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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를 쓰고

며칠 전 블로그에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라는 글을 올린 후 자칭 ‘댓글의 무덤’ 블로그에 적지 않은 댓글이 달리는 이변이 발생했다. 내 글의 냉소에 재밌어 하시는 분이 많았고, 일부 불편하시는 듯한 분도 계셨고, 또 극히 일부 ‘반어법’ 자체를 이해 못하시는 분도 계셨다. 아무렴 글이야 쓰는 사람의 손을 떠나가면 감상은 읽는 자의 몫이니 이를 탓할 일은 아닌 듯싶다.

여하튼 냉소적인 톤에 조금 불편하셨을 분도 있을 것 같아서 노파심에 한마디 변명하자면,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의 독후감을 쓰려고 생각한 순간부터 반어법이 아니라면 독후감을 쓸 수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렇게 썼다. 너무 악취가 심한 이 암담한 현실에 무력감이 어깨를 심하게 짓눌러, 냉소가 아니라면 탈출구가 따로 없었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사실 희극이라는 장르는 부조리한 현실을 어쩌지 못해 그것을 웃음으로라도 승화시키고자 발달한 장르로 알고 있다. 그래서 가진 자들과 모순된 현실에 대한 풍자가 희극의 최고봉으로 여겨져 왔다. 예를 들어 찰리 채플린의 ‘독재자’나 조나산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는 풍자를 통해 그 어떤 직설적인 비판보다 더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각설하고 또한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하자면 나의 글은 당연히 삼성이라는 기업 자체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또한 삼성의 노동자에 대한 부정이 아니다. 삼성일가의 노력(무시하지 못한다), 삼성 노동자의 희생, 사회적 뒷받침 등 모든 노력들의 총합체인 삼성이라는 기업은 우리나라를 먹여 살리는 고마운 경제주체이다. 이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다만 자본주의 독점기업 상당수가 그러하듯이 – 다만 유독 삼성이 두드러지게도 – 자본주의 경쟁사회에서 삼성은 – 보다 정확하게는 삼성일가와 그 하수인들이 – 권력의 매수 등 불법적/탈법적 수단을 통해 사익(私益)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고 실제로 실행에 옮겼다는 – 아니 옮겼다고 추정되는 –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다.

책에서도 김용철 씨가 주장하고 있듯이 그러한 각성은 반기업적/반자본주의적 행위라기보다는 오히려 가장 친기업적이고 친자본주의적 행위랄 수도 있다.(물론 자본주의 실재와 그 이상향이 일치하지 못한다는 반자본주의적 이데올로기 입장에서 비판할 수도 있고) 즉 역설적으로 주주자본주의의 이해에 가장 반하고 있는 이는 책에 따르면 삼성일가일 것이다.

그들의 행동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는 봉건적이다. 소수지분을 가지고 순환출자를 통해 그룹에 대한 지배구도를 확립한 후 편법적인 장난질을 통해 엄청난 부를 친자식에게 증여하는 행위는 자본주의 경영학과 아무 관련이 없고 삼성이 지향한다고 추정되는 기업철학과 아무 관련이 없다. 그런 행위에 대해 사법부는 미사여구를 동원해 면죄부를 주었다고 김용철 씨는 주장한다.

하지만 사법부가 정당화시킨 것은 어쩌면 금권주의, 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삐뚤어진 사회인식, 국내기업에 대한 외국인들의 부정적 시각, 그리고 경영능력이 검증되지 않은 봉건적 후계구도 등 부정적 유산뿐이다. 이로 인해 가까운 미래에 우리는 골드만 CEO의 다음 직책이 재무부 장관인 미국처럼 삼성임원이 관료로 직행하는 ‘선진국형 정경유착’의 시대에 살게 될지도 모른다.

이윤의 추구도 정도(正道)를 걸어야 한다는 것이 애초 불가능한 일을 꿈꾸는 백면서생의 생각 일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본주의 초기의 그 악랄한 자본가라 욕먹은 이들도 나름의 윤리는 있었다. 대표적인 독점자본가였던 록펠러는 극히 청교도적인 사고방식으로 기업을 경영하였고 2세는 전문경영인에게 회사를 맡기고 경영일선을 맡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그런 낭만이라도 있었다.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고

‘삼성을 생각한다’ 이 책의 장르는 매우 특이하다. 실존인물 들이 등장하고 실재하는 기업, 조직 들이 거론되지만 저자 김용철 씨가 이야기하고 있는 사건들은 모두가 사실이 아닌 일종의 판타지 소설이다. 이 장르의 대표적인 소설가로는 경험과 상상의 세계를 뒤섞어 놓은, 이른바 환상적 사실주의로 유명한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보르헤스가 있고, 만화가로는 코르트 말테제 시리즈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휴고 프라트가 있다. 이들은 실존인물과 가상의 인물들을 섞어놓아 사실인 듯 아닌듯한 환상적인 분위기의 스토리를 연출해내는데 귀신같은 재주를 지닌 예술가들이었다.

한데 김용철 씨는 그들의 서술구조에서 한발 더 나아가 100% 실존인물이 100% 실제 벌어졌던 일을 꾸미고 저지르고 있는 양 이야기하고 있다. 등장인물도 화려하다. 국내 최고의 재벌 삼성의 이건희 가족, 현 대법원장인 이용훈 판사, 돌아가신 두 대통령과 현 이명박 대통령, 대한민국 검찰 등 지배계급들이 총망라되고 있다. 그런데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이야기는 판타지 소설이다. 그 이유는 만약 이 이야기가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실화라면 이건 나라가 두 번 뒤집어질만한 대사건이고, 사실이 아닌 것을 김용철 씨가 사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이건 사상최대의 인격모독이자 무고이기 때문이다.

(사실이라면 이 책을 넌지시 검찰청 앞에만 던져두고 왔어도 벌써 무슨 일이 나긴 났을 것이다)

그런데..

위에 거론되고 있는 중 어느 누구도(!) 김용철 씨가 자신의 인격을 모독하고 있달 지 무고랄지 하는 등의 주장을 하지 않고 있으며, 그 대신 어색한 침묵만 흐르고 있기 때문에 나는 결국 판타지 소설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다. 결국 위의 모든 분들은 너무 너무 너무 아량이 넓으시고 예술에 대한 이해가 깊으셔서 김용철 씨가 없는 일을 마치 있는 것인 양 꾸며서 실명소설을 써도 기꺼이 그 순수성을 이해하시는 분들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다만 희한하게 광고매체들이 다른 광고로 채워야 할 지면이 너무 많아서 이 소설의 광고를 싣지 못하게 되었다는 안타까운 사연은 약간의 아쉬움으로 남는다.(웬만하면 광고 좀 내주시지)

줄거리는 허황되다. 삼성제국의 왕이 왕자에게 왕국을 물려주고 싶은데 겁나 아깝게도 왕도 아닌 껍데기 왕에게 재산 중 일부를 세금으로 내야 할 것 같으니까 그 밑의 떨거지들이 온갖 편법을 동원해 개꼬딱지 만큼의 세금만 내는 꼼수를 부렸고 하잘것없는 지식인 나부랭이들이 항의했으나 이미 재판관들은 왕에게 매수되어 자치기나 같이 치러 다니고 세금은 걷을 생각도 안하고 오히려 옆 동네의 영토도 왕의 소유라고 인정해주는 짓을 저질러서 보다 못한 삼성제국의 가신 하나가 뛰쳐나와 이를 폭로하지만 아무도 못들은 척 외면한다는 말도 안 되는 줄거리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표절 냄새도 난다

무슨 이런 개떡 같은 내용이 있나싶다. 이게 말이 될 것 같으면 이 사회는 똥물로 가득 찬 오물통이라는 소리다. 세상이 좋아져서 인권위원회도 있고, 518기념식도 열리고, G20회의도 열고, 4대강 녹색사업도 하고, 서울대 총장이었던 지식인이 국무총리도 하고, 전임 대통령도 비자금을 받았으면 예외 없이 수사를 하고, 아이폰도 수입되는 이런 개방적이고 민주화된 세상에 말이나 되는 상황인가 말이다. 김용철 씨는 판타지 소설작가로서 호르헤 보르헤스나 휴고 프라트를 뛰어넘겠다는 강박관념이 있어 이렇게 해도 해도 너무 억지를 부리는 줄거리를 구상해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적당히 하시라. 또 하나의 가족을 이렇게 놀려도 되는가?

삼성家의 미술관 ‘리움’의 어원을 아십니까?

Leeum, Samsung Museum of Art.jpg
Leeum, Samsung Museum of Art” by takato maruiFlickr: Leeum, Samsung Museum of Art. Licensed under CC BY-SA 2.0 via Wikimedia Commons.

1.
웬만한 분들은 리움이 뭔지 다 알리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들 마나님께서 미술관을 운영하고 계시고 리움은 바로 최고의 기업 삼성의 경영주 이건희 일가의 마나님인 홍라희 원장께서 운영하시는 미술관이다. 건물 자체가 세계적인 건축가들을 동원하여 지은 건물이며 콜렉션 역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수준이어서 ‘역시 삼성은 다르구나!’하는 소리를 들을만한 미술관으로 알려져 있다.(필자는 아직 가보지도 못했다)

여하튼 제목에서 던진 질문에 답할 차례다.

리움, 영어로 leeum 은 무슨 의미일까? 리움의 홈페이지의 설명에 따르면 “‘leeum’은 설립자의 성(lee) – 아마도 삼성문화재단의 설립자 이병철 혹은 이건희 – 과 미술관을 의미하는 단어의 어미(um)을 조합한 명칭”이다. 즉 leeum 은 ‘이씨 집안의 미술관’이라는 의미다.

여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작명의 의도를 좀 더 삐딱하게 바라보자. 애초에 미술관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mu·se·um〔〕〔Gk 「뮤즈신(Muse)의 신전」의 뜻에서〕 n. 박물관;기념관;미술관;자료관

미술관을 뜻하는 영단어 museum 은 그리스 신화 상의 학예·시가·음악·무용을 관장하는 여신 muse 와 um 이 결합되어 만들어져 ‘뮤즈신의 신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고로 leeum 은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muse 를 lee 로 대체한 단어이다. 의미를 쪼개서 다시 이해하자면 leeum 은 ‘이씨 집안의 신전’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보기에 따라서는 ‘이씨 집안이 신과 동격이라는 거야?’라고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이 정도까지만 추론해도 ‘사람 되게 삐딱하네’라고 불편해하실 분도 계식터이니 이쯤에서 마치겠다. 뭐 어떻게 보면 그렇다는 거다.

2.
김용철 변호사가 삼성家의 또 다른 비리를 폭로했다. 중앙일보의 위장계열분리 건, 비자금 조성방법, 비자금을 이용한 미술품 구입 건 등이다. 미술품 구입건에 대해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 변호사는 “이 회장 부인 홍라희씨와 신세계 그룹 이명희 회장 등이 지난 2001년부터 2003년까지 비자금으로 고가의 미술품을 구입했으며, 해외에 송금된 액수는 600억원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 자금출처는 “모두 구조본 재무팀이 관리하는 비자금이었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구입한 미술품의 명확한 소유관계는 따져봐야 할 일이지만 비자금 조성만으로도 모자라 그 돈으로 미술품을 구입한 일종의 공금 유용의 혐의까지 따질 일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 미술품이 홍라희 씨 개인소유로 되어 있다면 참으로 통탄할 일이다.(김 변호사의 폭로에 따르면 작품 하나는 이재용 상무 집벽에 걸려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이 힘들여 번 돈 600억 원이 고스란히 마나님의 취미생활에 쓰인 셈이니 말이다. leeum 소유라 할지라도 엄격하게는 부당한 계열사 지원일 것이다.

이번 폭로가 사실로 밝혀질 경우 신정아 사건이나 그 이전의 각종 미술대전에서의 비리 등 이미 썩을 대로 썩어있는 국내 미술계에 또 한 번 치명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미술품에 차등을 두어 시상하는 것도 개인적으로 미친 짓이라 생각하는데 거기다가 돈을 받고 미술품에 등급을 매기고 학벌을 통한 카르텔을 형성한 이 미술계, 그러면서도 거짓 학력에 뻔히 속고 있는 미술계에 국내 최고의 미술관이 깨끗한 돈도 아닌 비자금으로 사들인 미술품을 전시하고 있는 현실이라면 상황은 절망적이다.

‘이불’이라는 우리나라의 설치예술가가 1997년 뉴욕 MoMA라는 갤러리에 ‘화엄(Majestic Spendor)’이라는 작품을 설치하여 화제가 된적이 있다. 작품은 진짜배기 생선으로 만들어졌었다. 그런데 생선이 썩으면서 풍기는 악취로 인해 철거됨으로써 당시 큰 논란거리가 되었다. 이불의 작품 의도는 알 수 없지만 비자금으로 사들여진 미술품이 어찌 보면 또 다른 화엄이 아닐까 생각된다. 두고 보면 볼수록 썩은 냄새가 나지 않을까?

p.s. 1은 2를 위한 낚시 글입니다. 🙂

독백, 왜 제2의 김용철은 쉽지 않을까?

최근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비리에 대한 폭로선언 시리즈를 보고 있자니 문득 영화 한편이 떠오른다. 테일러핵포드가 감독하고 알파치노, 키아누리브츠가 주연한 “The Devil’s Advocate(악마의 변호사)”가 바로 그 영화다. 실력 있는 변호사인 키아누리브츠가 파격적인 대우를 받으며 한 기업을 위해 충성하는데 그 기업의 우두머리인 알파치노는 사실 악마였다는 초현실주의적인 영화였다.

알파치노가 ‘진짜’ 악마였다는 사실 때문에 초현실주의적이긴 하지만 그것을 비유로 생각한다면 어쩌면 가장 사실주의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현재 삼성의 우두머리로 계신 그 분을 영화에서의 ‘악마’ 알파치노에 비유한다면 김용철 변호사는 영락없이 키아누리브츠다. 영화 말미에서 결국 키아누리브츠가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듯이 김용철 변호사도 그런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사실 어쩌면 ‘악마’는 알파치노나 삼성의 어르신처럼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 서로를 엮고 있는 강한 그물일 수도 있다. 물욕(物慾)에서 비롯된 이윤동기, 이를 위한 무한경쟁, 종내는 서로가 서로를 갉아먹고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먹이사슬, 그리고 이 과정에서 자신에게 떨어지는 떡고물에 대한 유혹 들이 우리가 우두머리의 가시권에 있지 않아도 스스로를 비양심의 투전판에 끼게 하는 진정한 ‘악마’일지도 모른다.

헐리웃의 반골 마이클무어의 최신작 Sicko를 보면 의료보험 기업의 이익을 대변해오던 한 여의사의 양심고백 에피소드를 볼 수 있다. 그는 오랫동안 이 기업의 임원으로 있으면서 환자를 치료하여야 할 의사의 본분을 내팽개치고 보험료 청구를 거부할만한 합당한 논리를 개발하는데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였다. 이를 통해 그는 상상을 초월한 급료를 받았다. 누군가의 치료비로 썼어야 할 돈이었다. 그 역시 ‘악마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가 마침내 탈출에 성공한 것이다.

그렇지만 이토록 용기 있는 이들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이 현실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러한 행위가 여태껏 자기가 누리던 기득권의 포기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부자가 가난한 사람에게 함께 기득권을 포기하자고 했다고 한다. 가난한 이는 부자에게 너는 포기할 기득권이 많으니까 쉽게 포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나는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한다. 그러니 떡고물이 큰 이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사회 구성원 다수를 점하고 있는 서민들은 어쩌면 포기할 기득권이 없어서 그나마 있는 알량한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현실과 타협하고 사는지도 모른다.

둘째, 또 내부자고발에 따른 배신자라는 자괴감도 무시할 수 없다. 이는 어쩌면 눈에 보이는 알파치노와 같은 악마보다도 더 무서운 존재인데 악마를 물리치는 과정에서 그간 같이 일해오던 동료들을 배신하는 상황이 연출되고 똑같이 기득권 없기는 마찬가지이던 동료들이 유탄에 쓰러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 고발자를 괴롭힐 것이기 때문이다. 예전에 내부고발을 했던 한 공공기관 직원에 대한 동료들의 집단 괴롭힘은 한때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고발의 용기를 꺾는 원인은 그럼에도 세상이 쉽게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공포감이다. 김용철 변호사가 폭로를 했으니 삼성은 문을 닫게 될까? 삼성을 조각내서 사회화시키자는 데 국민들 중 몇 명이나 동의할까? 김용철 변호사가 이번 고백을 통해 사회에서 그의 용기 있는 행동을 칭송을 받으며 홀가분하게 여생을 보낼 수 있을까? 삼성은 여전히 건재할 것이고 김 변호사는 남은 인생을 죄인처럼 살아갈 개연성이 큰 것이 현실이다. 더 큰 물결과 그에 상응하는 사회적 반향이 아니고서는 이미 견고하게 구축된 ‘악마의 제국’이 무너질 리 만무하다. 앞서 예를 들었던 여의사의 양심고백도 큰 반향없이 스러져 가고 여전히 의료보험 기업은 건재하다.

누구나 조직에 속해 있고 조직의 논리를 익히고 살아간다. 심지어 세상을 등지고 사시는 노숙자분들마저 자체적으로 조직이 형성된다. 그것이 ‘사회적’ 본능을 타고난 인간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 조직논리와 자신이 생각하는, 그리고 인류가 동의해온 보편타당의 논리가 배치될 때 우리는 갈등하고 번민한다. 그러나 그것이 한 사회의 견고한 미시권력을 전복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어쨌든 개개인 스스로는 이 미시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자기반성과 또 다른 조직화, 공론화(어쩌면 블로깅? 어쩌면 정치활동?)를 시도하는 이외에는 뾰족한 방도가 없는 것도 안타까운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