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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살인 : 범죄소설의 사회사(Delightful Murder)

사실 개인적으로도 스릴러를 즐겨 읽기는 하지만 그 안에 녹아있는 보수적인 이데올로기는 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불편하였다. 물론 간혹 그러한 한계를 뛰어넘는 작품들도 있으나 대개의 스릴러는 이 사회가 – 즉 부르주아 사회가 – 범죄라고 정의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단죄의 성격이 강하기에, 그리고 그 속성상 선악구도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기에 당연히 체제수호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눈에 거슬렸다.

이러한 모습은 특히 개인적으로 더 선호하는 이른바 고전적 추리소설에서 더 자주 접하게 된다. 이들 소설은 대개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부르주아의 망중한에 찾아든 살인이나 절도 등의 일시적 혼란을 천재적인 주인공에게 의뢰하고, 그 천재는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력에 의지하여 사건을 해결한다는 형식미를 추구한다. 소재 면에서는 예를 들자면 유럽의 정치안정을 위해 왕이 정부(情婦)에게 보낸 연애편지를 찾아준다는 등의 부르주아적 가치수호에 치중한다.

콜린 윌슨의 저서 ‘잔혹’에서도 잘 설명되어 있듯이 범죄는 시대적 산물이다. 범죄 역시 그 사회적 맥락과 물적 조건이 축적될 때에 발현된다는 유물론적 이치다. 이 글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은 이러한 이치를 범죄 자체에 들이대기보다는, 그러한 범죄의 사회상의 거울이랄 수 있는 범죄소설의 영역에서 관찰한 책이다. 이 책은 이를 통해 앞서 손에 잡히지 않던 나의 불편함의 이유를 명쾌하게 해석해주는 동시에, 앞으로 이 장르의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가짐 등에 대한 하나의 팁을 제시해주고 있다.

책의 명민함은 추리소설을 비롯한 유사 장르들을 범죄소설로 묶어내고 해석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추리소설을 범죄소설의 서브장르로 둠으로써 추리소설의 형식이 제한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그리고 범죄에 대한 시각을 확장시키고 있다. 한 예로 작가는 좁은 의미에서의 추리소설과 이후의 스파이 소설이 만나는 접점, 거기서 불거지는 이념적 생채기에서 범죄소설의 한계와 함께 그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희적 텍스트로써의 범죄소설을 사회적 콘텍스트로 격상시킨다. 범죄소설의 팬이 범죄소설에게 줄 수 있는 ‘즐거운 선물’인 셈이다.

마르크스주의자로서 치열한 삶을 살았던 작가가 약간은 부끄러운 자신의 취미를 과감하게 공개하고, 그 취미와 자신의 철학을 혼합하여 단순한 범죄소설 입문서 이상의 가치를 창출해낸 수작이다. 각각의 장이 하나의 테마를 이루고 있어 심심할 때 한 챕터씩 쓱쓱 읽어 내려가도 좋을 듯 하다. 또한 번역판 색인에 빼곡하게 적혀 있는 작가 목록은 향후 관련 소설들을 찾아 읽을 때에 소중하게 쓰일 수 있는 또 하나의 별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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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 RSS를 다시 전체공개로 돌려놨다. 내 블로그는 희한하게 하루 방문자수보다 RSS구독자 수가 많다. RSS는 대략 1600명 정도 되는데 방문자는 1000명 정도? 어떤 뜻일까? ‘구독할만한 가치가 있는 블로그야’? 아니면 ‘굳이 방문해가며 읽을만한 글은 아니야’? 🙂 어쨌든 흔치 않은 경우일 것 같은데 RSS를 부분공개로 돌리니 방문자는 한 10% 정도 느는 것 같다. 여하튼 호기심은 급격히 감퇴해 그냥 전체공개로 회귀.

– 회사의 노트북에서 익스플로러를 열면 먹통이 된다. 이제 익스플로러를 쓰지 말라는 신의 계시인 것인지?

– ‘호밀밭의 파수꾼’ 독서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데 Holden이 그가 좋아하던 옛 은사에게 성희롱 당하는 장면으로 다가가고 있다. 예전에 이 부분을 읽었을 때 Holden이 그랬던 것처럼 아주 불쾌한 기억을 지니고 있기에 이 부분을 건너뛸지 말지 고민을 하고 있다.

토양이님 덕분에 몇 년 동안 찾아 헤매던 책을 구하게 되었다. 트로츠키주의자가 쓴 범죄소설 분석서라는 독특한 영역인데 ‘어네스트 만델’의 ‘즐거운 살인(delighted murder)’이라는 책이다. 내가 이 책을 못 찾은 이유는 저자를 또 다른 트로츠키주의자인 ‘미쉘 뢰비’로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토양이님 감사합니다.

– 아내가 ‘심야식당’이라는 만화를 두 권 사왔는데 밤 12시부터 7시까지 문을 여는 어느 식당의 풍경을 담백하게 그려낸 만화다. 주인장이 하는 짓이나 외모가 꼭 배철수를 닮았다. 소위 ‘음식 만화’ 장르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 Thomas Harris의 ‘양들의 침묵’을 책으로 읽었다. 뭐 당연한 일이겠지만 영화보다 더 많은 에피소드가 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영화장면, 특히 Hannibal Lecter 역을 맡은 Anthony Hopkins의 모습이 잔상으로 남아있었다. 그만큼 그가 없는 ‘양들의 침묵’은 생각하기 어려우리라. 덕분에 이 소설의 전작인 – 영화제작으로는 나중에 만들어졌지만 – Red Dragon을 영화로 감상하고 지금은 소설로 읽고 있는 중이다. Thomas Harris 이 양반 은둔자적 스타일이나 여러모로 참 독특한 사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