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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스’를 읽는 중

잉글랜드에서 교권반대주의는 주로 런던을 중심으로, 특히 도시에서 성장하고 있는 중산층 법률가들과 상인들 사이에서 활발하게 얼이났다. 이런 직업에 종사하는 대표들이 런던 사람들과 함께 1529년 말 처음 열린 종교개혁회의에서 교회에 대한 불만을 호소했다. 그리고 이번에도 같은 사람들이 크롬웰의 확실한 지휘에 따라 왕에게 탄원서에 적힌 새로운 불만 사항들을 검토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크롬웰은 (왕이 지명한) 하원의장을 끌어들임으로써, 탄원서가 다수의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는 인상을 만들어냈다. 사실 그들은 대부분 의견을 표출할 기회가 없었다.[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튜더스, G.J. 마이어 지음, 채은진 옮김, 말글빛냄, 2011년, p210]

전세계 왕조 중 가장 유명한 – 다양한 의미에서 – 왕조라 할 수 있는 16세기 영국의 튜더 왕조, 그중에서도 특히 논란의 중심인 헨리8세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쓰인 책의 일부다. 헨리8세에 관한 영화와 드라마가 숱하게 만들어질 정도로 그가 집권한 시기는 소위 “막장”도 그런 막장이 없었을 만큼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시기였다. 대중문화에서 다루는 그의 모습도 대개 그런 식이다. 하지만 실은 인용한 책은 헨리8세와 그의 후손들이 자행했던 기행은 그러한 말초적이고 육감적인 본능보다는 보다 이성적이고(?) 시대 맥락적인 상황이 자리잡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헨리8세가 본처인 캐서린을 버리고 앤블린을 정실로 취하기로 마음먹은 데에는 부정할 수 없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다고 자처하는 군주의 욕정이 자리잡고 있었을 것이다. 적자를 낳아주지 못한 늙어가는 왕비보다 젊고 세련된 – 프랑스에서 교육받고 온 힙한 여성인 – 매력적인 앤블린에게 더 성적매력을 느꼈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대중문화가 소비할만한 헨리8세의 캐릭터라면 그를 둘러싼 국제정세와 영국 자본주의의 성장은 그보다 더 복잡한 맥락이 자리잡고 있다.

Full-length portrait of King Henry VIII
By After Hans Holbein the Younger Link


로마카톨릭이 아직도 유럽사회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는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외부적으로는 엄청난 위세를 자랑하는 “이교도” 오스만 제국의 위협, 내부적으로는 마틴 루터 등 기존의 로마카톨릭을 위협하는 신진 종교 세력, 로마카톨릭 내부의 끊임없는 권력투쟁 등등 유럽의 지배체제는 끊임없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는 유기체처럼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약한 고리’로 치고 나왔던 것이 유럽 본토의 바다 건너에 자리잡고 있던 영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단지 이혼을 하고 싶었던 헨리8세가 시대정신의 대변자가 되는 순간이다.

책에도 언급되듯이 유럽사회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세력은 카톨릭 교회와 그 정점에 있는 교황청이었다. 각국의 교구는 유럽 인민의 신앙심을 담보로 치부를 하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의 부가 – 예를 들면 주교의 취임세라는 명목 등으로 – 교황청에 흘러가고 있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무역수지는 흑자여도 이를테면 (영국교회에서 교황청으로의) 이전소득수지가 적자여서 경상수지가 적자인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단지 교회에 대한 왕가와 인민의 맹종때문에 말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불만을 터트린 것이 독일에서는 개신교였고 영국에서는 헨리8세와 영국 브루주아였다.

헨리8세, 토마스 울지, 토마스 크롬웰 등 시대정신을 읽고 이를 자신들의 권력강화에 이용했던 위정자들은 처음에는 이혼 등 가정사를 로마 교황 클레멘스7세에게 위임했으나 그의 우유부담함 혹은 교묘한 정치적 줄타기로 인해 염증을 느끼고 마침내 자신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정치적 수단이 의외로 더 강력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틈새 시장을 파고들어 로마카톨릭의 절대적 권위에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는 이제 막 싹을 틔우고 있는 신흥 계급인 부르주아의 마음에도 흡족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헨리8세의 드라마는 “막장” 드라마를 넘어선 시대정신의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재미있는 세금 : 수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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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ard token” by U.S. State Department – http://www.america.gov/st/eur-english/2009/November/20091124175845FJreffahcS0.5918848.html. Licensed under Public domain via Wikimedia Commons.

수염세는 1705년 수염을 기르는 사람에게 부과되는 세금이었다.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선진유럽의 모델을 따라 러시아 사회를 선진화시키려는 목적의 일환으로 수염세를 제정하였다. 세금을 내는 이들은 “수염 토큰”을 가지고 다녀야 했는데, 이 토큰은 러시아의 독수리가 한쪽에 그려져 있고, 다른 쪽에는 소염이 달린 코와 입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이 토큰에는 두 개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는데 “수염세가 실시됐다”와 “수염은 불필요한 짐이다”라는 문장이다. 다만, 표트르 대제가 수염세를 부과한 첫 번째 지배자는 아니었다. 그 스스로가 수염을 기르고 있던 영국의 헨리 8세는 1535년 수염세를 도임했다. 이 세금은 누진세였는데 수염을 기르는 이의 사회적 지위에 따라 다양하게 부과되었다.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가 수염세를 재도입하였는데 2주일이상 기른 수염에 대해 과세했다.[원글 보기]

수염을 기르는 이들은 이 토큰을 가지고 다니면서 도시를 드나들 때마다 냈다고 한다. 헨리 8세가 어떤 생각으로 수염세를 도입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이후에도 사람들이 꾸준히 수염을 길렀던 것을 보면 그리 성공적인 세금은 아니었던 것 같다. 또 본인도 계속 기르고 있었으니 수염이 표트르 대제의 생각처럼 “불필요한 짐”이라 여기지도 않았을 것 같다.

또는 불필요한 짐이라 생각했더라도 원래 인간은, 특히 “고매한” 지위를 지닌 이들은 그런 짐을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데 즐겨 사용했으므로 – 예를 들어 유럽 귀족 여성들의 불필요한 머리장식이나 중국귀족들의 긴 손톱 등 – 특별히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찌되었든 결국 세수의 증대가 가장 큰 목적이었을 것이다.

결국 세금은 어떠한 특수한 목적이 명분으로 사용되든지 간에 본질은 정부라는 권력의 재산 상태를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하는 것이 종국의 목적이었다. 그 세금이 이렇게 수염을 기르는 이에게 과세될 수도 있고, 집의 창문에 과세될 수도 있고, 소득에 과세될 수도 있다. 앞의 두 세금은 없어진 것을 보면 그나마 가장 합리적인 세금은 소득세인 것 같다.