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대안경제

좌익 진영의 사회기반시설 건설을 위한 연기금 활용론에 대하여

향후 사회기반시설 건설에 국민연금기금을 적극 활용할 수 있다. 특히 임대형 사업은 정부가 기본 수익을 보장하므로 국민연금기금의 공공성·안정성·적정수익성을 동시에 제공한다. 국민연금기금이 참여할 경우 사회기반시설의 전성·건설·운영하는 과정에 지역 사회·연금가입자·연금공단이 주체가 되는 민주적 공공부문 지배 구조 모델도 만들어질 수 있다. 필요하다면 ‘사회기반시설에 대한 연기금투자법’(가칭)을 제정하여 국민연금기금의 사회기반시설 투자를 위한 법적 인프라를 갖추어야 한다.[대한민국 금고를 열다, 오건호 지음, 레디앙, 2011년, p185]

거의 모든 좌익은 민간투자사업을 반대한다. 국제적으로는 PPP(Private Public Partnership)이라 불리는 이 사업방식은 도로, 철도, 환경시설 등 통상 공공재(公共財) 혹은 인프라스트럭처로 명명되며 정부부문이 공급하던 재화 및 서비스를 민간자본의 힘을 빌려 제공하는 방식을 말한다. 광의의 “민영화”라 하면 소비에트 사회주의 블록에서 취했던 재화 및 서비스 일반의 국유화가 아닌 모든 민영화 방식을 아우르는 것이지만 민간투자사업은 그 중에서도 상기 사업방식에 특정된 민영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런 PPP사업의 본격화가 이른바 레이거노믹스와 쌔처의 “신자유주의 시대”와 일치한다는 정황 탓에 앞서 말했듯이 PPP는 좌파에게 “공공재의 사유화” 수단이자 “공공의 적”으로 간주되어 왔다. 진보적 성격이 강한 문재인 정부 들어서 민간투자사업으로 추진되어오던 사업이 재정사업으로 전환된달지, 유료도로법 개정을 통해 강한 공적통제를 시도한달지, 사업 재구조화를 통해 통행료 인하를 추진하는 등의 시도가 이어지고 있는 것도 그런 맥락이라 할 수 있다. 20년간의 민간투자사업의 전환기인 셈이다.

Evacuated Highway 401 Color.jpg
Evacuated Highway 401 Color” by Kenny Louie. Licensed under CC BY 2.0 via Wikimedia Commons.

인프라스트럭처 자금조달 수단에 대해 알아보자. 크게 두 개로 나누자면 재정사업과 민자사업이다. 두 수단을 섞는 방식도 있고, 일부 사업은 원인자부담금을 활용하기도 한다. 이 두 수단을 달리 말하면 비(非)시장적 수단과 시장적 수단이라 할 수 있다. 민자사업과 시장적 수단은 뉘앙스가 다른데, 연기금이 민자사업에 투자할 경우 민간자본이라기보다는 사회자본에 가까워 민영화보다는 “시장화”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전 세계적으로 각종 연기금은 이미 민자사업에 많은 돈을 투자하고 있다.

“대체투자(Alternative Investment)”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인 주식, 채권 등과 달리 Private Equity, 부동산, 인프라스트럭처 사업, 원자재 등에 투자하는 시장을 말한다. 이 시장은 전통적인 투자시장의 계속되는 낮은 수익에 대한 피난처가 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에 따르면 100개의 가장 큰 규모의 대체 펀드 그룹의 자산은 지난 해 6% 성장한 3조3천억 달러에 달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중 가장 핫한 투자자들이 바로 연기금들이란 점이다.[대체투자, 인프라스트럭처, 공익성 등에 관한 단상]

이런 상황에서 보면 오건호 씨 등의 국민연금 활용론은 순진한 측면이 있다. 그들은 민자사업 일반을 “절대악”으로 치부하면서 국유화/사회화를 주장하는데, 그 자금수단으로 이미 시장화를 통해 투자를 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활용론을 손쉽게 꺼내기 때문이다.1 이 활용론의 최신버전이 권미혁 의원의 주장이다. 하지만 실상을 보면 국민연금은 민자사업이 목표수익률에 미치지 못하여 최근 민자사업에서 갈등을 빚고 있다. 이미 시장에 진입한 투자자에게 공익(公益)을 위해 더 낮은 수익률로 각종 사업을 떠안으라는 복안이 타당한지 자문해야 한다.

우리 정치세력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연금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아무렇게나 꺼내 쓸 수 있는 쌈짓돈으로 여기는 것 같다.2 하지만 시장경제적 관점에서 보자면 사회적 투자의 가장 큰 돈줄인 국민연금은 정치인이 쓸 수 있는 돈이 아니다. 오히려 시장 사회주의적 관점에서 보자면 그러한 정무적 관점이 시장을 교란하고 더 나아가 사회적 투자의 합리성을 저해할 수 있다. 연금의 수익률이 공익(公益)인가? 낮은 도로 통행료가 공익인가?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 斷想

소위 “미래학자”들의 저서는 별로 읽지 않는 편이다. 취향의 문제이기도 하고 선입견의 문제이기도 한 것 같다. 암튼 최근 피치 못할 사정(!)으로 유명한 제러미 리프킨의 ‘한계비용 제로 사회’라는 책을 일부분 읽었다. 읽었던 서문과 일부 챕터를 요약하자면 기술의 상상을 초월한 발전으로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워지고 이로 인해 “전반적인 최적의 복지”가 이루어지면 다가올 미래는 “협력적 공유사회(collaborative commons)”로 발전할 것이라는 긍정적 세계관에 대한 개론과 각론이랄 수 있다.

그의 이념적 지형은 거칠게 보자면 ‘위험하지 않은 反자본주의자’ 정도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본주의 시스템 자체에 자본주의가 추동하는 기술발전에 따라 “한계비용의 제로化”되는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고 생각한다는 점에서 반체제적이다. 그는 이러한 주장을 위해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맑시스트의 분석이나 케인스의 예언을 인용한다. 그런 한편 자본주의라는 패러다임은 협력적 공유사회가 되도 한동안 존속할 것이라고 유보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위험한 사고의 소유자는 아니다.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은 토마스 쿤의 유명한 『과학 혁명의 구조』에서 빌려온 개념이다. 쿤이 패러다임을 처음 쓴 것은 아니지만, 그로 인해 그 단어는 가장 유명해졌다. 패러다임은 “함께 작용하며 통일되고 통합적인 세계관을 확립하는 신념 및 가정 체계로서 설득력이 높고 저항할 수 없는 까닭에 실제 상황 그 자체나 마찬가지로 여겨지는 것”이라 풀이되는 개념이다. 그런 면에서 순응적이고 긍정적인 개념이다. 칼 맑스가 자본주의를 “이데올로기”라 부르며 그것을 일종의 ‘허위의식’이라 부른 것과는 다른 자세다.

이런 점만 봐도 기득권이 제러미 리프킨을 불온시할 이유는 전혀 없다. 오히려 리프킨은 한계비용이 줄어들면서 기존 자본가의 이윤이 줄어들 상황을 염려하면서 로렌스 서머스의 보고서를 인용하며 “일정한 비율로 수익이 증가하는 조건하에 상품이 생산되는 .. 일시적인 독점 권한과 이윤이 민간 사업체에 이러한 혁신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보상이 될 것”이라며 이윤 확보의 로드맵까지 제시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공유경제”, “협력적 공유사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탈정치화될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한 셈이다.

내가 보기에 그의 이론의 가장 허술한 점은 “한계비용 제로化”를 협력적 공유사회로 가는 키워드로 여긴다는 점이다. 한계비용은 고정비가 일정한 단기적 생산 상황에서 재화나 서비스가 한 단위 늘어날 때마다 추가되는 비용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생산이 늘어날수록 한계노동생산성이 떨어지며 이에 따라 한계비용은 증가한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가 되며 정보재 등은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지는 상황이 연출되며, 리프킨은 이런 상황에 환호하고 있다. 하지만 장기상황에서는 한계비용 이외에 평균비용이 증가할 것이다.

즉, 현재 정보재와 같은 재화의 한계비용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이미 광범위하게 재정이나 투자로 깔아놓은 각종 물적인 인프라스트럭처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장기적으로 이 고정자본은 갱신되어야 한다. 이미 자본주의 황금기에 깔린 미국 등 서구사회의 인프라는 그 생애주기 막바지에 놓여 있어 대규모 갱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한 투입비용을 감안한다면 단순히 소프트웨어 다운로드 속도가 빠른 정황만 가지고 한계비용 제로 사회를 외칠 일인지 모르겠다. 그런 정보재에 대한 불평등한 상황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또 하나 그의 이론은 “최적의 복지” 로드맵이 눈에 띄지 않는다. 얼론 머스크가 북한의 핵보다 더 위험한 것이 인공지능이라고 했다는데, 그들이 인간의 웬만한 모든 종류의 노동을 빼앗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인류의 재산이 자산과 소득에서 절대 다수 얻어지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의 종말은 소득의 종말을 의미하기에 일부 벤처캐피탈리스트는 ‘기본소득’을 주장한다. 하지만 리프킨은 “소유주와 노동자의 낡은 패러다임이 무너지고 있다”(215p)고 말할 뿐이다. 노동자는 여전히 당장 돈이라는 “낡은 패러다임”이 필요한데?

* 짧은 독서로 거칠게 쓴 글이니 혹시 내가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다면 의견주시기 바랍니다.

블록체인이 자본주의 이상향을 실현해줄 것인가?

삼식부기 회계는 기업 지배 구조를 혁신하는 다양한 블록체인의 사례 가운데 첫 사례에 속한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기관들과 마찬가지로, 기업들은 합법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주주운동가 로버트 몽크스 Robert Moks는 이렇게 말했다. “자본주의는 CEO또는 이른바 제왕적 경영인의 이익을 위해, 그들의 이익에 의해 돌아가는 과두체제와 같습니다.” 블록체인은 주주들에게 권력을 돌려준다. 자산에 대한 권리를 표창하는 ‘비트셰어’라는 토큰이 하나 또는 다수의 투표에 따라 생성될 수 있고, 각 투표는 기업의 특정한 의결 사항을 대변한다. [중략] 일단 투표가 이루어지면, 이사회 회의록과 의결 내역이 타임스탬프에 따라 불변 원장에 기록된다.[블록체인혁명, 돈 탭스콧/알렉스 탭스콧 지음, 박지훈 옮김, 을유문화사, 2017년, pp 153~154]

올해 비트코인 등 이른바 가상화폐 광풍이 불고 있다. 특히 전 세계 가상화폐 거래량의 상당부분이 한국 소재의 거래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하니 새삼 ‘한국인의 역동성은 정말 대단하구나!’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여하튼 비트코인이니 이더리움이니 하는 가상화폐 또는 스마트계약들이 블록체인이라는 기술에 기반을 두어 만들어진 것들이라는 것은 이제 어느 정도 상식이 된 것 같다. 인용한 글이 담겨져 있는 블록체인혁명이라는 책은 바로 그 블록체인 기술로 우리가 미래사회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현황과 성찰을 담은 책이다.

인용문은 그중에서도 블록체인을 통해 기업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로드맵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삼식부기는 우리가 복식부기라 부르는 재무제표가 두 가지 장부 기록이 있는 반면, 블록체인을 이용하여 “월드와이드 원장”에 제3의 장부기록을 추가하는 방식을 일컫는 용어다. 기업이 각종 활동을 벌일 때마다 이 거래를 기록하고 블록체인에 타임스탬프가 찍힌 영수증을 발급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삼식부기가 일반화되면, 시장은 최신 재무보고서는 분기에 한 번씩 기다릴 필요 없이 필요할 때마다 버튼 한번으로 출력해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저자들은 이러한 자본주의를 “분산 자본주의”라고 부르고 있다. 주식회사라는 도구가 발명된 이후 우리는 명목상으로는 이 도구의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왔다. 즉, 우리는 공인된 주식 거래시장의 설치, 주주자본주의 강화를 위한 입법 및 규제, 기업의 투명성을 위한 회계 및 공시 등 수많은 대안과 통제를 시도했다. 그럼에도 인용문에서의 어느 주주운동가가 말하듯 여전히 기업은 – 주식회사조차 – “제왕적 과두체제”의 성격을 띠고 있는데 이는 많은 부분 고의 또는 제도적 결함으로 인한 기업의 불투명성 혹은 정보의 비대칭성으로 인한 결과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건을 예로 들어보자. 이 두 회사가 삼식부기에 의해 재무제표가 업데이트되었다면 주주는 보다 투명하게 회사가치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제공받을 수 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아직 그러하지 않았기에 주주는 회사가 정한 – 법에도 그렇게 정한 바 – 주식시장에서의 거래가격으로 합병하는 것에 대한 가부의 의사결정만 할 수 있었다. 일부 주장처럼 삼성물산의 장부가가 주가총액보다 높았을 수도 있는 사실은 복식부기로는 파악에 한계가 있다. 결국 이 기묘한 주주자본주의 역할극의 파국은 “총수” 구속이었다.

삼식부기에 회의적인 시각도 있는데, ‘프로토콜을 지키지 않고 비슷한 독자적인 네트워크에 비밀스러운 가치를 숨기려 하는 부외 거래의 가능성’이 삼식부기 방식에도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또한 문외한으로서도 드는 생각이 가상화폐는 프로토콜이 변경되면 새로운 가상화폐가 등장하는 것이지만, 삼식부기에서 프로토콜이 바뀌면 기존의 “불변”의 거래는 어떻게 처리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도 든다. 그럼에도 블록체인을 통한 기업 투명성 제고는 충분히 매력적이다. 이야말로 시장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효율적 시장가설의 이상향이 아닌가?

서비스 배당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주식회사는 회사를 분할해 각 지방의 중핵에 본사를 둡니다. 주식회사의 금전 배당은 제로로 하고 서비스 배당권으로 전환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주주가 일부러 일본에 와 서비스를 받는 것은 교통비만 해도 엄청나므로 자연히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때 제로이윤으로 고용자 보수를 올려 지역 주민이 주주가 되거나 지역 금융기관에 예금이 모이면 지역 금융기관이 주자가 되면 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104]

얼핏 들으면 웬 세계화, 전산화, 증권화의 대세를 거스르는 환경주의적 마인드의 공산주의자의 몽상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후 모건스탠리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경제관료를 거쳐 니혼대 교수로 있는 분이 하는 소리니 좀 신선하기는 하다. 주식과 주주라는 근대의 발명품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인 셈인데, 얼핏 드는 생각은 신규로 발행하는 주식이면 몰라도 기존의 주주들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꾸는 그 혁명적인 과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거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적인 개념?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통한 사회적 통제 확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만약 그러한 연기금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꾼다면 대부분의 연금 수혜자는 미래수익의 상당부분을 포기하여야 할지도 모를 사태가 벌어질 듯 하다.

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지금 경제산업성도 기업에 ROE를 8%이상 올리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을 진심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경제산업성이 부호 투자가의 집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제로금리일 때 ROE만 높다는 것은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뭔가 다른 것, 예를 들어 임금을 내리거나 여러 가지를 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전체 경제성장 중 일부분만이 이익인데 제로성장일 때 이익을 8% 늘리려면 인건비 등을 삭감해야 합니다.[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221]

제목은 참 묵시록적인데 정작 내용은 소박한 것이 일본 경제학 서적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이 책은 그런 내 편견에 증거를 한 조각 더 보태주는 책이다. 경제관료, 금융기업의 이코노미스트 등의 경험을 쌓은 후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두 저자가 내놓은 “그 너머의 세계”는 무척 소박하기 때문이다.1 요컨대 “제로성장”일지라도 “잃어버린 20년” 운운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자는 것이 대안이다. 또는 성장하는 사회가 아닌 성숙한 사회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근거로 사카키바라 교수는 일본의 높은 삼림화율, 높은 평균수명, 낮은 범죄율 등의 높은 질적 가치를 든다. 자족적인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일본 정도의 나라의 경제학자가 할법한 소리이긴 하다.

인용문은 두 저자의 대담 중 미즈노 교수가 한 이야기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격차를 확대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중심과 주변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제국의 식민지 수탈을 의미함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그것 역시 수탈할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더 이상 신대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주변화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인데, 일본의 경우 1990년 20%였던 비정규직 비율이 2014년 현재 37.9%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와 같이 국가가 나서서 수익률 제고를 주장하면 그 수단은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즈노 교수의 주장이다.

아베가 평소에 노동자의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정작 재정적 안정보다는 오히려 저렇게 인건비 하락으로 귀결될 성장신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두 저자의 생각이다. 아마도 아베의 로드맵은 정체되어 있는 일본경제는 기업이라는 프론티어가 8% ROE로 박차고 나가고 이 열매가 트리클다운으로 이어져 나머지 경제도 살아난다는 정도가 되었을 것일 텐데 저자들은 오히려 그런 성장신화가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과 자산은 기업과 재력가들의 갈수록 수중에 집중되고 소득이 부의 원천인 노동자는 계속 주변화되고 있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요즘만큼 미국의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의류업 일자리를 중국으로 옮기고 콜센터 운영을 인도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물결은 이제 거의 모든 업계 차원에서 미국 내의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계약 모델(contractor model)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포춘誌에서 10년 중 7년 동안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꼽힌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에서도 대략 정규직에 준하는 정도의 외주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고 이 이슈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전했다. 대략 7만의 TVC가 – 임시직(temps), 판매자(vendors), 계약자(contractors)의 줄임말 – 구글의 자동운전 승용차를 시험하고, 법률서류를 검토하고, 생산품을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마아케팅과 데이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근무 중에 빨간 배지를 착용하고 알파벳 직원들은 하얀 것을 착용한다. [중략] 얼마나 많은 미국의 노동자가 계약자로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직업군이 정부부처에서 집계하는 직업군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략 국가 노동력의 3~14%까지가 또는 2천만 명의 인구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몇몇 대기업들은 가장 핵심적인 고용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치기 당할 수 있다. 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2천 개의 회사 중 한 곳은 “중역실 이외에는 풀타임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작년에 예측했다.[The End of Employees]1

기업은 확실히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업이 지구 단위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 과정이 한데 모이면 한층 효율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뉴팩처가 등장했고, 소규모의 매뉴팩처는 점차 대공장으로 흡수된다. 칼 맑스는 이러한 대공장 기업이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업 스스로와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이제 기업이 기업 스스로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액센추어의 예언처럼 중역실 이외의 모든 고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기업이 변신 프라모델처럼 여러 부속품이 결합됐다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고, 그것을 우리가 알던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조짐은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LBO를 통해 소유주와 자본가의 개념을 해체하는가 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력의 형태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전 업종, 전 업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아웃소싱과 다르다 하겠다.


자동차인 줄 알았더니 로봇(출처 : 영토이)

앞서 말했듯이 20세기형 기업은 비교적 동질의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를 한데 모아 분업화된 공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형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 혹은 유사 군대조직과 비슷한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하다. 이런 질서는 심지어 그 기업에서 태어난 반항아 노동조합에서도 유지됐다. 그런데 이제 社內 노동력은 더 이상 가족도 군대도 아니다. 운전사는 빨간 배지를 단 A 파견회사 소속이고 프로그래머는 노란 배지를 단 B 파견회사 소속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소규모 매뉴팩처를 합병 또는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었다면 21세기 자본주의는 이를 다시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20세기 이전의 그것처럼 뭔가 목가적인 뉘앙스의 자영업자의 형성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개별 부속품을 담당하는 파견회사는 파견회사대로 하나의 거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70년대 SF영화인 Rollerball에서는 기업의 독점이 완성되어 회사명이 그저 “기업(Corporation)”이라 불릴 따름이라는 설정인데, 파견회사 역시 비서 파견이 전문인 거대기업은 그저 “비서 회사”로 불릴 따름인 세상이 21세기형 기업의 해체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동화를 통한 인간 노동의 배제 자체를2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균(菌) 본위제

균 본위제를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문득 균들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부패하지 않는 경제가 활개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 지 궁금해지곤 한다. [중략]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출동이나 제로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더숲, 2014년, p147]

‘본위제(本位制, standard)’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그리 정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발상이 재미있어서 인용해보았다. 젊은 시절 “블랙기업”에 가까운 식품회사에 근무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제빵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권유로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 특이한 저자의 이력이 잘 드러나는 아이디어다.

천연 효모를 써서 좋은 빵을 만들겠다는 집념을 가졌던 저자는 균(菌)에 대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균(菌) 본위제’ – 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배금주의에 대항하는 배균주의 정도가 아닐까 싶다 – 라는 신선한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균의 작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기물을 부패 혹은 발효란 이름으로 분해한다.

그렇다면 정말 경제 시스템에서 금본위제 대신 균본위제를 채택하면 어떻게 될까? 균은 유한하다. 더구나 유기물을 분해시킨다. 변하지 않는 화학적 특징 덕분에 교환가치로 인정받는 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균을 화폐로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경제는 부패, 즉 거품이 항상적으로 꺼지게 될 것이다. 거품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경제 시스템이 될 것이다.

항상 부패가 작동하는 경제의 결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금본위제에서 제공되는 신용이라는 촉매를 활용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은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여러 소수민족의 부락경제 정도로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또는 아예 대안경제의 목표를 가지고 가공의 신용창출을 허락하지 않는 대안화폐 공동체와 같은 실험적 공간에서 그런 경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사견으로 여러 대안경제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범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되지 않는 한은, 경제의 발전에서 거품의 생성은 일종의 필요악이다. 대표적인 거품이 대출이다. 오늘날 기업활동에서 자동차 구입에 이르기까지 소위 “레버리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레버리지가 없었다면 세계 경제규모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을 것이다.

다만 저자도 주장하듯 경제를 부패시키지 않고 계속 살찌우려 하는 현재상황이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부패하지 않는 빵을 상상할 수 없듯이 한없이 부풀어만 가는 경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번 읽은 ‘스트레스 테스트’의 저자 티모시 가이트너는 분명 경제의 구원투수였지만 또한 부패하지 않는 방부제 그득한 빵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