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감이 넘치는 관료는 어떻게 좌절하는가?

하지만 브룩슬리 본 의장이 받은 것은 피드백이기 보다 역풍에 가까웠다. 그린버거가 회상한다. “어느 날 본 의장의 사무실에 갔더니, 본 의장이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수화기를 내려놓더군요. 본 의장은 ‘래리 서머스 재무부 차관에게서 온 전화야’라고 말했습니다. 서머스 차관이 본 의장을 강하게 질책한 거였지요.” 은행 임원들이 서머스 차관을 찾아와 상품선물거래위원회가 규제를 시작하면 파생상품 부서를 런던으로 옮길 것이라고 협박한 것이었다. 그린버거가 회상한다. “서머스 차관은 우리에게 규제방안을 철회하라고 했습니다.” 본이 덧붙였다. “규제 방안을 철회하라는 압박이 매우 심했습니다. 파생상품을 취급하는 은행들은 파생상품 시장 규제를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파생상품 부서가 전체수익에 기여하는 비율이 40퍼센트에 이르는 은행들도 있었으니까요.”[모든 악마가 여기에 있다, 베서니 맥린/조 노세라 지음, 윤태경/이종호 옮김, 자음과모음, 2011년, pp168~169]

브룩슬리 본은 클린턴 정부 시절 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의장을 지낸 변호사다. 그는 이전 의장이었던 웬디 그램이 파생상품을 선물이 아니라고 선언하며 규제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취임했지만, 당시 이어지는 파생상품 관련 사건으로 시장이 출렁거리자 파생상품을 규제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그는 자신의 보좌관인 마이클 그린버거를 시켜 정책보고서를 작성하게 하고 이 초안을 관계자들에게 돌려 피드백을 받고자 했다. 그리고 위 인용문은 이 보고서에 대한 한 에피소드를 묘사하는 장면이다.

보고서 초안이 작성된 1998년은 막 파생상품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가 나오던 시점이었다. 프록터&갬블, 오렌지카운티 등이 무모하게 파생상품에 손을 댔다가 대규모의 손실을 내고 시장에 큰 충격을 주었던 즈음이다. 그럼에도 파생상품은 정부의 규제로부터 자유로웠는데, 이는 경제 관료들의 시장자유주의에 대한 믿음과 위에서 보는 것처럼 은행의 협박 내지는 회유 때문이었다. 책의 저자는 특히 래리 서머스에 대해서는 “똑똑한 사람인척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파생상품 규제를 반대했다고 한다.

폴 크루그먼, 제프리 삭스 등과 함께 “경제학의 3대 천재”라고 불리는 그인지라 – 그 천재들은 왜 현재의 경제위기에 대한 통일된 해법을 못 내놓는 걸까? – 지적자만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셌고, 그의 프레임에는 파생상품이 자유 시장에서 위험을 분산시키는 가장 좋은 해법이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당시 장관이었던 로버트 루빈은 파생상품의 위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다. 그는 서머스와 달리 골드만삭스에서 실제로 파생상품 부서를 이끌었고 시장선도자로 나선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루빈 역시 파생상품 방임주의의 편에 설 수밖에 없는데, 가장 막강한 경제관료 앨런 그린스펀 역시 자유방임 근본주의의 광신도였으며, 회전문 인사로 장관 자리에 오른 자신이 굳이 규제의 칼날을 먼저 갈 이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규제의 필요성을 제기한 관료는 기껏해야 600명의 직원을 두고 있는, 별 권한도 없는 상품선물거래위원회의 의장 정도였고, 그마저도 은행으로부터 협박받고 있는 천재소년 래리 서머스의 호통에 얼굴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나약한 존재였던 것이다.

어쨌든 이제는 모두 공감하고 있다시피 – 아직도 아니라고 우기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 이러한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활개 쳤던 파생상품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채권 등과 결합하면서 한 기업뿐 아니라 전 세계를 공포에 몰아넣을 정도의 위력을 지닌 핵폭탄으로 변신하여 2000년대 후반을 강타했다. 하지만 거의 모든 화이트칼라의 범죄가 그렇듯, 신용위기 이후에도 협박을 일삼은 은행은 구제금융으로 목숨을 연장했고 경제 관료들은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여전히 경제계의 거물로 남아 있다.

어쨌든 인용한 글에서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은행들이 자유롭게 그들을 규제하는 기관의 관료들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비즈니스를 다른 데로 옮기겠다는 협박을 할 수 있다는 사실 등이다. 이는 이미 정치가 “기업정치(corporatocracy)”라 불리는 구조로 고착화되어 있다는 것이고, 그러한 와중에도 기업이 입지의 자유에 따른 초국성을 띠며 행정력이 일국 단위에 머무는 – 세계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조차도 – 행정부를 을러댈 수 있다는 – 금융거래세 논쟁에서도 보듯이 – 것을 의미한다.

p.s. 본 의장은 관료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정책보고서를 발간하지만, 의회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상품선물거래위원회가 6개월 동안(마침 본 의장의 임기는 6개월 남짓 남아 있었다) 파생상품을 규제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항을 법안에 집어넣었다. 그로부터 석 달 뒤 그 유명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 사태가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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