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는 누구인가?

오랜만에 블로그에 글을 올린다. 바쁜 시기도 있었고 나름대로 시련의 시기도 있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단 탓이다. 이제 좀 삶이 안정되었으니 다시 글쓰기를 시작할까 한다. 예열 차원에서 역사학자 박태균 씨의 통찰력 넘치는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강의 영상을 올린다. 한반도의 현대사에서 가장 문제적인 인물, 박정희에 대한 연구야말로 한반도의 과거뿐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데에 있어 중요한 열쇠 하나를 제공하는 연구가 아닐까 싶다.

미국의 상업용 부동산에 관한 영상 하나

포스트 코로나19 시대에는 이전의 ‘소비의 비대면화’를 넘어서 ‘노동의 비대면화’ 시대로 접어들 것이라 판단된다. 이번 사태로 인해 재택근무가 반강제적으로 활성화되며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의외로 재택근무로도 기업이 제법 원활하게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기업의 거센 반발을 불러왔던 주5일제 노동이 당연시되듯 앞으로 ‘주3일 사무실 + 2일 재택 옵션’이 자연스러워 질지도 모른다.[비대면(非對面) 경제]

3년 전에 쓴 글이다. 우리나라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는 재택근무가 다시 사무실 근무로 자연스럽게 복귀하는 양상이지만, 이 영상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이는 직장 문화의 차이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요인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비대면 근무가 일상화되면서 상업용 부동산에 주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양상이 지속되면 우리에게는 직접적으로는 미국 상업용 부동산에 투자하고 있는 국내 금융투자자들의 수익률에 영향을 미칠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도래할지도 모른다는 시금석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 독후감

일본의 정치학자 시라이 사토시(白井聡)의 전후의 기만적인 일본 정치 체제에 관한 비판적인 저서 “영속패전론, 전후 일본의 핵심(永續敗戰論 戰後日本の核心)”을 읽었다. 영속패전론이라는 낯선 용어는 얼핏 러시아의 혁명가였던 레온 트로츠키의 유명한 혁명이론인 “영구혁명론” 혹은 “연속혁명론”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혁명을 영구적으로 행하자는 것이라면 뭔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데 패전을 영구적으로 반복하자는 것은(혹은 반복하게 된다는 것) 선뜻 이해되지 않는 표현이었다.

조악하게 요약하자면 그 용어는 전후 일본의 지배 체제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했다는 사실을 모호하게 만들었는데,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패전’이라는 정치적 귀결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p9) 체제라는 것이다. 이런 체제의 행태 중 한 예로 저자는 일본 정부가 8월 15일을 ‘종전 기념일’로 부른다는 사실(p52)을 들고 있다. 전쟁은 대일본제국의 패배로 끝났음에도 ‘패전(敗戰)’이 아닌 ‘종전(終戰)’이라고 부르는 기만이 전후 일본 체제의 근본을 이루고 있다는(p52) 저자의 지적이다.

일본 정부가 이렇게 패전을 부인하고 있다면 그 상대는 승전국 미국인가? 일본의 자칭 내셔널리스트들은 이런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p8). 그 대신 그들은 대미 관계로 좌절된 내셔널리즘의 스트레스를 아시아를 향해 분출한다(p9). 저자가 들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는 한국, 중국, 러시아와 벌이고 있는 영토분쟁이다. 저자는 이 세 나라와 일본이 분쟁을 벌이고 있는 영토의 진정한 주인을 따지기보다는 영토분쟁 과정에서의 일본의 모순된 행태를 밝힘으로써 지배 체제의 기만성을 고발한다.

또한 저자는 북한 문제를 통해 일본이 어떻게 영속패전론, 즉 패전을 부인했는지를 분석한다. 어쩌면 일본이 미국의 의도와 상관없이 선도적으로 외교관계를 모색했던, 말하자면 일본이 전후 최초로 시도한 ‘자주 외교’였다(p122). 이에 북한은 국교 정상화를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간 있었던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였는데 오히려 당시 고이즈미의 심복 아베 신조는 이를 반북(反北) 소재로 활용하여 정권을 잡았다. 그리고 납치 문제를 평화헌법 개정으로 연계시키는 ‘패전의 부인’ 완수(p126)를 시도한다.

그렇다면 이렇듯 패전을 부인하고 있는 일본 정치에 대한 미국의 태도는 어떠한가? 알다시피 미국의 진보적 세력은 일본의 뻔뻔함을 비판하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미국은 현재의 동북아 정치 구도의 설계자다.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냉전의 최전선을 한국과 대만에 떠넘기고 얻은, 지정학적 여유에서 비롯한 허깨비다(p153). 따라서 저자는 미국이 일본의 친미 보수 세력의 반성하지 않은 모습에 분노를 느끼고 있으나, 그 저열한 세력이 제멋대로 자라게 놔둔 당사자가 바로 미국임을 지적하고 있다(p157).

최근 한국의 대통령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제3자 변제’ 방안을 변명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수십 차례 사과했다”고 말하였다. 그러한 사과는 따지자면 겉마음, 즉 다테마에(建て前)다. 도쿄 한 복판에 A급 전범을 ‘호국의 영령’과 ‘신’으로 모시는 시설이 서 있고, 이곳의 참배가 정치 공약(p194)인 체제가 바로 그들의 속마음, 즉 혼네(本音)다. 일빠인 한국 대통령이 이를 모를 리는 없을 테고, 이번 역시 지난번 “위안부 합의”처럼 미국의 동북아 패권구도 재편을 위해 급히 일을 추진하다 보니 아무 소리나 해보는 것이다.

이 책은 일본에서는 2013년에 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2017년 1쇄가 발간되었지만, 읽고 있자면 엊그제 읽은 한일 정상의 오므라이스 만찬 소식만큼이나 생동감이 있다. 그만큼 일본의 정치 체제의 혼네는 변함없이 굳건하고, 우리 정치권과 우익 세력의 이에 대한 대처도 변함없이 굴욕적이기에 그러할 것이다. 이 책의 역자는 후기에서 저자의 ‘영속패전론’ 용어를 빌어와서 한국 현대사의 구조를 관통하는 핵심을 ‘영속식민지론’ (p212)이라고 표현했는데 정부가 요즘 하는 짓을 보니 더더욱 꽤 그럴싸한 표현이다.

냉전은 끝났지만 신냉전은 보다 다양한 전선에서 불꽃을 일으키고 있다. 러시아-반(反)러시아 구도 강화, 중국의 대만 위협, 시진핑과 푸틴의 정상회담, 미국의 ‘칩4 동맹’ 추진, 북한의 핵도발 등 곳곳에서 갈등이 첨예화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은 다시 한번 한일 갈등을 임시로 봉합하고 한미일 삼각동맹으로 나아가는 구상을 하고 있는 듯하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일본의 혼네로서의 자기성찰은 한동안 없을 듯하다. 이는 당연히 한국을 비롯한 동북아 전체에 불행한 일이며 그 수혜자는 각국의 극소수 권력층에 불과하다.

안 슬기로운 언어생활에 반성이 없는 미디어

지난해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경매(집합건물)를 신청한 건수는 978건으로 2018년(375건·지지옥션)보다 2.6배 급증했다. 경매 전 단계인 임차권등기 건수도 역대 최대에 이르렀다. 요즘 법무법인엔 전세금 반환 소송을 상담하는 세입자로 넘쳐난다. 법도의 엄정숙 변호사는 “역전세를 당한 세입자 상담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며 “갭투자한 집주인이 다른 자산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냐고 묻는 유형이 가장 많다”고 했다. 최근 경매로 나온 주택은 90%가 빌라로 추정된다. 하반기부터는 전세금을 못 갚아 경매로 몰린 아파트가 쏟아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세입자도 집주인도 비명”… 갭투자는 어쩌다 갭거지가 됐나]

개인적으로 “갭투자”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몇년전 읽었던 어느 부동산 경매 관련 서적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책의 저자가 추구하는 전략은 빌라를 경매로 저가에 낙찰받아서 전세를 놓는 방식으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보유 주택수를 늘려나가는 전략을 소개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빌라도 집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유하고 있다가 집값이 오르면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전략 노하우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책 내용을 보자면 많은 경우 처지가 곤란한 기존 세입자가 있어 그가 어떻게 순탄하게 집을 비우게 하느냐가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온순하고 순진한 내용이었다. 최근 몇달 동안 화제가 되었던 “빌라왕”들의 행태를 보면 이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서의 책 내용처럼 차근차근 빌라를 “갭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바지사장”을 내세우고 악질 중개업자의 꼬임에 빠진 무지한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 때로는 HUG의 도움도 받아 – 아무런 “갭”도 없이 보유주택수를 늘려가는 대량생산 콘베어 벨트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경우 “갭투자”라는 표현도 무색하고 말 그대로 부동산 사기 카르텔일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언젠가부터 미디어에서 성찰도 없이 쓰는 표현인 “갭투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미디어가 쓰는 성찰없이 즐겨 쓰는 각종 표현은 – “빚투”, “존버”, “영끌” – 간혹 복잡한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주는 기존 단어가 부족해서 쓰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미디어 종사자의 나태함으로 인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쓴 표현을 생각없이 가져다 쓰는 경우다. 이런 표현은 기사의 조회수가 생명인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특히 애용되고 있다. 자극적이고 친숙한(?!) 표현을 쓸수록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입자의 보증금을 활용한 내집 마련이 일반화되었던 한국 사회에서 어떤 면에서는 주택구입자 상당수가 “갭투자자”였다. 그리고 집주인이 적당한 돈이 모이면 세입자 대신 실거주를 하며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집을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한국 중산층의 삶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주택거래 방식이 점점 고도화되며 “갭투자”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나 또는 “빌라왕”처럼 부동산 구입 방식이 순수투자 목적형 혹은 기업형으로 커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시장참여자들이 주택을 애초에 사용가치와 상관없는 교환가치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를 추구하면서 “갭투자”는 더 이상 “갭투자”로 애교스럽게 불러줄만한 행태가 아니게 되었다. 수많은 “재테크” 서적과 부동산 관련 유튜브 채널이 집을 어서 사라고 부추겼고 급기야 사기꾼들이 이런 상승장, 전세금보증제도, 그리고 순진한 세입자를 악용하여 “갭투자”를 악질 사기행위로 변질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디어는 “갭투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채로 보도를 해대고 있다.

“영끌” 표현의 본질은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이 아니라 미래의 수익을 과하게 담보잡힌 행위다. “빚투” 표현의 본질은 “미투”처럼 ‘나도 레버리지 투자한다’가 아니라 빚으로 리스크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갭투자” 표현의 본질은 ‘나는 매매가와 전세가의 갭 정도만 투자해서 집을 샀다’가 아니라 “영끌”과 “빚투”의 총체적 레버리지 투기와 전세가가 하락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 베팅한 것이다. 그 믿음이 전세가의 하락으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미디어는 스스로의 언어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반성은 커녕 “갭투자”의 다음 버전 “갭거지”로 조회수 팔이에 나섰다.

요즘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전곡을 감상중

요즘 베토벤의 현악4중주 전곡을 감상중이다. 베토벤은 살면서 교향곡만큼이나 꾸준히 정성을 들여 작곡할 작품이 바로 현악4중주였다고 한다. 그런만큼 후세들은 그의 방대한 현악4중주 작품들을 초기, 중기, 후기로 각각 나누어 분류하고 있으며, 이중 특히 후기 작품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확실히 문외한인 내가 듣기에도 후기 작품들은 단순히 귀족들의 연회에서나 장식적으로 쓰이는 그런 현악4중주가 아닌, 시대를 초월하는 강한 인간적 의지가 담긴 – 그리고 무척 난해한 – 고도의 예술성을 구현해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시 비평가들조차 작품의 이런 난해함을 이해하지 못하고 혹평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어엿하게 베토벤의 수많은 걸작 중에서도 가장 반짝반짝 빛나는 걸작으로 인정받고 있다.

CBDC에 관한 단상

이자를 지급하는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 중앙은행 디지털화폐)가 있으면 뱅크런은 불가능하다.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은 예금자가 돈을 인출하길 원하는 그즉시 돈을 발행할 수 있다. 그리고 사용자 간의 즉각적인 거래라는 유동성 덕분에 경쟁자는 이들 예금자에게 3%의 이자를 지불할 수 있다. 전통적인 은행을 제외하고 누가 이러한 해결책을 반대하겠는가?

확실히 전통적인 은행은 금융시스템으로서 매우 중요한데, 이는 그들이 대출을 일으킴으로써 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기지를 신청한 가계가 지급능력이 있는지, 기업대출이 수익성있는 투자에 사용될 것인지 등을 점검한다. 대출은 언제나 위험하기에, 가장 경쟁력있는 은행일지라도 대출에 스프레드를 추가한다. 오늘날 은행이 얻을 수 있는 은행간 이자율 3%도 모기지에는 5%의 이자율을, 또는 기술 스타트업의 위험한 투자에는 9%의 이자율을 적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은행과 같은 몇몇 기관은 이러한 리스크를 평가하고 가격을 매길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은행들은 예금자의 돈을 굴리고 그들을 구제해줄 정부에 의존하면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다. 그들은 너무 많은 리스크를 부담하는 경우가 있다. 이때문에 학계와 규제당국은 오랜동안 은행이 더 많은 자본비율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하곤 했었다. 그들이 가계의 예금을 위험성있는 투자에 빌려주지 못하거나 정부의 구제금융에 의존하지 못할 때 그들의 위험감수 성향은 빠르게 줄어들 것이다.[The Simplest Fix for Banking]

중앙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화폐를 통해 이번 실리콘밸리은행이나 기타 다른 모든 금융위기 때 발생한 뱅크런을 막을 수 있다는 내용의 글의 일부다.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조금 더 살펴볼 문제겠지만, 어쨌든 이론상으로는 정통적인 은행이라는 소매상을 거치지 않고 중앙은행이 예금자에게 추가적인 거래비용없이 바로 예금을 지급하는 방식에 있어 큰 기술적 난제는 없어 보이는 해결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용문의 다른 곳에서도 지적하고 있듯이 이는 전통적인 은행의 먹거리를 빼앗는 이슈이기에 기득권들의 저항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은행”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근사한 석조건물을 올린 곳에서만이 중앙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오고 그것을 운용할 수 있다는 신성한 권리가 중앙은행으로부터의 직불이라는 ‘야만적인’ 디지털 거래에 의해 침범당하는 참담한 꼴을 은행들이 참아줄 수는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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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drian Pingstone – Taken by Adrian Pingstone in November 2004 and released to the public domain., Public Domain, Link

예전에 본 영화 중에서 ‘하얀 옷을 입은 사나이(The Man in the White Suit)’가 생각난다. 1951년 에 제작됐고 전설적인 영국 배우 알렉 기네스가 주연한 클래식이다. 하급 노동자인 주인공은 각고의 노력 끝에 영구적이면서도 오염되지 않는 직물을 발명하였고 이 직물로 하얀 양복을 한벌 만들어 입고다니면서 이 직물을 판매하여 희소성에 시달리는 시장의 수요를 구원하려 한다. 하지만 이는 시장에 있어 중대한 반역이었다.

상품은 희소성이 있어야 한다. 그 희소성을 수소가 독점해야 한다. 그래야 소비자들이 상품을 끊임없이 소비할 수 있다. 영구적인 직물이 나와서 더 이상 희소성을 가지지 않을 때 상품은 더 이상 상품이 아니고 마치 공기와 마찬가지로 공공재가 되는 것이다. CBDC가 정확히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는 구체적인 시행을 통해 증명되겠지만, 그것은 은행들에게 있어서는 마치 알렉 기네스가 발명한 영구적인 직물과 같은 느낌이 아닐까?

‘튜더스’를 읽는 중

잉글랜드에서 교권반대주의는 주로 런던을 중심으로, 특히 도시에서 성장하고 있는 중산층 법률가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얼이났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대표들이 런던 사람들과 함께 1529년 말 처음 열린 종교개혁회의에서 교회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사람들이 크롬웰의 확실한 지휘에 따라 왕에게 탄원서에 적힌 새로운 불만 사항들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왕이 지명한) 하원의장을 끌어들임으로써, 탄원서가 다수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의견을 표출할 기회가 없었다.[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튜더스, G.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말글빛냄, 2011년, p210]

전세계 왕조 중 가장 유명한 – 다양한 의미에서 – 왕조라 할 수 있는 16세기 영국의 튜더 왕조, 그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중심인 헨리8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쓰인 책의 일부다. 헨리8세에 관한 영화와 드라마가 숱하게 만들어질 정도로 그가 집권한 시기는 소위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을 만큼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기였다.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그의 모습도 대개 그런 식이다. 하지만 실은 인용한 책은 헨리8세와 그의 후손들이 자행했던 기행은 그러한 말초적이고 육감적인 본능보다는 보다 이성적이고(?) 시대 맥락적인 상황이 자리잡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헨리8세가 본처인 캐서린을 버리고 앤블린을 정실로 취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부정할 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군주의 욕정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적자를 낳아주지 못한 늙어가는 왕비보다 젊고 세련된 –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온 힙한 여성인 – 매력적인 앤블린에게 더 성적매력을 느꼈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대중문화가 소비할만한 헨리8세의 캐릭터라면 그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영국 자본주의의 성장은 그보다 더 복잡한 맥락이 자리잡고 있다.

Full-length portrait of King Henry VIII
By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Link


로마카톨릭이 아직도 유럽사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외부적으로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이교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내부적으로는 마틴 루터 등 기존의 로마카톨릭을 위협하는 신진 종교 세력, 로마카톨릭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 등등 유럽의 지배체제는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유기체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약한 고리’로 치고 나왔던 것이 유럽 본토의 바다 건너에 자리잡고 있던 영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혼을 하고 싶었던 헨리8세가 시대정신의 대변자가 되는 순간이다.

책에도 언급되듯이 유럽사회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와 그 정점에 있는 교황청이었다. 각국의 교구는 유럽 인민의 신앙심을 담보로 치부를 하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의 부가 – 예를 들면 주교의 취임세라는 명목 등으로 – 교황청에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무역수지는 흑자여도 이를테면 (영국교회에서 교황청으로의) 이전소득수지가 적자여서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단지 교회에 대한 왕가와 인민의 맹종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 독일에서는 개신교였고 영국에서는 헨리8세와 영국 브루주아였다.

헨리8세, 토마스 울지, 토마스 크롬웰 등 시대정신을 읽고 이를 자신들의 권력강화에 이용했던 위정자들은 처음에는 이혼 등 가정사를 로마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위임했으나 그의 우유부담함 혹은 교묘한 정치적 줄타기로 인해 염증을 느끼고 마침내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의외로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틈새 시장을 파고들어 로마카톨릭의 절대적 권위에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의 마음에도 흡족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8세의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를 넘어선 시대정신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