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tegory Archives: 대안경제

서비스 배당권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주식회사는 회사를 분할해 각 지방의 중핵에 본사를 둡니다. 주식회사의 금전 배당은 제로로 하고 서비스 배당권으로 전환합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주주가 일부러 일본에 와 서비스를 받는 것은 교통비만 해도 엄청나므로 자연히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때 제로이윤으로 고용자 보수를 올려 지역 주민이 주주가 되거나 지역 금융기관에 예금이 모이면 지역 금융기관이 주자가 되면 됩니다. [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104]

얼핏 들으면 웬 세계화, 전산화, 증권화의 대세를 거스르는 환경주의적 마인드의 공산주의자의 몽상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경제학 박사 학위를 딴 후 모건스탠리증권 수석 이코노미스트와 경제관료를 거쳐 니혼대 교수로 있는 분이 하는 소리니 좀 신선하기는 하다. 주식과 주주라는 근대의 발명품에 대한 발상의 대전환인 셈인데, 얼핏 드는 생각은 신규로 발행하는 주식이면 몰라도 기존의 주주들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꾸는 그 혁명적인 과정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하는 궁금증이 든다. 거의 무상몰수 무상분배적인 개념? 아무튼 개인적으로는 연기금의 주식투자를 통한 사회적 통제 확대에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있는 편인데, 만약 그러한 연기금의 금전 배당을 서비스 배당으로 바꾼다면 대부분의 연금 수혜자는 미래수익의 상당부분을 포기하여야 할지도 모를 사태가 벌어질 듯 하다.

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지금 경제산업성도 기업에 ROE를 8%이상 올리라고 열심히 말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을 진심으로 실행하고 있는 것이라면 경제산업성이 부호 투자가의 집사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제로금리일 때 ROE만 높다는 것은 원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뭔가 다른 것, 예를 들어 임금을 내리거나 여러 가지를 하지 않으면 달성할 수 없습니다. 전체 경제성장 중 일부분만이 이익인데 제로성장일 때 이익을 8% 늘리려면 인건비 등을 삭감해야 합니다.[자본주의의 종말 그 너머의 세계, 사카키바라 에이스케/미즈노 가즈오 지음, 김정연 옮김, Take One, 2017년, p221]

제목은 참 묵시록적인데 정작 내용은 소박한 것이 일본 경제학 서적의 특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평소에 했는데, 이 책은 그런 내 편견에 증거를 한 조각 더 보태주는 책이다. 경제관료, 금융기업의 이코노미스트 등의 경험을 쌓은 후 경제학과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두 저자가 내놓은 “그 너머의 세계”는 무척 소박하기 때문이다.1 요컨대 “제로성장”일지라도 “잃어버린 20년” 운운하지 말고 현재에 만족하며 살자는 것이 대안이다. 또는 성장하는 사회가 아닌 성숙한 사회를 지향하자는 것이다. 그렇게 살아도 된다는 근거로 사카키바라 교수는 일본의 높은 삼림화율, 높은 평균수명, 낮은 범죄율 등의 높은 질적 가치를 든다. 자족적인 냄새가 풍기긴 하지만, 일본 정도의 나라의 경제학자가 할법한 소리이긴 하다.

인용문은 두 저자의 대담 중 미즈노 교수가 한 이야기다. 그는 “글로벌라이제이션”은 격차를 확대시킨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중심과 주변을 형성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제국주의 시대의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제국의 식민지 수탈을 의미함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그리고 현대 자본주의 시대의 그것 역시 수탈할 곳을 찾아 헤매다 결국 더 이상 신대륙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내부를 주변화 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증가인데, 일본의 경우 1990년 20%였던 비정규직 비율이 2014년 현재 37.9%까지 상승했다. 그리고 인용문에서와 같이 국가가 나서서 수익률 제고를 주장하면 그 수단은 비정규직의 양산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미즈노 교수의 주장이다.

아베가 평소에 노동자의 임금을 더 올려줘야 한다고 주장하곤 하지만, 정작 재정적 안정보다는 오히려 저렇게 인건비 하락으로 귀결될 성장신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 두 저자의 생각이다. 아마도 아베의 로드맵은 정체되어 있는 일본경제는 기업이라는 프론티어가 8% ROE로 박차고 나가고 이 열매가 트리클다운으로 이어져 나머지 경제도 살아난다는 정도가 되었을 것일 텐데 저자들은 오히려 그런 성장신화가 양극화를 부추긴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는 우리나라도 비슷한 경로를 걷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자본과 자산은 기업과 재력가들의 갈수록 수중에 집중되고 소득이 부의 원천인 노동자는 계속 주변화되고 있는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한국이 가야할 그 너머의 세계는 어떤 세계일까?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요즘만큼 미국의 기업이 더 적은 인력을 고용하기 위해 노력했던 적이 일찍이 없었다. 의류업 일자리를 중국으로 옮기고 콜센터 운영을 인도로 넘기던 아웃소싱의 물결은 이제 거의 모든 업계 차원에서 미국 내의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 것 같다. [중략] 계약 모델(contractor model)이 너무 일반적이어서 포춘誌에서 10년 중 7년 동안 가장 일하기 좋은 직장으로 꼽힌 구글의 모기업 알파벳에서도 대략 정규직에 준하는 정도의 외주 노동자가 근무하고 있다고 이 이슈에 대해 잘 아는 이가 전했다. 대략 7만의 TVC가 – 임시직(temps), 판매자(vendors), 계약자(contractors)의 줄임말 – 구글의 자동운전 승용차를 시험하고, 법률서류를 검토하고, 생산품을 더 사용하기 쉽게 만들고, 마아케팅과 데이터 프로젝트들을 관리하고, 또 다른 많은 일들을 수행하고 있다. 그들은 근무 중에 빨간 배지를 착용하고 알파벳 직원들은 하얀 것을 착용한다. [중략] 얼마나 많은 미국의 노동자가 계약자로 일하는지는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이들 직업군이 정부부처에서 집계하는 직업군에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대략 국가 노동력의 3~14%까지가 또는 2천만 명의 인구가 이 직종에 종사한다고 추산하고 있다. [중략] 궁극적으로 몇몇 대기업들은 가장 핵심적인 고용 인력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치기 당할 수 있다. 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는 10년 내에 세계에서 가장 큰 2천 개의 회사 중 한 곳은 “중역실 이외에는 풀타임 고용인이 아무도 없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작년에 예측했다.[The End of Employees]1

기업은 확실히 20세기 최대의 발명품이다. 물론 그보다 훨씬 전에도 오늘날 우리가 기업이라고 부르고 있는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었지만, 그런 기업이 지구 단위로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된 것은 20세기가 되어서부터다. 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깨달은 것은 분업이 생산성을 높이고 이 과정이 한데 모이면 한층 효율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매뉴팩처가 등장했고, 소규모의 매뉴팩처는 점차 대공장으로 흡수된다. 칼 맑스는 이러한 대공장 기업이 자본주의를 융성하게 만드는 장소가 되는 동시에 노동자들이 조직화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기업 스스로와 자본주의를 패퇴시키는 장소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1세기 들어 이제 기업이 기업 스스로를 해체시키려 하고 있다. 액센추어의 예언처럼 중역실 이외의 모든 고용이 사라진다면, 이는 기업이 변신 프라모델처럼 여러 부속품이 결합됐다가 필요에 따라 또 다른 무언가로 변신하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의미고, 그것을 우리가 알던 기업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상황이다. 물론 이런 조짐은 이전 세기에도 있었다. 기업은 주식시장과 LBO를 통해 소유주와 자본가의 개념을 해체하는가 하면, 아웃소싱을 통해 노동력의 형태를 다양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게 이제는 전 업종, 전 업무에서 일상화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의 아웃소싱과 다르다 하겠다.


자동차인 줄 알았더니 로봇(출처 : 영토이)

앞서 말했듯이 20세기형 기업은 비교적 동질의 노동력을 지닌 노동자를 한데 모아 분업화된 공정에 참여시킴으로써 생산성을 극대화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20세기형 기업은 “또 하나의 가족” 혹은 유사 군대조직과 비슷한 규율과 가부장적 질서에 익숙하다. 이런 질서는 심지어 그 기업에서 태어난 반항아 노동조합에서도 유지됐다. 그런데 이제 社內 노동력은 더 이상 가족도 군대도 아니다. 운전사는 빨간 배지를 단 A 파견회사 소속이고 프로그래머는 노란 배지를 단 B 파견회사 소속이다. 20세기 자본주의가 소규모 매뉴팩처를 합병 또는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었다면 21세기 자본주의는 이를 다시 해체시키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과정은 20세기 이전의 그것처럼 뭔가 목가적인 뉘앙스의 자영업자의 형성과정과는 거리가 멀 것이다. 개별 부속품을 담당하는 파견회사는 파견회사대로 하나의 거대화된 새로운 형태의 기업으로 성장할 것이다. 1970년대 SF영화인 Rollerball에서는 기업의 독점이 완성되어 회사명이 그저 “기업(Corporation)”이라 불릴 따름이라는 설정인데, 파견회사 역시 비서 파견이 전문인 거대기업은 그저 “비서 회사”로 불릴 따름인 세상이 21세기형 기업의 해체과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 과정은 궁극적으로 자동화를 통한 인간 노동의 배제 자체를2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보다 디스토피아적인 모습을 띄게 될 가능성이 크다.

균(菌) 본위제

균 본위제를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다보면, 문득 균들이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부패하지 않는 경제가 활개치는 이 세상을 어떻게 볼 지 궁금해지곤 한다. [중략] 그런데 부패하지 않는 현대 자본주의 경제는 공황도 거품붕괴도 허용하지 않는다. 적자 국채를 발행하는 등의 재정출동이나 제로 금리정책과 양적완화 같은 금융정책을 통해 돈이라는 이름의 비료를 대량으로 살포하는 수법을 써서 한없이 경제를 살찌우려고만 한다.[시골빵집에서 자본론을 굽다, 와타나베 이타루 지음, 정문주 옮김, 더숲, 2014년, p147]

‘본위제(本位制, standard)’의 개념에 대한 이해가 그리 정교한 것은 아니지만 그 발상이 재미있어서 인용해보았다. 젊은 시절 “블랙기업”에 가까운 식품회사에 근무하다가 뜻한 바가 있어 제빵업을 시작하게 되었고, 아버지의 권유로 칼 맑스의 자본론을 읽고 난 후 자신의 일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게 된 특이한 저자의 이력이 잘 드러나는 아이디어다.

천연 효모를 써서 좋은 빵을 만들겠다는 집념을 가졌던 저자는 균(菌)에 대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거듭하였고, 그 결과 ‘균(菌) 본위제’ – 굳이 보다 정확한 표현을 찾자면 배금주의에 대항하는 배균주의 정도가 아닐까 싶다 – 라는 신선한 가치관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균의 작용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기물을 부패 혹은 발효란 이름으로 분해한다.

그렇다면 정말 경제 시스템에서 금본위제 대신 균본위제를 채택하면 어떻게 될까? 균은 유한하다. 더구나 유기물을 분해시킨다. 변하지 않는 화학적 특징 덕분에 교환가치로 인정받는 금과는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균을 화폐로 사용하면 필연적으로 경제는 부패, 즉 거품이 항상적으로 꺼지게 될 것이다. 거품이 생길래야 생길 수 없는 경제 시스템이 될 것이다.

항상 부패가 작동하는 경제의 결과는 비교적 명확하다. 금본위제에서 제공되는 신용이라는 촉매를 활용하지 않는 경제 시스템은 문명의 혜택에서 소외된 여러 소수민족의 부락경제 정도로밖에 발전하지 못한다. 또는 아예 대안경제의 목표를 가지고 가공의 신용창출을 허락하지 않는 대안화폐 공동체와 같은 실험적 공간에서 그런 경제를 찾아 볼 수 있다.

사견으로 여러 대안경제가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범위에서 성공적으로 안착되지 않는 한은, 경제의 발전에서 거품의 생성은 일종의 필요악이다. 대표적인 거품이 대출이다. 오늘날 기업활동에서 자동차 구입에 이르기까지 소위 “레버리지”를 사용하지 않는 경우는 드물다. 그리고 그 레버리지가 없었다면 세계 경제규모는 지금의 10분의 1도 안 됐을 것이다.

다만 저자도 주장하듯 경제를 부패시키지 않고 계속 살찌우려 하는 현재상황이 우려스러운 것은 사실이다. 부패하지 않는 빵을 상상할 수 없듯이 한없이 부풀어만 가는 경제는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번 읽은 ‘스트레스 테스트’의 저자 티모시 가이트너는 분명 경제의 구원투수였지만 또한 부패하지 않는 방부제 그득한 빵을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알파고가 경제시스템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사회?

신용평가업계도 위기감이 감돈다. 알파고, 아니 ‘알파크레딧’이라는 이름의 AI가 신용평가 영역을 침범하는 시나리오는 충분히 현실적이다. “AI의 재무 분석 결과 00사 부도율 7.25%, 고로 신용등급은 BB+”와 같은 계량적 판단은 당장이라도 가능해 보인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고 빠르게. 사실 신용평가가 1200대의 슈퍼컴퓨터가 필요할 정도의 계산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신용평가사들은 분명 비용 절감 효과를 기대할 것이다. 한 증권사 크레딧 애널리스트는 “AI가 신용평가업계에 도입될 경우 애널리스트 상당수가 보따리를 쌀 수도 있다”고 했다.[알파고가 신용등급을 매긴다면]

알파고가 인간들에게 – 그 인간들 중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이겠지만 – 충격을 안겨준 지 꽤 지났지만 아직도 알파고에 관한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다. 흥미롭게도 경제지에서는 이미 주기적으로 알파고와 같은 인공지능에 관한 기사를 내고 있는 것 같다. 바둑이 꼭 경제와 관련이 있어서라기보다는 바둑이라는 작은 세계에서의 알파고의 가치판단과 정책결정이 경제 시스템이라는 더 큰 바둑판에 펼쳐질 것이라는 예감에 따른 보도내용이 많다. 이미 현실화되고 있는 켄쇼라는 애널리스트를 대체할 소프트웨어 이야기도 있고 인용한 기사와 같은 호사가적 가십성 기사도 있다.

인용기사처럼 인공지능이 신용평가에 도입된다면 어떤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까? 이 계획이 실현된다면 신용위기의 한 원인이기도 했던 국제신용평가사들의 등급평가에 관한 부조리는 크게 줄어들지도 모르겠다. 공무원이나 국제금융기구에 근무하는 엄격한 관리자에 의해 관리되는 인공지능 평가 시스템은 고객유치를 위한 등급장사를 하지는 않을 것이다. 보다 선제적으로 등급조정이 이루어질 것이고 이에 따라 투자자는 발 빠른 조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미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프로그램 매매처럼 냉정한 신용평가로 등급에 대한 신뢰도는 더욱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많은 SF영화나 스릴러가 인공지능을 소재로 만들어졌는데, 마이클 케인 주연의 Billion Dollar Brain 역시 그런 영화 중 하나다.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한 미국 자본가가 소련을 침공한다는, 비틀린 냉소적 정치 스릴러인 이 작품에서 소련 침공 계획의 주요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체가 바로 인공지능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냉정한 판단으로 명령을 내리기에 때로 브레인은 아군인줄 알았던 이까지 암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하지만 극중 한 배신자가 컴퓨터에 잘못된 명령을 몰래 입력하여 의사결정을 바꾸는데, 결국 인공지능의 태생적 한계를 잘 말해주는 장면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순환론이기는 하다. 인간의 결정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기계를 통해 의사를 결정하기로 했지만, 그 기계는 인간이 만들고 관리해야 한다면 궁극적인 해결책은 기계가 기계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제도”나 “국가”라는 것도 어느 면에서는 인공물로 때로 매몰차 보일 정도로 우리의 행동을 제약한다는 점에서, 기계적인 판단을 내리는 소프트웨어랄 수 있다. 신용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다. 다만 기계적이고 냉정해야 할 신용평가 분석가가 실적에 시달리고 친분에 판단이 좌우된다면, 기계가 의사결정과정의 상당부분을 대체한다고 해도 변명거리가 없을 것이다.

한편 신용 시스템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된다면 우리 경제 시스템의 큰 부분 하나가 인공지능에 맡겨지는 셈이다. 이런 고급 의사결정에서 인공지능의 효율성이 검증된다면 장래에 보다 고차원적으로 전반적인 사회의 경제기획에 인공지능을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이 개인의 한계효용을 빅데이터 형태로 수집하여 이를 분석하고 파레토 효율이 도달하는 시점에서의 상품생산량을 결정해주는 과정에 쓸 수도 있을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SF적 미래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런 미래는 바로 신고전파의 한계효용이론이 적용된 계획경제 시스템이란 점이다.

시장경제 이론과 계획경제 이론의 조화로운 만남일지도?

자본주의는 계속 발전하고 있다는 이코노미스트의 칼럼에 대해

그러나 당신이 만약 자본주의를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으로 정의한다면, 이 시스템은 후퇴하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Airbnb와 Etsy와 같은 신경제 웹사이트들에서 사람들은 그들의 휴가기간 동안 집을 빌려주거나 예술품과 공예품을 파는 등 새로운 방식으로 돈을 벌고 있다. 과거에 집주인들은 임차인을 찾는데, 취미생활자는 구매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집합적인 웹사이트들에서는 이런 일들이 훨씬 쉬워졌다.[Advancing, not retreating]

분명히 Airbnb와 Etsy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거나 발전시키면서 사회적 효용을 증가시킨 측면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근거로 ‘자본주의가 전진하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이는 글쓴이가 “자본주의 = 시장경제에서의 개인의 상호작용” 등식 자체가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 사이트에서도 몇 번 살펴보았듯이 시장이라는 것이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만 존재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구(舊)사회주의 블록 일부에서는 이른바 “시장 사회주의” 실험을 시도한 나라들도 있을 정도로 시장이란 제도는 다양한 경제체제에서 존재가능하다.1 심지어 어떤 이는 계획경제는 자본주의의 특징이며 칼 맑스가 지향한 것은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시장경제라는 뉘앙스의 급진적인 주장을 하는 이도 있다.

흔한 오해와는 달리 맑스는 ‘위로부터의’ 계획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특성이라고 보았고, 그 ‘전제적’ 성격을 비판했다. 맑스는 자본주의의 전제적인 계획생산에 대해 “자유로운 생산사들의 연합”(‘코뮌주의’)을 대치시켰고, 후자로부터 생산의 진정한 재조직과 ‘아래로부터의 참여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점에서 맑스의 코뮈니즘은 전제적 계획에 따른 공동생산의 의미를 지닌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자본주의)’와는 무관하다.[맑스적 코뮌주의의 생태문화사회적 성격]

몇 번 주장하였듯이 자본주의 체제의 중추기능을 하는 기업은 거의 대부분 계획경제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것도 위 인용문의 글쓴이가 이야기하듯 ‘전제적’ 성격이 상당히 강하다.(이번 엘리엇 사태나 롯데 사태에서의 행태를 보라)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이러한 소유의 집중이나 – 또는 그 소유보다도 더 왜곡된 권력 집중이 – 진정한 시장경제의 발전을 방해한다고 보는 입장이었고, 인용문의 글쓴이가 주장하는 ‘코뮌주의’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의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코노미스트가 “자본주의 발전”의 사례로 든 애어비앤비는 적어도 현재까지의 모습으로 봐서는 대기업보다 덜 위계적이고 수혜자가 폭넓다는 측면에서 덜 ‘전제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유로운 생산자들의 연합”의 초기형태일지도?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국면에서 등장한 “국익”이라는 표현에 대하여

신장섭 교수는 국민연금이 수익률과 국익을 고려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 교수는 “삼성물산 주가가 합병발표 뒤 15~20% 올랐다”며 “국민연금은 투자기관이기 때문에 필요한 수익률을 내야하고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 국익을 지키는 범위에서 투자해야 한다” [중략] “삼성그룹은 잘한 점도 있고 잘못한 점도 있지만 엘리엇매니지먼트는 한국경제에 어떤 공이 있는지 모르겠다”[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국민연금 어느 편에 서야 하나]

KIC 고위 관계자는 8일 “지난 2010년 10월 투자 수익률 제고 차원에서 엘리엇 펀드에 5000만달러(약 568억원)를 투자했으며 지금까지 약 40%의 수익률을 올린 것으로 안다”면서 “엘리엇이 삼성물산 보유 지분(7.12%)을 일시에 다 팔고 나가면서 ‘먹튀’ 행태를 보이거나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 시장 질서와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 회수를 적극 고려하겠다”고 밝혔다.[한국투자공사 “엘리엇이 국익 해치면 투자금 5000만달러 회수 고려”]

참 재밌는 상황이다.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의도가 의심스러운 합병 건에 대해 외국계 펀드가 딴죽을 걸고 나오자 난데없이 “국익(國益)”이 화두로 등장한 것이다. 이 표현을 최초로 언급한 이는 인용기사 중 언급된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인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한 토론회에서 국민연금이 “국익을 지키는 투자”를 해야 한다는 논지를 폈다. 한편 엘리엇에 투자하고 있는 KIC는 엘리엇이 “국익에 반하는 모습“을 보이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이제 우리는 국익의 실체를 파악하여야 한다. 국익이라는 비교적 단순하지만 추상적인 표현을 경제적으로 굳이 규정해보자면 ‘국가 및/또는 그 국가에 거주하는 국민 전체의 경제적 이익’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경제적 이익이 국민경제 단위를 경계로 하여 그 손익을 따져야 한다는 명분은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형평성 측면으로는 어떠할까? 국익이라는 국가주의적 뉘앙스를 감안하자면 그 경제적 이익은 보다 많은 국민의 이익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신 교수의 “국민연금에 국민이라는 이름이 붙은 만큼”이란 개드립은 무시하고라도 국민연금이 국민경제에 도움이 되는 기업의 경영권을 보호해주는 것이 소위 국익에 도움을 주는 것이라는 의견에는 크게 이의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현재의 삼성그룹 지배구조 개편은 단순히 경영권 보호라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 사익추구의 의도가 있다는 점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의결권 자문사들이 삼성물산의 주주는 합병 건에 반대해야 한다고 권하는 것이다.

오스카르 랑게와 같은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경제가 정상적인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라 여기면서 우리나라의 재벌과 같은 사익추구 집단의 존재가 시장경제의 발전에 저해가 된다는 주장을 펼쳤다. 즉 삼성 “오너” 일가의 지배권 강화를 위한 꼼수 시도가 아니라면 시장에서 양 합병 주체는 각각의 기업 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 노력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사익에 의해 왜곡된 삼성물산은 직원을 동원해 소액주주를 찾아가 합병 찬성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고 있다.

신 교수 주장대로 국민연금이 합병 건에 찬성하면 국익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엘리엇이 시세차익을 얻지 못하고, 제일모직에도 상당한 지분이 있는 국민연금의 삼성그룹 주식 가치가 오를 수도 있고, 통합 삼성물산이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여 기업이 성장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KIC가 손해를 보고, “오너” 일가가 부당한 이익을 얻고, 위임장을 받으러 다니던 삼성물산 직원이 구조조정으로 잘릴 수도 있지만 이런 손해들은 국익의 대차대조표에서 한편에 밀어두면 될 것이다.

그렇다면 국민을 대변하는 국민연금은 왜 더 나은 국익을 추구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합병이 성사되면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삼성 측의 조건부 립서비스 말고 지금부터라도 주주 가치의 제고를 위해 노력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여타 조치를 – “오너” 일가의 예상 이익에 대한 특별과세, 협력업체와의 상생, 직원들의 고용안정 등 – 합병 찬성을 조건으로 협상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진정 국익을 논하려면 그 정도의 협상도 고려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