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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양적완화 정책 단상

경제학이라는 학문이 아카데미에서 자리 잡기 전부터 이미 사람들은 경제활동을 해왔다. 그 경제원리가 학문적으로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인간은 사회화되기 시작하면서 경제활동을 자연적으로 몸에 익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돌도끼와 같은 도구의 유용성을 물리학적으로 검증하기 전부터 돌도끼를 사용해왔던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런 와중에 시도된 최초의 경제학적 시도는 어쩌면 “중상주의(重商主義, mercantilism)”일 것이다. 이들은 상업, 즉 무역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부의 창출이 무역을 통해 실현된다고 보았다. 더불어 그들은 그 부의 최종결과물을 금으로 보았다. 왜냐면 금은 곧 돈이기 때문이다. 즉 중금주의(重金主義)로 이어지는 논리다. 아주 단순하다.

당시 사람들은 지폐는 돈으로 보지 않았다. 그것은 일종의 차용증서일 뿐이다. 지금도 통용되는 지폐를 보면 그것이 돈이라는 말은 없다. 그것은 ‘은행권’일뿐이다. 은행이 돈을 – 다시 말해 금을 – 맡겨놓은 이들에게 금을 맡았다고 확인해주는 ‘은행권’이다. 이것이 오늘날 부분지급준비제도의 시초라 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이 금본위제의 초기형태가 된다. 부는 무역을 통해 창출되고, 금으로 표시되며, 은행권은 그것의 차용증서다.

닉슨이 1971년 8월 금태환 정지를 선언한 이래 달러를 기축통화로 하는 금환본위제는 자연스럽게(?) 달러본위제로 넘어왔다. 미국이 일방적으로 선언한 이 사건에도 불구하고 달러가 기축통화로써 유지되어왔던 배경은 막강한 군사력 등 초강대국으로서의 위상과 다른 대체수단이 마땅치 않았던 냉혹한 국제정치 질서가 현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전후의 통화질서를 마련한 브레튼우즈 체제가 기본적으로 모순된, 그러므로 단명할 수밖에 없는 체제라는 것은 시작부터 예언되어 왔었다. 그중 하나가 예일대학의 R.트리핀 교수가 제기한 트리핀의 딜레마다. 이 주장은 브레튼우즈 체제가 화폐수요를 달러 증발을 통해 만족시킬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증발은 달러의 신뢰도를 떨어트려 금태환성을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일국의 통화가 세계통화가 된다는 것의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케인즈가 나서서 별도의 국제통화(bancor)를 발행하자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달러가 국제통화가 되었다. 그 이후 미국은 기축통화국으로서 우월적 지위를 누려왔다. 이들은 이른바 시뇨리지라 불리는 이익을 누렸는데 이론적으로는 아무리 많은 통화를 발행해도 외환위기가 도래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돈이 모자라면 달러를 찍으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이 무한대로 달러를 찍어내어 시장에 유통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비록 금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달러라는 화폐의 존엄성은 지켜져야 했다. 강환 화폐여야만이 국제결제통화로써의 가치가 있는 것이고, 연준의 통화증발은 국가부채와 재정적자로 이어지기에 재정건전성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2008년에 터진 전 세계 금융위기는 이러한 패러다임을 바꿔놓는 계기가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GDP 대비 3% 수준에서 유지되어야 한다고 암묵적으로 합의되었던 미국의 재정적자는 10%를 육박할 정도로 치솟았다. 유동성 대량방출로 말미암아 연방준비제도의 대차대조표는 순식간에 두 배 이상으로 늘어 2조 달러에 육박한다.

금리수준은 전 세계가 너나 할 것 없이 제로 수준의 금리를 유지하였다가 최근에야 일부국가들이 야금야금 올리고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미국은 여전히 금리를 최저수준으로 유지하고 있다. 실업률, 소비부진, 수출경쟁력 등 내외적으로 험난한 장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꺼내든 카드가 양적완화라 미화된 표현이 붙여진 통화증발이다.

1차 양적완화는 2008년 금융위기 발발 직후 총 1조7천억달러 규모로 단행되었다. 이 당시 많은 이들이 달러의 가치하락과 인플레이션 등을 우려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이치였다. 하지만 생각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잠깐 폭등하던 원자재 가격도 얼마 안 있어 안정되었고, 달러 수요는 오히려 늘어 세계 각국이 달러와 스왑라인을 개설해야 할 정도였다.

왜 트리핀의 딜레마가 작동하지 않았을까? 금태환조차 되지 않는 은행권인데 말이다. 그것은 대안 없는 기축통화라는 달러의 지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달러의 기축통화 지위를 빼앗아야 한다고 아무리 유럽과 중국이 떠들어봐야 혼란스러운 국제무역시장에서 먹혀들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1차 양적완화에도 별로 약발이 먹혀들지 않았다고 판단한 미연준은 이번 달에 2차 양적완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규모는 6천억 달러로 시장에서는 주가가 상승하는 등 어느 정도 반기는 눈치였다. 하지만 예상대로 주요국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폴볼커나 일부 연방은행 이사 역시 양적완화가 기대하고 있는 효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어쨌거나 헬리콥터 벤(Helicopter Ben)은 지금 바닥을 실험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얼마나 뿌려야 인플레이션이 다시 가속화되는 임계점에 도달할 것인가?’, ‘트리핀의 딜레마가 과연 존재하는 딜레마이기는 하였는가?’라는 물음을 던지면서 말이다. 더럽혀지고 있는 연준의 대차대조표만 외면한다면 이보다 속편한 대안도 없다.

실질 실업률이 17%에 달하고 모기지채권의 절대비중을 망한(!) 국영기업 프레디맥/패니메가 소화하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별다른 대안이 없다. 2차 양적완화가 장기금리를 30~50 베이시스 포인트 눌러 내리는 효과가 있다하니 미국은 실질적으로 마이너스 금리인 셈이다. 마찰력을 최대한 없애야 돈이 회전한다고 최면을 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만약 2차 양적완화에 따라 달러가 통제 가능한 수준까지 절하된다면 그것은 미국에게 바람직한 일일 것이다. 또는 그럼에도 달러가 예상보다 더 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 또한 별로 나쁜 상황이 아닐 것이다. 3차 양적완화의 토대를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달러 스스로가 수퍼노트가 되어 여신기한이 무한인 채권을 계속 찍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