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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의 고통’에 대한 단상

개인적으로 한때 소설이랍시고 끼적거리기도 하고 이 블로그에 이런 저런 글을 쓰는 것을 창작이라고 쳐준다면야, 나도 일종의 창작활동을 하는 셈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글을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지 않은 이유는 무엇보다 재능이 없기 때문이지만, 그 이유 말고도 또 하나 하찮은 이유를 하나 대자면 창작의 고통에 대한 공포감도 있었을 것이다.

앉은 자리에서 즉흥곡을 척척 연주해대던 모짜르트같은 희대의 천재가 아닌 이상(그러한 에피소드도 후대에 의해 과장되었을 개연성이 좀 있다고 여겨지지만), 대개의 예술가들은 하늘 아래 없던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고, 이러한 노력은 웬만한 사람이라면 견디기 어려울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예술적 성공은 금전적 보상을 안겨준다. 그러나 이건 또한 굶주린 유령이다. 코가 버튼 모양이었던 소년 기자 땡땡에 관한 만화로 부를 쌓은 벨기에 예술가 조르쥬 레미(Georges Remi)는 1951년 같은 이름으로 주간지에 두 개의 땡땡 란을 창작하는 일의 “진을 빼는 스케줄”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를 한 장 썼다. “내 말을 믿게. 예술가 자신 말고는 누구도 그림 이야기를 위해 소요되는 수많은 작업, 리서치, 독창성 등을 상상할 수 없다네.” 에르제(Hergé)란 필명으로 더 널리 알려진 레미의 말이다. “인쇄기가 입을 크게 벌리고 인쇄할 종이들을 갈망하면서 저쪽에 앉아 있지.”[Tintin steps off the page]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땡땡의 모험”의 작가 에르제에 관한 일화다. 사실 그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기했던 완벽주의와 이로 인해 받았던 압박감은, 그의 팬들에게는 꽤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의 만화는 한 컷 한 컷이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엄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한 세밀한 묘사로 채워져 있다. 에르제는 스스로를 이런 집요함에 몰아넣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런 고집스러운 집요함이 없었더라면 땡땡의 모험은 단지 1930년대 소년잡지에 연재되었던 반공(反共)적이고 인종주의적인 작품으로만 남았을 것이다. 그는 세밀함에 대한 고집뿐만 아니라 작품의 주제의식에 대한 고집도 남달라 결국 스스로의 역사관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땡땡을 단순한 아동만화 캐릭터 이상의 것으로 승화시킨다.

땡땡이 단순한 소년만화로 취급되지 않는 이유도 이런 사유다. 초기의 엉성한 주제의식과 어두운 가족사가 내포된 캐릭터 설정 등이 작품의 한계였다면, 에르제 스스로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인 후기의 작품들은 단순한 모험만화가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세계관을 반영하는 걸작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에게는 고통이었지만 말이다.

다시 창작의 고통에 대해 말해보자. 블로깅도 이런저런 자잘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글줄기도 잡아야 하고 관련근거도 찾아봐야 하고 문체도 신경 써야 한다. 그런 번거로운 일을 왜 하냐하고 생각해보면 결국 그런 창작의 고통에 수반되는 창작의 기쁨과 자기성장 때문이 아닐까 싶다. 에르제가 누린 창작의 기쁨의 크기는 가늠하기 어렵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