은 이후 많은 파이프라인 계약을 체결하였다. 카스피 북쪽 지역의 카자흐 유전과 중국 북쪽의 신장(Xinjiang) 자치지역의 중국 파이프라인 네트웍을 잇는 카자흐스탄-중국 석유 파이프라인이 현재 건설 중이며 2009년 10월에 운영을 개시할 것이다. 그 지선이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의 유전을 향하는 평행하는 천연가스 라인도 건설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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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자본의 목에 누가 방울을 달수 있을까?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의 부실화에서 비롯된 미국의 금융위기, 이에 따른 전 세계 경제의 출렁거림의 근본원인은 무엇보다도 모기지 대출을 남발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낮았던 대출 금리와 이에 따른 시장참여자들의 투기적인 묻지마 대출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들 수 있는 또 하나의 주요원인은 금융에 대한 탈규제, 혹은 미 금융당국의 부실한 규제일 것이다.

금융에 대한 탈규제는 1970년대 리처드 닉슨이 달러에 대한 금태환을 일방적으로 포기한 이후 미국을 시작으로 하여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금환본위제 포기에 따른 환율위험 노출과 금융탈규제에 따라 금융시장에는 파생상품 시장의 질적/양적 성장, 투자은행의 대규모화 및 세계화, 헤지펀드 등 규제를 받지 않은 금융자본의 융성, 기초자산의 증권화 등 이전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새로운 환경이 조성되었다.

전후 얼마동안은 IMF, 세계은행, 국제결제은행(BIS) 등의 국제적인 금융기구의 활용방안에 대해 회의적이었던 미국은 자국의 금융업 팽창 및 이에 따른 시장 확보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이들 기구들의 새로운 용도를 발견 – 또는 발명 – 했다. 즉 이들 기구들이 자본주의의 무정부성에 따라 – 또는 의도된 무정부성에 따라 – 자금경색에 빠진 국가들에 구제 금융을 빌려준 뒤 자본투자제한 등에 대한 탈규제(특히 금융부문에서)를 강제하고 BIS 비율 준수 등 까다로운 새로운 금융기준을 마련한 뒤 미국 금융자본의 무혈입성을 돕는 역할이 그것이었다.

이렇게 전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하여 멈추지 않는 자본회전을 목표로 삼고 있는 서구의 금융자본에게도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시장은 미국일 것이다. 세계 최고의 구매력을 자랑하는 국민, 세계 최고 규모의 자본시장, 그와 동시에 유동성위험이나 신용위험이 가장 적은 멋진 곳이 바로 미국이 아닌가 말이다. 문제는 시장이 상대적으로 안정되어 있어 높은 이윤창출의 기회가 적고, 탈규제 기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국의 금융당국은 세계에서 가장 능력 있는 규제당국이라는 점이다.

그래도 여전히 기회는 항상 존재했는데 한때 ‘닷컴’이라는 사명만 가지면 황금주식으로 행세했었던 닷컴버블 붕괴 이후 찾아온 새로운 기회는 바로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이었다. 이 거대한 시장에 온갖 희한한 종류의 파생상품이 얽히고설키면서 탄생하였고 여기에 투자은행, 헤지펀드, 모노라인, 기타 수많은 이름도 듣보잡인 투자자들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는 바로 그 시점에서 그 능력 있는 미국의 금융당국에서는 “어떠한 연방 차원의 공동의 감독(federal coordinated oversight)”도 없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가장 감독과 규제가 필요한 시점에 규제당국은 급변하는 금융시장을 따라잡지 못했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폴 크루그먼은 “보이지 않는 손 뒤에 숨어서(Hiding behind the invisible hand)” 라는 멋진 제목의 글에서 그 당시에 없었다는 “공동보조(coordinated effort)”에 대해 실은 그러한 공동보조가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옳은 방향의 반대의 방향이었다는 점이다. 즉 그의 주장에 따르면 서브프라임 대출이 광분할 때쯤인 2003년에 금융시장을 감독하여야 할 정부기관 다섯 군데 중 네 군데의 대표자가 오히려 금융규제의 완화를 위해 노력하였다고 한다. 결국 ‘보이지 않는 손’은 실은 ‘보이는 손’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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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ll Street Sign (1-9)” by Vlad LazarenkoOwn work. Licensed under CC BY-SA 3.0 via Wikimedia Commons.

그런데 앞서 언급하였던 뉴욕타임스의 해당기사를 보면 최근에 다시 좀더 강화되고 체계적인 새로운 금융규제책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민주당 등지에서 나오고 있다고 한다. 현재의 제도들은 급변하는 시장의 행동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다. 또한 Fed가 월스트리트에 상업은행에 준하는, 또는 그 이상의 혜택을 지금 베풀고 있는데 규제는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인식은 확산되고 있지만 그것의 실현여부는 불투명하다. 부시와 골드만삭스 CEO 출신의 헬리 폴슨 재무부장관은 여전히 그러한 규제가 시장의 효율성을 떨어트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보다 근본적으로 월스트리트는 공화, 민주 양당에게 있어 가장 매력적인 돈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느 누가 나서서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수 있을 것인가? 부시나 헨리 폴슨, 맥케인은 애초에 생각도 없을 것이고… 오바마? 클린턴? 설마.

항상 그래왔지만 탈규제를 주장하는 이들은 사람들이 잘못된 규제와 규제 자체를 혼동하게끔 만든다. 잘못된 규제가 경제나 사회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을 보여주면서 ‘규제 때문에 모든 것이 문제가 된다’라고 주장한다. 이들은 성질대로라면 잘못 위치해 있는 전봇대 뿐만 아니라 전국의 모든 전봇대를 다 뽑아야 직성이 풀릴 이들이다. 재밌는 것은 또 이런 친구들이 문제가 되면 그들이 맹신하는 시장의 기능에 경제를 맡겨야 하는데 가장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곤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지금 비슷한 양상이 진행 중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스타일이 너무 새마을 운동 스타일로 구시대적이어서 사람들이 잘 속지 않고 있다는 것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