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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리정책과 통화정책

향후 10년 동안 누적으로 7조1천억 달러로 예상되는 재정적자 대신에 백악관은 9조 달러 정도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수치는 연간 재정적자가 2019년 GDP의 4%를 훨씬 초과할 것이라는 것과 부채누적의 속도가 예상 GDP 성장을 초과할 것을 암시한다. 이는 유지 가능한 회계 경로가 아니다.[중략]
이번 회계연도의 1조6천억 달러의 적자 중 거의 3분의 2는 – 2차 대전 이후 기록인 GDP의 11.2% – 지난 10월 통과된 7천억 달러의 금융부문 구제안과 2월부터 적용된 7천8백7십억 달러의 경기부양 패키지 명목으로 현재까지 쓰인 부분에 해당한다.[중략]
만약 최소한 부채의 증가속도가 경제의 성장속도 범위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투자자들은 채무이행 의무에 대해 점차 신뢰하지 않을 것이고, 정부의 비용을 증가시킬 것이다. – 그리고 재정적자 위기는 재정적자 소용돌이로 휘말릴 것이다. 최악의 경우 고삐 풀린 부채로 말미암아 1970년대의 두 자리 수의 인플레이션과 이자율로 회귀할 수도 있다. 다만 이번에는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국 채권자들에 대한 미국의 천문학적인 이행의무가 함께 한다.

Instead of a cumulative $7.1 trillion deficit over the next decade, the White House now projects a $9 trillion deficit. These figures imply average annual budget deficits greater than 4 percent of gross domestic product through fiscal 2019, a rate of debt accumulation faster than projected GDP growth. This is not a sustainable fiscal path.[중략]
Almost two-thirds of the current fiscal year’s $1.6 trillion deficit — a postwar record 11.2 percent of GDP — is attributable to the $700 billion financial sector bailout passed last October, and what has been spent so far under the $787 billion counter-recession stimulus package adopted in February.[중략]
Unless it can at least limit the growth in debt to the growth of the economy, investors will gradually lose faith in Treasury obligations, increasing the government’s borrowing costs — and turning a deficit crunch into a deficit spiral. In the worst case, unchecked debt could trigger a return to the double-digit inflation and interest rates of the late 1970s, only this time with massive U.S. obligations to foreign lenders such as China and Japan.[출처]

인용문에 언급된 1970년대 미국의 경제는 암울했었다. 베트남 전쟁과 린든 존슨 대통령 시절부터 급격하게 늘어난 사회복지예산 등으로 말미암아 국내 인플레이션은 만성적인 현상이 되어버렸다. 보수주의 경제학자들은 민주당의 자유주의적인 경제정책을 물려받은 닉슨에게서 이러한 위기를 보수주의적 경제정책으로 풀어나가길 기대했다. 하지만 뾰족한 답이 없었던 닉슨은 오히려 물가와 임금을 통제하는 등 민주당 정권보다 더 국가개입적인 정책을 시도하여 보수층을 실망시켰다.

결국 끝없는 혼란은 자신의 임무가 ‘인플레이션 용(inflationary dragon)’을 잡아 죽이는 일이라고 주장한 FRB 의장 폴 볼커가 진두지휘한 초고금리를 통해 안정되었다. 그는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할인율(중앙은행이 민간은행에 대부해줄 때의 이자율)을 무려 12%로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이를 당시 언론은 ‘토요일 밤의 학살’이라고 불렀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내경제는 침체에 빠져들었고 이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이 해고되는 등 노동계급의 엄청난 희생이 따랐다.

어쨌든 레이건 시절까지 이어졌던 이러한 고금리 정책으로 말미암아 인플레이션은 진정되었다. 전반적인 물가가 안정이 된 만큼 경제는 다시 탄력을 받았고 80년대 초부터 미국경제는 새로운 도약을 맞게 되었다. 그런데 폴 볼커의 무기는 고금리 말고 또 하나가 있었다. 바로 통화 공급의 축소였다. 금리정책과 함께 통화정책은 물가수준을 잡는 주요수단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금리와 함께 너무 많은 돈이 인플레이션의 주요 원인이라면서 “그 방정식에서 너무 많은 돈 부분을 공격(attack the too-much-money part of the equation)”했다고 주장하였다.

요컨대 정부가 경제를 조절할 수 있는 두 가지 큰 무기는 금리와 통화조절이다. 이를 유념하여 현재의 상황을 보면 현 위기의 심각성을 알 수 있다. 일단 금리의 경우 제로금리에 가까우니 금리는 오직 한 방향으로만 움직일 수 있다. 만약 2차 침체기에 접어든다 하더라도 각국 정부가 쓸 수 있는 금리정책은 없다. 오직 통화 공급만 늘릴 뿐이다. 한편 인플레이션 기미가 보일 때는 금리를 높일 수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통화 공급 축소가 쉽지 않다. 국가의 지출은 70년대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이 커진데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한 재정지출이 이미 막대해 뿌려진 통화를 회수할 여력이 급격히 소진된 탓이다.

미국의 이번 회계연도 재정적자는 우리 돈으로 2천조 원으로 예상된다.(주1) 이런 상태에서 인용문에서 주장하다시피 경제성장률이 부채증가율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재앙적인 상황이 될 것이다. 세금은 걷히지 않고, 더 많은 구제책이 마련되어야 하고, 투자자들은 신뢰를 상실할 것이다. 이미 중국이 달러 포트폴리오의 조정에 착수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금리정책과 통화정책 모두 외다리 신세가 되어버린 미국이 믿을 것은 이제 채권자들 밖에 없는 상태인데 또 외다리이기는 두 나라 모두 마찬가지다.

(주1) 우리나라 예산이 280조원 정도니까 미국의 재정적자가 우리나라 예산의 7배가 넘는다는 이야기다.

80년대 美모기지 채권시장 확산에 관한 에피소드 하나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파생상품의 융성의 계기 이외에 또 하나의 계기가 있는데 무엇보다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간의 축적 양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닉슨이 1971년 미 달러의 금태환을 포기한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금융 지배를 유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오히려 달러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고 이윤은 축소되고 주식시장은 침체에 빠졌고 미국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 1979년 10월 폴 볼커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취임한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고자 고금리 프로그램을 내놓는다.[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4-1>]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1979년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금리를 올리면서 S&L은 ‘돈’맥경화에 걸렸고, 주택대출시장은 붕괴할 위기에 빠져들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S&L은 모조리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1981년 9월 30일 의회는 아끼는 S&L업계를 위해 재치 있는 세금유예 법안을 통화시켰다.(S&L이 자신의 주택대출을 팔아 조달한 자금으로 다른 S&L의 값싼 대출을 매수하면 세금을 유예시켜 주는 것이다. S&L들은 서로의 대출을 교환하는 셈이다. 이런 매매에서 발생하는 엄청난 손실은 교묘하게 숨겨졌다. 즉, S&L은 1달러 당 100센트인 대출 채권을 1달러 당 65센트라는 헐값에 팔고 있었다. 그런데 새로운 회계 규정은 S&L이 매매손실을 그 대출회수 기간만큼 순차적으로 상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만약 대출 채권의 만기가 35년이라면 1달러 당 35센트의 손실은 매년 1센트씩 손실이 난 것으로 회계 처리하는 것이다. 더욱이 이런 손실도 과거 10년간 S&L이 낸 세금과 상계 처리할 수 있었다. 즉, 손실이 났다는 사실을 신고하면 국세청(IRS)은 과거에 낸 세금을 되돌려주었던 것이다. S&L은 가능하면 많은 손실을 내서 국세청에게 보여주기만 하면 됐다. 이건 아주 쉽다. 대출 채권을 헐값에 팔아버리면 된다. S&L이 대출 채권을 팔기 위해 혈안이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S&L은 즉시 대출 채권을 팔아치우기 시작했고, 수천억 달러의 거래가 일어났다. 이런 조치가 취해졌을 때, 라니에리의 트레이더들은 세금유예 조치 자체도 알지 못했다. 그럼에도 살로먼의 모기지 부서는 시장을 독점했다. 이는 의회가 월가에 엄청난 보조금을 준 셈이고 그것이 라니에리 주식회사를 살려낸 것이다.[라이어스 포커(원제:Liar’s Poker), 마이클 루이스 지음, 정명수 옮김, 위즈덤하우스, 2006년, pp183~184]

새로이 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이 된 폴 볼커가 인플레이션을 잡기위해 초고금리 정책을 펴면서 위기에 빠진 S&L(저축대부조합)의 모기지 대출채권이 월가로 넘어간 속사정에 관한 묘사다. “S&L 위기와 Opportunity Fund의 등장”과 비교하여 읽으시길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 (4)

다음은 사회주의평등당(the Socialist Equality Party) 호주지부의 국가서기인  Nick Beams가 2008년 11월과 12월에 걸쳐 호주 여러 도시에서 가졌던 강의를 요약 발췌한 내용이다. 번역이 일치하지 않은 점이 있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1971년 브레튼우즈의 몰락으로 말미암아 세계 화폐 시스템의 안정적인 닻이라 할 수 있는 달러의 역할이 끝을 맺었다. 또한 어떠한 일개 국가의 화폐도 그러한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1970년대 새로운 화폐운동으로부터 발생되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이 개발되었다. 금융 파생상품이 발달하기 시작한 것이다.

파생상품은 금융계약이나 금융장치, 어떠한 임의의 것의 가치로부터 파생되는 가치로 규정된다. 파생상품은 오랜 기간 존재하여 왔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선물계약(futures contracts)이다. 금융 파생상품은 새로운 개발품이다. 물리적인 상품이 아닌 돈과 다른 금융자산에 연계된다. 1972년에 화폐 선물 시장이 시카고 선물거래소(Chicago Mercantile Exchange)에서 열리게 된다. 이 시장에서 금융기관, 수입업자, 수출업자 등이 환율변동을 헤지(hedge)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환율 선물은 다음 기간 개발될 수많은 금융 파생상품의 한 종류일 뿐이었다.

1973년 피셔 블랙(Fischer Black)과 마이런 숄즈(Myron Scholes)가 가격 옵션의 공식을 개발하면서 더욱 발전하게 된다. 어떤 선물 거래는 참여자들을 구매와 판매의 역할로 국한시키는 반면 옵션은 일종의 보험과 같은 것이다. 프리미엄을 지불하는 대가로 그것은 구매자에게 특정시기에 일정한 가격으로 자산을 사거나 팔 수 있는 권리를 준다. 만약 가격이 예측한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옵션은 가치가 없고 구매자는 프리미엄만을 손해볼 것이다. 1973년 시카고 옵션거래소(the Chicago Options Exchange)가 문을 연다.

옵션은 큰 이익을 낼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 어떤 구매자가 6개월 후 50달러의 주식을 살 수 있는 옵션을 산다. 옵션의 가격은 5달러다. 100주에 대한 가격은 500달러다. 6개월 후 주가가 60달러가 되었다고 가정하자. 구매자는 옵션을 행사하고 5달러의 주당이익을 얻을 것이다. 총이익은 500달러가 될 것이다. 수익률은 100%다. 이 구매자가 그냥 주식 100주를 50달러에 사서 6개월 동안 보유했다고 치자. 이익은 1,000달러가 되지만 수익률은 20%다. 옵션의 사용은 더 많은 수익률의 기회를 준다.

반대로 주가가 60달러로 오른 것이 아니라 49달러로 떨어졌다고 가정하자. 옵션 구매자는 500달러를 잃어서 손해율은 100%다. 반면 주식 구매자는 100달러만 잃어서 손해율은 2%에 불과하다. 옵션은 더 큰 기회와 더 큰 위험의 가능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또 다른 타입의 파생상품도 등장했는데 바로 환율 스왑이다. 이어서 고정금리와 변동금리가 상호 교환되는 이자율 스왑도 등장한다. 1990년대 보유자가 채권 지불 실패 위험을 보장하는 신용부도스왑(the credit default swap)이 등장한다. 이러한 계약은 거래소 또는 더 빈번하게 이른바 장외(over the counter) 거래에서 당사자들 간에 이루어졌다.

처음 파생상품은 리스크를 방어하고자 만들어졌으나 곧 투기의 수단이 된다. 그리고 그 성장은 눈부시다. 전 세계 외환거래 계약은 1973년 일 150억 달러, 1980년 일 800억 달러, 1995년 1조2천6백억 달러로 증가한다. 1973년에 이들 계약은 총 상품 및 서비스 거래의 15%를 구성했다. 1995년에는 불과 2%다. 외환거래의 폭발은 무역이 아니라 금융계약의 결과가 되어버렸다. 2008년 6월 OTC 거래에서의 파생상품이 기초하고 있는 자산은 683조7천억 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전 세계 산출의 10배에 해당한다. 1973년 금융 파생상품은 사실 존재하지도 않았다.

미국 경제의 금융화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로부터 시작된 파생상품의 융성의 계기 이외에 또 하나의 계기가 있는데 무엇보다 미국에서 지난 30여 년간의 축적 양식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닉슨이 1971년 미 달러의 금태환을 포기한 것은 미국 자본주의의 금융 지배를 유지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오히려 달러의 가치는 급격히 떨어졌고 이윤은 축소되고 주식시장은 침체에 빠졌고 미국경제는 스태그플레이션에 접어들었다. 1979년 10월 폴 볼커가 미연방준비제도이사회의 의장으로 취임한다. 볼커는 인플레이션을 치유하고자 고금리 프로그램을 내놓는다.

“볼커 충격”으로 잘 알려진 이 프로그램으로 금리는 사상 최고로 치닫고 경제는 1930년대 이래로 가장 깊은 침체로 빠져든다. 노동계급은 강하게 저항하였다. 수백만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결과적으로 미국 자본주의의 구조가 변했다. 1865년 남북전쟁 이후 미국경제는 제조업이 이끌었다. 미국식의 생산방식은 가장 효율적이고 이윤이 많은 것으로 증명되어 왔다. 그런데 그것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았다. 볼커의 조치의 핵심은 축적의 새로운 레짐은 금융자본의 확대에 기초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새로운 축적양식으로의 길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81~1982년의 경기침체 뒤에 느리게 경기가 회복되었다. 주식시장은 1982년이 되어서야 오르기 시작했다. 이 10년은 저축대부조합이 촉발한 위기로 막을 내린다. 소비에트의 붕괴와 중국의 자본주의 세계로의 편입은 세계 자본의 순환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 된다. 이를 통해 금융자본에 근거한 축적양식이 가능해진다.

미국과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의 노동력의 1/3에 해당하는 중국의 개방은 노동계급으로부터의 잉여가치 착취의 엄청난 확대를 의미한다. 아이팟을 생산하는 중국 제조공장이 미국에서 290달러에 파는 기계를 만들어주고 받는 돈은 4달러다. 값싼 제조상품은 인플레이션을 방지한다. Fed는 인플레이션 걱정 없이 계속 금리를 낮게 유지할 수 있었다. 값싼 신용이 다양한 자산 거품을 촉발했다. 실질임금의 인상 없이도 소비는 증대했다.(주1)

1982년 금융회사의 이윤은 세후 총기업이윤의 5%를 차지했다. 2007년 그들의 지분은 41%로 증가한다. 지난 시절 부채는 제조업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금융부문의 발전에 따라 부채는 더 많은 금융활동을 위한 금융업에서 발생했다. 자산에 기초한 증권의 매매가 부의 축적의 새로운 방식이 되었다. 경제의 금융화는 생산과정에 대한 적출(extraction)이라기보다는 잉여가치의 전유(專有 ; appropriation)에 가까웠다.(주2)

[원문보기]

 

(주1) 현대 자본주의에 있어 중국의 개방은 대항해 시대의 지리상의 발견에 맞먹는 파급효과를 가져온 셈이다

(주2) 이 문구는 많은 의미를 함유하고 있는데 적출, 즉 착취와 전유 사이의 뉘앙스의 차이를 확실하게 이해하여야 하는 부분이다. 간단히 말해 착취는 노동을 통한 잉여가치를 빼앗는 행위이고 전유는 남이 착취한 잉여가치를 자기의 것으로 재차 착취하는 것에 가깝다고 이해하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