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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슬기로운 언어생활에 반성이 없는 미디어

지난해 세입자가 집주인을 상대로 경매(집합건물)를 신청한 건수는 978건으로 2018년(375건·지지옥션)보다 2.6배 급증했다. 경매 전 단계인 임차권등기 건수도 역대 최대에 이르렀다. 요즘 법무법인엔 전세금 반환 소송을 상담하는 세입자로 넘쳐난다. 법도의 엄정숙 변호사는 “역전세를 당한 세입자 상담 건수가 급증하고 있다”며 “갭투자한 집주인이 다른 자산이 없다고 하는데 어떻게 대응해야 하냐고 묻는 유형이 가장 많다”고 했다. 최근 경매로 나온 주택은 90%가 빌라로 추정된다. 하반기부터는 전세금을 못 갚아 경매로 몰린 아파트가 쏟아질 거란 우려가 나온다.[ “세입자도 집주인도 비명”… 갭투자는 어쩌다 갭거지가 됐나]

개인적으로 “갭투자”라는 표현을 처음 접한 것은 몇년전 읽었던 어느 부동산 경매 관련 서적에서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책의 저자가 추구하는 전략은 빌라를 경매로 저가에 낙찰받아서 전세를 놓는 방식으로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보유 주택수를 늘려나가는 전략을 소개한 책이었다. 당시에는 빌라도 집값이 오를 가능성이 높으므로 보유하고 있다가 집값이 오르면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전략 노하우를 소개하는 책이었다. 책 내용을 보자면 많은 경우 처지가 곤란한 기존 세입자가 있어 그가 어떻게 순탄하게 집을 비우게 하느냐가 주된 내용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꽤나 온순하고 순진한 내용이었다. 최근 몇달 동안 화제가 되었던 “빌라왕”들의 행태를 보면 이보다 훨씬 체계적으로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앞서의 책 내용처럼 차근차근 빌라를 “갭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바지사장”을 내세우고 악질 중개업자의 꼬임에 빠진 무지한 세입자의 전세금으로 – 때로는 HUG의 도움도 받아 – 아무런 “갭”도 없이 보유주택수를 늘려가는 대량생산 콘베어 벨트 방식을 채택하였다. 이 경우 “갭투자”라는 표현도 무색하고 말 그대로 부동산 사기 카르텔일 뿐이다.

다시 돌아가서 언젠가부터 미디어에서 성찰도 없이 쓰는 표현인 “갭투자”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미디어가 쓰는 성찰없이 즐겨 쓰는 각종 표현은 – “빚투”, “존버”, “영끌” – 간혹 복잡한 상황을 간단명료하게 표현해주는 기존 단어가 부족해서 쓰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미디어 종사자의 나태함으로 인해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쓴 표현을 생각없이 가져다 쓰는 경우다. 이런 표현은 기사의 조회수가 생명인 현대 미디어 환경에서 특히 애용되고 있다. 자극적이고 친숙한(?!) 표현을 쓸수록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세입자의 보증금을 활용한 내집 마련이 일반화되었던 한국 사회에서 어떤 면에서는 주택구입자 상당수가 “갭투자자”였다. 그리고 집주인이 적당한 돈이 모이면 세입자 대신 실거주를 하며 안정적인 주거생활을 누리다가 때가 되면 집을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 것이 한국 중산층의 삶의 한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문제는 주택거래 방식이 점점 고도화되며 “갭투자” 자체만을 목적으로 하는 개인이나 또는 “빌라왕”처럼 부동산 구입 방식이 순수투자 목적형 혹은 기업형으로 커나가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이렇게 시간이 흐르며 시장참여자들이 주택을 애초에 사용가치와 상관없는 교환가치 그 자체만으로서 가치를 추구하면서 “갭투자”는 더 이상 “갭투자”로 애교스럽게 불러줄만한 행태가 아니게 되었다. 수많은 “재테크” 서적과 부동산 관련 유튜브 채널이 집을 어서 사라고 부추겼고 급기야 사기꾼들이 이런 상승장, 전세금보증제도, 그리고 순진한 세입자를 악용하여 “갭투자”를 악질 사기행위로 변질시켰다. 그럼에도 여전히 미디어는 “갭투자”라는 용어 사용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는 채로 보도를 해대고 있다.

“영끌” 표현의 본질은 ‘영혼까지 끌어모은 대출’이 아니라 미래의 수익을 과하게 담보잡힌 행위다. “빚투” 표현의 본질은 “미투”처럼 ‘나도 레버리지 투자한다’가 아니라 빚으로 리스크를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갭투자” 표현의 본질은 ‘나는 매매가와 전세가의 갭 정도만 투자해서 집을 샀다’가 아니라 “영끌”과 “빚투”의 총체적 레버리지 투기와 전세가가 하락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 베팅한 것이다. 그 믿음이 전세가의 하락으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미디어는 스스로의 언어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런데 반성은 커녕 “갭투자”의 다음 버전 “갭거지”로 조회수 팔이에 나섰다.

위험수위에 도달한 한국 매스미디어의 언어오염 현상

한국의 매스미디어가 보도기사를 쓸 때 사용하는 언어의 오염 현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기자들 스스로 언어에 대한 엄격함을 유지할 능력이 없기 때문인지 아니면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소셜미디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하여 언어사용에 유연성(?)을 가지기로 마음먹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미디어 보도의 기본원칙인 언어적 엄격함은 이미 오래전부터 지켜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즉, 매스미디어는 언제부터인가 보도기사에서 ‘존버’, ‘줍줍’, ‘영끌’과 같은 온라인커뮤니티에서 만들어낸 비속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고 있고, – ‘곱버스’나 ‘떡상’과 같은 표현은 이미 오래전에 시민권을 획득했다 – 심지어는 매스미디어 스스로 미투(MeToo) 현상을 조롱하는 듯한 ‘빚투’와 같은 어이없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한다. 매스미디어와 온라인커뮤니티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는 상황이다.

어찌 보면 이들 표현이 신세대에게 더 직관적이기 때문이란 이유도 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 가상자산 관련 기사에서 더 자주 목격할 수 있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다만, 이런 현상이 일반화되다 보니 뻔히 올바른 표현이 존재함에도 신문뿐만 아니라 지상파에서까지 ‘내로남불’이나 ‘돈맥경화’라는 정체불명의 사자성어를 쓰고 있는 상황으로까지 언어오염 현상이 심각해지고 있다.

어쨌든 왜 이런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인가 다시 한번 추측해보자면 짧은 시간에 정해진 물량의 보도를 쏟아내야 하는 보도 노동자의 근로조건 탓도 있지 않을까 짐작되기도 한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들 스스로 언어와 문어에 대한 수호자인, 기록하는 이로서의 – 기자(記者) – 자존심과 자긍심이 옅어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당신이 쓴 글은 인터넷이 존재하는 한 남아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