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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건립에 대해 다시 한번

역사적 기록을 보면 자본의 이동성 capital mobility 이 부유한 국가들과 가난한 국가들의 수렴을 촉진하는 주요 요인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일본이건 한국이건 타이완이건 그리고 더 최근 들어서는 중국을 막론하고 최근 몇 년 동안 선진국 코앞까지 쫓아온 아시아 국가들 중 그 어느 곳도 대규모 외국인 투자로 수혜를 입지는 않았다. 본래 이들 국가는 모두 물적자본과 그리고 더 중요한 인적자본의 투자에 필요한 재원을 스스로 조달했는데, 최근 나온 연구들은 특히 인적자본이 이들 국가의 장기성장에서 핵심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반대로 식민지 통치 시대건 오늘날의 아프리카에서건 다른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던 국가들은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 이유로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점은, 그들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이 크지 않은 분야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고, 만성적으로 정치적 불안에 시달렸다는 사실이다.[토마 피케티 지음, 장경덕 외 옮김, 이강국 감수, 글항아리, 2014년, p90]

피케티의 이 책은 역사적으로 자본의 수익률(r)이 노동의 수익률(g)보다 크다는 “근본적인 불평등”에 다룬 책이다. 인용한 구절은 이러한 경향이 국제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한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부유한 국가에서 ‘자본의 한계생산성 marginal productivity of capital’이 낮아지면서 자본의 흐름은 가난한 국가로 흐르게 마련인데, 이럼으로써 이들 국가들 사이에 불평등이 감소할 것이라는 고전파 경제학 이론의 주장과 달리 오히려 자체적으로 자본을 조달한 국가들이 더 고도로 성장했다는 것이 피케티의 관찰이다.

이러한 관찰은 한 예로 든 우리나라의 경우를 놓고 볼 때 그리 틀린 관찰은 아니다. 한국은 강제적인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한 일제 강점기부터 사실상 자력으로 인적자본을 늘려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일정 부분 일본이나 미국과 같은 과거 및 현재의 선진국들의 물질/비물질적인 도움이 있었지만 – 그리고 이것이 정치적인 편향에 상당부분 영향을 미쳤지만 – 교육을 책임진 가정의 헌신은 거의 유례없을 정도로 혹독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더불어 피케티는 인적자본을 더 강조하기는 했지만 물적자본 역시 자체적으로 해결했다는 사실도 매우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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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yangIronworks” by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 저작자 김소민의 허가를 받고 퍼블릭 도메인으로 공개함. Via Wikimedia Commons.

포스코 광양제철소

이미 이 블로그에서 몇 번 다뤘던 포항제철 건립의 비화가 대표적 사례다. 박정희 정권은 국제금융기구들로부터 무모한 계획이라고 비판받았던 제철소 건립을 대일청구권 자금을 활용하여 건설한 – 사실상의 내자조달 – 사례는 남한의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에서 매우 중요한 국면이다. 또한 박 정권은 당시 절대적인 자본부족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독일에는 간호사와 광부를, 베트남에는 군인을 보내고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외자를 조달한다. 사실상 이런 자금이 그런 조달 배경 덕분에 자본수익이라는 반대급부의 꼬리표가 달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만일 포항제철이 ‘자본의 한계생산성’으로 인해 새로운 고율의 자본수익을 쫓던 투자자들의 자본에 의해 건설되었다면 상황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역사에 가정은 금물이지만 아마도 포항제철의 모습, 나아가 남한 전체의 모습은 지금과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지금 봐도 무모하기 그지없는 두 박씨의 원대한 계획은 “공상과학”이라 치부되어 사업계획이 수정되었을 것이고 투자에 쓰일 잉여는 배당에 쓰였을 것이다. 하지만 두 박씨는 사실상의 주주인 일제의 피해당사자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마패’까지 등장하는 개발독재로 포항제철의 투자효율을 극대화하였다.

고전파 경제학 이론으로 설명하기 매우 난해한 사건이었다.

종이마패

포철 1기 설비구매는 대금지불과 설비선정의 절차에 비능률과 잡음을 부르는 혼선이 깔려 있었다. [중략] 포철은 정부기관은 ‘주일구매소’를 통해 설비구매를 계약할 수밖에 없었다. 주일구매소는 포철이 면밀한 검토를 거쳐 선정한 설비공급업체를 성능이나 가격에서 트집 잡았다. 그러면서 포철이 2류로 돌린 업체와 계약하겠다고 주장했다. 공급업체에서 상납과 리베이트를 받아내려는 정치인들의 협잡까지 개입했다. [중략] 단단히 준비하고 있는 그에게 기회가 왔다. 1970년 2월 3일, 대통령이 포철의 공사진척 상황을 보고받고 싶어 한다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전화했다. [중략] 설비구매에서 포철이 부닥친 난관을 설명하고 개선방안을 건의했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박정희가 말했다. “지금까지 건의한 내용을 여기에 간략히 적어봐.” 박정희가 메모지를 내밀자, 경제장관회의에서 지시할 자료로 쓰려나 싶어 건의사항을 간략히 정리했다. [중략] 박태준이 박정희에게 메모지를 넘겼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내용을 야무지게 훑어본 박정희가 메모지의 좌측 상단 모서리에 친필서명을 하여 도로 내밀지 않는가. [중략] 박정희의 친필서명이 든 메모지는 포철 역사에서 ‘종이마패’로 불린다. [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이대환, 2004년, 현암사, pp309~312]

개발독재시대의 두 거물 박정희와 박태준이 한국경제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잘 보여주는 한 사례다. 경제성장을 일구어낸 개발도상국에서 볼 수 있는, 강직한 기업인, 비효율적인 국가기관, 떡고물을 챙기려는 정치인, 신념을 가진 독재자 등 그럴듯한 캐릭터들이 잘 포진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적어도 포항제철과 관해서는 ‘종이마패’적 기업운영이 성공을 거두긴 했다. 하지만 박태준이라는 CEO의 일방적인 말만을 믿고 통치자가 기존의 주일구매소와 같은 객관적 검증절차를 배제시켜버린 행태는 매우 위험할 수도 있다. 그 위험성은 사실 역사를 돌아볼 때 지루하게 반복되어 왔다.

실제로 이후 수많은 경제행위에서는 상호검증을 통한 의사결정의 합리성을 도모하기 위해 법적으로나 제도적으로 여러 기관과 행정절차를 두어왔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도 결국은 운용하기 나름이어서 오늘날에도 국가는 제도와 기관의 검증절차를 갖은 편법을 동원하여 피해나가기도 한다.

대표적인 회피행위로는 민영화를 들 수 있다. 공공서비스를 민영화하는 것은 부채에서나 행정기관의 감독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점에서 행정력의 범위에서 배제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개별사업으로는 사업을 쪼갬으로써 일정규모 이상 사업에 필요한 타당성 검토에서 배제시키는 방법이 있다.

요컨대 권력분산형 국가 모델은 – 예를 들자면 독립적인 중앙은행과 같은 – 그것이 반드시 경제성장 등에 있어서 성공적 이어서라기보다는 그렇지 않을 경우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이 너무 크기에 보강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들이 행정 권력의 아전인수 격 행동에 의해 지금도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이 그 반증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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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제철 건립의 자금조달에 관하여

식민지와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난 약소국 남한은 – 또는 적어도 그 당시의 위정자들은 – 하나의 꿈이 있었다. 그것은 ‘산업의 쌀’이라는 철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갖는 것. 특히 철강생산 능력이 북한에 크게 뒤떨어진 남한은, 이승만 정권 이래 지속적으로 제철소 건립을 추진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드디어 제철소 건립이 가시화된 것은 1966년 이었다.

그해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 4개 국가와 이들 나라의 7개 철강업체로 구성된 대한국제철차관단(KISA :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이 정식으로 발족되었다. KISA의 합의사항은 한국에 종합제출 건설을 위해 차관단이 1억 달러, 한국이 2천5백만 달러를 출자하여 1967년 봄까지 공장을 착공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 공염불이었다. KISA와 남한과의 합의각서에는 자금 조달시기, 배분율, 책임소재 등에 대한 명시가 없었다. 이 때문에 사업성이 미진하거나 자국 및 자사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지 발뺌을 할 수 있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러했다. 이 난국을 타개한 것은 포철사장 박태준 씨였다.

대일청구권 자금을 포철 1기 건설에 투입하자는 박태준의 절묘한 아이디어는 확인하나마나 현실성을 담보했다. 3억 달러의 무상자금만 해도 1966년부터 10년간에 걸쳐 지급하도록 되어 있으니 아직 절반은 남았을 터, 대외경제협력기금(유상자금) 2억 달러에서도 여유가 있을 터. [중략] ‘하와이 구상’을 서둘러 실현하려면 장애 하나를 넘어야 했다. 양국 정부가 농림수산업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고 합의해둔 자금의 용처를 바꾸는 것. 먼저 박정희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일본 내각을 설득해야 했다.[세계최고의 철강인 박태준, 이대환, 2004년, 현암사, pp273~274]

박태준 씨가 자금조달로 어려움을 겪을 당시 머리를 식히러 찾은 하와이에서 떠올랐다는 이 아이디어 덕분에 자금조달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고, 결국 남한 경제사에 큰 획을 그은 포항제철의 건설은 본 궤도에 접어들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박태준 씨가 사용한 자금이 결국 “농림수산업 발전을 위해 사용한다고 합의해둔 자금”이었다는 점이다.

“농림수산업의 발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당시 일본의 통산상 오히라의 말을 빌리자면 “경제원칙 상 산업화의 첫 단계는 농업자립화이므로, 남한은 비료공장, 농기계공장을 세워 농업부터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원칙이 옳건 그르건 간에 결국 당시 대한중석의 사장 지위였던 박태준 씨는 일개 기업인으로 대일청구권의 용도를 바꾼 셈이다.

드디어 1969년 12월 韓日간에 종합제철에 관한 기본협약이 체결되어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韓日 국교정상화 때 양국간에 합의된 청구권 및 對韓차관 공여액은 무상자금 3억 달러, 유상자금 3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 이상으로서 무상 및 유상자금 각 3억 달러에 대해서는 항일독립유공자보상, 對日민간청구권보상, 평화선철폐에 따른 어민보상 등 국민적 요구가 방대했다. 朴대통령은 국민적 반발이 적지 않을 것을 각오하면서 낭비보다는 건설이라는 견지에서 종합제철건설에 상당한 액수를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렸다.[김정렴, 한국경제정책30년사, 중앙일보사,  pp138~139]

당시 재무부/상공부 장관을 역임한 김정렴 씨의 진술은 또 다른 측면을 보여준다. 즉, 남한이 일본과의 국교를 정상화하면서 받아낸 각종 자금은 “농수산업의 발전”뿐만 아니라 일제(日帝)시대로 인해 고통 받은 이들과 국교정상화로 피해를 입는 이들의 청구권이기도 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런 보상을 “낭비”로 보고 종합제철 건설에 투자하는 “대영단”을 내린다.

이러한 일련의 모습은 남한경제의 주요특징의 하나로 지적되고 있는 요소투입 주도 성장모델의 한 단면이다. 일단 외자(外資)든 내자(內資)든 – 거의 외자였지만 – 동원하여 정권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업에 집중 투자함으로써 의식적으로 해당산업을 육성하는 것, 자유시장 경제원리와 별로 맞지 않는 이 방법을 박정희가 채택하였고 포철이 그 대표사례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의 작가 장하준 씨는 이러한 국가주도형 자본주의 모델에 대해 긍정적인 편이다(또는 적어도 그 존재의의를 부정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이러한 의식적인 경제정책이 가지는 함의에 공감한다. 만약 당시 경제관료들이 ‘남한은 농업국가가 적당하다’는 국제사회의 충고(?)를 받아들였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눈에 선하다.

문제는 경제근간이 자본주의인 사회에서 그 요소투입 모델이 성공한 이후다. 이후 포철에서 만든 철로 농기계를 만들어 농업 발전에 기여한 정황은 있었겠으나 포철이 창출한 잉여로 항일독립유공자나 위안부들의 뒷바라지를 해주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것은 악덕기업이어서가 아니라 주주의 이익 – 또는 노동자의 이익 역시 – 을 반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일견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자본주의의 기업원리를 고수하려 한다면 애초에 자금용도가 제철소 건립을 위한 상업차관이 아니었던 – 어찌 보면 일제로 인해 피해 입은 국민 모두의 것인 – 배상금을 쓰지 않았어야 할 일이다. 그래야만이 포철이 투입과 산출이 자본주의 경제원리에 그대로 부합하는 기업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