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죽음’을 읽고

이 독후감은 이 책을 펴낸 곳인 ‘브렌즈’가 무료로 제공한 책을 읽고 쓴 글입니다.


강의 죽음(원제 : When the Rivers Run Dry), 프레드 피어스 저, 김정은 역, 브렌즈

아담 스미스는 그의 대표적인 저작 국부론에서 사용가치가 반드시 교환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는데, 이를 설명하기 위해 물과 다이아몬드를 예로 든다. 즉 물의 사용가치는 굉장히 크지만 교환가치는 거의 없고, 그에 반해 다이아몬드는 사용가치는 작지만 교환가치는 크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었다. 시장에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이렇듯 모순적인 위치에 놓일 수 있다는 그의 뛰어난 직관을 통해 가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파헤쳤다는 점이 아담 스미스의 위대함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자면 그의 이러한 설명은 어쩌면 그가 처한 또 다른 특수한 상황에 기인하는 것이라 볼 수도 있다. 즉, 그가 살던 당시의 영국은 최고로 문명이 발달한 국가여서 물에 대한 교환가치가 싸다는 특수성을 띠고 있었기에, 물이 부족한 국가에서는 물에 대한 교환가치가 그 사용가치에 근접할 수도 있다는 – 다이아몬드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 또 다른 특수성이 간과한 설명이기도 한 것이다. 예컨데 그가 사막지대의 물이 부족한 국가의 경제학자였다면 다른 예를 들었을 것이다.

딴죽을 걸어봤지만 어쨌든 모든 문명은 강에서 출발하였다. 당연히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담수를 싸게 이용하기 위해서다. 따라서 국지적으로 물이 비싼 문명이 있었을지 몰라도, 대부분의 문명은 물을 싸게 활용할 수 있었고 이것이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 즉, 크게 보아 물이 싼 것은 대부분 문명에서 보편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더 물의 교환가치는 올라가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개연성이 크다. 물자원이 급속히 고갈되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저술가 프레드 피어스 Fred Pearce 가 지은 <강의 죽음>은 인간이 강을 어떻게 남용하고 있으며, 이러한 행태로 말미암아 앞으로 인류가 얼마나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릴지에 대해 담담한 톤으로 경고하고 있다. 그 목소리는 단순히 환경주의/생태주의적인 당위론에 근거한 것이 아닌, 수많은 현장답사와 그 실상의 파악을 통한 과학적 사실관계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듣는 나로서는 때로 끔찍하기까지 했다. 그야말로 인간은 현 상태에서 옴짝달싹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물 자원이 급속히 고갈되는 근본원인에는 대규모 농축산업과 같은 대량생산, 물을 극히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는 도시라는 정주방식의 등장, 그리고 이들을 지탱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조작되는 물길과 그 위에 세워지는 대규모 관개시설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인간에 의한 물 착취는 지극히 비효율적이며 편견에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편견은 강줄기와 물 자원을 인간의 “위대한” 능력으로 정복할 수 있다는 오만이다. 또한 그 편견은 경제체제를 구분하지 않는다.

역설적으로 구(舊)사회주의권에서 이 편견은 더 두드러진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 저자의 암시인바, 그들은 인민에 의한 자연정복 또는 자연개조를 사회주의의 승리로 보았다는 정황이 책의 곳곳에 제시되고 있다. 중국의 수많은 댐건설, 소련의 대규모 목화재배 농장들은 이러한 비극의 증거이다. 물론 자본주의 국가들이라고 시장 효율적으로 물을 활용한 것은 아니다. 그들의 탐욕스러운 도시는 먼 곳의 물을 끌어다 분수 물로 써버리는 천박의 극치를 보여준다. 자본주의는 ‘무정부적’으로 사회주의는 ‘계획적’으로 낭비했을 따름이다.

결국 현존하는 어떠한 경제체제, 정치체제도 아직까지는 물 자원의 지탱 가능한 이용에 대한 대안을 가지고 있지 않은 관계로, 인간이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물은 점점 더 희소해지고 – 물론 재생 가능함에도 그 주기는 점점 더 길어지고 – 더 불평등하게 분배될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전망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물에 대한 교환가치의 급등(아담 스미스의 편견(?)과 다르게), 그리고 물을 둘러싼 지역간/국가간 갈등의 첨예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얼마 전 외신은 중국과 인도의 물 분쟁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대안은 무엇일까? 저자의 대안은 소박하다. 현대인보다 현명했던 옛날 사람들이 택했던 방식을 채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빗물을 받아쓰고, 작은 저수지를 곳곳에 만들고, 강줄기를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았던 그 옛날 방식 말이다. 그 방식이 현재와 같은 대량 생산 체제에서 통하겠냐고? 저자는 또 통하고 있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그것이 전체 문명에 두려움 없이 받아들여지기에는 다소 시간이 걸릴 수 있겠지만 어쨌든 몇몇 문명권에서는 시도가 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 시도가 성공한다면 그 시도는 더 확산될 것이다.

우리의 상황을 보자. 강이 파괴되고 있는 가장 최근 사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 것이다. 나 스스로도 강에 접해서 살고 있지 않고, 과연 강이 내 삶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피부로 느끼지는 못하고 있지만 현재와 같은 방식의 사업은 강을 “살리는” 사업이 아님을 금새 알 수 있다. 굳이 정비를 하여야 한다면, 신중한 실험과 시범사업을 통해 이루어져야 함에도 지금은 너무나 오만하게 너무나 급하게 진행되고 있다. <강의 죽음>이 가장 경고하고 있는 모든 악행이 동원되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든다.

그것이 “녹색성장”이란 이름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그것은 한 특정정부가 가장 큰 책임을 지고 있지만, 이전 정부와 심지어 그 “녹색성장”을 통해 이득을 누리고자 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책임이 면죄되는 것은 아니다. 이전 정부도 새만금을 비롯한 자연자원을 녹색개발주의의 미명 하에 유린하였으며, 한 광역자치단체의 주민들은 이러한 개발주의를 균형성장이란 이름 하에 환영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장 비판하여야 할 것은 어쩌면 우리 안의 “경제 환원주의”다. 정권이 바뀐다고 해결되지 않는 욕망.

경제란 무엇일까? 상품이 사용되고 그 상품을 교환할 수 있는 돈에 의해 움직이는 시스템이다. 돈은 우리가 착취하는 – 좋게 말해서 활용하는 – 자연자원의 가치와 그것을 상품으로 전환시키는데 들어간 노동의 가치를 인간의 기준에 맞춰 표시한 것에 불과하다. 그 근저에 접근하면 자연자원 없이 돈만으로 돌아가는 시스템은 없다. 하지만 그 시스템에는 모순되게도 돈이라는 청구권으로 자연자원은 얼마든지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편견을 가진 이들로 가득하다. 그 경제의 착시현상을 바꿀 수 있는 법은 두 가지 대안이 있을 것이다.

인간이 바뀌던가 인간을 갈아치우던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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