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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런 버핏의 “더 많은 세금”은 올바른 해법인가?

“부자들이 항상 이야기하길, 알다시피, 우리에게 더 많은 돈을 주면 우린 나가서 돈을 더 많이 쓸 것이고, 그러면 그것들은 나머지 당신들에게 모두 흘러들어갈 거예요.” 버크셔해서웨이의 CEO 버핏이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지난 10년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어요. 그리고 미국 대중이 알아차렸으면 합니다.”[Warren Buffett Tells ABC Rich People Should Pay Higher Taxes]

요즘 빌게이츠와 함께 ‘자비로운 자본주의’의 선동가가 되어버린 워런 버핏의 최근의 사자후다. 각각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을 대표하는 이들로 우열을 가리기 힘든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두 인물의 이러한 일련의 언행은 어쩌면 현재의 자본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토로하는 고백성사일지도 모른다.

적지 않은 이들이 이들 “착한” 부자의 용기 있는 언행에 호응하고 있다. 사실 버핏이 말한 톤의 내용은 이미 소위 “좌파”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정직한 우파 경제학자들마저도 인정하는 일종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지만, 바로 그 발언을 절대 할 것 같지 않은 이들로부터 들었다는 신선함 때문에 더 많은 호응을 얻지 않나 생각된다.

그렇다면 버핏은 거짓선동에 불과한 ‘트리클다운 효과’에 대한 대안을 어떤 것을 제시하고 있는가? 그는 “부자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을 주장하고 있다. 부시를 비롯한 보수정부의 정책기조에 정면으로 반하는 주장이거니와 진보진영의 주장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런 증세만으로는 해결되기 어려운 다른 상황도 있다는 점이다.

세전 국내 비금융 기업이윤은 – 한데 뭉뚱그렸지만, 또한 미국 비즈니스의 근본적인 건전성에 대한 공정한 평가기준으로 보이는 –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의 비중에서 최고기록의 근처에도 못 가는 수준이다. 이들 이윤은 1940년대에는 국민소득의 15%를 초과했다. 그리고 1950년대와 1960년대 연속 12%를 넘었다. 금년 3분기 이들 이윤은 국내소득의 7,03%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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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더 잘하고 있나? 음. BEA의 데이터에 따르면, 금융업의 이윤과 “나머지 세계”의 이윤이 – 즉, 미국 국적 기업이 외국에서 벌어들인 돈 – 1950년대와 1960년대 그러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리고 국민소득에 대한 지분으로 기업이 내는 세금은 그 때보다 훨씬 적다.
그래서 기업이윤이 전 기간에 걸쳐 가장 높은 것으로 보이는 이유는 금융회사들(대부분 거대 금융회사)과 다국적 기업들이 더 많은 돈을 벌고 더 적은 세금을 내기 때문이다. 흠…[The Real Story Behind Those “Record” Corporate Profits]

하바드비즈니스리뷰의 편집책임자 저스틴 폭스(Justin Fox)의 주장에 다르면 세금이 걷혀지지 않는 상황이 단순히 보수정부의 세금감면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기업이윤의 비중이 점점 더 금융업과 다국적 기업에서 창출되고 있는 구조로 변해가고 있고, 이것이 더 적은 세금징수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금융업은 제조업과 달리 다양한 금융상품과 구조화 금융 덕분에 여러 가지 세금혜택을 누릴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수입의 주요부분을 담당하는 부문을 조세피난처로 옮겨 세금을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또한 다국적 기업들 역시 다양한 세금혜택을 좆아 미국 이외 지역에 적은 세금만으로 기업을 운영할 수 있고 이를 잘 활용하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미국의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은 늘어도 국내소득(domestic income)은 줄어들게 된다. 자연히 기업이 낼 세금은 줄어든다. 또한 고용창출효과가 큰 제조업 부문이 줄어들게 되면서 근로소득도 줄어 자연히 세금은 더욱 줄어들게 될 것이다. 자본의 세계화가 제1세계 국가에게도 별로 이롭지 않음을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자본의 세계화’는 제3세계에게는 혜택일까? 중국, 인도, 그리고 망하기 전의 아일랜드와 같은 몇몇 나라들은 대외 개방경제, 특히 해외직접투자로부터 혜택을 받은 사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 나라들은 – 위에 언급한 나라들조차 – 미국 노동자들보다 훨씬 적은 임금으로 동일한 노동을 해야 하는 혜택을 받았을 뿐이다.

한편 ‘경제저격수의 고백’의 저자로 유명한 존 퍼킨스가 CNN기사를 인용하여 주장한 바에 따르면 미국기업의 2/3와 해외기업의 68%가 2조5천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으면서도 연방소득세를 한 푼도 내지 않았다. 그 결과 전체 연방세에서 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1943년 40%에서 2003년 7%로 급감하였다 한다.

요컨대 미국의 자본이 금융자본화/세계화되면서, 그리고 국내정치가 금권주의화되면서 기업의 이윤은 계속 상승하여도, 그 이윤은 미국내 제조업을 통한 부의 창출보다는 다른 국가로부터의 노동착취, 더 적은 세금납부를 통해 달성하였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구조적인 상황은 문제가 부자들의 자애로운 납세만으로 해결되기 어려움을 말해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미국자본의 복잡한 사정을 촉진한 것은 “더 많은 세금을”을 외치고 있는 워렌 버핏과 빌 게이츠가 가속화시킨 상황이기도 하다. 그들 스스로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을 대변하며 금융의 세계화와 자본주의 제조업의 국제적 수직계열화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세금을 더 내자고 할게 아니라 자신들의 기업경영 스타일을 바꿔야 한다.

‘설국열차’라는 만화가 있다. 얼어붙은 지구를 끝없이 달리는 열차에 앞 칸은 부자들이 뒤 칸은 빈자들이 타고 있다. 부자 들은 열차속도를 높이기 위해 뒤 칸을 떼어내려 한다. 그 만화를 보며 부자는 빈자의 도움으로 살아가는 현실에선 그런 상황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세계화로 파편화된 미국에선 그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미국 부자들은 다른 설국열차의 뒤 칸을 착취하면 되니까.

‘경제 저격수의 고백’을 읽고

경제 저격수란 전 세계의 수많은 나라들을 속여서 수조 달러에 달하는 막대한 돈을 털어 내고, 그 대가로 고액 연봉을 받는 전문가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들은 세계은행과 미국 국제 개발처, 또는 다른 해외 ‘원조’ 기관들로부터 돈을 받아 내어 거대 기업의 금고나 전 세계의 자연 자원을 손아귀에 쥔 몇몇 부유한 가문의 주머니 속으로 그 돈이 흘러가도록 조종한다.[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김현정 옮김, 황금가지, 2005년, p9]

존 퍼킨스의 회고록 ‘경제 저격수의 고백’의 서문에 나오는 “경제 저격수”의 정의다. 저자는 1971년부터 ‘메인(Chas. T. Main)’이라는 엔지니어링 회사에 근무하였는데 그가 한 일은 기술자들이나 세계은행의 은행가들과 함께 사업계획을 구상하고 자금을 조달하여 사업을 시행하는 것이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경제 저격수라 칭한 것이다.

언뜻 정상적으로 보이는 일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 과정에서 그는 자본, 특히 메인과 여타 미국자본이 최대한의 이익을 얻게끔 도모하고 사회간접자본시설을 지은 나라가 과도한 빚을 져 수렁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정도로 만드는 일을 수행했다고 한다. 경제성장률을 과도하게 추정하여 공사규모를 부풀리는 것이 그 전형적인 방식이었다.

퍼킨스의 행동반경은 중동, 아시아, 남미 등 이제 막 산업화의 길로 접어드는 제3세계 곳곳을 아우르고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세계은행 관계자, 현지 기업인, 반정부 인사, 또는 최고 권력자 등 다양한 이들을 만나 상부상조하거나 반목하면서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이란에서는 회교혁명으로 인해 사업을 중도에 접어야 하는 고초를 겪기도 한다.

솔직히 이 책에서 묘사되고 있는 그의 고백은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앞서 말한 것처럼 정상적인 기업 활동에 대한 저자의 지나치게 도덕주의적인 과잉반응일 뿐이라고 몰아붙일 수도 있는 상황이다. 어차피 정상적인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경쟁원리가 작동하여야 하는 것이고, 메인은 그에게 그런 역할을 주문한 것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이 담긴 에피소드는 메인 입사 초기 저자와 그의 상사 클로딘과의 만남이다. 매력적인 갈색 머리의 여인 클로딘은 메인의 수석컨설턴트로 어느 날 홀연히 저자 앞에 나타나 그가 맡은 일이 ‘경제 저격수’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이야기하고 그를 조련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언뜻 스파이 스릴러에서 스파이 조련과정을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클로딘은 존 퍼킨스를 남몰래 자기 아파트에서 만나며 그에게 그의 임무가 1) 대형 토목 공사 프로젝트가 메인을 비롯한 미국기업에게 돌아오게끔 하는 것 2) 차관을 받은 나라의 파산을 유도하여 자원 등의 수탈이 용이하게 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의 그의 임무는 경제성장률을 예측하여 프로젝트가 미칠 영향을 분석하는 컨설팅 업무였다.

클로딘은 “인도네시아는 베트남 다음에 쓰러뜨릴 나라죠.”라고 말하곤 했다. 또 “반드시 인도네시아 국민들을 설득해야 해요. 만일 인도네시아가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면…….”이라고 말하면서 손가락으로 자신의 목을 긋는 시늉을 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냥 쉽게 얘기할게요. 인도네시아의 경제 전망 보고서를 작성할 때 매우 긍정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야 해요. 새로 발전소를 짓고 전력 공급 시스템을 건설하면 인도네시아 경제가 얼마나 발전하게 될지 잘 포장해야 하죠. 그 수치가 충분히 높으면 국제 개발처와 여러 은행들이 차관을 빌려 주는 거예요. 일을 성사시키면 당신도 충분한 보상을 받을 거고 이국적인 매력을 가진 또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수도 있죠. 세상이 당신의 쇼핑 바구니인 셈이에요.”[같은 책, p57]

저자가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전제로 이 에피소드는 좌익들이 주장하던 소위 선진 자본주의 국가가 제3세계에 취하던 경제공세의 보편적인(?) 행태에 대한 진실을 매력적인 갈색 머리 여자로부터 직설적으로 강의를 들은 과정이다. 그런데 원래 그가 면접을 치룬 곳은 국가 안정보장국이었으니 기업가정치(Coporatocracy)와 국가주의의 결합인 셈이다.

저자가 자신의 행위를 “정상적인 기업 활동”이 아닌 범죄행위로 간주하며 양심의 가책에 시달리다가 끝내 이 책을 내놓으며 고백성사를 한 것은 어쩌면 클로딘과의 만남에서 들었던 직설적인 진실을 소화해내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자신의 행동을 기업의 정상적인 이윤논리로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익혔더라면 좀 더 이겨내기 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국 그의 태생적인 유약함과 원주민과의 만남 속에서 깨달은 기업가정치의 폐해, 그리고 민족주의적인 지도자들의 의문의 죽음을 접하면서 그는 그 모든 것들이 하나로 통한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이 책에서 그 사실을 고백한다. 바로 미국이 그들의 건국정신을 저버린 채 다른 나라의 자주성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하인 나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다.

모든 책이 그렇듯 책의 내용이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는 – 또는 저자의 편견을 통해 잘못 전달된 사실인지 – 독자들이 판단할 일이다. 결국 그 작업은 책이 증언하고 있는 여러 사실을 다른 시각에서 본 다른 매체들을 통해 판단하고 걸러내는 작업이 유효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적어도 이 책은 그런 수고를 덜어주는 책에 속한다고 본다.

그런 객관적 사실과 더불어 이 책을 읽는 내내 나의 마음속에 침잠해 있던 감정은 그 오랜 세월을 자신이 하는 일 때문에 스스로를 자학했던 저자에 대한 연민이었다. 어쨌든 그 일을 처음 선택한 것은 그 자신이었기에 상당부분 그의 잘못이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 그것은 남을 괴롭히는 나라에서 태어나 하필 그 자리를 맡게 된 그의 ‘업(業)’이란 생각도 들었다.

사실은 나 역시도 그만큼은 아니지만 현재 하고 있는 일과 소신과의 부조화 때문에 때때로 고민이 되기도 하고 자학하기도 하니만큼 더욱 그의 처지가 안타깝기도 했다. 결국 상당부분 일 자체가 선악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그 일을 하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으로 스스로 다잡고 있고 퍼킨스 역시 그렇게 행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 상당수가 일을 즐기면서 하지 못하고 마지못해, 심지어는 고통스러워하면서 한다면 그 사회는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하다고 하여도 건강하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대기업 부사장도 일 때문에 자살하고, 노동자는 산재로 목숨을 잃고, 경제 분석가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기 위해 숫자를 조작하고 괴로워하는 그런 사회는 하루빨리 사라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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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국내 자본가의 자서전을 읽다 흥미로운 대목을 발견했다.

소위 선진국의 후진국 원조란 원래 ‘원조’라는 미명하에 그런 식으로 바가지 씌우고 그 위에 이자다 뭐다 하여 후진국의 껍데기까지 벗겨먹는 짓에 지나지 않는다.[이 땅에 태어나서, 정주영, 솔, 1998년, p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