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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안 통과와 부채상한 증액이라는 두 개의 치킨게임

예산을 둘러싼 싸움이 이상할 것은 없다. – 의회는 1997년 이후 예산을 시간에 맞게 제대로 통과시킨 적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번 싸움은 새로운 국면이다. 하원의 공화당원들은 예산의 내용 자체에 대해 반대해서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반대하기 때문에 예산을 막은 것이다. 그 큰 부분이 이번 주 가동을 시작한(이 기사를 보라) 버락 오바마의 헬쓰케어 개혁이다. 그들의 원래 요구사항은 오바마케어의 모든 재원을 빼앗아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말로 그들은 민주당원들이 그들의 대통령의 가장 커다란 성과를 죽이기를 원한 것이다. 이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았다. 예산안에 대한 데드라인이 임박하자, 공화당원들은 그들의 요구를 줄였다. 오바마케어를 거덜 내는 대신, 개인이 건강보험을 구입해야 하는 의무를 (사지 않으면 벌금을 내는) 1년 동안 연기해야 하는 것으로 말이다. 이 소리가 합리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두 가지 사유로 그렇지 않다. 첫째, 의무를 연기하는 것은 전체 개혁을 박살낼 수 있다. 오바마케어는 두 개의 기둥 위에 앉아 있다. 모든 이들은 보험을 가지게끔 강제하고 있고, 보험사는 사람들이 이미 아프다는 이유로 요금을 더 비싸게 청구하지 못하게 금지하고 있다. 만약 오직 두 번째 규칙만 적용된다면, 아픈 이들은 보험을 사러 몰려들 것이지만 건강한 이들은 자신들이 아플 때까지 가입을 미룰 것이다. 보험사는 막대한 보조금 없이는 제공이 불가능한 보험 보장 때문에 프리미엄을 올리든가 파산해야 할 것이다. 오바마케어는 죽음의 악순환에 빠져들 것이고 아마도 파산할 것이다. 몇몇 공화당원들에게는 이것이 목표다.[No way to run a country]

기사가 지적하고 있는 “몇몇 공화당원들”의 중심에는 신흥 극우 원리주의 집단 티파티(Tea Party)가 있다. 티파티의 생성과정에 대해서는 이 글을 다시 한 번 참조하시면 되는데, 이들의 영향력은 어느덧 지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당인 미국 공화당의 아킬레스건을 쥐고 흔드는 지경까지 이른 것 같다. 반(反)연방주의나 시장근본주의의 조류가 하루 이틀의 일은 아니지만 그런 극단주의가 하나의 단체로 조직화되어 이렇게까지 짧은 기간에 이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다는 사실은 놀랍기 그지없다.

이러한 이론적으로 순혈주의적인 정치적 행동은 자본가들에게조차 불편한 상황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몇 번 주장했지만 자본가들은 자본주의자가 아니다. 완전경쟁이나 순수한 시장에 의해서 가동되는 자본주의는 그들이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정보 불균형의 – 또는 권력불균형 – 시장과 거리가 멀다. 그러니 순혈주의 티파티의 치기어린 행동이 반가울리 없다. 오바마는 현지 시간으로 10월 2일 재계 CEO들을 불러 모아 응원을 독려했고 골드만삭스의 로이드블랭크페인과 美상공회의소 등은 이에 화답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2일(현지시간) 미국 최대 금융회사들의 최고경영자(CEO) 14명을 만나 1시간 넘게 셧다운을 둘러싼 정쟁 해법을 논의했다. [중략] 회담에 참석한 골드만삭스의 로이드블랭크페인 CEO는 “(부채 한도 인상 실패에 따른) 국가의 채무 불이행 사태를 곤봉처럼 휘두르면서 정쟁의 위협 도구로 쓰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 상공회의소도 재계단체 약 250곳과 함께 ‘정치 다툼을 멈추고 셧다운과 채무 불이행 사태를 막아야 한다’는 편지를 의회에 보냈다. [중략] 재계에서는 반(反) 오바마케어 정쟁을 이끄는 공화당 강경파인 ‘티파티’에 대한 불만이 나온다. 셧다운 해결 촉구 편지에 서명한 재계단체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의 회장이자 공화당 출신 전 미시간 주지사인 존 엥글러는 “독자적 성향인 티파티 쪽 공화당원들은 솔직히 많은 사람의 얘기를 안 드는 특성이 있다”고 지적했다.[美 재계, 오바마와 연합 “셧다운 해결돼야”]

이번 정쟁이 예산안 자체가 아닌 오바마케어를 표적으로 삼았다는 특성과 별개로, 또 하나의 특성은 숨고를 틈도 없이 부채한도 상한 조정이라는 새로운 라운드가 열린다는 점이다. 양당의 파이터는 새로운 링에서 싸울 것인데 美 재계가 걱정하는 점은 이 두 싸움이 화학적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엄청난 폭발력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신용위기의 주범인 월街를 처벌하기는커녕 안정적인 수익기반을 창출해준 오바마 정부가 두 싸움에서 좌절할 경우 재계가 그 여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미국의 부채상한 한도 증액 추이(출처)

예산안과 마찬가지로 부채 한도의 상한 재조정도 의회의 끊임없는 정쟁도구였다. 위 그래프를 보면 잘 알 수 있듯이 이 제도는 재정건전성을 의회가 통제하겠다는 본래의 의미는 퇴색한 채, 진영의 이익을 위한 협박수단으로 전락했을 뿐이다. 하지만 어이없는 이유로 예산안이 통과되지 않게 되면서 이 치킨게임에서 정말 치킨 두 마리가 통닭이 될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리고 그 게임에서는 양당, 미국, 그리고 나머지 세계 모두가 패자가 되는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재계가 두려워하는 것이 이런 상황이다.

미국은 세계의 기축통화를 찍어내는 “과도한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 정부의 부채는 안전한 피난처로 여겨졌고, 이를 통해 샘 아저씨는 엄청난 돈을 엄청 싸게 빌릴 수 있었다. 미국은 그 권리를 하룻밤 새 잃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신용도를 저하시키는 여하한의 행동은 – 워싱턴에서의 촌극은 분명히 그러한데 – 미래에 예측치 못한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 단순히 미국이 더 이상 빚을 얻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미국의 디폴트의 여파는 전 세계적일 것이고 예측하기 어렵다. 이 사태는 금융시장을 위협할 것이다. 미국의 재무부 채권은 매우 유동화가 쉬었고 안전하기에, 담보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투자은행과 같은 금융기관이 초단기 차입의 재원인 2조 달러 규모의 “삼각 리포” 시장에서 차입을 위해 담보로 사용하는 재무부 채권은 전체 담보의 30% 이상이다. 디폴트는 대주들의 더 많은 혹은 다른 종류의 담보 요구로 이어질 것이다. 이는 2008년의 리만 브라더스의 몰락이 초래한 것과 비슷한 금융 심장마비를 야기할 수도 있다.[No way to run a country]

공화당 소속의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지출삭감과 개혁을 위한 방안이 포함돼야 한다“며 부채상한 증액만을 위한 표결은 하지 않겠다고 몽니를 부렸다. 겉으로는 재정건전성을 위한 우국충정인 것처럼 들리지만 지난번 부채상한 증액에서 받았던 티파티로부터의 정치적 압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련한 정치인인 그가 상한 증액 실패로 인한 피해를 예측 못할 정도의 멍청이는 아닐 것이지만 정치적 생명이 티파티 등의 정치적 색맹의 손아귀에 놓여 있다면 몽니는 의외로 길고 잔인한 것이 될지도 모른다.

요컨대, 현재의 미국정치의 혼란상은 양당체제에서의 이념적 혼란 양상에서의 경제위기에 대한 대중적 분노가 극우적 방향으로 표출되었고, 이 분노가 극단적인 배후세력이 원하는 바에 따라 흘러감에 따라 상황은 예측불허로 치닫고 있다. 이번에 부채상한을 증액한다 하더라도 이 제도가 남아있는 한, 정치적 모험주의는 계속될 것이다. 미국 정부의 해결할 길이 묘연한 부채증가, 양당을 초월한 재계에 대한 비굴한 대처, 그리고 이 뒤틀린 상황을 교묘히 이용하는 재력가가 있는 한 계속될 극단적 모험주의다.

파시스트는 “사회주의의 구원자”였을까?

나치의 반자본주의적 수사에는 중요한 특징이 둘 있다. 첫째, 비생산적 자본 또는 금융자본에 대한 공격은 동시에 유태인 자본에 대한 공격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나치는 또한 공산주의와 맑스주의, 노동자의 자율성 요구와 계급투쟁의 고양에 대해 끊임없이 공격했다. 유태인-볼셰비즘 음모론이 존재하며, 이 음모는 동시에 금융자본의 지배 메커니즘이기도 하다는 주장을 통해, 이 두 특징이 나치 이데올로기 속에 결합된다. 나치는 유태인-볼셰비키의 통치에 대항한 투쟁을 통해 사회주의의 구원자임을 자처한다.[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이후, 2002년, 114p]

이런 주장은 유키아바라 최의 “그림자 정부”나 쑹홍빙의 “화폐전쟁”과 같은 음모론 서적들을 읽어본 이라면 그리 낯설지 않은 주장일 것이다. 금융업 종사자와 볼셰비키에 특히 유태인들이 많았다는 사실은 역사를 음모론의 왜곡된 프레임으로 보는데 중요한 틀을 제공했다. 그 프레임을 통해 세계가 거대한 음모집단에 – 필시 유태인이 수괴로 있는 – 의해 조종되어 종내는 세계정복의 시나리오로 나아간다는 것이 이런 종류의 음모론자의 생각인데, 책 정도로나 발간되면 다양한 지적(?)토양의 한 부분이 될 수도 있겠으나, 나치처럼 행동으로 나설 경우엔 참혹한 비극이 되고 만다.

나치들이 이렇게 금융자본과 볼셰비키를 한 울타리에 엮는 무리수는 유태인이 “무(無)민족적인 특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즉, 그런 특성 때문에 유태인 환전상은 국경을 넘나들며 금융업을 한 것이고 볼셰비키는 민족주의가 아닌 국제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이라는 우월한 개념을 파괴하려 했다는 것이 그들의 논리인 셈이다.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계급을 민족에 복속시켜 스스로가 우월한 민족의 해방자임을 자처하려 한 나치스트/파시스트에게 있어 국제주의를 통해 민족의 틀을 깨려는 유태인은 공산주의자든 금융자본주의자든 모두 파시즘/나치즘의 적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왜곡된 사상은 – 인용한 책의 저자의 표현으로는 “반동적 모더니즘” – 사실 당시의 상황에서 예외적이고 변태적인 주장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유럽은 거센 사상적 소요상태에 휘말리는데 공산주의 운동이 인기를 얻는 한편으로 민족주의적 기운을 고취시키려는 사상적 조류도 만만치 않았다. 전혀 파시즘과 관계없는 것으로 보이는 사상가 막스 베버조차도 예를 들면 근대 이전의 금융자본 위주의 자본주의를 “천민자본주의(Pariakapitalismus)”라 폄하하고 청교도적 윤리를 강조하는 산업자본을 근대적 자본주의의 지향으로 이해하려 했다는 점이 그 한 예다.

(상략)이와 같이 베버는 근대 이전의 자본주의를 근대자본주의와 엄격히 구분하여 비합리적 자본주의, 정치기생적 자본주의 등으로 불렀는데 천민자본주의도 이러한 표현의 하나이다. 베버가 이 기묘한 표현을 쓰면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중세에 ‘천민민족 Pariavolk’으로 불리며 주로 상업, 금융업에 종사했던 유태인이었지만, 보통은 근대 이전의 낡은 자본주의의 특징을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되고 있다. ‘천민’이라는 표현이 붙은 것은 중세의 상인금융업자가 일반적으로 특수한 신분을 형성했으며 그 직업이 종교적, 도덕적으로 천하게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이 용어는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용어로서 사용되지는 못하고 있으며 특히 자본주의를 시대를 초월한 현상으로 보는 입장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가해지고 있다.(경제학 사전, 풀빛편집부 편, 조용범/박현채 감수)

막스 베버는 파시스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파시스트는 근대에 대한 이러한 고찰에서 대중을 자극할만한 재료를 찾아와 무차별적으로 섞어서 그들의 논리를 재구성했다. 본래부터 반(反)계몽과 반(反)지성을 주장하던 무리였으므로 이런 저런 주장을 섞어 거대한 궤변을 만들어내는데 별 무리가 없었다. 종내는 스스로를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을 넘어선 “사회주의의 구원자”를 자처한 이들인 만큼 그들의 뇌 속에 사상적 모순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들이 자본주의와 볼셰비즘을 넘어선 “제3의 길”을 제시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태적 모습을 취하며 체제 위기를 돌파했다는 점이다.

파시즘은 자본주의적 상품생산보다는 금융자본과 화폐자본을 ‘적’으로 간주하는 반동사상의 전통 속에 안락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 전통의 목표는 무계급사회를 구현하거나 착취를 철폐하는데 있지 않다. 그보다는 근대 사회의 금전적 만능주의를 억제하는 ‘인민들’의 공동체를 추구한다. 자본에 대한 파시스트들의 공격은 항상 자본주의 생산양식보다는 금융 또는 은행자본에 대한 공격에 집중된다. ‘사회주의’라는 라벨을 붙이고 작동하고 있지만, 파시즘의 공격은 자본주의 사회의 토대에 대해서는 걸고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파시즘,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이후, 2002년, p110]

결국 파시스트/나치스트에게 있어 주적(主敵)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볼셰비즘으로 상징되는 국제공산주의 운동이었다. 국제주의를 부르짖는 사회주의자들과 “기생적”으로 다른 자본을 착취하는 은행자본만 통제 하에 둔다는 생각이었고, 이러한 상황에 당시 독일의 자본가들은 안락함을 느끼며 나치에 협조한다. 일례로 코카콜라는 나치 정부의 비호 하에 무력한 저임금 노동자를 활용하여 독일에서 사세를 키웠는데 베를린 올림픽에서 독일 운동선수에게 알맞은 건강음료로 홍보하고, 나치의 홍보기구를 적극 후원하는 등 친(親)나치 행각을 일삼았다.(앞서의 책 124p) 그리고 이윤은 더욱 커졌다.

그럼 현대적 의미에서의 파시스트는 누굴까? 유럽 각국에서는 극우정당이 인기를 얻고 있다. 하지만 이런 부류보다 더 무서운 집단이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집단이 자본주의의 심장인 미국에서 활동하는 티파티(Tea Party) 등이다. 표면적으로는 정부의 독단에 맞선 시민운동으로 포장한 이들의 탄생배경이 미국 금융의 몰락에 대처한 정부의 부당한 구제금융에 대한 정서적 반감에서 시작됐다는 점, 그러면서도 지향하는 바는 정부의 역할을 축소시키려는 리버타리안적 행태를 보인다는 점, 표면적으로는 대중동원을 통해 그들의 주장을 관철한다는 점에서 유사 파시스트적 모습을 보인다고 여겨진다.

물론 당시의 구제금융은 명백히 “이익의 사유화, 손실의 사회화”였고, 이는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소유를 기반으로 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행태였다. 하지만 구제금융의 시작이 오바마가 아닌 부시였고, 종내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복지예산 삭감이나 환경규제 완화라는 점에서 정당한 분노가 엉뚱한 해법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 최근 뉴욕시장 선거에서도 티파티를 후원하는 막강한 자본가가 후원하는 유사단체가 벌써 기승이라니 이들 파시스트의 향후 행보가 우려스럽다.

서민들이 우익정당을 지지하는 이유에 대한 단초

월스트리트는 너무 추상적이고 대침체를 초래한 금융 게임들은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월스트리트에 대한 정부의 구제금융은 거의 모든 이들이 본능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에게 이는 매우 잘못된 일이다.

티파티의 등장이 월스트리트의 구제금융의 시기와 일치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티파티를 지지하는 한 지인은 “정부가 힘 있는 자들에 의해 포섭되어, 우리 세금을 가져가고, 우리의 점심을 먹기 때문에” 정부를 싫어한다고 내게 설명했다.

동시에 보통 사람들을 돕기 위해 정부가 하는 일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너무나 조밀하게 엮여져 있어 거의 정부가 하고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오바마의 헬스케어 예산안에 대항하기 위해 의회의 주민회의에 나타나 “내 메디케어를 뺏어가지 마라!”라고 소리치던 분개한 유권자를 생각해보라.

코넬의 정치학자 Suzanne Mettler의 최근 논문에 따르면 얼마나 많은 정부보조의 수혜자가 그들이 여하한의 혜택도 받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는 소셜시큐리티 수혜자의 44% 이상이 자신들이 “정부의 어떠한 사회 프로그램도 이용하고 있지 않다”고 응답하는 것을 발견했다. 정부보증의 학생대출을 받는 가구의 반절 이상, 홈모기지의 이자공제를 받는 이들의 60%, 실업보험 수혜자의 43%, 그리고 소셜시큐리티 장애급여 수령자의 30% 역시 같은 대답을 했다.[The Rise of the Wrecking-Ball Right]

서민들이 먹고살기 힘들다면서, 힘 있는 것들이 싫다면서 왜 우익정당을 지지하는지에 대한 단초를 제공하는 Robert Reich의 설명이다. 즉, 일반유권자들은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 시장의 작동원리보다는 그 시장과 협잡해 세금을 갈취해가는(!) 정부에 더 분노하기 쉽고, 우익은 이러한 심리를 이용하여 “작은 정부”라는 – 실질적으로는 “더 큰 시장”이라는 – 그들의 목표를 위해 유권자를 포섭한다는 것이 민주당 지지자인 Reich의 설명이다.

“이미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정부의 복지기능을 인지하지 못하는 유권자들은 ‘정부가 혈세로 엉뚱한 짓을 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역할을 축소시켜야 하고, 나아가 큰 정부를 지지하는 진보세력을 배척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할 개연성이 있다. 즉, 정부의 형태를 진보적으로 바꿔 자신들의 계급적 이익을 관철한다는 대자적 목표는 ‘그 놈이 그 놈이다’라는 프로파간다에 정부일반에 대한 혐오감이라는 즉자적 대응으로 치환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부가 들어선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는다는 현실이 유권자의 염세주의를 부추기고 대자적인 정치행위를 무력화시키는 것도 사실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노동부 장관을 지낸 Robert Reich로서는 민주당을 변호하고 싶겠지만, 결국 오바마의 민주당 정권 역시 경제운용에서 보자면 공화당의 민간금융기업과의 회전문식 인선을 답습하고 있고, 염세주의를 부추긴 월스트리트 구제금융의 장본인이니 말이다.

우리의 경우는 더욱 심해 한나라당과 민주당 간의 정치적 입장차에 비해 경제적 입장차가 매우 좁은 형편이다. 둘 다 성장주의적, 친재벌적 경제운용을 지향하여 왔고, 큰 정부나 복지에 대한 아이디어는 최근에서야 재야에서 제도권으로 진입한 진보정당의 그것을 많이 차용했다. 그러다보니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으로 민주당 정권을 저주하던 보수정당과 보수지가 한미FTA 등의 신자유주의 정책에서는 한 목소리로 칭송하는 상황까지 연출하였다.

대의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이러한 나라들의 양당정치가 갈수록 퇴보하는 것은 기업정치와 자본의 세계화가 한 나라의 행정권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결국 생존을 위해 그들에게 생존을 구걸해야 하는 상황이 강화되면서 일반적인 현상이 되어가고 있다. 기업은 번영을 위해 점점 더 정부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되고, 오히려 정부가 필요한 서민들이 염세주의적으로 계급모순적인 정치행위를 하게 되는 상황은 지금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