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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에서의 재미있는 논쟁, 그리고 마이런 숄즈

경제 블로그 Big Picture 가 한 흥미로운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세계적인 경제학자인 마이런 숄즈와 조셉 스티글리츠가 “현재의 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은 실수다”라는 의견에 대해 각각 찬성과 반대의 의견으로 논쟁을 벌이고 이를 이코노미스트가 중재하는 형식이다. 둘 다 당대의 경제학적 주장을 대표하는 이들이라 각각의 주장이 매우 선명하다.

스티글리츠
보다 일반적으로 문제는 너무 적은, 또는 너무 많은 규제가 아니다. 그 대신 올바른 규제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규제들이 힘을 얻을 수 있는 규제 시스템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리스크는 이 위기 이후의 너무 많은 규제를 하게되는 것이 아니고 너무 적은 규제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위기가 끝난 후, 최근 몇 년간 그들 스스로 아주 일을 잘 해온 자본가들은 그들 돈의 일부를 정치적 프로세스를 왜곡하는 데 쓸 것이다. – 과거의 선거기부금이 높은 수익 투자라는 것을 입증하였다.
The question, more generally, is not so much too little or too much regulation, but the right regulation and a regulatory system that enforces the regulations we have. The risk we face is not that we will have too much regulation in the aftermath of the crisis but too little. After the crisis is over, the financiers who have done very well by themselves in recent years will use some of that money to distort the political process – campaign contributions have proven in the past to be high return investments.

숄즈
경제이론에 따르면 금융혁신은 실패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리고 특별히 성공적인 혁신은 예측하기 힘들다. 혁신을 지원하기 위해 필요한 인프라스트럭처는 혁신 그 자체를 낙후시킨다. 이는 통제가 그 당시의 관리 메커니즘에서의 몰락을 방지하는 데에는 부족할 가능성을 높인다. 그러나 실패가 미래의 실패를 제거하는데 재규제가 성공할 것이라는 결론으로 이끄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회가 더 적은 자유를 통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Economic theory suggests that financial innovation must lead to failures. And, in particular, since successful innovations are hard to predict, the infrastructure necessary to support innovation needs to lag the innovations themselves, which increases the probability that controls will be insufficient at times to prevent breakdowns in governance mechanisms. Failures, however, do not lead to the conclusion that re-regulation will succeed in stemming future failures. Or that society will be better off with fewer freedoms.

숄즈라는 인물에 대해 설명하자면, 그는 70년대 초반 피셔 블랙(Fischer Black)과 함께 주식옵션의 가격을 결정하는 문제에 돌파구를 여는 논문을 발표하여 투자이론의 새 장을 연 이로 평가받고 있다. 그들의 논문은 옵션의 가격결정 방법과 옵션의 헤지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옵션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숄즈는 역시 같은 분야에서 학문적인 업적을 달성한 로버트 머턴 Robert Merton 가 함께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다. 이들의 다소 ‘실용적’인 이론이 학문적 업적으로 인정받은 것이다. 더 나아가 이 현실참여적인 두 학자는 그들의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키기로 마음먹는다. 바로 90년대 가장 큰 금융사고의 진원지였던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얼굴마담이 된 것이다.

나는 솔직히 이러한 점에서 숄즈의 ‘자유’ 주창은 다소 뻔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이는 나 혼자만은 아닌 것 같다.

전직 헤지펀드 엠피리카의 소유자였고 현재 리스크엔지니어링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나심 니콜라스 테이럽은 국립 공공 라디오의 아침 방송에서 현재의 시장 혼란은 1997년 로버트 머턴과 마이런 숄즈에게 노벨상을 안겨주었던 주식-옵션 가격결정 모형이 작동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것이므로 수상은 취소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머턴과 숄즈는 1998년 몰락하여 그 당시로서는 가장 큰 규모의 헤지펀드 실패인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의 두뇌들이었다. 테이럽에 따르면 그들의 예전 회사를 침몰시킨 리스크 관리 실패가 금번 월스트리트를 침몰시키는데 공을 세웠는데, 바로 그것이 투자회사들로 하여금 자신들은 리스크로부터 절연되어 있다고 (그릇되게) 믿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Nassim Nicholas Taleb, the former owner of hedge fund Empirica and current risk engineering professor and best-selling author, told National Public Radio’s Morning Edition that the current market turmoil proves that the stock-option valuation process that Robert Merton and Myron Scholes won a Nobel for in 1997 doesn’t work. And he wants that prize revoked.
Merton and Scholes, of course, were the brains behind Long-Term Capital Management, whose collapse in 1998 was the largest-ever hedge fund failure at the time. According to Taleb, the risk management failures that torpedoed their old firm have now helped to torpedo Wall Street by leading investment companies to believe (wrongly) that they were insulated from risk.[출처]

나는 이 의견에 상당히 공감하는 편이다. 그에 대한 과도한  그런 면에서 보자면 숄즈에게 필요한 것은 규제 반대 주장이 아니라 뼈를 깎는 자기반성이 아닐까 싶은데…

단순히 숄즈가 헤지펀드를 하나 말아먹었다는 이유만으로 규제반대를 부르짖는 그의 주장을 반대하는 것은 가혹한 면이 있을 것이기에 탈규제의 폐해 사례를 하나 알아보도록 하겠다.

NCR(주1)제도는 비록 정치하고 세련되지 못한 매우 단순한 방식을 따르고 있지만, 적어도 2004년까지는 증권회사의 재무건전성을 유지하도록 하는 규제로서 훌륭히 그 기능을 수행했다고 평가받는다.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urities and Exchange Commission))는 2004년 6월 8일, 투자은행지주회사에 대해서 법적인 감독권한은 없지만 이를 통합적으로 감독하는 자발적 통합감독 프로그램(consolidated supervised entities:CSE)을 마련했다.

대형 투자은행들은 집요하게 앞에서 살펴본 표준 NCR 제도가 투자은행의 위험관리 능력을 무시하고 레버리지를 과도하게 규제하는 제도라고 주장하며 이의 완화를 요구하였다. 이러한 규제완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한 사람은 당시 골드만삭스의 CEO였으며 현재 미국 재무장관인 Paulson이었다.
이러한 규정이 마련되자마자 곧 Goldman Sachs, Morgan Stanley, Merril Lynch, Lehman Brothers, 그리고 Bear Stearns 의 5개 대형 투자은행은 SEC로부터 CSE 자격을 승인받았다. 이 5개 투자은행이 CSE 자격을 획득한 유일한 투자은행들인데, 공교롭게도 이번 월가의 금융위기에서 모두 부실화된 투자은행들이기도 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월가의 금융위기와 자기자본규제, 연구위원 한상범, 자본시장 Weekly 2008-40호 II, 한국증권연구원, pp2~3]

이러한 5대 투자은행들의 “자발적 감독”의 결과는 어떠했을까? 그 이전까지 그나마 12배를 유지했던 이들의 레버리지는 2004년의 예외인정 이후 40배까지 상승한다. 수익률은 놀랄 만큼 향상되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이제 다들 아시다시피 기업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어쨌든 이코미스트에서 진행하고 있는 독자 찬반투표에서 현재까지의 결과에 따르면 규제를 해야 한다는 의견이 61%로 규제를 하지말자는 의견 39%가 훨씬 우세하다.

현재의 위기 이후 금융시스템을 강하게 규제하는 것은 실수다
( surveys)

(주1) 표준 순자본규칙(Uniform Net Capital Rule)의 약자로 미국 증권거래위원회에 등록된 증권회사에 대한 자기자본규제 제도

올해 노벨상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경고?

언제부터인가 경제학에 복잡한 수학공식과 물리학공식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정치경제학(political economy)’이라는 용어는 철지난 좌파 경제학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용어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주류 경제학자들의 주된 연구는 그 이후 정치와 경제의 상호관계를 파헤치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효율적 시장가설에 맞는 시장을 구현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자기들만이 아는 암호를 동원하여 이론으로 구현해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온 듯하다.

이런 와중에 금년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레오니트 후르비치 미네소타대 교수, 에릭 매스킨 프린스턴대 교수, 로저 마이어슨 시카고대 교수 등 3명이 고안하고 발전시켜온 ‘메커니즘 디자인’은 정치와 경제의 새로운 연결고리를 제시하는 분야로 추측되어 한편으로 반갑기도 하다.

‘메커니즘 디자인’은 어떻게 하면 정책이 성공적으로 실행될 수 있는가를 연구한 이론으로 아무리 취지가 좋은 정책이라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제대로 설득시키지 못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설득의 수단은 각종 지원, 규제, 또는 폭력적 억압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따라서 이 이론은 참가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려는 상황에서의 전략에 대한 연구이론인 게임이론의 한 종류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자세한 이론의 얼개는 알 수 없으나 밀턴프리드만 유의 극단적인 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시장은 그 자체로 자기완성형이기 때문에 정부의 개입은 어떤 식으로든 시장을 왜곡시키고 오도하게 한다는 논리와는 배치되는 이론으로 생각된다. 이 이론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아이디어는 수상자중 한명인 에릭 매스킨 교수의 수상소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는 “환경을 보호하거나 모든 시민들에게 양질의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사회가 시장의 힘에만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전제하면서,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몇몇 서방 지도자들이 옹호하고 있는 엄격한 자유시장 논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시장은 경제학자들이 사유재산이라고 부르는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동하지만 공공의 이익에 관해서라면 제 기능을 하지 못 한다”면서 “공익 분야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장만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직접 ‘적절한 수준’을 선택해야 하는 과정이나 메커니즘, 기관 등을 파악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 디자인 이론을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은 언제나 옳다’라는 시장신봉자들이 들으면 거품을 물 발언들이 거침없이 쏟아낸 멋진 수상소감이다. ‘메커니즘 디자인’의 경제학상 수상은 한편으로 보면 노벨 평화상의 주제가 ‘환경’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즉 올해 노벨상의 주제는 ‘시장만능론에 대한 경고’일지도 모르겠다. 수상위원회 측이나 이들로 대표되는 유럽의 정치적 엘리트들은 사회주의 블록의 해체 이후 무한경쟁의 신자유주의의 지구차원의 확산과, 구 사회주의권의 급속한 자본주의화 및 산업생산기지화로 말미암은 폐해가 이제 서서히 우리의 목을 죄어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시장만능론으로 말미암아 환경은 피폐해지고 공공서비스의 영역은 급속한 민영화로 몸살을 겪고 있다. 계급간 사회양극화는 심해지고 제1세계는 잉여자원의 과잉소비를 통해, 제3세계는 필수자원의 획득을 위해 자연을 착취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의도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올해 노벨상이 주는 함의는 ‘이대로는 안 된다’라는 경고의 메시지가 담겨 있음은 분명한 것 같다.

알고어(Al Gore)의 노벨 평화상 수상은 유럽의 내정간섭?

해외의 한 정치 웹사이트 World Socialist Web Site(이하 WSWS)는 최근 기사를 통해 알고어의 노벨상 수상은 유럽의 정치권 엘리트들이 미국의 부시 행정부에 가하는 일종의 견제라는 설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설이 제기되기까지의 미국과 유럽간의 정치적 최근 갈등을 순차적으로 살펴보면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적 외교노선에 대해 유럽은 은근히 불쾌감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러한 불쾌감과 긴장은 이라크전을 반대한 프랑스와 독일에 대해 럼스펠드가 “늙은 유럽(old Europe)”이라고 빈정대면서 고조되었다.

특히 부시가 쿄토 의정서를 일방적으로 탈퇴한 것에 대해서 유럽은 심한 불쾌감을 느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이 사건을 비롯하여 이른바 환경이슈에 대해 유럽은 이라크 전에서의 약한 균열과 좌우 정치인들의 이념적 갈등을 봉합하고 반미의 전선으로 하나로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고 이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바로 알고어의 노벨 평화상 수상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WSWS가 우선 제기하고 있는 논거는 첫째, 엄격히 말해 알고어는 노벨 ‘평화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수상위원회 의장인 Ole Danbolt Mjoes가 정치적 의도는 절대 없노라 며 “평화상은 어떠한 것에 대한 비판이 절대 아닙니다. 평화상은 긍정적 메시지이자 이 땅에 평화의 챔피온들에 대한 지원일 뿐입니다.(A peace prize is never a criticism of anything. A peace prize is a positive message and support to all those champions of peace in the world)”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알고어는 이라크 침공에 찬성표를 던진 10인의 민주당 의원 중 한명이며 수많은 제3세계를 폭력으로 억압한 클린턴 시대의 2인자였다는 점에서 “평화”와 거리가 멀다는 것이 WSWS의 주장이다. 그리고 노벨상은 다른 상과 달리 통상 한 인물의 전 생애에 걸친 업적에 수상한다는 점에서 그의 수상은 노림수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좌익의 지나친 순결주의라고 치부할 수도 있는 논거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보다 근본적인 논거는 바로 선정위원회의 구성과 선정방법이다.

여타 부문의 노벨상은 스웨덴 과학아카데미와 같은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 위원회로 구성되는데 비해 평화상은 입법부의 정당 역학에 의해 노르웨이 의회가 선정하는 다섯 명의 위원회에 전적으로 의존한다는 사실이다. 이번 위원회는 네 명의 전직 의원과 전직 대학 학장이었다. 그들은 극우에서 극좌까지 다양한 노르웨이의 정당에 소속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이 정치적인 고려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이 한 논지이다.

즉 WSWS는 만약 노벨상 선정위원회가 진정으로 기후변화에 경고를 하고 싶었다면 공동수상자인 ‘ 정부간기후변화위원회 (IPCC:the Intergovernmental Panel on Climate Change)’로 충분했을 것인데 굳이 알고어를 공동수상자로 선택한 것에는 2008년 미대선에 대한 그들의 의지를 알린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찌 되었든 WSWS는 기후변화가 이러한 정치역학이나 근본적으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알고어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며 근본적이고 새로운 경제체제로만이 해결가능하다고 주장하면서 기사를 끝맺고 있다.

알고어의 수상이 유럽권의 무언의 시위라는 것은 사실 지난 9월 29일 유엔 주재로 열린 기후변화 방지를 위한 특별회의에서 유럽 각국의 외교관들이 부시를 노골적으로 혐오하였다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또한 미국언론이 고어 수상은 부시의 실패라고 비판하는 것도 분명한 기대효과다(관련기사 보기). 그것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간에 말이다. 문제는 미국의 유권자들이 그러한 신호를 감지하든가 스스로 깨우치든가 현재 잘못 운행하고 있는 미국호를 바로잡을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결국은 국민주권의 나라가 아닌가.

하지만 또 한편으로 보면 민주당의 대권주자가 정권을 잡는다 하여도 심지어 알고어가 정권을 잡는다 하여도 미국이 안고 있는 시스템적인 모순을 풀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전 세계 인구의 3%를 차지하면서도 전 세계 에너지의 25%이상을 소비하는 나라가 미국이다. 현재 서브프라임 사태로 소비가 위축되지 않을까 대미 수출국들이 걱정하였는데 최근 BBC 웹사이트의 기사에 따르면 미국 소비자들은 소비를 줄이고 있지 않다고 한다(관련기사 보기). 이러한 소비가 세계무역에는 긍정적 영향을 미칠지 몰라도 환경에는 엄청난 악영향을 미친다. 그런데 어느 누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고 소비자들에게 환경보호를 위해 소비를 줄이라고 말하고 정책을 실현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그것이 근본적인 변혁이 아니더라도 상당한 정도의 고통을 감내하는 외과적 수술이 있지 않고서는 기후변화와 온난화라는 이 사상초유의 환경재앙은 쉽게 해결될 전망이 보이지 않는 것이 현실인 것 같다.

WSWS기사 전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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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상 타면 좋겠지만 못 타면 또 어떤가?

노벨상 하나도 못 탄 나라여서 후진국이라고 스스로 자괴감에 시달리던 나라가 있었으니 그 이름하여 대한민국. 드디어 김대중 대통령께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시어 태극기를 세계 방방곡곡에 휘날리셨다. 그런데 그마저도 또 로비로 탄 상이니 뭐니 자국인들끼리 싸우는 희한한 나라가 바로 이 나라가 아닌가 싶다.

노벨상.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 가운데 하나다. 그 권위를 세운 과정은 깊이 알지 못하지만 하여튼 선정 과정이나 수상 과정을 보고 있자면 과연 폼은 난다. 유럽의 고풍스럽고 고급스러운, 직설적으로 말해 ‘귀족’스러운 그 분위기는 수상을 하는 사람이나 그 수상자의 해당국이나 뿌듯한 자부심을 심어줄 만큼 근사하다.

고은 시인이 이번에도 노벨 문학상의 문턱에서 미끄러졌다고 문학계에서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한 출판사 대표는 “노벨 문학상의 유럽 중심주의는 그동안 계속 문제제기가 된 부분”이라며 “일본을 제외하곤 제3세계와 아시아 문학에 대해서 지나치게 무관심해 왔다”고 말했다 한다. 당연한 이야기다. 유럽의 상이니 유럽중심인 것 아닌가. 오스카가 미국 중심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는 또 한국문학이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데 실패했다는 자성론도 나오는 모양이다.

왜 이 시즌만 되면 유럽의 어느 상패에 휘둘려 자학모드로 돌입하여 OTL 자세로 들어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왜 한국인은 이렇게 유난히도 타국인들의 평가에 신경을 쓰는 것일까. 다른 이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 심히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체면’ 문화가 아닐까 싶다. 여담이지만 개인적으로 ‘미녀들의 수다’라는 프로그램도 그러한 사고방식의 연장선상이 아닐까 싶다. 외국인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에 대해서 뭐라 이야기하는지가 신경 쓰이고 또 알고 싶은 것이다.

물론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하는 것은 예술이 지향하여야 할 바이긴 하다. 그러나 그 보편성은 소설을 영어로 쓴다고 되는 것이 아닐 것이다. 문학에 있어서는 특히 언어라는 장벽이 있긴 하지만 판소리가 판소리이기 때문에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국문학이 한국인에게 기쁨을 주었다면 그것으로 된 것 아닌가? 걸쭉한 사투리가 배어 있는 토속적인 문학작품에서 느끼는 정서를 영어로 아무리 멋들어지게 번역한들 그 정서가 그대로 옮겨지지는 않을 것 아닌가? “누리끼리한” 을 영어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여하튼 타면 좋겠지만 안탔다고 정기적으로 “우린 안 돼”라고 고개 숙이는 짓은 고만하자. 막말로 노벨이 문학을 알기나 했을까?

노벨상 수상자 선정 원칙과 과정의 실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