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대안경제

알파고가 경제시스템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회?

신용평가업계도 위기감이 감돈다. 알파고, 아니 ‘알파크레딧’이라는 이름의 AI가 신용평가 영역을 침범하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현실적이다. “AI의 재무 분석 결과 00사 부도율 7.25%, 고로 신용등급은 BB+”와 같은 계량적 판단은 당장이라도 가능해 보인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고 빠르게. 사실 신용평가가 1200대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할 정도의 계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용평가사들은 분명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한 증권사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AI가 신용평가업계에 도입될 경우 애널리스트 상당수가 보따리를 쌀 수도 있다”고 했다.[알파고가 신용등급을 매긴다면]

알파고가 인간들에게 – 그 인간들 중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겠지만 – 충격을 안겨준 지 꽤 지났지만 아직도 알파고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경제지에서는 이미 주기적으로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에 관한 기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바둑이 꼭 경제와 관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바둑이라는 작은 세계에서의 알파고의 가치판단과 정책결정이 경제 시스템이라는 더 큰 바둑판에 펼쳐질 것이라는 예감에 따른 보도내용이 많다.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켄쇼라는 애널리스트를 대체할 소프트웨어 이야기도 있고 인용한 기사와 같은 호사가적 가십성 기사도 있다.

인용기사처럼 인공지능이 신용평가에 도입된다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신용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국제신용평가사들의 등급평가에 관한 부조리는 크게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공무원이나 국제금융기구에 근무하는 엄격한 관리자에 의해 관리되는 인공지능 평가 시스템은 고객유치를 위한 등급장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선제적으로 등급조정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투자자는 발 빠른 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그램 매매처럼 냉정한 신용평가로 등급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SF영화나 스릴러가 인공지능을 소재로 만들어졌는데, 마이클 케인 주연의 Billion Dollar Brain 역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한 미국 자본가가 소련을 침공한다는, 비틀린 냉소적 정치 스릴러인 이 작품에서 소련 침공 계획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바로 인공지능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판단으로 명령을 내리기에 때로 브레인은 아군인줄 알았던 이까지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 한 배신자가 컴퓨터에 잘못된 명령을 몰래 입력하여 의사결정을 바꾸는데, 결국 인공지능의 태생적 한계를 잘 말해주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순환론이기는 하다. 인간의 결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계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그 기계는 인간이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면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제도”나 “국가”라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인공물로 때로 매몰차 보일 정도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판단을 내리는 소프트웨어랄 수 있다. 신용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기계적이고 냉정해야 할 신용평가 분석가가 실적에 시달리고 친분에 판단이 좌우된다면, 기계가 의사결정과정의 상당부분을 대체한다고 해도 변명거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신용 시스템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된다면 우리 경제 시스템의 큰 부분 하나가 인공지능에 맡겨지는 셈이다. 이런 고급 의사결정에서 인공지능의 효율성이 검증된다면 장래에 보다 고차원적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경제기획에 인공지능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개인의 한계효용을 빅데이터 형태로 수집하여 이를 분석하고 파레토 효율이 도달하는 시점에서의 상품생산량을 결정해주는 과정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SF적 미래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미래는 바로 신고전파의 한계효용이론이 적용된 계획경제 시스템이란 점이다.

시장경제 이론과 계획경제 이론의 조화로운 만남일지도?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칼럼에 대해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면, 이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Airbnb와 Etsy와 같은 신경제 웹사이트들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휴가기간 동안 집을 빌려주거나 예술품과 공예품을 파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과거에 집주인들은 임차인을 찾는데, 취미생활자는 구매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집합적인 웹사이트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훨씬 쉬워졌다.[Advancing, not retreating]

분명히 Airbnb와 Etsy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효용을 증가시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전진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글쓴이가 “자본주의 =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 등식 자체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서도 몇 번 살펴보았듯이 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구(舊)사회주의 블록 일부에서는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 실험을 시도한 나라들도 있을 정도로 시장이란 제도는 다양한 경제체제에서 존재가능하다.1 심지어 어떤 이는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칼 맑스가 지향한 것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시장경제라는 뉘앙스의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았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생산사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따른 공동생산의 의미를 지닌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맑스적 코뮌주의의 생태문화사회적 성격]

몇 번 주장하였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중추기능을 하는 기업은 거의 대부분 계획경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위 인용문의 글쓴이가 이야기하듯 ‘전제적’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이번 엘리엇 사태나 롯데 사태에서의 행태를 보라)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유의 집중이나 – 또는 그 소유보다도 더 왜곡된 권력 집중이 – 진정한 시장경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인용문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코뮌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가 “자본주의 발전”의 사례로 든 애어비앤비는 적어도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봐서는 대기업보다 덜 위계적이고 수혜자가 폭넓다는 측면에서 덜 ‘전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초기형태일지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국면에서 등장한 “국익”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신장섭 교수는 국민연금이 수익률과 국익을 고려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삼성물산 주가가 합병발표 뒤 15~20% 올랐다”며 “국민연금은 투자기관이기 때문에 필요한 수익률을 내야하고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국익을 지키는 범위에서 투자해야 한다” [중략] “삼성그룹은 잘한 점도 있고 잘못한 점도 있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한국경제에 어떤 공이 있는지 모르겠다”[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국민연금 어느 편에 서야 하나]

KIC 고위 관계자는 8일 “지난 2010년 10월 투자 수익률 제고 차원에서 엘리엇 펀드에 5000만달러(약 568억원)를 투자했으며 지금까지 약 40%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안다”면서 “엘리엇이 삼성물산 보유 지분(7.12%)을 일시에 다 팔고 나가면서 ‘먹튀’ 행태를 보이거나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 시장 질서와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 회수를 적극 고려하겠다”고 밝혔다.[한국투자공사 “엘리엇이 국익 해치면 투자금 5000만달러 회수 고려”]

참 재밌는 상황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합병 건에 대해 외국계 펀드가 딴죽을 걸고 나오자 난데없이 “국익(國益)”이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이 표현을 최초로 언급한 이는 인용기사 중 언급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이 “국익을 지키는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한편 엘리엇에 투자하고 있는 KIC는 엘리엇이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이제 우리는 국익의 실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국익이라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을 경제적으로 굳이 규정해보자면 ‘국가 및/또는 그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 전체의 경제적 이익’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경제적 이익이 국민경제 단위를 경계로 하여 그 손익을 따져야 한다는 명분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형평성 측면으로는 어떠할까? 국익이라는 국가주의적 뉘앙스를 감안하자면 그 경제적 이익은 보다 많은 국민의 이익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신 교수의 “국민연금에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이란 개드립은 무시하고라도 국민연금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것이 소위 국익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크게 이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단순히 경영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사익추구의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결권 자문사들이 삼성물산의 주주는 합병 건에 반대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다.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라 여기면서 우리나라의 재벌과 같은 사익추구 집단의 존재가 시장경제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삼성 “오너” 일가의 지배권 강화를 위한 꼼수 시도가 아니라면 시장에서 양 합병 주체는 각각의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익에 의해 왜곡된 삼성물산은 직원을 동원해 소액주주를 찾아가 합병 찬성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신 교수 주장대로 국민연금이 합병 건에 찬성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엘리엇이 시세차익을 얻지 못하고, 제일모직에도 상당한 지분이 있는 국민연금의 삼성그룹 주식 가치가 오를 수도 있고, 통합 삼성물산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기업이 성장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KIC가 손해를 보고, “오너” 일가가 부당한 이익을 얻고,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던 삼성물산 직원이 구조조정으로 잘릴 수도 있지만 이런 손해들은 국익의 대차대조표에서 한편에 밀어두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을 대변하는 국민연금은 왜 더 나은 국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합병이 성사되면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삼성 측의 조건부 립서비스 말고 지금부터라도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여타 조치를 – “오너” 일가의 예상 이익에 대한 특별과세, 협력업체와의 상생, 직원들의 고용안정 등 – 합병 찬성을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 국익을 논하려면 그 정도의 협상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

로봇이 내 일자리를 빼앗는 것인가? 노동으로부터 해방시켜 주는 것인가?

NPR은 최근 시장보고서를 내고 향후 20년 내 로봇에 의해 대체될 가능성이 높은 직업군 20개를 선정하였다. 이 직업군에는 전기전자제품 조립공, 보석가공연마사, 계산대 점원 등 단순반복 작업이 주를 이루는 제조업 및 서비스업의 직종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의외로 회계 장부 담당자나 은행원과 같이 상대적으로 복잡한 작업을 하는 서비스업 직종도 포함되어 있으며, 패션모델과 같은 의외의 직종도 포함되어 있다.

▲11위, 차량운전사=운전사,개인운전사들이 자동화될 가능성은 97.8%다. 운전자들은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것이다. 구글의 자율주행차는 인간이 개입 없이 수천마일을 시험해 왔다. 또한 트래비스 캘러닉 우버 최고 경영자(CEO)도 궁극적으로 모든 자동차가 운전자들을 대체하게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로봇이 내 일자리 뺏는다. 안전한 직업군은?]

특히 운전사는 이미 구글의 무인운전차량 개발 프로젝트 등을 통해 끊임없이 무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대표적인 직종이다. 머지않은 시대에 우리는 SF영화 토털리콜에서나 보던 피노키오처럼 생긴 로봇 운전자가 행선지를 묻는 택시에 승차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상용화 시대를 앞당기고 있는 주체는 당연히 인용기사에 언급된 구글이나 우버와 같은 사적기업이다. 특히 우버는 구글보다 더욱 더 상용화에 목을 매고 있다.

우버는 언젠가 자사의 계약 운전사 수만 명을 대체할 수 있을 무인차를 꿈꾼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무인차 개발 역량을 전혀 갖추지 못한 우버는 곧바로 ‘드림팀’ 구성을 할 수 있는 곳으로 눈을 돌렸다. 바로 카네기멜론대의 국립로봇공학센터(NREC)다. 투자자들에게서 조달한 50억 달러의 현금으로 무장한 우버는 일부 NREC 소속 과학자들에게 수십만 달러의 보너스와 현재 연봉의 두 배를 제시했다. [우버, 산학협력 맺은 카네기멜론大 연구진 빼가]

처음에 “공유경제”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았던 우버가 번창하는 실제 이유는 “주문형(On-Demand) 경제”나 “하인(Concierge) 경제” 모델에 기반을 두었기 때문임은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말한 바 있다. 즉 우버는 운전이라는 서비스 노동에 활용할 노동력을 비정규/비정형화하여 비용을 절감하여 수익을 창출하고 있다. 이러한 모델에 대한 비판도 적잖은 상황이지만, 우버는 사실 그 상황마저 뛰어넘는 궁극의 무인화의 길로 가려하고 있다.

잠깐 옆길로 새자면 처음에 대리운전 업체 비슷하게 시작한 우버가 학교의 연구 인력을 빼나가는 블랙홀이 된 과정이 참 흥미롭다. 결국 우버는 앞서 말한 비용 절감 모델을 스마트폰 앱이라는 수단을 통해 ‘규모의 경제’ 化하여 성공하였다. 벤처캐피탈은 그 가능성에 베팅하여 투자를 했고, 우버는 그 잉여자금을 현재 수익모형의 다음 단계에 베팅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 아니고서는 볼 수 없는 역동적인 투자환경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각설하고, 관건은 우버가 이렇게 산학협력을 빙자한 인력 빼오기를 해올 정도로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프로젝트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일 것이다. 사견으로 우버가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어느 기업인가는 그 비즈니스 모델을 구현해낼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Siri에게 “차 좀 불러줘”라고 주문하면 집 앞에 무인운전차량이 대기해 있는 장면을 목도할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가는 것이다.

문제는 우리 대부분이 노동자라는 사실이다. 텔레마케터인 24세 여성인 미선 씨는 무인택시라면 운전사의 성희롱이나 난폭운전이 없어질 것이라며 좋아할지도 모른다. 문제는 본인의 직종이야말로 로봇化로 인해 없어질 직종 1위라는 점이다. 언젠가 그는 출퇴근을 위해 무인택시를 탈 필요도, 택시비를 지불할 돈도 없을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노동자는 로봇化로 인해 노동뿐 아니라 월급으로부터도 해방되는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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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biddenplanetposter” by Copyrighted by Loew’s International. Artists(s) not known. – http://wrongsideoftheart.com/wp-content/gallery/posters-f/forbidden_planet_poster_01.jpg.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이렇듯 사적소유에 의해 지탱되는 자본주의는 기술발전 등으로 인한 자동화 혜택의 절대다수가 주주에게 귀속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편 칼 맑스는 자본을 “가변자본”과 “불변자본”으로 나누고, 개별 자본은 가변자본인 인간의 노동을 가치의 변화가 없는 불변자본인 기계로 대치하여 상품의 가치를 전유하려는 속성이 있음을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개별 자본에게 있어 합리적인 이러한 의사결정이 사회의 이윤율을 하락시킬 것이라 예측하였다.

말인즉슨, 우버 등 개별자본이 로봇化를 통해 경쟁력을 가져 상대적 고수익을 누리는 것은 자본주의 고유 속성이고 이런 자동화가 차츰 일반화되면 노동자로부터의 착취율이 떨어져 사회 전체의 이윤율이 감소한다는 것이 칼 맑스의 논리다. 이 법칙이 “경향적 저하의 법칙”이란 희한한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만큼 애매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시사점은 있다. 노동자는 이제 착취당할 여지도 없게 되고 무인택시를 이용할 소비자도 사라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경향이 바로 오늘날 미국이나 일본과 같은 첨단 자본주의 국가의 지도자들이 기업에게 노동자의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이유다. 개별 자본은 자동화를 통해서든 구조조정을 통해서든 계속 수익극대화를 추구하고 제도는 이를 정당화하고 있지만, 그로 인해 총자본이나 사회전체는 성장이 둔화되거나 심지어 정지할 수 있는 위기로 몰리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다만 노동자라는 생산자가 동시에 소비자라는 평범한 사실을 상기시키고 있을 뿐이다.

이 모델에서 랑게는 신고전파의 전통 특히 바로네가 정식화해놓은 전제들을 그대로 따랐다. 이러한 형태의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를 기초로 하고 있다. 개인들은 각자 자신의 직업과 소비재를 자유롭게 선택하며, 이것들은 “진짜 시장”에서 매매된다. [중략] 피고용자들은 소득을 얻고 또 추가로 “사회적 배당금” 즉 “사회가 소유하는 자본 및 천연자원에서 나온 소득의 개인 몫”을 얻게 되어 있다.[신자유주의의 좌파적 기원, 조하나 보크만 지음, 홍기빈 옮김, 글항아리, 2015년, pp75~76]

칼 맑스 등 사회주의 사상가들이 꿈꾼 생산력이 극대화된 미래에 인간은 고통스러운 노동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다. 그리고 시장 사회주의자 오스카르 랑게가 꿈꾼 사회는 어쩌면 칼 맑스도 이야기한 “자유로운 생산자 연합”의 보다 구체적인 로드맵일 수도 있다. 문제는 노동자가 무인택시를 즐기며 “사회적 배당”을 받으려면 노동자 스스로가 기업의 주주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는 그런 길이 제한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고 있다.

현실에서 “사회적 배당”의 특징을 지닌 존재는 연기금으로부터의 연금 정도다.

장하준 교수의 삼성활용론 중 국민연금의 역할에 관하여

지금 삼성전자의 경우, 국민연금공단이 7~8%의 지분을 갖고 있다. 회장 유고가 발생하는 경우, 국세청이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등 삼성 3세들로부터 상속세를 삼성전자 주식으로 받아(주식 가격을 더 높게 쳐줄 수도 있다) 국민연금공단에 인도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국민연금공단이 삼성전자의 확고한 최대 주주가 되고 삼성 가문의 지분은 크게 줄어든다. [중략] 삼성전자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으로 경영하도록 압력도 행사할 수 있다. 이건희의 후계자가 엉뚱한 경영을 일삼는다면 일정한 기간 뒤에 CEO 자리에서 쫓아낼 수도 있다.[“필요하면 삼성법도 좋다”]

장하준 교수는 국내의 좌우 진영 모두에서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현실주의자” 혹은 “실용주의자”의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에 대한 위와 같은 입장이 그의 전형적인 시각인데 어느 진영도 선뜻 동의할 수 없는 해법일 것이다. 좌파의 입장에서는 “봉건적인” 기업 지배권을 보장해주는 것이고 우파의 입장에서는 “연기금 사회주의”의 도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법 제102조(기금의 관리 및 운용) 보건복지부장관은 국민연금 재정의 장기적인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킬 수 있도록 제103조에 따른 국민연금기금운용위원회에서 의결한 바에 따라 다음의 방법으로 기금을 관리·운용하되…

국민연금법에서 규정하고 있는 기금 운용원칙은 “수익을 최대로 증대”시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우파의 이념공세를 막을 수 있는 무기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원칙 자체가 국민연금을 주주 자본주의로부터의 방패막이로 사용하려는 장 교수의 생각과 배치되는 것이다. 국민연금 역시 다른 주주처럼 단기차익을 시현하려는 맘을 먹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보장하는가?

기관투자자에 포함되는 펀드, 연금기금, 생명보험사는 청구권의 만기(maturity of liabilities)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우선 펀드, 특히 공포펀드의 경우 환매요청과 거의 동시에 자금을 인출할 수 있으므로 청구권의 만기는 초단기에 해당한다. 반면, 생명보험사의 보험계약은 비교적 장기이며, 퇴직연금, 국민연금 등 연금기금의 청구권의 만기는 초장기라 할 수 있다.[기관투자자가 자본시장 발전에 미치는 영향 및 정책과제, 자본시장연구원, 2014년 2월]

청구권의 만기가 길다는 점은 확실히 연금의 단기수익 추구 성향을 경감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향은 다소 안정적인 경영에 도움을 줄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국민연금은 수익 추구 집단이다. 주식시장 부양을 위해 연금을 동원한달지 하는 여태의 행태가 장 교수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또 다시 연금을 호출한 명분은 아닌 것이다.

국민연금에 돈을 붓고 있는 내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분명 연금은 궁극적으로 수익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연금의 주주행동주의가 옳은 것이냐 혹은 국민경제에 유리한 방향이 연금에 유리한 방향이냐 등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국민연금의 운용원칙이 좀 더 고유특성에 맞게 조정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본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가?”에 대한 피케티의 대안

역사적 경험에 대한 여러 발견 가운데 하나는 더 나은 경제적 평등을 향한 일반적 경향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종합해보면, 두 개의 가장 놀라운 결론은 미국에서의 ‘초특급경영인’(supermanagers)의 등장과 유럽에서의 ‘가산제적 자본주의(patrimonial capitalism)’의 회귀이다. 피케티의 이론에서 중요하고도 무척 흥미로운 것은 자본축적에 관한 것인데, 그것은 책의 기본공식으로서 ‘자본의 수익률’(r)이 ‘경제성장’(g)을 능가한다는 의미의 “r>g”로 표현된다. 풀어 말하면 소득 대비 자본의 비율은 그 수익률이 경제성장보다도 현저하게 더 높은 한, 한정 없이 증가할 것이라는 명제이다. [중략] 이러한 분석 뒤에 피케티는 대담한 대안 혹은 여러 평자들이 “비현실적”이라고 비판하는 정책을 제시한다. 특히 그는 최고 수준의 소득에 대해 훨씬 더 높은 한계세율을 부과하는 것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를 요구한다. 그렇지 않으면 장기적으로 개별 국가들이 국민소득 배분에 있어 중간층과 하층에게 경제자원을 재분배할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피케티의 “21세기 자본”. 자본주의에 대한 탈이념적, 현대적 해석 바람]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쓴 “21세기 자본”에 대한 최창집 교수의 소개 글 중 일부다. 1971년생의 젊은 나이인 피케티가 내놓은 이 책은 685쪽이나 되는 양에다가 많은 통계와 도표가 포함된 경제학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리스트에 오르는 인기를 얻고 있다고 한다. 최창집 씨는 이런 인기의 배경에는 “유럽적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프랑스의 지적 환경”과 “방대한 경험적 자료”가 있기에 가능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서평만을 보고 판단하기에는 미흡하지만 그의 책은 여태의 경제학계가 가지고 있는 통념을 여러 면에서 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장 흥미로운 점은 오늘날 선진 자본주의가 19세기말 자본주의의 특징이었던 “가산제적 자본주의”로 회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소득에 의한 부의 축적보다는 세습과 자본수익에 의한 부의 축적의 경향이 더 커지고 있다는 주장인데, 피케티는 “자본의 수익률이 경제성장을 앞지르면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피케티가 이런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어떠한 자료를 활용하였는지는 그의 책을 보고나서야 판단할 일이지만 선진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몇 가지 상황을 보면 그의 주장이 일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슈퍼슈퍼리치의 등장, 사모펀드의 생산자본 지배현상, 조세피난처의 득세 등 자본주의의 다양한 모습들은 어쩌면 피케티의 논거의 원인이기도 할 것이고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피케티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자본주의의 활력은 더욱 잃어갈 것이다.

피케티가 대안으로 내놓은 것은 “수준의 소득에 대한 더 높은 한계세율”과 “누진적인 글로벌 부유세”이다. 최창집 씨가 “비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했는데, 특히 비현실적인 주장은 “글로벌 부유세”일 것이다. 조세피난처까지 봉합하여 전 세계 단일 과세율을 적용하자는 것인데, 사실 이 비현실적인 주장은 나도 이 블로그에서 한 바 있다. 그리고 자본이 초국적화되었고 국민국가이 영토가 한정된 상황에서 이외에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어쨌든 HedgeFund.net은 중요한 아이디어를 하나 제공하고 있다. ‘전 세계 단일세율’이 바로 그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 각국은 낮은 세율과 낮은 임금을 쫓아 부나방처럼 옮겨 다니는 자본을 끌어들이기 위해 경쟁적으로 세율을 내리고 있는 형편이다. 우리나라 역시 새 정부 들어 이런 의도를 노골화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 조세피난처와 같이 극단의 세율을 제시하지 않는 이상은 그들의 자본유치활동은 결국 자본이 거쳐 갈 하나의 정거장을 제공하는 행위일 뿐이다.[전 세계가 단일세율을 적용하면 어떨까?]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안드로이드(Android)는 구글이 내놓은 모빌 기기들을 위한 운영체제다. 그렇지만 원래 이 호칭은 인간의 형태를 지닌 기계, 즉 봇과 같은 기계장치를 일컫는 말이다. 이 단어는 이미 1863년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장난감에 관한 미국 특허장에 언급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호칭이 유명해지게 된 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는 SF소설에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영화 ‘Blade Runner’의 원작인 필립 K. 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가 있다.

소설에서 안드로이드의 역할은 인간의 노예다. 전쟁으로 황폐화되어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운 지구 대신 우주의 식민지로 이주해가는 인간들을 위해 제공되는 것이 바로 안드로이드였다. 안드로이드는 노예이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고 자유를 찾아 지구로 탈출해온 안드로이드는 주인공 릭 데카드와 같은 사냥꾼에 의해 “은퇴”당해야 했다.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안드로이드로서는 억울한 일이었지만 어쨌든 안드로이드는 철저히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존재였다.

한편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어떠할까?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것일까? 현실의 안드로이드는 제조업, 농업, 광업과 같은 분야에서의 자동화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증기기관, 트랙터, 드릴기계 등이 바로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다. 이들 안드로이드는 물질문명의 생산성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인류를 미증유의 풍요의 시대 속에서 살게 해주었다. 안드로이드는 분명 인간의 이익을 위해 봉사한 셈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개별 산업 그 자체에서는 반드시 좋은 반응을 얻은 것은 아니었다.

기계사용을 통한 대량생산은 전통적인 수공업자들을 몰락시켰다. 더 발전된 기계가 등장하면서는 대공장의 숙련노동자들의 일자리까지 빼앗았다. 이를 통해 산업사회는 거대한 실업자 집단을 낳았고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과 같은 사회갈등을 증폭시켰다. 칼 맑스는 이러한 상황이 “자본의 유기적 구성 고도화”로 인한 이윤율 저하 경향과 맞물려 혁명적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고 예언했다. 대단한 통찰력을 지닌 관찰이었지만 현실은 어쨌든 아직 지구적 혁명적 상황에 몰리진 않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기계화, 자동화로 인한 사회적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스마트폰의 등장은 수많은 사람들의 생산성을 극적으로 향상시켰지만 그로 인해 일자리를 잃은 전통적인 산업분야 종사자도 많았을 것이다. 전기자동차 업체인 테슬라는 GM과 비교해 시가총액이 절반 수준에 달하지만 직원은 30분의 1 수준이라고 한다. 공장자동화의 영향이다. 게다가 딜러를 통한 판매가 아닌 온라인 판매 방식이라 딜러도 필요 없다. 딜러 연합은 강하게 반발하며 현대의 러다이트가 되었다.

분명 생산성의 향상은 사회적으로 긍정적일 텐데 왜 일부는 저항하는가? 기득권을 뺏기기 때문이다. 비록 궁극적으로 쇠퇴할 기득권일지라도 당사자에게는 심각한 일임은 분명하다. 사회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으로 이어지겠지만 특정인에게는 노동시간의 몰수이자 소득의 몰수이기 때문이다. 현실에서의 안드로이드는 이주자 전체의 노예가 아니라 기업주와 같은 소수의 노예다. 기업주가 안드로이드로부터 이득을 또 다른 노예와 공유할 생각이 없는 한 인간노예는 기계노예에게 분노감을 갖게 된다.

지난 주말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열린 IT행사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인터랙티브에서는 로봇이 노동시장을 차지할 것인가가 중요한 토론주제였다고 한다. 논의 내용 중 상당수는 로봇이 멀지 않은 미래에 인간의 노동력을 대체할 것이라 내다봤다고 한다. 칼 배스 오토데스크 CEO는 30년이 지나면 똑똑한 기계와 로봇들의 수가 인간의 수를 넘어설 것이라는 다소 성급한 예언도 내놓았다. 그의 예언이 실현된다면 정말 인간의 모습을 지닌 안드로이드 노동자가 등장하지 말란 법도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그 기계화로 인해 노동자들이 피해를 입는다면 러다이즘은 더 오랜 생명력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런데 칼 배스가 이런 갈등을 해소할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소득이 아닌 경제 생산에 세금을 부과하거나 소득 수준을 보장하기 위해 시민들에게 수당을 지급하는 ‘역소득세’를 실시하는 방안이 그것이다. 전자는 미루어 짐작하건데 개인에 대한 소득세는 없애고 기업에 대한 법인세를 강화하는 방안이다. 후자의 방법은 어느 정도 익숙한 기본소득이다. 소득세 폐지, 법인세 강화, 기본소득.

물론 이것은 스스로 자동화를 통해 돈을 벌어야 하는 업체의 대표의 말이다. 이런 정책이 현실화된다면 그의 비즈니스는 더욱 탄력을 얻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 유의미하다. 사회전체의 자동화 이로 인한 노동시간 단축이 특정분야 특정인의 도태로 이어진다면 사회의 유지를 위해 보조를 한다는 개념은 수긍할만하다. 그리고 그것이 선별적인 보조가 아닌 사회유지를 위한 패러다임의 전환적 조치로서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로 이어진다는 아이디어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안드로이드는 기본소득을 꿈꾸는가?

영화 Blade Runner의 시간적 배경은 2019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