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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에 대한 단상 – NekoNeko 님의 의견에 대한 답글

사실 1970년대부터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고 알려진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 개념일지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중심원리인 자유시장, 규제의 완화, 재산권 등의 중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핵심원리와 일체의 모순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가 1970년대 이후의 신자유주의 사조를 특정하게 된 데에는 아무래도 1) 닉슨 정부의 금환본위제의 포기 등과 연계된 금융자본의 국제화 경향 2) 과거 사회주의 블록의 위협에 대한 내부적 통제의 수단으로 강화되었던 사회복지 등의 공공서비스 등의 해체경향과 연관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견지 하에 신자유주의의 이데올로기는 시장 자유주의가 한층 강화된 자본주의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쌔처 정부는 공공서비스의 민영화 도입이 공공부문의 비효율을 제거시켜줄 것이라는 믿음 하에 이른바 Universal Testing 이라는 제도를 도입하였다. 효율적이고 경제적이라면 공공이나 민간을 가리지 않고 이용하겠다는 취지로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되고 있는 공공서비스 민영화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그 취지는 좋았다. 다만 처음의 문제인식이 “공공=비효율, 민간=효율”이라는 선입견 하에 출발하였다는 점이 문제다. “보편적인(universal)”한 평가에는 선입견이 없어야 하나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시피 좌우파로 나뉘어져 있는 정치권에는 선입견 자체를 전제하고 있는 집단이니 사실 애초에 보편과는 거리가 먼 정치놀음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NekoNeko님의 코멘트를 살펴보자.

“신자유주의가 세계화를 통해 전 세계를 무한경쟁으로 모는 측면에서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한편으로 신자유주의에서 시장이 재발견되고 이를 통해 좀 더 효율적인 자원 활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 역시 사실이거든요.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것은 인간적인 모습이지 비인간적인 모습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장의 효율적 기능을 이야기하고 있는 NekoNeko님의 발언은 넓게 보아 바로 쌔처 정부의 Universal Testing 의 취지와 유사하다 하겠다. 결국 폐쇄된 시장이란 특혜와 비효율을 낳게 되고 이는 희소한 자원의 낭비를 유발할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순기능이 있기에 사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시장은 존재해왔고 자본주의 이후에도 시장은 존재할 가능성이 크다. 문제는 NekoNeko님도 지적하고 있다시피 많은 이들로부터 “무한경쟁으로 모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띠고 있다고 비판받는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NekoNeko님의 대안은 다음과 같다.

“어쨌거나 사회 시스템이 이러한 문제점까지 커버해 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전 이런 사회 윤리의 문제는 시스템 보다 사회 구성원 교육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중략) 이 모든 것들을 시스템으로 커버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 역시 NekoNeko님의 대안에 동의한다. 적자생존 사회에서 승자독식을 당연시하는 현재의 교육은 심각한 문제점을 안고 있다. 조중동 등 보수언론에서는 신자유주의 시대에 걸맞게 금융교육을 강화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바 그 주장에는 일정 정도 동의하는 동시에 돈벌이 교육에 상응하는 만큼 약자에 대한 배려 등 사회연대 교육도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한가지 첨언할 점은 이러한 교육 역시 자본주의 시스템의 주요한 부분이기에 NekoNeko님의 발언이 약간은 어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시장을 효율적으로, 그리고 공정하게 움직이게 하는 데에는 교육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유사 이래 극우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시장이 가장 효율적이 되려면 시장에 아무런 규제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시장이 마비되었을 때에 사실 그들이 가장 크게 의존한 것은 바로 시장에 대한 규제와 계급적으로 불공정한 국가기구의 재정지원이었다.(주1) 규제와 제도가 바르게 세워지지 못한 것이 문제이지 규제나 제도 그 자체가 문제인 적은 없었다. 전봇대 한 개를 뿌리 뽑아 어떤 도로의 소통이 좋아졌다고 전봇대 자체를 부정하는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신자유주의가 되었든 자본주의가 되었든, 또는 수정자본주의가 되었든 그것이 효율만능, 승자독식, 탈규제만능의 시장 시스템으로 작동된다면 그것의 수명은 승자들조차도 당황할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수명이 짧을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서브프라임모기지로 망신창이가 된 미국의 주택시장이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요동치는 원자재 선물시장이다. 미국의 금융당국이 뒤늦게 금융제도를 정비하고 있고 의회가 선물시장에서의 투기행위를 조사하고 있는 것이 바로 체제수호자들의 위기의식이 갈수록 증대되고 있다는 결정적 증거일 것이다.

(주1)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에 직면하여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 부시행정부가 취한 조치와 금융자본에 지원한 천문학적인 돈을 생각해보라

윤길현, 가장 나쁜 점은

원래 스포츠 관람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지라 ‘윤길현’이라는 이름이 포털 검색어 상위에 오를 때까지도 그 친구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다. 사태를 이리저리 모아서 재구성해보니 이미 그 이름은 이 시대에 이XX과 함께 대표적인 패륜아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사건의 정황을 모르는 이들을 위해 사건을 시간 순으로 죽 나열해보겠다.

– SK와 KIA는 3연전으로 몸도 마음도 피폐해있었고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다
– SK에는 8회 윤길현(26) 이라는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와 있었다
– KIA 타석에는 최경환(37)이 공을 기다리고 있었다
– 윤길현이 빈볼을 던졌고 최경환을 약간 화난 투로 윤길현을 쳐다보았다
– 윤길현이 침을 뱉고는 “뭐? 뭐?”를 외치며 손으로 도발을 하며 다가갔다
– 양측 선수들이 뛰어나왔고 KIA의 이종범(39)이 가장 먼저 도착했다
– 윤길현이 이종범에게도 눈을 치켜뜨며 “뭐? 뭐?”라고 외쳤다
– 사태가 수습된 후 경기가 재개된다
– 최경환이 윤길현에게 삼진아웃당한다
– 윤길현은 돌아선 최경환에게 “아이 X팔”이라고 쌍욕을 했다
– 덕아웃에 돌아온 윤길현이 동료선수와 상황을 재연하며 즐거워했으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다
– 이런 상태에서 김성근 감독은 9회 다시 윤길현을 마운드로 내보냈다
– 경기 후 KIA팬을 중심으로 한 스포츠팬들이 인터넷을 달구기 시작했다
– 윤길현이 싸이 홈피에 변명에 가까운 짧은 사과문을 올린다
– 그런데 애초 윤길현의 아이디(dbsrlfgus123)와 다른 아이디(qwert09)가 올린 글이었다
– 30여분 개제되었던 사과문은 이후 삭제되었고 홈피는 폐쇄되었다
– 김성근 감독은 자신은 윤길현이 욕한 줄 몰라서 9회에 내보냈다고 변명한다
– 그리고 현재 자숙의 의미로 경기에 합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 KBO는 퇴장당하지도 않은 선수를 징계할 마땅한 근거가 없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입장이다

대충 이 정도가 진행상황이다. 가만 보고 있으면 각종 자충수만 골라서 두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고의적인 빈볼이야 다들 던지는 것이고 KIA역시 3연전 동안 많이 던지지 않았느냐, 후배라고 선배한테 복종만 하라는 이야기냐는 것이 SK 일부 팬들의 항변이다. 하지만 이 항변은 고의적인 도발행위, 쌍욕, 덕아웃에서의 시시덕거림, SK 선수들의 모르쇠, 진위여부가 불투명한 사과문 등 각종 분노를 자아낼만한 에피소드 속에 파묻힌다.

역시 장유유서의 한국사회인지라, 특히나 이종범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압도적인지라 그에 대한 비난이 가장 우세하다. 11살이나 많은 최경환 선수에게 쌍욕을 하고 이종범에게 눈을 치켜뜬 윤길현은 인간말종이라는 것이 현재의 여론이다. 물론 나 역시도 이종범에게 만큼은 남다른 애틋함이 있어 그가 그런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 안쓰럽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윤길현과 SK의 행동 중에 가장 화가 치미는 것은 바로 삼진아웃을 당한 최경환에게 윤길현이 쌍욕을 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패자의 등에 칼을 찍는 행위이다. 팀간의 승부이긴 하지만 타석에 들어선 타자와 이를 상대하는 투수는 또 하나의 작은 승부를 펼쳤고 윤길현은 승자, 최경환은 패자였다. 그런 상황에서 윤길현은 돌아선 패자에게 패배 이상의 모욕감을 안겨준 것이다. 효도르가 패배한 최홍만에게 쌍욕을 했다고 상상해보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약육강식이 당연시되는 이 세상에서도 그나마 인류가 일종의 공동선처럼 지켜왔던 것이 바로 패자에 대한 아량이었다. 인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그나마 사회적 약자나 정치적 약자는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고 그것이 공적부조나 복지정책으로 시현되기도 했다. 그런데 사회의 승자가 패자를 저주하고 조롱한다고 생각해보라.

사실 지금의 신자유주의는 실상 이 사회를 그러한 패자에 대한 배려가 없는 사회로 몰고 가고 있다. “Money Talks”, “Winner Takes It All”과 같은 프로파간다가 주창되고 서점의 경제 섹션에는 진지한 경제분석 도서보다는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성공담 등의 이른바 재테크 서적들로 메워져 있다. 새로 등장한 보수정부는 이전의 두 정부의 기조와는 같으나 더 빠른 속도로 사회의 신자유주의화에 몰입하고 있다.

그런 상태에서 윤길현의 행동은 어쩌면 이 사회의 또 다른 자화상 일뿐인지도 모른다. 그 역시도 뛰어난 선수로 자라오는 과정에서 야구만 잘하면 거칠 것이 없다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어떠한 것인지 익히지 못한 절름발이 엘리트로 자라왔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사회 곳곳에 이러한 절름발이 엘리트들이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름끼치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런 4가지 없는 인간들을 혼내주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철저한 예의범절 교육을 통해 다시 장유유서가 지고지순의 가치로 여겨지는 아름다운 전통사회로 회귀할 것인가? 물론 의미는 있겠으나 그것은 근본에 다가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역시 거시적이긴 하지만 그 해답은 바른 교육이다. 단순히 학교교육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전체가 약자에 대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나의 이익이 된다는 그런 반복학습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교육이다.

단순히 생각해봐도 윤길현의 행동은 장기적으로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야구는 혼자 하는 운동이 아니고 그가 언제까지 그의 치기어린 행동을 감싸주는 현재의 SK 감독진과 선수진에 둘러싸여 살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그런 순간이 되었을 때에 다른 구단과 그 선수들은 윤길현의 행동을 기억하고 그때 그를 따돌리든지 하여 징벌할 것이다. 이것이 사회의 이타적 징벌의 한 사례다. 그때쯤이면 윤길현은 자신의 잘못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다시 한번 큰 테두리에서 이야기하자면 우리 사회 역시 유아독존의 안하무인인 승자에게 돌아올 것은 차가운 멸시와 비협조뿐이라는 사실을 알게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개인에 대한 징벌이 아닌 공생의 길이다. 안하무인의 프로야구 선수가 살아남는 프로야구는 팬들의 외면을 받게 되고 안하무인의 승자가 살아남는 사회는 자멸의 길로 접어들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