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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 프리드먼, 그리고 자유

케인즈의 일반이론에서의 주요주제 하나는 공황조짐이 있는 상황에서의 통화정책이었다. 그러나 밀턴 프리드먼과 안나 슈워츠는 그들의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 에서 Fed는 대공황을 막을 수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더 나중에 이 주장은 프리드먼 그 자신의 것들을 포함한 인기 있는 저작들에서 Fed 가 공황을 초래했다는 주장으로 변신했다.
A central theme of Keynes’s General Theory was the impotence of monetary policy in depression-type conditions. But Milton Friedman and Anna Schwartz, in their magisterial monetary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claimed that the Fed could have prevented the Great Depression ? a claim that in later, popular writings, including those of Friedman himself, was transmuted into the claim that the Fed caused the Depression.[Was the Great Depression a monetary phenomenon?, Paul Krugman, 2008.11.28]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주장을 세상의 모든 일을 유태자본의 음모로 환원시키는 음모론자들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당시 연준은 무엇을 했는가? 그들은 이자율을 낮추어 경제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기보다는 무자비하게 통화량을 수축시켰다. 그리하여 1929년 457억 달러에 달하던 통화량이 4년 후인 1933년에는 3백억 달러에 불과해서 극심한 디플레가 조장되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1929년 대공황의 주범이 연준은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겠지만 유수의 경제학자들간에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노벨상 수상자이자 경제학자인 스탠퍼드 대학의 프리드먼(Milton Friedman) 교수도 1996년 1월 방송국 대담에서 그러한 사실을 인정했다.[세계 경제를 조종하는 그림자 정부(경제편), 이리유카바 최, 2002년, 해냄출판사, p154]

한편 이 책에서는 말미에 지급준비금 보유율을 1백 퍼센트까지 증가시켜야 한다거나 월별 인구 증가 예상에 준해 월별 화폐 공급량을 산출한다는 등의 COMER(통화경제개혁위원회 : committee on monetary economic reform)라는 단체의 주장을 싣고 있는데 그다지 맘에 와 닿는 주장은 없다. 잘은 몰라도 통화주의 이론을 조악하게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다(주1). 한편 이들이 이론적 지주로 여기는 프리드먼은 어떠한 세계를 꿈꾸고 있을까? 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못한 터라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아래 글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페비언 사회주의와 뉴딜 자유주의(주2)로 향한 여론의 흐름은 이제 약화되었지만, 앞으로 나타날 여론의 물결이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로 향할 것인지, 아니면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로 향할 것인지는 아직 분명치 않다. [선택의 자유, 밀턴 프리드먼, 박우희譯, 1980년, 주식회사 중앙일보, p190]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프리드먼은 “마르크스나 모택동의 정신에 입각한 일당독재정부”는 거부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그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담 스미드나 토마스 제퍼슨의 정신에 입각한 자유의 확대와 정부의 축소”일 것이다. 아담 스미스라면 이미 국부론을 통해 경제학의 기반을 다진 이고 그 다음으로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의 제3대 대통령으로 알려져 있다. 내 관심을 끄는 이는 토마스 제퍼슨이다. 왜 프리드먼은 토마스 제퍼슨을 끄집어냈을까? 그것은 그가 바로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인물과 대척점에 섰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더 해밀턴은 누구인가? 그는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이다. 그는 미국의 건국 이후 영국의 영란은행을 흉내 낸 중앙은행을 설립하였고, 미국의 경쟁력 약한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해 자유무역을 반대하였고, 당시 13개로 뿔뿔이 흩어져 있던 주정부를 아우르는 강력한 중앙정부를 수립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기에 많은 이들의 많은 반발을 샀다. 그를 반대한 부류는 월스트리트와 금융을 금권주의의 탐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 남부의 부유한 농산물의 자유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는 이들, 그리고 신생미국이 영국과 같은 강력한 정부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자치가 허용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었다. 그 중심에는 토마스 제퍼슨이 있었다.

자본주의 캠프 선봉에는 해밀턴이 있었고, 민주주의 캠프 선봉에는 제퍼슨이 있었다. 해밀턴이 이끄는 연방주의자 Federalist 들은 강력한 중앙정부를 지지했으며, 특히 금융과 상업활동에서 정부의 개입을 강조했다. 지역적으로는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방을 기반으로 했다. 반면 제퍼슨이 이끄는 공화주의자 Republican(놀랍게도, 오늘날 민주당의 원조인 이들을 당시에는 ‘공화당’이라고 불렀다)들은 연방정부의 권한을 제한하는 것을 지지했고 이들의 지역기반은 남부였다. 농민들과 대지주들이 공화당의 지지 세력이었다. [머니맨, 헨리 브랜즈, 차현진 해설.옮김, 청림출판, 2008년, p92]

자 이제 편이 갈라졌다. 프리드먼이 아담 스미스와 함께 제퍼슨을 언급한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그것은 그가 절대적인 가치인 자유를 – 특히 경제활동의 자유를 – 마르크스나 모택동이나, 그리고 결정적으로 해밀턴과 같은 강력한 중앙정부 주창자들로부터 수호하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이전의 봉건제나 절대군주제에서 정당성을 획득한 주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절대군주 하에서의 경제에 대한 독재로 인한 폐해는 실제로도 심하였다고 한다.

특히 프리드먼의 주특기(?)인 통화문제에 있어 군주의 횡포가 심했는데 그것은 바로 무절제한 화폐 초과공급을 말하는 것이다. 즉 화폐주조권을 가지고 있던 절대군주는 금함량을 속이는 방법 등으로 화폐를 유통시켜 자신의 사금고를 채우곤 했다. 발권기관의 수익을 뜻하는 시뇨리지의 어원도 불어의 ‘군주 seigneur’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이러니 나라의 경제는 피폐해져 인민들의 생활은 비참하게 찌들어가게 되었고 결국 절대군주제는 무너지게 된다. 그리고 잘 알다시피 거기에서부터 자유주의는 싹트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역사적 타당성을 획득한다.

프리드먼이 대표하는 시장자유주의는 마르크스, 모택동, 해밀턴이 지향하는 강력한 중앙정부가 이토록 피를 흘려가며 지켜온 자유를 빼앗아가는 행위라고 간주하고 있는 듯하다. 여기에서 마르크스와 모택동은 좌익을 대표하고 오히려 해밀턴은 금권주의를 대표하는 바, 상반된 이들 같지만 둘 다 시장의 자유를 유린한다는 점에서는 공범인 셈이다. 더 나아가 ‘그림자 정부’의 저자 이리유카바 최는 현대의 자본주의는 사실 사회주의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시장의 지배자인 자본가가 경제사에 등장한 이래 권력층은 – 심지어 절대군주조차도 – 자본가의 자유는 유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그들은 공생관계를 변함없이 맺어왔다. 프리드먼이 싫어하는 해밀턴은 유치산업(幼稚産業) 보호론을 통해 미국에서의 자본가의 육성을 도모했었다. 독재자 박정희는 재벌의 독점권을 옹호하였다. 오늘날 미국정치의 경우에는 부시 행정부처럼 정부 자체가 자본가로 메워지기도 했었다. 그들에게 있어 주요한 패퇴는 기껏해야 아직 대지주가 힘을 발휘하던 시절의 영국에서 ‘곡물법(corn law)’을 폐지할 힘이 없었던 시기나, 대공황으로 인한 금융억압으로 인해 행동에 제약이 가해지던 정도였다.

해군이 면직산업 발전에 결정적인 전환점을 마련해 준 것은 1753-63년의 7년 전쟁에서 프랑스에게 승리한 것이었다. 이 전쟁에서 프랑스 함대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함으로써 영국이 인도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영국이 패배했다면 인도나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식민지를 내놓도록 요구 당했을 것이므로 면직산업에게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나폴레옹과의 전쟁도 마찬가지이다. 넬슨 제독이 해상권을 장악한 덕분에 랭카셔의 수출은 1793-1815년 사이에도 급속하게 증가했다. 반대 상황이었다면 면직산업의 미래도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렇게 식민제국과 해군력이 원료 공급지와 시장을 하나로 묶는 것을 도와줌으로써만 영국 면직산업은 유지될 수 있었다.[면직산업과 의료,시장, 통상로 보호의 문제, 강철구, 2008.8.11]

강철구 이화여대 교수의 글이다. 이 당시 영국과 프랑스 양국의 정치체제는 말할 것도 없이 군주제였다. 그들은 비록 독재자이긴 하였지만 자신들의 권한을 자국 산업의 성장을 위해 사용했다. 그러한 면에서 어쩌면 시장참여자 중에서 자본가에는 애초에 강력한 국가로부터 찾아올 자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번 월街의 사태를 보더라도 그들은 든든한 조력자가 아닌가 말이다.

한편 앞서 살펴본 화폐주조권이 독점되어 있기에, 연준이 – 현대판 군주(?) – 그것을 잘 못 사용하였기에 그들 자체가 대공황의 주범이라는 주장은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프리드먼과 슈워츠는 앞서 언급한 “미국에서의 화폐의 역사”에서 연준이 최종대부자 기능을 효율적으로 수행하지 못하여 은행 공황이 발생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책적 실수도 있었지만 금본위 제도를 유지하기 위한 고육지책인 측면도 있다. 더 나아가 이번 금융위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원인이 결합되어 폭발한 당시의 대공황을 단순히 통화의 수축만을 원인으로, 그것도 음모론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너무 순진한 발상일 뿐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책의 실패를 바탕으로 최종대부자의 기능을 없애버리자는 – 또는 통화량 조절이외에는 다른 짓은 하지 말라는 – 발상은 허리띠를 안 매고 다니면 살이 빠질 것이라는 착각에 불과할 뿐이다.

이쯤에서 프리드먼이 보호하고자 하는 자유가 도대체 어떠한 자유인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이것이 아닐까?


“나에게 구제금융을 제공한 것은 고맙다. 그러나 내가 보너스를 받을 자유는 빼앗지 말라.”

최상위 임원들의 임금과 보너스를 강력히 제한하겠다는 발표 하루 뒤 AIG는 이들 임원 중 몇몇은 내년에 “유지 보너스”로 수백만 달러를 받을 것이라고 밝혔다.
One day after announcing strict limits on salaries and bonuses for its top tier of executives, AIG revealed that some of those executives will receive millions in “retention bonuses” next year.[AIG to pay retention bonuses to executives, Financial Times, 2008.11.26]

(주1) 원래 통화주의 자체가 조악한 것일지도…

(주2) 여기에서의 자유주의는 우리가 오늘 날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의 사상적 뿌리와는 다르다. 이는 미국에서는 자유주의, 즉 liberalism을 1차 세계대전 당시 지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진보당의 작가들이 진보주의 progressivism의 대체물로써 선점하였기 때문이다.

니모를 찾아서, 그리고 자유를 찾아서

‘니모를 찾아서(Finding Nemo)’는 디즈니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잘 표현한 전형적인 사례다. 무엇에도 우선하는 가족의 가치, 그럼에도 세상 밖으로 나아가려는 후손들에 대한 너그러운 배려가 이 영화의 핵심적인 주제다. 등장인물(?)들은 이미 알고 있다시피 말린(Marlin)과 니모(Nemo) 부자로 ‘흰동가리(clownfish)’ 종으로 알려진 (의인화된) 물고기들이고 나머지 조연들 역시 바다 속에 서식하는 (역시 의인화된) 상어, 문어, 해마, 거북이 등이다.

사건은 홀아비 말린의 과보호 속에서 자란 니모가 학교에 입학하면서 발생한다. 입학 첫날 아버지에게 반항하던 니모는 잠수부에게 잡혀 시드니의 한 치과 수족관에 갇히게 되고, 말린은 기억력이 낙제점인 도리(Dory)라는 수다스러운 물고기와 함께 니모를 찾아 나선다. 니모는 수족관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나지만 아버지와 바다에 대한 그리움으로 함께 탈출을 꿈꾼다. 말린은 죽을 고비를 몇 번 당하는 등 힘든 여정을 이어가지만 거북이, 펠리칸 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아들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앞서도 이야기하였다시피 이 영화가 시종일관 전달하는 메시지는 가족의 중요성이다. 그리고 또한 개인의 발전은 가족 안에서의 사랑과 배려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도 강조하고 있다.(주1)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다 흥미로운 점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수족관에 갇힌 니모를 비롯한 물고기들의 탈출기에서 볼 수 있는 ‘자유에의 대한 갈망’이다.

영화에서는 물고기들이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즉 자유에 대한 갈망을 당연히 추구하여야 할 가치로 받아들이고 있다. 니모로서는, 그리고 또 한 마리의 바다 출신(?)의 물고기 길(Gil)에게는 당연하다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니모는 아버지와 생이별을 하였고 길은 바다의 존재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바다로 탈출하여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져볼 수도 있을 텐데 영화는 이에 대해 설명하지 않고 있다.

누군가가 태어나기를 감옥에서 태어났다면 그를 감옥 바깥으로 보내는 것은 그에게 자유를 주는 것인가 아니면 살벌한 바깥세계로 내모는 것인가. 과연 니모나 길을 제외한 다른 물고기들은 ‘자유’라는 피상적인 – 또한 실체에 접근하였는지도 모르는 – 가치를 위해 안정적으로 제공되는 먹이와 먹이사슬로부터의 안전함을 희생할 필요가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또 다른 수족관, 또는 감옥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엇을 통해 확신할 수 있는가. 내 자신이 감옥에서 태어난 사람일 수도 있다. 사실은 이 세계도 또 하나의 감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 당신을 갑갑하게 하는가. 당신의 자유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면서 속박 당하게 되는가.

이러한 ‘자유와 세계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주제로 한 영화가 꽤 있다. 대표적인 영화로 ‘The Matrix’, ‘The Truman Show’ 등을 들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주인공들은 그들 자신이 갇혀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자신들은 사실 갇혀있다는 진실에 접근하게 되고 갈등은 증폭된다. 하지만 그게 어때서. 감옥 속에서 행복(?)했다면, 진실을 조금만 외면하면 계속 행복할 것인데(주2) 꼭 쇼생크 탈출의 앤디처럼 필사적으로 탈출할 이유가 있는가. 그럴 정도로 ‘자유에의 갈망’은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지고지순한 가치인가.

물론 이 영화는 지금 이렇게 딴죽을 걸고 있는 그러한 주제에 대하여 어떠한 문제제기도 하지 않는다. 자유의지는 당연한 것이고 수족관은 파괴되어야 한다. 수족관은 그렇듯 자유를 속박하는 설정으로만 작용할 뿐이다. 수족관에서 태어난 물고기가 바다를 만났을 경우 혼란스러워질 세계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삐딱한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수족관과 바다의 상징성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는 길에게 바다가 또 하나의 수족관이면 어쩔 테냐고 묻고 싶었다.

어쨌든 니모는 탈출에 성공하고 아버지 말린을 만났고 아버지의 격려 속에 좀더 성숙한 물고기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수족관에 있을 때보다 더 많은 위험에 노출될 것이고 먹이를 찾기 위해 더 필사적인 노력을 하여야 할 것이다.(주3) 그래서 나는 니모에게 묻고 싶다.

“수족관에 살 때보다 더 행복하니?”

p.s. 주연을 맡은 흰동가리는 성전환이 자연스럽게 되는 생물로 유명하다고 한다. 헉~ 더 자세한 정보는 여기를….

(주1) 잘 알고 있다시피 이러한 메시지는 디즈니 영화 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메인스트림 헐리웃 영화가 공통적으로 전하는 메시지다

(주2) 사실 The Matrix 2편, 3편에 나오는 실제 세계를 보면 왜 그리 악착같이 가상의 세계를 탈출하려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든다.

(주3) 아 물론 영화는 “그 뒤로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을 맺는다

자유무역, 누구를 위한 자유인가?

■ 다국적 기업이란 무엇인가?

다국적(또는 초국적) 기업이란 순수하게 일국 내에서만 비즈니스를 영유하는 기업과 달리 한 나라 이상의 지역에서 기업을 운영하는 회사들을 일컫는 말이다. 오늘날 이러한 기업은 전 세계적으로 6,3000개에 달하며, 이들이 전 세계 거래의 3분의 2와 투자의 80%를 차지하고 있다. 그들은 ‘세계화’의 무대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제적인 존재이다.

많은 다국적 기업들은 지구적인 규모에서 그들의 거대한 사업을 일구어나가고 있으며, 가장 큰 다국적 기업의 연간 매출은 많은 개도국들의 총생산 규모를 초과하고 있다. 일례로 General Motors의 매출은 노르웨이의 총생산을 상회하며, Ford의 매출은 남아프리카의 총생산을 넘어섰으며, Shell의 매출은 나이지리아의 총생산의 두 배이다.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100개의 경제주체 중에서 51개가 기업이고 나머지가 국가이다.

다국적 기업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공유한다. 그래서 이들은 각국의 정부가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수립하게끔 로비를 할 수 있는 힘을 집결시킨다. 국제상공회의소(the 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유럽 기업가 원탁회의(the European Roundtable of Industrialists) 와 같은 단체들은 상거래와 투자와 관련한 지구적인 정책에 가장 많은 영향을 행사하는 단체들이다.

■ 국민국가와 국제기구, 다국적 기업들의 개?

이들 다국적 기업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관세없는 자유무역이다. 80년대 신보수주의 정권의 비호 아래 수많은 적대적 M&A를 통해 몸집을 불려왔던 이들 기업들에게 이제 일개 국민국가라는 옷은 더 이상 맞지 않기 때문이다. 서방의 정부들은 이러한 다국적 기업들의 전방위적인 영향력 행사에 대해 그들에게 상당 부분의 권한과 역할을 줌으로써 호의적으로 화답하고 있다. 오늘날 수립된 수많은 자유주의적인 정책들이 지난 몇십년간 이들 그룹의 로비에 의해 입안되고 실행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정부는 다국적 기업의 이해관계에 마냥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차원에서만 대응하고 있을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과거 제국주의적이고 식민주의적인 형태로 국가를 운영해왔던 여러 서구 국가들은 거의 대부분의 다국적 기업들의 본거지가 이들 국가들인 관계로, 다국적 기업의 관능적인 브랜드를 등에 업고 그들과 호흡을 맞춰가며 국제경제를 그들의 국부(國富) 창출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고 있다. 또한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가들 자신이 집권세력이 되어 기업편향적이고 반환경적인 정책 입안, 경제적 이해를 위한 전쟁도발을 부추기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경제정의를 부르짖고 있는 국제기구들도 다국적기업의 대변인 노릇을 자처하고 있다. 가장 주도적인 개입형태는 WTO(the World Trade Organization)이다. GATT와 우루과이 라운드의 결과로 정비된 이 기구는 전 세계의 자유무역을 위하여 자유주의적 정책을 관철시키고 동시에 거래의 자유를 가로막는 각종 규제를 철폐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WTO와 함께 또 다른 대표적인 자유무역 전도사로는 IMF(International Monetary Fund)와 세계은행(World Bank)이 있다. 이들 두 단체는 선진국에서 추렴된 돈을 미끼로 무역규제가 심한 개도국들을 무장해체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 무엇이 자유무역을 가능하게 하는가?

아무리 다국적 기업들이 일국내 무역을 뛰어넘어 전 세계를 대상으로 장사를 하여 좀더 많은 이윤을 남기겠다는 속셈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몇 가지 전제조건이 없었다면 적절한 이윤창출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선 첫째로, 통신기술의 발전을 들 수 있다. 인터넷을 비롯한 통신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전 세계를 초단위로 묶어내는데 성공하였고 이로써 전 세계 자본거래 규모는 상상을 초월하고 있다. 둘째로, 운송비용의 인하를 들 수 있다. 해상운송비용은 지난 20년 간 70% 정도 인하되었다. 따라서 이제 관세장벽만 철폐하면 제반조건은 대충 마련되는 셈이다.

이러한 기술의 발전과 운송요금의 인하는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자유무역의 전제조건을 연상시킨다. 당시 도시간 거래의 활성화의 기초에는 철도, 도로 등 인프라스트럭처의 급격한 양적 팽창을 통해 가능하였다. 당시 기업들은 국가로 하여금 인프라스트럭처를 국가의 세금으로 짓도록 강제하였고 미국의 경우에는 기업들이 직접 나서서 전국단위의 철도를 건설하기도 하였다. 이 철도기업이 건설한 철도 노선을 따라 버팔로 사냥 투어를 상품으로 내놓은 사실은 유명하다.

■ 역사의 반복

또한 이러한 일련의 모습들은 과거 자본주의 초기단계에서 길드(Guild)의 성장과 안전을 보장하던 도시경제권을 해체시켰던 국민국가의 폭력성을 연상시킨다. 길드가 도시 내에서 제조업 장인들의 이해관계를 관철시키는 이해단체이며 필연적으로 해체될 수밖에 없는 보수적인 집단이었다는 것이 대체적인 관점이긴 하나, 이들 길드가 상층 장인들과 직인들로 분열되고 길드들 사이에 우열이 나눠지기 이전에는 조합원들의 이해관계 관철과 더불어 상품의 질을 적정수준으로 유지하고 나름의 사회적 연대를 보장해주고자 노력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강력하게 성장한 상업자본은 길드의 존재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데 있어 불필요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전제적 군주와 한통속이 되어 폭력적으로 도시경제를 해체시키고 국민국가의 성장을 강력하게 견인하였다. 이러한 역사극의 주연들은 국민국가의 틀 내에서 국민들의 복지와 국내산업을 보호해왔던 개도국 정부와 이를 깨부수려는 다국적기업과 선진국들, 그리고 이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국제기구의 모습과 근사하게 중첩된다.

국민국가의 형성과 자유무역의 증진이 윈-윈 게임이 아닌 상업자본을 위한 제로섬게임이었듯이 세계화와 국제간 거래의 자유 증진은 또 하나의 거대한 제로섬게임이 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승자는 다국적 기업과 선진국의 집권세력, 패자는 개도국과 전 세계(선진국이나 개도국 구분 없이)의 하층계급으로 나뉘어져가고 있는 형국이다. 이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부분의 개도국 정부들은 ‘비열한’ 게임의 법칙을 인정하고 자신들의 국가를 세일즈 하는데 앞장서는 한편 그나마 가능성 있는 자국의 산업 분야의 덩치를 키워 다국적 기업에 대항하려 하고 있다.

■ 국가 세일즈 성공할 수 있을까?

경제자유구역, 기업하기 좋은 환경, 귀족노조, 노동3권 약화, 국가경쟁력…. 이러한 단어들은 한 나라의 경제규모를 넘어선 다국적 기업들에게 아양을 떨기 위해 정부가 내놓은 사탕발림들이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의 존재 앞에서는 권위주의적 정부이건 자유주의적 정부이건 간에 비위를 맞추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나라가 지구경제권이라는 폭주기관차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정부는 동북아 지역단위의 맹주들을 묶어 서구 중심의 자유무역의 공격으로부터 대항세력을 키우고자 하는 의지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중국의 맹렬한 경제성장과 지역 헤게모니 획득의도, 이를 저지하고자 하는 일본의 저항, 양국의 군사대국화, 북핵 문제, 상대적으로 뒤쳐지고 있는 한국의 외교적 혹은 경제적 위상 등으로 말미암아 그 앞날이 쉽지만은 않을 듯 하다. 한편으로 FTA 등을 통한 신자유주의 편입시도 역시 FTA가 지니고 있는 계급편향적인 본질로 인해 국내 진보세력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고 있다.

대답은 쉽지 않다. 다국적 기업, 미국의 매파 정부, 이들을 변호하는 국제기구의 존재 등은 속된 말로 대통령이 아니라 대통령 할아버지라도 겁먹지 않을 수 없는 이들이다. 하지만 결코 길이 없는 것만은 아니다. 이미 전 세계 진보세력과 일부 개도국들은 서로 힘을 합쳐 몇 번의 WTO 회의를 무산시키고 일정 정도 양보를 받아낸 경험을 가지고 있다. 강자의 자유에 맞서 약자의 자유를 얻어낸 소중한 경험이 있다. 이러한 경험과 성과를 어떻게 엮어내어 진정한 대항세력을 성장하는가가 향후의 주요한 과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부와 의회, 자본가들은 알량한 떡고물이라도 떨어질까 하는 기대감에 국내 진보세력이나 여타 비동맹의 성격을 지닌 국가들과 연합하기를 주저하고 있다. 과연 이러한 신자유주의의 푸들 노릇이 성공할 수 있을까? 세계 500대 기업에 우리나라 기업이 13개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고 가능성이 있다고 여긴다면 그것은 그네들 생각의 자유이고 그러한 사실이 우리나라도 언젠가 다국적 기업을 등에 업고 선진국(?)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대시키지 않는다고 여기는 것도 필자 생각의 자유이지만, 그러한 국제간 경쟁의 냉혹함을 빌미로 형식적 민주주의의 역사적 성과를 무위로 돌리려고 시도한다면 이것은 형식적 자유나 의사소통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적 대립과 계급투쟁의 문제가 될 것임은 분명한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