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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성

경제에 있어 ‘유연성(flexibility)’이란 단어는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서 매우 극단적인 평가가 갈리는 단어다. 특히 앞에 ‘노동’이라는 단어가 붙게 될 때에 더욱 그렇다. 이렇게 되면 노동자나 자본가나 할 것 없이 저마다 볼멘소리를 해대기 시작한다. 노동자는 사회안전망 없는 노동유연성은 사기라고 주장하고 자본가는 노동유연성이 없어서 기업경영이 어렵다고 주장한다. 양쪽 말이 다 일리가 있는 듯하지만 쉽게 합의하지 못한다. 근본문제는 바로 계급갈등이기 때문이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은 ‘노동유연성’은 산업의 유연성 중 한 요소에 불과한데 우리 사회에서는 유연성이 곧 노동유연성인 것처럼, 최소한 그것이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이고 노동자계급이 이를 효율적으로 대처하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다. 유연성이라는 표현은 포디즘이나 테일러리즘 등 ‘대량생산 대량소비’에서 다양한 소비자 기호에 부응하는 생산의 유연성이라는 경영개선의 개념에서 도입된 개념이기에, 산업전반의 다양한 유연성 제고를 다루는 개념임에도 말이다.

예를 들어 소비자들이 환경을 중시하려는 소비태도를 보여 큰 배기량의 자동차 구입을 꺼린다는 경향이 관측되었을 경우, 기업은 신속하게 환경친화적인 신차를 개발할 수 있는 조직을 정비하고 조립라인을 제 때 맞춰 개선하는 작업을 할 수 있는 그런 순발력을 발휘하는 것이 유연성의 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GM이 이걸 못 해서 망했다는 설도 유력하다) 유명한 패션브랜드 자라(Zara)의 경우 소비자의 기호의 변화에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디자인 및 생산 시스템을 구축하여 성공한 케이스로 꼽히고 있다.

우선 다시 ‘노동유연성’으로 돌아가자. 이번 쌍용자동차 사태를 접한 사회주류가 제일 먼저 뽑아든 칼은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미 지난 5월 “노동유연성 문제는 올해 말까지 최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국정 최대 과제”라고 말했다 한다. 그리고 정부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는 비정규직법 개정, 복수노조 허용, 노조 전임자 지급금지, 노조의 인사경영권 침범 금지 등을 제시하고 있다.(관련기사보기)

한편 여론은 어떠할까? 위의 기사에 따르면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지난달 8일 발표한 설문조사에서 이 대통령의 ‘노동유연성’ 발언에 대해 응답자의 63.0%가 “노동자들의 고용불안을 막기 위해 노동안정성이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한다. 앞서 말했듯이 우리 사회에서 노동유연성 강화와 노동안정성(또는 고용안정성) 강화가 화해할 수 없는 대척점에 서있다는 증거이다.

흥미로운 점은 양 측 모두 각각의 주장의 논거를 주로 유럽의 노동시장에서 찾는다는 점이다. 노동유연성 강화론자들에 따르면 유럽은 1990년대의 높은 실업률의 원인으로 노동시장의 경직성을 지적하였고, 사회대타협을 통해 노동유연성을 제고하여 실업률이 크게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고용안정성 강화론자들은 그 배경에는 정규직-비정규직 차별해소와 사회안전망이 있다고 주장한다. 사실을 보면 후자의 주장처럼 유럽의 노동유연성 강화는 사회안전망 강화에 따로 놓고 생각할 수 없다.

네덜란드형 유연안정성 정책은 1999년 1월에 발효된「유연성 및 안정성에 관한 법률’(Flexibility and Security Act)」로 구체화되었음.
– 유연 근로자는 계약 만료 시 특별한 절차나 조건 없이 고용계약이 종료된다는 점을 제외하면 급여(동일노동, 동일임금), 보너스, 휴가, 훈련 등에 있어서 측면에서 정규직근로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음.
– 국가재정을 사용하는 실업보조의 경우 최대기간이 7년에서 38개월로 줄어들었으나, 근로자가 실업수당을 받기 위해 자신이 비자발적인 실업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어졌음.
– 고용법규 면에서 연공서열이 낮은 사람을 우선 해고하는 원칙이 철폐되고 나이와 업무능력 등을 고려하여 해고할 수 있는 유연성이 기업에게 제공됨.[유럽의 유연안정성정책이 우리나라 비정규직 문제에 주는 시사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09년 8월 7일, p6]

상기 내용을 보면 네덜란드의 경우 제도가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된 측면도 있고, 불리하게 된 측면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우리의 노동시장 상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노동자에게 유리함을 알 수 있다. 반면 우리 정부의 노동시장 유연성 강화 시행방안을 적어도 위 기사로 판단하자면 사회안전망 구축 방안은 찾아볼 수 없고 오히려 노동유연성 강화와 관계없는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 노조 전임자 임금을 주지 않아서 어떻게 노동유연성이 강화된다는 것인지 내 짧은 지식으로는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한편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의 보고서는 노동유연성 강화를 위한 사회안전망 구축에는 결국 재정준비가 필수적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사회복지 지출 비율로는 해고자의 보호는 어려운 실정이고 결국은 더 많은 재정확보를 통한 사회보장장치의 강화가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 정부는 노동유연성 강화와 감세를 통한 경기부양, 그리고 SOC예산 증액(특히 4대강 정비)이라는 모순된 정책을 수행하겠다고 나서고 있는 실정이다.

총체적인 유연성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개인적으로는 급변하는 사회경제구조에서 경제 시스템의 유연성 확보는 필수적이라고 생각한다. 이번 쌍용차 사태는 어떤 측면에서는 한국 및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의 산업구조조정이 (폭력적으로) 관철된 측면도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생산품목, 디자인, 제공할 서비스, 노동시장 등 총체적인 경영요소들이 실시간으로 변해감에 따라 생산주체의 대응 역시 그만큼 유연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구글을 생각해보라 이제 구글을 검색 사이트라 부르는 이는 없다)

문제는 계급갈등이 온존하는 시스템에서는 가진 자들은 허다한 유연성 중에서 손쉽게 노동유연성 제고를 택하려 하고 있고, 노동자들은 그 자신이 다른 노동으로 대체할 수 있는 바로 그 “유연성”이 떨어지기에 저항할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이다. 경제체제가 현재와 다르다면 이러한 갈등을 민주적인 통제에 따른 산업재배치로 해소할 개연성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남한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만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소통이 없는 우리나라의 ‘일자리 나누기’

일본경제신문은 일본 기업 단체(일본 경제단체 연합회, 이하 경단련)와 노조단체(일본 노동조합 총연합회, 이하 연합)의 양자간에 근로자의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고용을 유지하는 잡셰어링의 도입을 위한 논의를 재개하고 있다고 보도(1/8)[최근 일본의 Job Sharing 도입 논의와 전망, 한국은행 해외조사실, 2009. 2.21, p2]

이 부분을 보면 우리나라나의 일자리 나누기와 일본의 그것의 근본적인 차이를 알 수 있다. 1) 우리나라는 임금을 깎아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이고 일본은 노동시간을 단축하여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발상이다. 2) 우리나라는 정부가 하향식으로 공공기관의 임금을 강압적으로 깎는 방식이고 일본은 노사간의 논의를 통한 방식이다. 네덜란드, 프랑스 등 여타 국가도 일본과 진행양상이나 추진방식은 매한가지다.

물론 일본에서의 일자리 나누기 추진현황이 반드시 바람직한 방향으로 가는 것도 아니고, 우리가 무조건적으로 따라할 수 없는 특수상황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예나 다른 나라의 예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공통의 보편적인 원칙은 바로 이해당사자 간의 소통이다. 일자리 나누기는 첨예한 이해관계가 대립될 수 있는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그 현장에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소통은 찾아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