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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피케티의 대안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여러 발견 가운데 하나는 더 나은 경제적 평등을 향한 일반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종합해보면, 두 개의 가장 놀라운 결론은 미국에서의 ‘초특급경영인’(supermanagers)의 등장과 유럽에서의 ‘가산제적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의 회귀이다. 피케티의 이론에서 중요하고도 무척 흥미로운 것은 자본축적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책의 기본공식으로서 ‘자본의 수익률’(r)이 ‘경제성장’(g)을 능가한다는 의미의 “r>g”로 표현된다. 풀어 말하면 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은 그 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도 현저하게 더 높은 한, 한정 없이 증가할 것이라는 명제이다. [중략] 이러한 분석 뒤에 피케티는 대담한 대안 혹은 여러 평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정책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최고 수준의 소득에 대해 훨씬 더 높은 한계세율을 부과하는 것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개별 국가들이 국민소득 배분에 있어 중간층과 하층에게 경제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자본주의에 대한 탈이념적, 현대적 해석 바람]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에 대한 최창집 교수의 소개 글 중 일부다. 1971년생의 젊은 나이인 피케티가 내놓은 이 책은 685쪽이나 되는 양에다가 많은 통계와 도표가 포함된 경제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는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최창집 씨는 이런 인기의 배경에는 “유럽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지적 환경”과 “방대한 경험적 자료”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서평만을 보고 판단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그의 책은 여태의 경제학계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여러 면에서 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가 19세기말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던 “가산제적 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득에 의한 부의 축적보다는 세습과 자본수익에 의한 부의 축적의 경향이 더 커지고 있다는 주장인데, 피케티는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을 앞지르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가 이런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떠한 자료를 활용하였는지는 그의 책을 보고나서야 판단할 일이지만 선진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상황을 보면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슈퍼슈퍼리치의 등장, 사모펀드의 생산자본 지배현상, 조세피난처의 득세 등 자본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은 어쩌면 피케티의 논거의 원인이기도 할 것이고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피케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본주의의 활력은 더욱 잃어갈 것이다.

피케티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수준의 소득에 대한 더 높은 한계세율”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이다. 최창집 씨가 “비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비현실적인 주장은 “글로벌 부유세”일 것이다. 조세피난처까지 봉합하여 전 세계 단일 과세율을 적용하자는 것인데, 사실 이 비현실적인 주장은 나도 이 블로그에서 한 바 있다. 그리고 자본이 초국적화되었고 국민국가이 영토가 한정된 상황에서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HedgeFund.net은 중요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단일세율’이 바로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각국은 낮은 세율과 낮은 임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옮겨 다니는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율을 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 역시 새 정부 들어 이런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조세피난처와 같이 극단의 세율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은 그들의 자본유치활동은 결국 자본이 거쳐 갈 하나의 정거장을 제공하는 행위일 뿐이다.[전 세계가 단일세율을 적용하면 어떨까?]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안드로이드(Android)는 구글이 내놓은 모빌 기기들을 위한 운영체제다. 그렇지만 원래 이 호칭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기계, 즉 봇과 같은 기계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1863년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장난감에 관한 미국 특허장에 언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호칭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SF소설에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화 ‘Blade Runner’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있다.

소설에서 안드로이드의 역할은 인간의 노예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지구 대신 우주의 식민지로 이주해가는 인간들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 바로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는 노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자유를 찾아 지구로 탈출해온 안드로이드는 주인공 릭 데카드와 같은 사냥꾼에 의해 “은퇴”당해야 했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안드로이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안드로이드는 철저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였다.

한편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어떠할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제조업, 농업, 광업과 같은 분야에서의 자동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증기기관, 트랙터, 드릴기계 등이 바로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다. 이들 안드로이드는 물질문명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인류를 미증유의 풍요의 시대 속에서 살게 해주었다. 안드로이드는 분명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별 산업 그 자체에서는 반드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기계사용을 통한 대량생산은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을 몰락시켰다. 더 발전된 기계가 등장하면서는 대공장의 숙련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았다. 이를 통해 산업사회는 거대한 실업자 집단을 낳았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사회갈등을 증폭시켰다. 칼 맑스는 이러한 상황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맞물려 혁명적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관찰이었지만 현실은 어쨌든 아직 지구적 혁명적 상황에 몰리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지만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전통적인 산업분야 종사자도 많았을 것이다.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는 GM과 비교해 시가총액이 절반 수준에 달하지만 직원은 30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공장자동화의 영향이다. 게다가 딜러를 통한 판매가 아닌 온라인 판매 방식이라 딜러도 필요 없다. 딜러 연합은 강하게 반발하며 현대의 러다이트가 되었다.

분명 생산성의 향상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텐데 왜 일부는 저항하는가? 기득권을 뺏기기 때문이다. 비록 궁극적으로 쇠퇴할 기득권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일임은 분명하다. 사회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겠지만 특정인에게는 노동시간의 몰수이자 소득의 몰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이주자 전체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주와 같은 소수의 노예다. 기업주가 안드로이드로부터 이득을 또 다른 노예와 공유할 생각이 없는 한 인간노예는 기계노예에게 분노감을 갖게 된다.

지난 주말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IT행사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인터랙티브에서는 로봇이 노동시장을 차지할 것인가가 중요한 토론주제였다고 한다. 논의 내용 중 상당수는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 내다봤다고 한다. 칼 배스 오토데스크 CEO는 30년이 지나면 똑똑한 기계와 로봇들의 수가 인간의 수를 넘어설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예언도 내놓았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정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안드로이드 노동자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러다이즘은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 배스가 이런 갈등을 해소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소득이 아닌 경제 생산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소득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역소득세’를 실시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전자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인에 대한 소득세는 없애고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후자의 방법은 어느 정도 익숙한 기본소득이다. 소득세 폐지, 법인세 강화, 기본소득.

물론 이것은 스스로 자동화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업체의 대표의 말이다. 이런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그의 비즈니스는 더욱 탄력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의미하다. 사회전체의 자동화 이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이 특정분야 특정인의 도태로 이어진다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보조를 한다는 개념은 수긍할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선별적인 보조가 아닌 사회유지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적 조치로서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로 이어진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영화 Blade Runner의 시간적 배경은 2019년이다.

‘국가 단위의 기억’의 時限에 대한 단상

그러나 여기서 ‘소박한 의문’이 생긴다. 왜 두 차례의 참화를 겪으면서도 인류는, 특히 서양사회는, 자본주의 원리에 대해서 근본적인 재검토를 하려고 하지 않았을까. 슈펭글러나 폴라니 같은 뛰어난 사상가가 나타났는데도 왜 ‘이성신앙은 위험하다’든다 ‘자본주의는 악마의 맷돌이다’고 한 의식을 공유할 수 없었던 것일까. [중략]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가설’을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다. [중략] 자국이 한 번도 전장이 되어본 적이 없었던 미국인에게 그런 유럽인의 쓰라린 경험이 다른 사람 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폴라니가 필생의 대저 “대전환”을 쓴 것은 대전 중의 미국이었지만, 그 의미를 미국인들은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미국이 세계의 지배자가 되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것은 아닐까. 사실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전후의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다. 거기에서 신자유주의나 글로벌자본주의가 강력한 경제철학으로서 세계에 침투해 들어갔다.[자본주의는 왜 무너졌는가, 나카타니 이와오 지음, 이남규 옮김, 기파랑, 2009년, pp169~171]

인용문에서 “현대경제학의 이론체계에서 주요한 부분은 미국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저자의 주장에는 약간 반감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일단 전후의 쓰라린 상처를 딛고 일어나기 위해 서구세계가 공통적으로 채용했던, ‘국가의 주도적인 역할 수행이라는 사고방식은 케인즈 적이라는 점에서 歐洲의 아이디어에 가깝고, 더욱이 “현대자본주의의 모순이 한층 더 확대된” 계기를 만든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 역시 오스트리아의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서 근원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가렛 대처, 로널드 레이건, 그리고 가깝게는 알란 그린스펀 등의 시장자유주의 전도사들은 하이에크의 저서와 소련에서 망명한 소설가 아인랜드(Ayn Land)의 사상을 교과서적으로 받아들였다. 즉, 직접적인 전쟁의 경험이 없기에 자본주의의 궤도를 수정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저자의 가설보다는, 오히려 전쟁의 부산물로서 탄생한 “공공의 적” 소비에트 집단주의에 대한 자유주의적 반발이 더 미국식 자본주의를 일종의 안티테제로 내세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보는 가설이 타당해 보인다.

가설은 가설일 뿐이니 가설을 까기 위해 이 글을 인용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이 인용문에 깔고 있는 전제로써의 “국가 및 지역 단위의 기억”이라는 가정이 맘에 들어서 인용을 했다. 사실 유럽은 아직도 전쟁 당시의 기억을 국가 및 지역 단위에서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래서 반세기가 훨씬 넘은 지금까지 끔찍했던 전쟁을 피하기 위해 EU라는 연방국가를 꿈꾸고 있고, 독일은 그렇게도 인플레이션을 혐오하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압제적으로 보이는 독일의 모습에서 서슬 퍼런 파시즘을 연상하고 있다.

전쟁과 같은 혹독한 경험이 아닐지라도 국가/지역의 기억은 존속된다. 외환위기를 경험한 국가는 경제이론이야 어떻든 그 비용이 얼마든 간에 일단 외환보유고를 늘리려는 강박관념을 갖게 된다. 부동산 시장이 쭉 상승했던 국가는 빚내서 집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기억이 전쟁의 기억만큼은 치열하지 않아서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인데, 대개 그 기억의 시한은 거시적 상황인가 미시적 상황인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한 경제주역의 세대가 물러가는 30~40년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후 자본주의 영국은 노동당을 선택했고 미국은 진작 뉴딜이라는 새로운 경제체제를 받아들였다. 전간기의 자유방임적 체제의 폐해를 분명히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국가주도의 자본주의가 30~40년 쯤 지나고 석유위기가 봉착하자 이전의 기억이 퇴색하며 결국 국가 및 사회의 역할을 부정하고 개인의 자기책임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를 채택하게 된다. 용어에 ‘신(neo)’자를 붙였지만 고전적 자유주의의 폐해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국가 단위에서의 기억력이 쇠퇴한 셈이다.

시장근본주의의 폐해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기억은 또 한 번의 파괴적(일뻔 했던) 시스템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다시 한 번 상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글래스-스티걸 법을 만들었던 기억을 되살려 도드-프랭크 법을 가다듬고 있다. 당시와 다른 점이 있다면 물적 조건은 한층 악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당시엔 미국이라는 거대한 자금의 원천이 있었다. 현재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후보인 중국은 사실 허울 좋은 껍데기에 가깝다. 그런 상황에서 개혁조치마저 전후의 그것에 미치지 못할 만큼 미봉책에 가깝다.

전후 영국의 노동당은 지금의 기준으로 봐서도 ‘소비에트와는 다른, 그러나 명백한 사회주의 국가’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변혁을 추구했다. 주요기간산업은 빠르게 국유화되었고, 부자에 대한 세율은 혁명적으로 높아졌다. 유럽 대륙의 조치도 이와 비슷했고, 미국은 反소비에트 연합의 유지를 위해 이런 혁신조치를 용인하면서도 돈을 쏟아 부었다. 미국 또한 혁신적인 재분배 정책을 통해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국가주도의 자본주의 선순환을 이끌었는데 그 정점은 린든 존슨의 “위대한 사회” 정책이었다.

하지만 현재 당시의 유럽이랄 수 있는 미국에서의 개혁조치는 지지부진하다. 애초 양적완화 자체가 기만적인 미봉책이었는데 단기적인 경기호전으로 벌써 원대 복귀할 태세다. 앞서 말한 도드-프랭크 법은 수많은 이해관계자의 주장을 섞다보니 분량이 무려 330만 단어에 3,500페이지에 달하는 규모임에도 이 법을 두려워하는 이가 별로 없어 보일 정도다. 가장 근본적으로 패니메, 프레디맥 두 거대한 정부보증회사의 처리방안은 아직도 오리무중이다. 변혁적인 조치는커녕 개혁조치마저 벽에 부닥치고 있다.

단기적으로 미국의 경제가 호전될 수는 있다. 제조업이 호전되면서 고용도 활성화되고 소비도 증가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제조업 공장으로서의 과거 미국의 영광을 되돌려주는 것은 아니다. 이미 “Made in USA”보다 “Made by Apple”이 더 유의미한 세상이 됐다. 공장은 수시로 입지를 옮기고 초국적 자금 운용에 따라 稅收는 바닥을 기고 있다. “위대한 사회”를 외치기에는 사회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기억력을 되살리려면 필요한 것은 어쩌면 이젠 과거의 경험보다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할 것 같다.

사회주의, 기계화, 개발주의 등에 대한 단상

그러므로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사회는 어디나 적어도 지금의 미국만큼 고도로 기계화되어야 한다. 아마 그보다 훨씬 더 그래야 할 것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그리는 세계는 언제나 완전히 기계화된 세상이며 엄청나게 조직화된 세상이다. 그것은 옛 문명들이 노예에 의존하듯 기계에 의존하는 세상이다.[위건 부두로 가는 길, 조지 오웰, 이한중 옮김, 한겨레 출판, 2010년, p255]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라 자처한 조지 오웰이 한 진보단체의 의뢰로 1936년 쓴 르포르타쥬 ‘위건 부두로 가는 길’의 일부다. 책의 전반부는 작가 스스로가 몸으로 체험한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부분이고 후반부는 인용한 부분과 같이 영국에서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한 현황과 이에 대한 날선 비판으로 이루어져 있다.

오웰이 잘 관찰하였듯이 확실히 그 당시의 사회주의자들은 기계화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었다. 그들이 실현할 사회주의는 고도화된 자본주의와 마찬가지로 기계화, 산업화를 최대한 극대화시켜 인간을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윤동기의 제거는 오히려 이런 기계화를 더 촉진시킬 것이었다.

일례로 오웰과 비슷한 시기에 활약한 화가이자 공산주의자였던 페르낭 레제는 기계문명에 대한 그의 신뢰가 아예 그림에 투영된 경우다. 그는 사람의 몸통을 기계 플랜트의 배관을 연상시키는 형태로 그렸다. 이런 그의 경향에 대해 한 평론가는 큐비즘이란 단어를 재밌게 비틀어 튜비즘(Tubism)이라고 정의하기도 했다.

실제로 신생 소비에트에게 있어 기계화는 사회주의와 거의 동일시되었다. 후진적인 생산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생산과 유통 과정은 기계화, 표준화, 집단화 되어야 했다. 각종 설비는 대규모로 지어져서 규모의 경제를 극대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시스템에서 노동영웅이 탄생했고 목가적인 소농은 발붙일 틈이 없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많은 진보세력이 비난하고 있는 맥도날드 햄버거와 같은 패스트푸드도 이러한 기계화, 표준화에 대한 낙관주의를 사회주의와 공유하고 있다. 이전에 비효율적으로 만들어지던 음식들을 제조업 공정처럼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어 맛의 질을 일정수준으로 유지하면서 싸게 팔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 모든 산업에 이러한 획일적인 표준화를 적용하는 것은 스스로가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조차 상당수가 비판적인 시각일 것이다. 그렇기에 원전과 같은 개발주의적 산물에 대해 반대운동을 펼치고 있고, 슬로우푸드 운동과 같은 반성적인 소비운동이 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확실히 이념적 지평을 넓혀 줄 것이다.

문제는 그러함에도 과연 삶의 모든 측면에서 기계화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이다. 오웰 역시도 이런 현실을 인정하고 있다. (어떠한 이념적 기반이건 간에) 개발주의 자체의 폐해를 비판하는 이들도 스스로의 삶에 미치는 개발주의의 수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원전 없는 세상을 꿈꾸는 와중에도 전기는 쓰고 있으니 말이다.

이에 대한 대안 모색을 위해 우선은 인간이 자연을 지배할 수 있다는 맹신을 버려야 할 것이다. 과거 소비에트 사회주의는 이런 맹신 속에 자연을 파괴했고, 자본주의 국가 역시 일상적으로 그렇게 하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조금 더 비용을 감내할 자세를 갖춰야 한다. “지탱 가능한 발전”은 이전의 개발주의와 다른 비용을 요구 할 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마음자세를 바꾸고 개발주의를 청산하는 일이 과연 현 체제에서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단순히 무슨 방송국의 캠페인으로 이러한 일이 가능하다고 생각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또한 이상주의자들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도전도 애정 어린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을 수 없다.

귤이 바다를 건너와 탱자가 된 또 하나의 사례, “경제민주화”

경제민주화는 의사결정의 권력을 기업의 주주에서 보다 공공의 지분소유자인, 노동자, 소비자, 공급자, 근린주구, 더 많은 이들 등 보다 큰 그룹으로의 이동을 제안하는 사회경제학적 철학이다.
Economic democracy is a socioeconomic philosophy that proposes to shift decision-making power from corporate shareholders to a larger group of public stakeholders that includes workers, customers, suppliers, neighbors and the broader public.[wikipedia.org]

경 제민주화는 경제조직의 단위들이 그 안에서 일하는 사람들, 그리고/또는 그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고 통제될 때 실현된다. – 최우선적인 이해관계가 단기적인 재정이득인 원격 주주들보다는,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조직과 공동체에 대한 진정 장기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이들에 의해서 소유되고 통제되는 것을 말한다.
Economic democracy exists when the units of economic organisations are owned and controlled by the people who work in them, and/or by those who use their services – people who have a genuine long-term interest in the organisations and the communities in which they operate rather than remote shareholders whose overriding interest is short-term financial gain.[equalitytrust.org.uk]

‘경제민주화’란 무엇인가?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이 개념의 정의는 명확하다. 바로 경제에 있어 의사결정의 주체를 소수의 손에서 다수의 손으로 넘기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가 재벌총수의 전횡, 단기적 이해의 주주자본주의를 포함한다면, 후자는 소비조합, 노동자의 경영참여, 이해자 자본주의, 기타 보다 급진적인 경제단위의 민주적 통제를 의미한다.

따라서 박근혜 씨가 처음 “경제민주화”라는 화두를 꺼냈을 때에는 우선 위와 같은 이 개념의 고갱이에 대해 고민하였어야 한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그렇지 않다. 본질이 “박정희 체제”의 적자인 그로서는 그와 같은 급진적인 사고를 차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안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경제관료 출신 김종인 씨의 영입이다.

김종인 씨는 전두환 前 대통령이 개헌을 할 적에 소위 “경제민주화 조항”이라 불리는 헌법 제119조 2항을 집어넣자고 건의하여 관철시킨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과연 그 주장이 진실인지의 여부는 차치하고라도 우선 알아야 할 것은 그 조항이 이 경제적으로 극우적인 나라에서 “경제민주화 조항”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명성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헌법 제119조의2. 국가는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원문 보기]

이 조항을 보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하는 주체가 “국가”다. 비록 그 규제와 조정의 목적은 바람직한 것이지만, 오랜 기간 국가주의의 통제에 의해 경제시스템이 왜곡되고 변질되어 온 역사에 비추어 볼 때 그 주체를 국가로만 국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며, 백번 양보하여도 “경제민주화”가 포괄하는 주체와는 동떨어져 있다.

한편, 왜 박근혜 씨가 이번 선거에서 이 개념을 선점하려 하였는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가 실제로 경제체질의 개선에 관심을 가졌을 개연성도 무시할 수 없다. 그밖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경제정책의 좌클릭을 통한 중도층의 흡수와 ‘근대화 세력 對 민주화 세력’이라는 구도를 깨뜨릴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이란 분석을 해볼 수 있다.

그러한 포지셔닝이 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것으로 보인다. 박근혜 씨가 결국 경제민주화 정책이라고 내놓은 것들이 기존의 재벌개혁 공약에서도 한참 미진한 신규 순환출자 금지 등, 오히려 주주자본주의를 강화시키는 정도의 “경제민주화”와 전혀 상관없는 정책이지만 민주당은 이런 보수성에 동질화되어버려 이슈파이팅에 실패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어느 샌가 한국화(韓國化)되어버린 “경제민주화”는 박근혜 씨의 아버지 박정희가 주창한 “한국식 민주주의”를 연상시킨다. 박정희는 “서구 선진국과 우리는 역사적 배경과 토양이 다르므로 정치도 달라야 한다”며 한국의 현실에 맞는 민주주의를 주창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 없는 “한국식 민주주의”인 유신(維新)체제였다.

박근혜 씨의 “경제민주화”도 국제사회에서 통용이 될 수 없는 “한국식 경제민주화”다. 재벌의 소유구조 왜곡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최태원 SK “회장”은 티끌만한 지분으로 공금을 가로챘고, 기업은 신종자본증권으로 – 역시 한국화된 – 회사의 자본상황을 윤색하려 하고 있다. 박근혜 식 “경제민주화”는 이 혼탁한 바다에 소금 한줌 뿌리는 짓이다.

한편 “노동자 대통령”을 표방하며 출마한 김소연 씨는 “재벌 재산을 몰수하여 사회화하고, 모든 주요 산업을 사회화하여 노동자와 민중이 통제”한다는 공약을 내걸고 있다. 몰수의 정당성, 현실성에 대해선 의문이 가지만, 적어도 “노동자와 민중의 통제”는 경제민주화 본래의 의미에 충실하다. 너무 거칠어 거부감이 들지 몰라도 사전적(!) 정의에는 충실하다.

‘자본주의가 소유권이 엄존하고 그걸 보호해주어야 유지되는 체제인데 그걸 부정하면 어떻게 하란 말이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 어느 현명한 철학자의 다음과 같은 생각을 들어보자. 우리가 주체적으로 당연하다 생각하는 생각들은 남의 생각이고 시대적 맥락을 가진 생각에 불과할 수도 있다. 주주가 회사의 주인이란 생각은 절대진리인가?

(러셀이 책을 저술할 당시인 1940년대 초반인 현대에는 많은 국가들이) 정치 권력의 세습이론을 거부하였음에도 이것이 민주 국가의 경제 제도에 거의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 우리는 여전히 부모의 재산을 자식들이 상속받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즉, 정치 권력의 세습은 거부하면서도 경제적 권력의 세습은 수용하는 것이다. 정치적 왕조는 사라졌으나 경제적 왕조는 살아남았다.

나는 지금 두 형태의 권력이 다르게 취급되는 행태를 옹호하거나 반대하려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저 그러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차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한 사람이 삶을 통해 축적한 부를 다른 사람에게 상속할 수 있다는 견해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여겨지는지를 고려해본다면, 로버트 필머 경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왕권의 세습을 자연스럽게 여길 수 있었는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로크의 혁신적 견해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아마도 (부의 세습이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현대인들의 생각이) 미래에는 필머의 이론만큼이나 공상적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러셀의 서양철학사(History of Western Philosophy) 中, 재산의 상속에 대한 러셀의 견해에서 재인용]

읽어볼만한 또 다른 관련 글 “경제민주화라는 유령”(이정환닷컴)
An Alternative Model: Economic Democra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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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책이 나왔군요

2012년 10월, OpenOil 이 세계적인 원유 전문가와 프로페셔널들을 모아서, 이 업계를 관장하는 계약들을 읽는 법을 설명하는 책 한권을 만들었다. Sourcefabric 이 고안한 “book sprint”라고 알려진 단기집중의 생산기술을 빌려서, 이 그룹은 일주일 만에 “원유계약 – 이것들을 읽고 이해하는 방법(Oil Contracts- how to read and understand them)”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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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con4, 새로운 경제학을 위한 또 하나의 시도?

우리가 오늘날 직면하고 있는 경제위기는 단순히 경제의 위기만이 아니다. 이는 또한 경제학의 위기이다.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을 이론적으로 지배하였던 자유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신뢰는 금융 붕괴, 국제적 불균형, 대량실업, 그리고 환경악화로 인해 깨지고 있다. 이러한 도전들에 맞서기 위해 우리에게는 21세기를 위한 경제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과거의 닫힌 경제적 도그마로부터 자유로운 열린 마인드의 경제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인류의 웰빙을 담보하는, 단기적인 아웃풋과 이윤의 극대화에 몰두하지 않는 경제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의 아이들과 다가올 세대를 위하여 지구를 지켜줘야 한다고 인식하는 경제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사람과, 지구와, 미래를 위한 경제학이 필요하다.

Econ4 라는 사이트에 적혀 있는 그들의 미션이다. “사람과, 지구와, 미래를 위한 경제학”을 찾아내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가진 이들 집단은 사이트 구성으로 볼 때에 Occupy Wall Street 운동 등으로부터 고양된 신사회운동의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일단 사이트에는 새로운 시리즈로 The Bottom Line이라는 트레일러비디오가 올라와 있다. 이 제목으로 경제학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올라오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디오 속 한 화자가 “우리에게 경제문제가 놓여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문제가 놓여 있다”란 말이 인상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