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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에 관한 메모

그러나 이 논리 자체는 노동뿐만 아니라 토지도 또한 상품의 가치에 뭔가를 기여한다는 낡은 반대론에 대처하지는 못했다. ‘부’와 ‘가치’ 간의 실질적인 구별이 올바르게 확립되자 비로소 토지의 역할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명이 가능했다. 물론 매우 일찍부터 상품의 사용가치는 그 교환가치와는 다르다는 것이 인식되고 있었다. 유명한 물과 다이아몬드의 예증은 스미드 이전의 여러 저작자들에 의해 사용되었고 상품의 교환가치는 종종 그것의 효용과 거의 관계가 없다는 것을 지적했던 경제학자들도 허치슨 이전에 있었다. 그러나 리카아도가 항상 ‘부’(사용가치의 합계로 그것의 창조에는 토지와 노동이 함께 공헌한다)와 ‘가치’(그것은 노동만에 의해 결정된다)에 대해서 강조했던 구별이 정확히 정식화되었던 것은 (비록 몇몇 초기의 경제학자들이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충분히 알지 못한 채 이 구별을 채용했다 하더라도) 잠시 후의 일이었다. 일단 이러한 방식으로 토지가 가치의 결정요소에서 제외되어 버리면 남는 문제는 오직 노동이 상품의 가치를 주는 것은 그것에 지불된 보수를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 그 자체의 지출을 통해서라는 것을 명백히 하는 것뿐이었다. [노동가치론의 역사, 로날드 L. 미크 지음, 김제민 옮김, 풀빛, 1985년, p100]

“세계 경제 위기 : 한 마르크스주의자의 분석”에 대한 독후감

고대 사람들은 부(wealth)가 어떻게 창출되는가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남의 것을 뺏으면 되지.”

전쟁을 해서 뺏고, 도둑질을 해서 뺏고, 노예로 만들어서 뺏고 등등 뺏는 방법은 지금보다 훨씬 투박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괜히 대량살상무기가 위험하다 화염병을 던지니 위험하다 핑계대지 않았다.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였고 패자는 노예가 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사람들이 좀더 세련(?)되게 살기 시작했을 때에 그들은 무역을 시작했다. 물론 여전히 전쟁과 도둑질이 손쉬운 돈벌이였지만 더 머리를 굴려 돈을 버는 방법도 번성하기 시작했다. 이때 조야한 경제이론이 등장한다.

“무역을 하려면 상품거래의 표준이 되는 등가물이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금(金)이다. 금을 많이 가지는 자, 또는 나라가 부자다.”

이것이 중상주의(mercantilism)의 단순논리다. 우리는 적게 쓰고(수입하고) 남이 많이 쓰게 해서(수출해서) 차액을 남기는데 그것이 금의 형태로 체현되는 것이고 그 나라에 금이 많으면 그 나라는 부자라는 것이 논리였다.

이를 반박한 것이 바로 아담 스미스 등이 주창한 노동가치론이다. 금을 서로 뺏고 빼앗겨도 금의 총량은 더 많이 캐내지 않는 한은 불변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점점 윤택해진다. 그것은 금이 더 많아져서가 아니라 바로 노동을 통해 자연자원을 쓸모 있는 물건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단순하지만 당연한 이치다. 과격급진 이론이 아니고 그저 사실일 뿐이다.

이후 무슨 정보가치론이니 뭐니 하는 이상야릇한 궤변으로 오염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노동가치론은 경제학에 있어서 하나의 공준이다. 주류경제학에서는 생산의 3요소로 토지, 노동, 자본을 들면서 노동을 격하시키지만 나머지 두 개의 것은 경제학적으로는 노동이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변화가 없는 것들이다. 토지는 부의 원천이랄 수 있고 자본은 혈맥의 역할을 하나 결국은 노동이 투입되어야 기능한다는 것이다.

칼 마르크스는 이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론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였다. 그는 생산과정에서 노동이 투입되면서 자본가가 투입된 노동에 상응하는 가치를 노동자에게 지급하지 않았다는 논리직관을 통하여, 잉여가치라는 핵심개념을 도출해낸다. 이 잉여가치가 결국 사회전체의 부의 증분을 설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잉여가치를 창출하는 노동이 어떤 노동이냐 하는 것은 때로 혼선도 있지만 대체로 1차, 2차 노동이다. 3차, 즉 금융업을 포함한 서비스업부터는 1,2차 노동으로부터 잉여가치를 나눠가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번 금융위기에 대한 해석에서 바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러한 전제를 당연시하는 것이다.

즉 금융업은 그 자체로는 가치(value)를 창출하지 못한다. 그것을 전유(專有 ; appropriation)할 뿐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된다. 세상 모든 노동자들이 1,2차 노동을 하지 않고 금융업에만 종사한다고 가정해보자. 창출되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은 자명하다. 아이슬란드 전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가능하지만 전 세계 모든 인구가 금융업에 종사하며 타국의 화폐를 뺏어오는 것은 금을 둘러싼 중상주의보다 더 어이없는 체제일 뿐이다.

결국 1,2차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의 총량은 산술적임에도 그것을 전유하려는 금융업 등 서비스업의 기능이 기하급수적으로 활발해지면 사회는 두 가지 길로밖에 갈 수 없다. 화폐증발과 신용창출을 통해 인플레이션을 가속화시키든가 아니면 그 금융기능이 마비되든가 둘 중에 하나로 가게 된다. 지난 몇 십년간 급속도로 발달해온 자본주의는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을 왔다 갔다 하다가 이번에 후자의 길로 깊숙이 접어들은 것이라 할 수 있다.

Nick Beams가 주장하는 자본주의의 고유모순이 바로 이것이다. 사회 전체가 요구하는 청구권, 예를 들면 이자, 지대, 집값 등은 노동으로부터 창출되는 잉여가치를 기반으로 한 것이다. 자본주의가 발전하게 되면 그 잉여가치 비율은 여러 사정으로 줄어들 수밖에 없는데 점점 그 청구권은 늘어만 간다. 금융화, 증권화, 집값 상승 등이 청구권에 거품을 형성한다. 그리고 빵~ 하고 터진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시장의 자유화가 그것을 치유할 것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위와 같은 프로세스를 부정한다. 케인지언들조차 정부가 유동성을 공급하면 자본주의는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다. 기업이 부채비율이 높아지면 건전성이 악화된다. 결국은 퇴출의 길로 접어든다. 유동성을 공급하는 국가는 어떻게 되는가? 건전성이 악화된다. 그 국가는 퇴출되지 않는 불사의 존재일까? 미래세대는 그들의 영원한 인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